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책상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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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
나보다 사십여 년이나 더 늦게 오고 있는 열일곱의 그보다 그 점에 있어선 더 나을 것이 없다. 사랑이란 목숨의 부적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 깊어서 사랑에의 그리움은 때때로 우주보다 절망적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어떤 소리로 오는지 알고 있다.
치익 탁.
치익 탁, 치익 탁의 연속성이다.
치익...에서, 세상의 모든 참나리꽃이 일제히 죽음 같은 개화를 위해 제 어두운 음부를 잔뜩 오므리는 걸 나는 본다. 탁...하면, 그들은 서슴없이 제 죽음을 열고서 붉고 노란 색등으로 피어날 것이다.

(치익 탁,은 열일곱 화자가 사창가에 누워 있는 동안 그에게 다가오던 창녀의 슬리퍼 끄는 소리...)-127쪽

책은..... 위험한 거야.
뿔테안경은 쓸쓸하게 웃는다.
무엇이 왜 위험한지 뿔테안경은 말하지 않고, 그도 묻지 않는다. 뿔테안경이 말하는 위험이란 전체가 정해준바, 삶의 일반적인 실패를 뜻하는 것이겠지만, 그런 위험은 살아 있다는 목숨의 위험함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는 생각한다. -165쪽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물 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가는
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겄네

육백 치기 화투판을 잠시 미뤄두고 배달돼온 자장면을 왁자지껄, 육자배기 어우러지듯 이리찧고 저리 까불면서 먹고 있다가, 참나리 누나의 반 강요에 못 이겨 마지못해 그가 낭송해 보인 시가 바로, M이 좋아하는 박재삼의 '울음이 타는 강'. 배운 바 없고 익힌 바 참나리꽃이 되어 발랑 까뒤집혀 피는 것이 전부인 어리고 늙은 창녀들이, 시를 어찌 알고 시적 비애를 또 어찌 공감할까 했는데, 시의 반도 읽기 전에 열여섯 나이 어린 창녀9의 볼에 눈물이 주르르륵, 그리고 이내 뚝, 뚝, 뚝 검은 자장면 면발 위에 떨어지고 만다. -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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