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김형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8월
품절


그때 인수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다. 제발 감정이 단선적인 것이기를, 사랑이든 미움이든 한 가지 감정만 느낄 수 있기를.....-56쪽

편안하고, 아득하고, 그리고 하염없었다. -90쪽

인수는 지방 소도시에서는 시간이 서울과 다른 속도로 흘러가는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서울의 시간이 휘몰아치는 폭풍이나 격랑 같은 것이라면 지방 소도시의 시간은 미풍처럼 느리고 부드러웠다. 서울에서는 늘 시간에 쫓겨다닌 것 같았는데 여기서는 시간을 데리고 다닌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친구처럼 곁에 머물며 잠을 깨워주고, 쉬어야 할 때임을 알려주었다. 나무 그림자가 이동하는 광경처럼, 꽃망울이 벙그는 모습처럼 시간의 구체적인 실체가 눈앞에 보이는 때도 있었다. -132쪽

사랑에는 패자만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의 감정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가면 첫번째 사랑은 두번째 사랑에 대한 패배자일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 사랑은 영원히 그 첫번째라는 자리를 쟁취할 수 없고, 늘 첫번째 사랑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또한 패배자였다. -138쪽

"몸에서 음악 소리가 나고, 소리에서 색깔이 나오고, 그 색에서 다시 향기가 퍼져요. 봐요, 당신 살 냄새가 얼마나 향기로운지."
인수는 서영의 팔을 들어 코 가까이 대주었다. 특별한 냄새를 맡지는 못했지만, 인수의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서영은 그 말을 결코 잊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았다. -140쪽

이별이나 단절 같은 것이 눈빛으로, 침묵으로 전달될 때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인수는 처음 알았다. 이제 만나지 못하겠어요. 그렇게 말로 표현하면 모든 것이 단순해졌다. 그저 이별의 칼날이 깊숙이 찌른 상처 하나만 잘 다스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차가운 눈빛으로, 냉담한 무언(無言)으로 통보받는 이별은 한층 복잡했다. 그 속에는 단절의 고통뿐 아니라, 끊임없는 미련, 신호를 잘못 읽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 아직도 여지가 남아 있을 듯한 희망....들이 뒤섞여 있었다. -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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