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즈음에서 슬슬 필자에 대한 항의가 나올 것이다. "당신은 아주 까다로운 분이군요. 도대체 어떻게 하면 당신 마음에 들까요? 저것도 쓸모없고 이것도 쓸모없다면 도대체 당신은 어떤 것을 요구하는 겁니까? 요정 이야기입니까? 그것뿐입니까? 어린이들에게 지식을 주거나 도덕을 가르치는 이야기만 나오면 금방 화를 내고 마니 그럼 어쩌라는 겁니까? 요컨대 알맹이가 하나도 없는 책이 아니면 당신 마음에 안 든다는 겁니까?"-59쪽
그 질문에 대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우선 책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책이 있다면 반드시 내가 바라는 책이 아니어도 찬사를 아끼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럼 질문에 대하여 이제부터 내가 말하는 좋은 책이란 무엇인지 얘기해 보겠습니다."-59쪽
나는 예술의 본질에 충실한 책을 사랑한다. 그것이 어떤 책인가 하면 직관에 호소하고 사물을 직접 느낄 수 있는 힘을 어린이들에게 주는 책, 어린이들도 읽자마자 이해할 수 있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책, 어린이들의 영혼에 깊은 감동을 주어 평생 가슴 속에 추억으로 간직되는 책, 그런 책 말이다. -59쪽
나는 또 어린이들이 즐겨 머릿속에 그리는 것을 그대로 담은 책을 사랑한다. 온 세상 삼라만상 속에서 특히 어린이들의 취향에 맞추어 선택된 것. 어린이들을 해방시키고 기쁘게 하며 행복하게 하는 이미지, 눈 깜짝할 사이에 어린이들한테 덤벼들어 그들을 현실 세계의 굴레로 얽매어 버리지 못하도록 지켜 주는 신비의 세계, 그런 것을 어린이들에게 주는 책을 나는 사랑한다. -60쪽
어린이들에게 감상이 아니라 감수성을 자각시켜 주는 책, 인간다운 고귀한 감정을 어린이들의 마음에 불어넣는 책, 동식물의 생명뿐 아니라 삼라만상의 생명을 모두 중시하는 마음을 심어 주는 책, 천지의 만물과 그 만물의 영장인 인간 속에 있는 신비스러운 것을 헛되이 하거나 소홀히 하는 마음을 결코 어린이들에게 심어 주지 않는 책, 그런 책을 나는 사랑한다. -60쪽
그리고 놀이라는 것이 대단히 소중하고 중요한 일임을 인식하고 있는 책, 지성과 이성을 단련하는 것은 반드시 당장에 이익을 낳거나 실제 생활에 이용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며, 목적으로 해서도 안 된다는 점을 분별하고 있는 책, 그런 책을 나는 사랑한다. -60쪽
나는 지식을 주는 책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 책이 무엇이든 쉽게 깨닫게 해주는 것처럼 가장하고는 감쪽같이 어린이들을 유인해서 즐거운 시간을 낚아채려고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런 것은 말도 안 된다. 또 실제로 엄청나게 수고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는 것이 많으므로 그런 방법 자체가 터무니없다고 하겠다. 나는 어설프게 다른 것으로 가장한 문법이나 수학이 아니라 솜씨 좋고 적당하게 지식을 가르치려는 의도로 쓰여진 책을 사랑한다. 어린 영혼의 싹을 짓뭉개 버리는 주입식 책이 아니라, 영혼 속에 지식의 씨앗을 뿌리고 건강하게 기르려는 그런 책을 사랑한다. 지식을 과대 평가하고 만물의 척도로 삼는 과오를 저지르지 않는 책, 즉 지식의 한계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 책을 사랑한다. -60쪽
특히 내가 사랑하는 책은, 모든 인식 가운데 가장 어렵지만 가장 필요한 것으로, 곧 인간의 심성에 대한 인식을 어린이들에게 심어 주는 책이다. 페로 같은 사람은 신비한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기지에 찬 매력적인 방법으로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올바른 지식을 준다. 그는 충분히 인간을 관찰하며 어려운 문장을 쓰지 않는다. 어렵기는커녕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의 문장은 대단히 정확하고 진실하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 밑바닥까지 스며든다. 또 힘이 있어 인간의 정신을 원숙하게 하고 예지의 꽃을 피게 할 수 있다! <엄지동자>에 이런 문장이 있다. "아주머니는 가난했습니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이 아이들의 어머니였습니다." "이 피에로라는 아이는 아주머니의 큰아들이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이 아이를 누구보다도 사랑했습니다. 피에로의 머리칼은 조금 붉은데, 아주머니의 머리칼이 조금 붉기 때문입니다." "나무꾼도 아내 못지않게 슬퍼하고 있었지만, 아내가 끈질기게 괴롭히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나무꾼도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아내가 좋은 말을 해줄 때는 기분이 좋지만, 다 끝난 일을 가지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 지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답니다." (중략)-61쪽
끝으로 내가 사랑하는 책은 높은 도덕성을 지닌 책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도덕성은 가난한 사람에게 동전 두 닢을 주었다고 해서 자신을 자비로운 사람으로 여기는 그런 째째한 근성의 도덕이 아니다. 거짓 눈물을 흘린다든가 이웃 사랑을 모르는 경건주의, 부르주아적 위선 같은 한 시대 한 민족에 한정된 특수한 결점을 어떻게 해서든 장점인 양 가장하는 것도 아니다. 또 마음으로부터의 공감이나 개인의 노력 등은 완전히 무시하고, 앞뒤 가리지 않고 강한 자의 의지를 아랫사람에게 강요하는 그런 난폭한 도덕성도 아니다.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진리, 인간의 영혼을 생기 있고 분발하게 하는 진리를 풍부하게 지니고 있는 책을 나는 사랑한다. 이기적이지 않고 성실한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보답을 받을 것이고, 설령 다른 사람이 보답하지 않더라도 스스로에게 득이 될 만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책, 선망이나 시샘이나 탐욕이 얼마나 추하고 저열한 것인지 보여 주는 책, 욕설을 하거나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결국에는 입을 열고 뭔가 말할 때마다 살무사나 두꺼비가 튀어나오게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담은 책을 나는 사랑한다. (중략)-62쪽
물론 이런 조건을 다 채우기는 어렵다. 나도 그런 사실쯤은 충분히 알고 있다. 이렇게 되면 어른을 대상으로 하는 좋은 책의 조건보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좋은 책의 조건이 더 엄격해진다. 게다가 어른을 위한 좋은 책도 그렇게 간단하게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단지 잔재주를 부려 이야기를 솜씨 있게 만들어 내어 어린이들이 소화하기 힘든 가짜 읽을거리를 던져 줌으로써 어린 영혼을 짓누르거나, 의젓한 도덕가 같은 태도로 교훈이나 지식을 선심 쓰듯이 내놓거나, 한술 더 떠서 단점이나 결점을 장점 내지 미점이라고 믿게 하여 어린이들을 그르치는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용서할 수 없다. 내가 어른이 어린이를 억압했다고 말한 의미는 바로 이런 것이다.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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