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논 갓 리틀 - 제35회 부커상 수상작
DBC 피에르 지음, 양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내가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순전히 신문 광고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문 광고 속의 서평 한 줄 때문이었다.

풍자가 있고 비애미가 있는 이 작품은 지성, 본능, 감성, 해학 등 인간과 관련된 모든 차원에서 읽는 이를 붙들어 맨다. 장점이 워낙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약점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 선데이 익스프레스

자고로, 찬사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어찌보면 별 것도 아닌 한 개의 문장 앞에서 나는 열에 들떴다. "그래, 툭 까놓고 좀 허접한 구석은 있다. 그러나 어쩔 것이냐, 한 번 읽어보면 너도 안 빠지곤 못 배길 거다!"라고 문장 한 개가 나에게 건방을 떨었다.
그래서 였는데. 그랬기에, 한 빈곤한 미녀의 등을 치며 이 책을 구입했던 것이었는데.

약점이 너무도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강점은 미처 찾아내질 못했다.

그랬다. 온통 '씨팔'과 '똥'으로 버무려진 문장 속에서 작가가 비판하고 있다는 미국에 대한 통렬한 풍자는 건져내기 힘들었다. (오오 버논, 괄약근에 가끔 문제가 생기는 일이 있어서 그러는거냐? 프로이드 박사가 널 봤다면, 분명히 '항문기의 문제'에 대한 주요 연구 과제라고 생각했을거다. )
하긴, 작품의 정수를 꿰뚫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비속어로 버무려진 문장 탓은 아니었다. 우리는 미국인에게 역한 버터 냄새를, 그들은 우리에게 독한 마늘 냄새를 맡아내지만, 사실 옆구리 어딘가가 속으로 썩어들어가는 환부 - 그 고름의 냄새는 본인 아니면 눈치 채기가 힘든 모양이다. 자식의 범죄 여부보다는 냉장고 쇼핑에 더 관심있어 보이는 주부, 사형조차 쇼로 둔갑시켜 버리는 언론, 그 틈바구니 구석구석에 찌든 상업주의.... 그것들은, 사실 건져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작품 전면에 나란히 나란히 누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발견하고 비웃을 수가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문화(문화라고까지 할 것도 없는, 생생한 실생활)에 대한 조금의 이해 혹은 작가의 친절한 주석, 그 둘 중의 하나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이러한 생각은, 이 책 바로 뒤에 읽기 시작한 김영하의 소설집에서 <비상구>라는 작품을 읽으며 더욱 진해졌다. 두 소설 다 '씨팔'로 버무려 져 있다.(하긴, 버논은 사실 무죄이고 비상구의 주인공은 지은 죄가 있다는 차이가 있다만.) 하지만 나는 확실히, 비상구의 주인공에게 더 빨려들어 갔다. 그가 잠든 여관, 달린 길, 뻑치기를 저지른 가로수에 대한 주석이 필요치 않았으니까.

그렇게 3막까지는, 총기 난사 사고에 대한 가려진 진실이 드러날 거라는 일말의 희망이 없었다면 책을 덮고야 말았을 고역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4막, <내 여름은 나를 이렇게 보냈다>부터 버논이 비속어를 쓰지 않기로 결심을 하고(하느님, 감사합니다!), 글이 제법 흥미진진한 법정 드라마의 성격을 띄기 시작한 이유로 슬슬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말. 마치 전쟁 영화의 접전 장면처럼 화면이 이리 저리 흔들거리는 듯 해서 혼란스러운 그 결말은...밝히면 스포일이 될테니, 제법 괜찮았다고 해 두자. 옮긴이의 말이, 이 결말을 두고 비평가 사이에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결말 역시 할리우드나 디즈니 등 미국 상업주의의 대표 주자를 패러디 해 비튼 것 같아 마음에 든다나. 나 역시 그렇다. 패러디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좀 어설프고 황당하긴 하지만 지금까지의 고행(?)을 반이나마 달래주는 결론이었다.

책의 맨 첫 장, '이 책에 쏟아진 언론의 찬사'에서 가이드 북스라는 출처로 버논 리틀을 홀든 콜필드(호밀밭의 파수꾼)에게 비유해 놓았다. 그것을 보고 홀든의 팬인 나는 잠시 가슴이 설레었는데, 지금은....슬쩍 기분이 나빠지려고 한다. 누가 더 나은가를 떠나서, 목록도 나오기 전에 이런 칭찬에 페이지를 할애하는 것은 그리 좋은 아이디어가 아닌 듯 하다. 영화를 보기 전에 "그거, 꼭 봐야 돼! 너무너무너무 재미있어!"라는 말을 듣고 들어가면 기대치가 커진만큼 재미가 반감되는 것. 꼭, 그런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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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8-18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선물해 주신 사과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책 읽기가 힘들었다고 님에 대한 제 사랑이 반감되는 것은 네버네버네버 아니니까요.^^

진/우맘 2004-08-18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이것과 매우 유사한 말을, 을 선물해 주신 찌리릿님께 했던 기억이....^^;;;

미완성 2004-08-18 0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흑. 안타까울 따름이어요...ㅠ.ㅠ
미모로써 우리 버논을 용서해Boa요~*

진/우맘 2004-08-18 0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믄요 그러믄요. 버논도, 지누맘에게 박대를 당해 그렇지...알고 보면 괜찮은 넘이거든요.^^;

큰이모 2004-08-18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너무 매력적이라 먼저 읽어보려다 말았는데..
흠.. 치명적인 약점이 뭔지 느무 궁금해진다..

진/우맘 2004-08-18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긴, 끊임 없이 되풀이 되는 '씨팔'과 '똥'이지, 뭐.-.-

큰이모 2004-08-19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거라면.. 점잖은 양반집 자손인 우리들에겐 정말 치명적이군.. ㅋㅋ
근데, 농담이 아니라 어릴적 교육 때문인지, 욕하는 사람이랑 함부로 반말하는 사람에겐 거부반응이 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