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
카스 R. 선스타인 지음, 박지우.송호창 옮김 / 후마니타스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넛지(Nudge)」의 공저자인 하버드대 선스타인 교수의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를 읽었다. 「넛지」와 겹치는 내용이 많고, 「넛지」처럼 다소 지루한 전개가 독해의 맛을 반감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제목만으로도 소장가치가 있다. 굳이 구매하고 싶지 않다면, 서론과 결론만 읽어도 좋다. 다음은 결론의 일부이다. 




“동조하는 사람들은 사회에 도움이 되고,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반사회적이며 심지어는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어떤 면에서는 이는 사실이다. 종종 동조는 사회의 연대를 강화시키고,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연대를 위태롭게 하거나 어느 정도 집단의 평화를 위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적어도 한가지 중요한 면에서는 동조와 이견의 역할을 반대로 이해하고 있다. 많은 경우, 대중의 뜻을 따르는 것은 개인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설령 개인의 의견이 사회의 지배적인 의견과 다르다 하더라도, 개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의익에 도움이 된다.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사회들은 구성원들이 무조건적으로 동조하지 않고, 좀 더 활발하게 이견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이와 같은 노력은 부분적으로는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실질적인 목적은 오히려 사회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이 생각났다.




홍세화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데이비드 허친스 「레밍 딜레마」

버나드 마넹 「선거는 민주적인가」 



* 최근 다시 이 책을 읽었는데 10년 전에 읽고 서평까지 썼다는 걸 몰랐다ㅠ.ㅠ


나랑 다른 사람과 토론하는 것은 불편하다. 그래서 나랑 같은 사람과 이야기한다. 그런데 계속 그렇게 하면 위험하다. 왜냐면 서로 위안, 위로, 공감이 될 수는 있어도 자극, 교환, 발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론 공멸한다. 마치 획일적으로 재배, 사육되는 농축수산물이 질병에 취약하듯...

 

<밑줄>

21세기 초반 많은 미국 회사들이 부정부패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엔론사의 파산이 가장 널리 알려졌지만, 월드컴, 아델피, 타이코와 같은 회사들 역시 비슷한 문제에 봉착했다. 기업의 실패를 가까이서 관찰해 온 많은 사람들은 그 실패에 대한 처방으로, 기업 조직을 더욱 엄격하게 통제하기보다는 진지한 토론을 장려하고 회사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고위 간부들에게 거리낌 없이 이의를 제기하는 집단을 기업 내에 두라고 충고한다. 강력한 힘을 가진 기업의 중역들이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처벌할 때, 직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조용히 상급자의 명령을 따르기만 하는 부작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기업의 실적에 따라 이득을 보는 주주들에게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증거자료들은 이견 제시를 하나의 의무로 간주하고 어떤 주제라도 토론할 수 있는상당히 논쟁적인 이사회를 가진 기업이 실적이 좋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건강한 기업 이사회라면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고 대다수 사람들이 가진 획일적 견해에 대한 도전을 장려해야 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친구와 동료들의 화를 돋우거나 그들로부터 비난을 받지 않으려 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이견을 제시하는 것이 자신이 속한 집단의 효율성을 해치고, 자신의 평판에 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두려워한다.

 

독재 국가는 이견을 가진 사람들을 처벌하고 때로는 죽이기까지 한다. 미국을 포함한 자유로운 사회에서조차 이견을 가진 사람들은 종종 충성심이 없거나 심지어는 사회의 적으로 묘사된다. 자유로운 국가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도록 허용하지만 사회적 압력은 동조를 요구하고 때때로 이런 압력은 매우 강력하다.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따돌림을 당하거나 직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다. 그러나 진정한 희생자는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와 견해를 제공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마치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처신한다. 사실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는 지극히 낙관적이다. 안데르센의 이야기에서는 어린아이가 외친 진실이 거짓을 이겼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실제 세계에는, 광범위하게 퍼진 기만은 그렇게 쉽게 물리칠 수 없다. 사실에 관한 잘못된 판단은 계속되고 있으며, 이는 가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불의, 억압, 집단 폭력이 지속될 수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거의 언제나 선량한 사람들이 침묵하기 때문이다.

 

1942년 웨스트버지니아주 교육위원회는 공립사립학교에 국기에 대한 맹세를 강제하는 결의안을 채택해, 맹세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에게 퇴학 처분을 내리고 맹세를 하지 않는 한 재입학을 불허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얼마 안 돼 대법원의 심판을 받았다. 연방대법원은 특정 신념을 말 또는 행동으로 고백하도록 시민에게 강제할 수 없다며 이 조처가 연방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했다.

 

다수는 동조를 낳고, 소수는 혁신을 낳는다. 이 점에서 한 사람의 이견이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언론의 자유는 사회적 영향이 개인의 행동과 신념에 영향을 미침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실수와 병리 현상을 막을 수 있는 핵심적인 보호 수단이다.

 

집단토론의 결과는 토론에 앞서 각 구성원들이 가진 견해의 평균보다 더 극단적인 견해를 취하게 된다. 이와 같은 현상을 집단 편향성이라 부르는데, 이는 집단토론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전형적인 현상이다.

 

집단편향성을 방지하기 위한 방법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집단 구성원들을 그들이 찬성하지 않는 논점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인간이 아닌 법에 의한 통치를 실천에 옮기는 것이 법의 지배의 핵심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이는 매우 모호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통치는 법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법을 운용하는 제도들은 사람들로 채워져 있으며, 법은 이들의 해석에 의존한다. 모두 같은 법복을 입고 있지만, 누가, 어느 정당이 임명한 대법관인가에 따라 판결의 내용은 크게 달라진다.

 

조직이나 국가는 이견을 환영하고 개방성을 응원할 때 가장 번영할 확률이 높다. 잘 기능하는 사회들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폭넓고 다양한 관점들을 통해 발전할 수 있다. 선진 사회의 구성원들은 비슷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폐쇄적인 집단 혹은 같은 의견만이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집단 내에 머무르지 않는다.

 

헌법에 규정된 많은 권리 및 제도는 동조, 쏠림 현상, 그리고 집단 편향성으로부터 발생하는 부정적인 결과의 위험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 그 가장 간단한 예는 표현의 자유로, 표현의 자유는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쏠림 현상이나 정당화되지 않은 극단주의를 견제한다.

 

동조하는 사람들은 사회에 도움이 되고,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반사회적이며 심지어는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어떤 면에서 이는 사실이다. 종종 동조는 사회적 연대를 강화시키고,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연대를 위태롭게 하거나 어느 정도 집단의 평화를 위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적어도 한가지 중요한 면에서는 동조와 이견의 역할을 반대로 이해하고 있다. 많은 경우, 대중의 뜻을 따르는 것은 개인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설령 개인의 의견이 사회의 지배적인 의견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개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사회들은 구성원들이 무조건적으로 동조하지 않고, 좀 더 활발하게 이견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이와 같은 노력은 부분적으로는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실질적인 목적은 오히려 사회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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