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 범우사상신서 3
에리히 프롬 지음. 방곤,최혁순 옮김 / 범우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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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에 와서 1980년에 돌아간 에리히 프롬. 부모는 유태인이고 고향은 독일이다. 세계 대전 때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1941자유에서의 도피, 1976소유냐 존재냐등을 썼다. 소유냐 존재냐에서는 유태교와 맑시즘이 곳곳에서 보인다. 제목 그대로 소유하는 삶이라 존재하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이야기인데, 마지막 장인 새로운 사회의 특색에서 제기한 여덟가지 주장은 4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유효하다.

1. 산업광고와 정치적 선전에 있어서 모든 세뇌적 방법은 금지되어야 한다.

2. 풍요한 국민과 가난한 국민의 격차를 좁혀야 한다.

3.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의 대부분의 불행은 연간 보증 수입을 보장해 줌으로써 없어질 것이다.

4. 여성은 가부장제 지배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5. 최고문화회의를 설립하여 정부, 정치가, 국민에게 지식을 필요로 하는 모든 문제에 관하여 조언을 해주는 것을 그 직무로 삼도록 해야 한다.

6. 효과적인 정보를 효과적으로 보급하는 체제도 확립되어야 한다.

7. 과학적 연구는 산업분야와 방위에 그것을 응용하는 일과는 분리되어야 한다

8. 핵무기 폐기

 

 

<밑줄>

도는 존재이다 노자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 자기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당신의 존재가 희미할수록 더 소유하게 된다 칼 마르크스

 

내 목표가 소유라면 나는 더욱 많이 소유할수록더욱 그 존재가 확실해지므로 나는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 즉 내가 속여야 할 고객과 없애야 할 경쟁자와 착취해야 할 노동자에 대해 적의를 품어야 한다. 소망에는 끝이 없기 때문에 나는 결코 만족할 수 없으며,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을 시기해야 하며, 더 적게 가진 사람들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감정을 억눌러야 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가장하듯이 나 자신이 (나 자신에 대해서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나) 미소를 띤, 이성적이고 성실하고 친절한 인간으로 보이기 위해서이다.

 

소유에 대한 열정은 틀림없이 끝이 없는 계급투쟁을 가져올 것이다. 공산주의자는 그들의 체제가 계급을 폐지함으로써 계급투쟁을 종식시킨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허구이다. 왜냐면 그들의 체제는 생활의 목적을 한없는 소비원리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더 많이 갖기를 바라는 한, 계급이 형성되게 마련이고 계급투쟁이 있게 마련이다.

 

 

 

능동성과 과정을 표시하는 것은 동사이다. 예를 들면 나는 존재한다, 나는 사랑한다, 나는 원한다, 나는 미워한다 등등. 그런데 어떤 능동성소유하다라는 말로 표현되는 경우가 점차 잦아지고 있다. 즉 명사가 동사 대신 쓰이고 있다. 그러나 능동성을 명사와 결부시켜 소유하다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언어의 오용이다.

 

소비는 소유의 한 형태이며, 그것은 아마 오늘날의 풍요한 산업사회의 가장 중요한 형태일 것이다. 소비는 다의적인 특질을 가지고 있다. 즉 그것은 우선 불안을 제거해 준다. 왜냐하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길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더 많이 소비할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전의 소비가 곧 그 욕구충족적 성격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소비자들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자신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 =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및 내가 소비하는 것

 

삶의 소유양식에 젖어 있는 학생들은 귀를 기울여 강의를 듣고, 그 말의 논리적 구조와 의미를 이해하며, 가능한 한 그 말을 모두 그들의 노트에 적는다. 후에 필기한 것을 암기하며 시험에 합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 내용이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사상체계의 일부가 되어 그것을 풍요롭게 하거나 확장시키진 못한다. 학생들은 그 대신에 그들이 들은 말을 사상, 혹은 전체적인 이론의 고정된 몇가지 집합으로 면모시켜 그것을 저장한다. 학생과 강의내용은 서로 무관한 채 동떨어져 있으며, 다만 학생 각자가 어떤 사람의 진술의 집적의 소유자가 되어 있을 뿐인 것이다.

