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성소설걸작선 1
조안나 러스 외 / 여성사 / 1994년 8월
평점 :
절판


페미니즘과 SF 이 두 가지는 모두 대중적 인기를 크게 끌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합해지면 형편은 달라진다. 페미니즘 SF는 SF가 갖는 제한되지 않는 상상력이라는 강력한 도구를 사용해서 여성문제에 접근한다. 시간적, 공간적,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어 사회를 이루고 있는 기본적인 가정을 뒤엎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억압된 사회구조 속에 미묘하게 녹아 있어서 쉽게 잡아내기 힘든 여성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내 준다. 필요없는 것을 잘라내고 본질만을 보여주기 때문에,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이 더 이상 그렇지 않고, 때로는 현실을 소름 끼칠 정도로 날카롭게 보여주기도 한다.

---------역자 후기 中

점 빼는 것만큼이나 간단하게 성전환을 할 수 있는 사회를 상상해 봤는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낙관론과는 달리 여성의 권리가 과거보다 훨씬 줄어든....어머니조차 아들에게 '관리'되고, '여성교화위원회'라는 단체가 설치는 미래는? 여기, 그러한 세계들이 있다.

솔직히 나는...페미니즘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다. 성 차별 사안이 뉴스에 드러나면 잠시 분개하지만 그 뿐. 시집살이를 모르는 편안한 며느리에, 남편에게 맞아본 기억도 없고, 태반이 여성인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운 좋은 나에게 페미니즘은 TV 속 얘기 같기만 했다. 기본적으로 페미니즘을 '불운한 여성의 권익 보호를 위한 운동' 쯤으로 얼렁뚱땅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과연 그럴까? 페미니즘의 정의를 떠나서, 나 자신도 정말 차별 받아본 기억이 없는가? 아닐 것이다. 다른 여성과 비교해 볼 때 조금 낫다는 것일 뿐, 그 이상은 아니지. 그런데 그 이상 고민하고 싶지가 않았다. 앉은 자리가 따뜻하면 생각하기가 귀찮아 지는 법. 헌데, 이 책은 그 조용한 수면에 돌맹이 하나를 던져 넣었다.

이 책 이전에, '이갈리아의 딸들'이 그랬다. 이갈리아는 좀 더 노골적으로, 돌맹이가 아닌 바위덩이를 던져 넣었지. 이제껏 여자이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것...이라 믿고 있던 많은 사안들이,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는 사실이(출산의 고통, 수유로 인한 직업 포기 등...) 생경하고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세계여성소설걸작선>은 그렇게 노골적이지는 않다. 이러한 점이 저렇게 부당하다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대신, 무한 상상력으로 묘하게 비틀어진 세계를 살짝, 내 앞에 내려놓는다. 그 세상을 넘어다 보며 나는, 어느새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렇다면, 머리 아픈 책 아닌가? 절대 그렇지 않다! 이러니 저러니 하는 생각은 책을 덮고 나서야 자연스레 배어나오는 것이고, 읽는 동안은 별로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8편의 단편이 모두 흥미진진하다고는 못하지만, 각자의 색깔이 분명한 이야기들은 중고등학교 때 로맨스 소설 읽었던 것과 다름 없이 술술 읽혔다. 코니 윌리스나 어슐리 르귄 같은 이름들이 슬슬 익숙해지는 기분(얼마 전 'SF걸작선'을 읽은 기시감 때문에.^^)도 즐거웠다. 재미있고, 개성있는데다 새로운 사고의 지평을 열어 주는...책이 가져야 할 여러 미덕을 겸비한 이 작품의 결정적인 단점 하나는....<품절>이라는 것이다! 아깝다. 나 역시 세계여성소설걸작선2를 읽고 싶건만...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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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26 1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panda78 2004-06-28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이제 거진 다 읽으셨겠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