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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련암 공양주보살

 

홍련암 공양주보살은

홍련암에서만 반평생을 보냈다

 

열아홉에 시집갔으나

서른에 남편이 이승을 떠났다

과일장사, 고기장사로 두 아들 다 키워놓고

미련없이 절로 들어왔다

 

그로부터 삼십년

동해바다는 여전히 홍련암 기둥을 때리고

법당 앞 해당화 향기도 여전한데

 

이제는 자식들이 모시겠다 해도

홍련암을 떠날 수 없다 한다

 

홍련암 부처님이 내 서방님 같다고

정든 서방님 두고 어디 가냐고

 

그렇게 말할 때는 꼭 새색시처럼

얼굴이 빨개지곤 하는데

 

그러면 해당화도 덩달아 붉게붉게 물들어

그 알싸한 향기를

참 멀리가지도 보내는 것이다

 

 

 

<창작과비평> 1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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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더기

 

당신도 속초 바닷가를 혼자 헤맨 적이 있을 것이다

바다로 가지 않고

노천횟집 지붕 위를 맴도는 갈매기들과 하염없이 놀다가

저녁이 찾아오기도 전에 여관에 들어

벽에 옷을 걸어놓은 적이 있을 것이다

잠은 이루지 못하고

휴대폰은 꺼놓고

우두커니 벽에 걸어놓은 옷을 한없이 바라본 적이 있을 것이다

창 너머로 보이는 무인등대의 연분홍 불빛이 되어

한번쯤 오징어잡이배를 뜨겁게 껴안아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먼동이 트고

설악이 걸어와 똑똑 여관의 창을 두드릴 때

당신도 설악의 품에 안겨 어깨를 들썩이며 울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버지같이 묵묵히 등을 쓸어주는

설악의 말 없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은

바다가 보이는 여관방에 누더기 한 벌 걸어놓은 일이라고

걸어놓은 누더기 한 벌 바라보는 일이라고

 

정호승 <포옹> 창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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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 한잔 하게 하소서

10월에는 죽은 者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하소서.

돌아오지 않게 죽어서

우리에게 다른 우리로 가는 고통을

없게 하소서.

골목에서 우리가 다른 우리로 가는 소리가

우리의 짧은 잠을 깨우고

창문을 깨우고 이슬을 깨우고 달빛을 깨우고

마지막에는 밤과 하늘까지 깨우는 소리가

되지 않게 하소서.

 

10월에는 산 者들이 홀로

사색하며 잠들며 그 사색의

편협한 小路와 의견을

만나게 하소서.

小路에서 그리고 방구석에서

10월에 죽을 者와 친하고 10월에

죽을 者와 농담할 여유가 생긴 사람은

龍山이나 光化門에서

나와 소주 한잔 하게 하소서.

 

- 오규원,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문학과지성사, 1981)

; 그 때 그 시절의 시인의 생각을 짐작하는 것은 개인의 몫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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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난 뒤의 팬티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읍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와져도 앞 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 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者도 아닌 죽은 者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 오규원,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문학과지성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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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죽음은 버스를 타러가다가

걷기가 귀찮아서 택시를 탔다

 

나는 할 일이 많아

죽음은 쉽게

택시를 탄 이유를 찾았다

 

죽음은 일을 하다가 일보다

우선 한잔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 한잔 하고

한잔 하다가 취하면

내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무슨 충신이라고

죽음은 쉽게

내일 생각해보기로 한 이유를 찾았다

 

술을 한잔 하다가 죽음은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것도

귀찮아서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생각도

그만두기로 했다

 

술이 약간 된 죽음은

집에 와서 TV를 켜놓고

내일은 주말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강이 제일이지 ---

죽음은 자기 말에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그래, 신문에도 그렇게 났었지

하고 중얼거렸다

 

오규원,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문학과지성사. 1981)

 

; 수목장이 있던 날, 혼자 소주 한잔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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