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법상스님이 들려주는 이야기
법상 지음 / 도솔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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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사는 거와 삶을 사는 거나 묘하게도 발음이 똑같이 '사는' 거다.

발음이 같아선지 사람들은 삶 사는 걸 상품 사는 취급한다.

잘 사는 것에 '''바르게' 또는 '자주'의 뜻이 있는데, 사람들은 주로 '자주'로 쓴다.

그런고로 잘 사는 건 대개 삶을 바르게 살기보단 상품을 자주 사는 것으로 치우쳐 쓰인다.

법상스님은 부자보단 잘 사는 사람이 되라했다.

삶을 잘 사는 건 상품을 자주 사는 게 아니란 뜻이렸다.

 

<기억 남는 구절>

주위에 친근한 동료 몇몇이 주식으로 대박을 터트려 차를 사고 집을 사고 수억을 벌었다는 이야기들이 나돌면 설마 하던 이들까지 너나없이 모두 꿈을 꾸기 시작한다. 그러나 한번 조심스레 돌이켜 생각해보자. 세상에 주식 투자하여 득을 본 사람이 더 많은가 실을 본 사람이 더 많은가. 물론 짧게 보면 득을 본 사람도 더러 있지만, 그런 사람 또한 결국 손실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르고 있는가. 대박이라니, 그런 일이 어디 있겠나. 인과의 법칙 속에서 대박이란 없다.

대박을 터트린 사람의 마음은 또 다른 대박을 바라게 마련이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보자. 나라도 한 백만원으로 몇 천만원 벌었다면 거기서 안주한 채 그 돈만 유용하게 쓰고 말겠는가. 그 벌어들인 돈으로 재투자를 하니 그게 문제의 시작이다. 도박이 그렇다. 잃으면 다시 따기 위해 자꾸 더 하고, 돈을 빌려서라도 이길 듯하면 자꾸 더하고, 많이 따고 나면 재미가 붙어 더 따려고 애를 쓰게 마련이다.

복의 그릇이 작은 이가 많은 복을 받게 되면 그 넘치는 복만큼 탐욕심과 어리석음을 키우게 되고 만다. ... 자신의 복의 그릇을 잘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설사 대박을 터트렸다하더라도 그것은 내 안의 복을 미리 다 끌어 쓴 것에 불과하다. 미리 받아 다 서 버렸으니 앞으로는 궁핍해질 수밖에 없다. 복이란 지을 때도 오랜 시간 조금씩 지어왔듯이 받을 때도 제 인연에 걸맞은 때에 딱 필요한 만큼만 받게 되어 있는데, 그 큰 복을 미리 다 받아 놓으니, 그 복을 받을 그릇이 되지 않는데 받아 놓는다고 복이 남아 있겠는가.

 

기도는 말 그대로 비는 것이다. 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루기를 원한다는 것이고, 원하는 바가 크고 강할수록 우리의 기도는 더욱 간절하다. 그러나 다른 말로 기도가 간절하다는 것은 그만큼 강하게 바란다는 말이며, 그 이면에는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괴로움 또한 크게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기도란 무엇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데 있을까. 그렇지 않다. 수행자의 기도는 내가 바라는 결과를 얻고자 함이 아니고,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그 결과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강인한 내적인 수행력을 쌓는 데 있다. 기도를 하면 마음이 비워지고 마음이 비워지면 결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며, 그랬을 때 결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기도의 참 의미가 아닐까.

 

누군가를 다스리고자 한다면 그냥 그가 원하는 것을 최대한 잘할 수 있도록 놓아주어야 한다. 내 마음대로 쥐고 흔들었을 때, 겉모양은 내가 원하는 대로 가고 있는 것 같아도, 그 내면은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얼마 전에 한 신문에서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노후자금은 얼마나 될까를 물었더니 몇 억에서 몇 십억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답했던 설문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아마도 여기서 말하는 노후자금이란 애써 일하지 않더라도 놀고먹고 마음껏 소비하면서 보낼 수 있는 충분한 자금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생각해보라. 마음껏 놀고 먹으면서 소비하고 보내는 노후는 얼마나 비참할지... 사람들은 그것을 삶의 행복으로 알겠지만 지혜로운 이라면 그러한 어리석은 노후를 과감히 버릴 것이다.

옛날의 노년은 삶의 지혜가 세월에 녹아든 어르신이자 흡사 선지식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요즘의 노년기를 보면 어르신으로 존경받기는커녕 사회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귀찮은 존재쯤으로 취급된다. 이런 사회 풍토는 바로 놀고먹으면서 노후를 보내길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폐한 정신이 만들어낸 자회상이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재산을 모아두지 않고 검소하게 먹는 그런 사람의 해탈의 경지, 잡념을 모두 끊고 먹고 입는 것에 구애받지 않는 그런 사람의 해탈의 경지는 텅 비어 아무 흔적도 없기 때문에 허공을 나는 새의 자취처럼 알아보기 어렵다. 마을이나 숲이나 골짜기나 평지나 깨달음을 얻는 이가 사는 곳은 어디라도 즐겁다. 사람들이 없는 숲 속은 즐겁다. 집착을 버린 이들은 세상 사람들이 즐거워하지 않는 곳에서 즐거워한다. 그들은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마라.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 하늘에 있는 새를 보라.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쌓아두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너희 아버지께서 새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 ... 내일 일을 위하여 걱정하지 마라.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할 것이고....”

 

왜 그러한 일들이 우리를 괴롭히는가. 그것은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더 큰 관점, 전체적인 진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모든 사건은, 그것이 너무 아프고 괴로운 일일지라도, 그것이 그 순간 최선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괴로운 일일이지라도, 우리를 돕기 위한 우주 법계의 배려다. 즉 지금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다음에 더 큰 일로 우리를 괴롭혔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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