 

소유양식을 가지고 있는 학생은 단 한가지 목표밖에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을 즉 배운 것을 고수하는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그것을 단단히 기억하거나 노트를 소중히 보존한다. 그들은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거나 창조할 필요가 없다. 사실 소유형의 사람들은 어떤 주제에 대한 새로운 사상이나 관념에 접하며 오히려 당황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된 양의 정보에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우수한 학생이란 여러 철학자들이 각기 말한 것을 가장 정확하게 암송할 수 있는 학생이다. 그들은 박물관의 박식한 안내인과 같은 것이다. 그들이 배우지 않은 것은 이러한 종류의 재산적 지식을 초월한 것이다. 그들은 철학자에게 질문하고 그들과 말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 그들은 철학자 자신의 모순과 그들이 어떤 문제를 무시하거나 쟁점을 회피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법도 배우지 않는다.

 

우리의 교육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지식을 소유물로서 갖도록훈련하는 데 애쓰고 있으며, 그 지식은 그들이 후일 갖게 될 재산 혹은 사회적 위신의 양과 대체로 비례한다. 그들이 받는 것은 최소한 그들이 일을 하는 데 불편이 없을 만큼의 양이다. 여기에 덤으로 그들 각자에에 자존심을 높이기 위한 사치스러운 지식을 모은 꾸러미가 주어지는데, 각자의 꾸러미의 크기는 그 인물이 아마도 얻게 될 사회적 위신과 일치한다. 학교는 이 전면적인 지식의 꾸러미를 생산하는 공장이다.

 

하나님은 두가지 중요한 계율을 덧붙인다. 그 하나는 각자는 자기의 필요에 따라 거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출애굽 16:17~18) 마르크스에 의해서 유명하게 된, 각자는 그 필요에 따라 받는다는 원리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정식화되고 있다. 부양받을 권리가 아무런 조건 없이 확립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식을 먹여 살리는 어머니이다. 자식들은 부양받을 권리를 확립하기 위해 그 어떤 일을 할 필요가 없다. 두 번째의 계율은 축재와 탐욕과 그리고 소유욕에 대한 계율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음날 아침까지 아무것도 저축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무리가 아침마다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고 해가 뜨겁게 쪼이면 그것이 스러졌더라”(출애굽 16:20~21)

샤바트(Shabbat:안식일)을 지킨다는 개념도 음식을 거둔다는 것과 관련되어 도입되었다. 모세는 유태인에게 금요일(유태교의 안식일은 토요일)에는 평상시의 음식량보다 두 배를 거두라고 말했다. “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칠일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출애굽 16:26)

 

신약성서는 삶의 소유구조에 대한 구약성서의 저항을 계승하고 있다. 그 저항은 그 이전의 유태인이 행한 저항보다 더 철저하다. 구약성서는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계급의 소산이 아니라 유목하는 목양자나 독립적인 농부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로부터 천년 후 탈무드라는 학문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학식이 풍부한 바리새인들은 소수의 매우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소수의 아주 잘사는 사람들에 이르는 중류계급을 대표하고 있었다. 이 양집단이 마음 속에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회정의의 정신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보호, 그리고 모든 무력한 사람들, 예를 들며 과부나 소수민족에 대한 원조였다. 그러나 대체로 그들은 부를 나쁘다거나 존재의 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난하지는 않았다.

이에 반해서 초기의 기독교도들은 주로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멸시당하는 사람들, 짓밟히고 버림받은 사람들의 집단이었고, 그들은 구약성서의 몇몇 예언자들처럼- 부자와 권력자를 심하게 비판했고, 부와 세속적 권력과 성직의 권력을 순연한 악으로 보고 타협하지 않고 탄핵했다. 실제로 막스베버가 말했듯이 산상수훈은 커다란 노예반란의 연설이었다. 초기 기독교도들이 품고 있던 기분은 완전한 인간적 연대 바로 그것이었으며 때때로 그것은 모든 물질적 재화의 자발적인 공동소유라는 관념으로 표현되었다.

 

다른 교부(敎父)들과 마찬가지로 바실리우스에게도 모든 재물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데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은 그의 특성을 말해준다. “남의 옷을 빼앗는 자는 도둑이라고 불린다. 그렇다면 줄 만한 능력이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에게 옷을 주지 않는 자는 도둑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을까?”

