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5월
구판절판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조심스런 성격의 인간이야.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여러 사람 앞에서 으스대는 그런 타입은 아니란거지. 내게는 들러리 같은 게 어울려. 코울슬로나 프라이드 포테이토 같은 하찮은 존재라고 할까, 그런 와무(지렁이 모양으로 된 위장 낚시바늘-역주) 부스러기 같은 게 어울려."-22쪽

"그래도 괜찮아. 그럴 기분이 들지 않으면, 억지로 할 필요는 없어. 솔직히 말해서 나는 지금까지 꽤 많은 남자들과 섹스를 했지만, 생각해 보면 말이야, 그건 결국은 두려웠기 때문이었어. 누군가에게 안겨 있지 않으면 두려웠거든. 누군가가 나를 원했을 때 분명하게 거절하지 못했지. 그뿐이야. 그런 식으로 섹스를 해봐야, 좋은 일 같은 거 하나도 없어. 오히려 살아갈 의미 같은 것들이 조금씩 닳아가며 줄어들 뿐이지. 내가 하는 말, 무슨 뜻인지 알 수 있겠어?"-232쪽

그녀는 말한다. "인간이란 결국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 그 기억이 현실적으로 중요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상관이 없지. 단지 연료일 뿐이야. 신문의 광고 전단지나, 철학책이나, 에로틱한 잡지 화보나, 만 엔짜리 지폐 다발이나, 불에 태울 때면 모두 똑같은 종이조각일 뿐이지. 불이 '오, 이건 칸트로군'이라든가, '이건 요미우리신문의 석간이군'이라든가, 또는 '야, 이 여자 젖통 하나 멋있네'라든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타고 있는 건 아니잖아. 불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어떤 것이든 모두 종잇조각에 불과해. 그것과 마찬가지야. 중요한 기억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기억도, 전혀 쓸모 없는 기억도, 구별할 수도 차별할 수도 없는 그저 연료일 뿐이지."-235쪽

우리는 하나의 순수한 시점이 되어, 이 거리의 상공에 있다. 눈에 비치고 있는 것은, 잠에서 막 깨어나고 있는 어느 거대 도시의 정경이다. 다양한 색상으로 칠해진 통근 열차가 제각기 가야 할 방향으로 움직이며, 많은 사람들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실어 나르고 있다. 옮겨지고 있는 이들은,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다른 얼굴과 정신을 지닌 인간들인 동시에, 하나의 큰 집합체의 이름 없는 한 「부분」이기도 하다. 하나의 총체인 동시에, 그저 단순한 부품이다. 그들은 그처럼 다른 존재의 두 가지 성격을 말하는 이의성二義性을 교묘하게, 그리고 편의에 맞춰 구분해 쓰면서, 정확하고 재빠르게 일상적인 아침의 의식을 치러나간다. 이를 닦고, 면도를 하고, 넥타이를 고르고, 립스틱을 바른다. 텔레비전 뉴스를 살펴보고, 가족과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배변을 한다. -27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