 

소유양식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견해의 전거로 대표적인 것은 빈곤에 대한 그의 설교인데, 그것은 마태복음 513절의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구절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설교에서 에크하르트는 마음의 가난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관해 논하고 있다. 그는 우선 외면적인 빈곤, 즉 물질적인 빈곤도 미덕이며 권장할 만한 것이지만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면적인 빈곤, 즉 복음서 구절에 언급되어 있는 빈곤이며, 그것을 정의하여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것도 원하지않고, 아무것도 알지못하고, 아무것도 갖고 있지않는 자는 가난한 인간이다

 

아이를 낳는 모든 고통이 여자의 것임을 고려할 때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이를 만든다는 것은 여성에 대한 노골적인 착취라는 것을 거의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편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독자적인 형태의 소유권, 즉 어린 시기의 자식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다. 이 공전은 끊임없는 악순환을 이룬다. 남편은 아내를 착취하고, 아내는 어린 자식을 착취하며, 청년기의 남자는 이윽고 연상의 남자들에 끼여 여자를 착취하는 등등으로

 

조지 그로데크는 남자는 결국 단 몇분동안만 남자일 뿐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은 어린아이라고 논평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이윽고 왜곡되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1백 년이나 너무 일찍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가 이미 그 가능성의 한계에도 달해 있기 때문에 혁명이 임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죽은 뒤 엥겔스가 말했듯이 그들은 완전히 판단을 잘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발달의 절정에서 그들의 새로운 가르침을 선언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쇠퇴하고 궁극적인 위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1백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는 점을 예견하지 못했다.

 

아이히만(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학살을 지휘했던 악명 높은 나치스 독일의 친위대 중령)은 관료의 극단적인 한 예이다. 아이히만은 유태인이 미워서 수십만의 유태인을 죽인 것은 아니다. 그는 누구를 미워하지도 않았다. 아이히만은 그의 의무를 다했을뿐이다. 그는 유태인을 죽였을 때 의무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는 유태인을 독일 밖으로 추방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도 똑같이 의무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단지 규칙을 지키는 일뿐이었다. 그는 그가 규칙을 어겼을 때만 죄의식을 느꼈다. 그의 진술에 의하면 그는 단지 어렸을 때 꾀를 부려 빈둥거린 일과 공습 때 피난 명령을 어긴 두 경우에만 죄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의 대부분의 불행은 연간 보증 수입을 보장해 줌으로써 없어질 것이다. 이 생각의 핵심은 모든 인간이 그가 일하든 안 하든 관계없이 굶주림에서 벗어나고 주거를 제공받을 절대적인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생족은 유지해 가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보다 많이 받을 필요도 없지만 그보다 적게 받아서도 안 된다. 이러한 권리는 현대에 있어서는 새로운 개념의 표상이지만 실은 기독교에 의해 요구되는 많은 원시적인 부족들에 의해 실천된 매우 오랜 규범이며, 그것은 인간은 사회에 대한 의무를 다하든 다하지 못하든 관계없이 생존을 위한 절대적인 권리를 지닌다는 규범이다. 그것은 우리가 애완용 동물에게는 인정하면서 같은 인간에게는 인정하지 않는 권리이다.

대규모의 복지 관료제를 운영하기 위하여 현재 쓰고 있는 비용, 그리고 육체적, 특히 정신신체적인 질병, 범죄성, 마약중독(이 모든 것은 그 대분이 압제와 권태에 대한 항의의 형태이다)을 치료하는데 드는 비용을 고려해 본다면, 필요한 사람에게 연간 보증 수입을 제공하는 데 드는 비용보다도 적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생각은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게으르다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실행 가능성이 없고 위험한 것으로 생각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투적인 이의에는 근거가 없다. 그것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을 합리화시켜 주는 슬로건에 지나지 않는다.

 

중세 후기의 문화가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이상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근대사회가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지상의 진보의 나라의 성장이라는 이상에 의해서 고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세기에 와서 이러한 이상이 바벨탑이상으로까지 타락했다. 그것은 이제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으며, 마침내는 모든 사람들이 그 폐허 속에서 묻어버리고 말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가 정과 반이라면 새로운 합, 즉 중세 후기 세계의 정신적 핵심과 르네상스 이래의 합리적 사고와 과학발달과의 종합이 대혼란을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이 종합은 존재의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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