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언제나 그랬다. 폴 오스터의 책을 읽을때면 초반반부엔 몰입을 못하고 고전하기 일쑤였다. 몇 페이지를 읽고 덮고...또 얼마를 읽고 덮으면서 중반부에 다다르면 이야기는 슬슬 재미있어지기 시작하고, 책이 막바지에 이르면 '그래서? 그래서?'하고 채근해 대는 머리에 못이겨 휘몰듯 속독을 하여 결과를 확인하고는, "하아..." 한숨을 쉬며 마지막 몇 페이지를 다시 읽어보게 된다. 매번 그러면서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초반부에는 재미없을 것>이 작가의 컨셉일 리도 없는데...도대체 왜?

그런데, 얼마 전 읽은 폴 오스터의 관련기사에서 그 이유를 찾아냈다. <차이니즈 박스>. 상자를 열면 다시 하나의 상자가 나오고, 그 속엔 또 다른 상자.... 그런 차이니즈 박스처럼 폴 오스터의 소설은 대부분 이야기 속에 다른 이야기, 그 이야기 속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국어 시간에 배웠던 재미없는 표현으로는 <액자 소설>이라 하던가? 하지만 액자는 틀 속에 그림이 하나 뿐이니, <차이니즈 박스>가 더 맞는 표현이겠다. 그리고 보통 폴 오스터의 차이니즈 박스는 열면 열 수록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책 읽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은 반론을 펼칠지 모르겠지만, 아직 내공이 얕아 줄거리 위주로 책을 읽는 나같은 사람은 알맹이가 더 맛나고 재미있을 수 밖에.

환상의 책도 그렇게 차곡차곡 포개진 몇 개의 이야기의 집합체이다. 가장 큰 상자는 교수 겸 작가 <짐머>의 이야기. 그 뚜껑을 열면 실종된 영화배우 <헥터>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 말미에 헥터가 찍은 미공개 영화 <마틴 프로스트의 내면적인 삶>이야기가 들어 있다. 그런데 이 상자들은 각각 개별된 것이면서도 꽉 닫혀 고립된 것이 아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책이 막바지에 이르면 제일 안에 들어있던 마틴 프로스트의 상자가 짐머의 상자에 포개지고, 헥터의 상자가 짐머와 마틴 프로스트의 이야기에 관여하며 뒤엉킨다. 안과 밖,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질 무렵 그 혼란은 가라앉고....짐머의 나레이션은 그 모든 것에 마법을 건다. "그대로 멈춰라!" 이 이야기는 그 마법으로 인해 소설인 동시에 현실이고, 끝났음에도 시작되는, 한결 매혹적인 것으로 완결되는 것이다. "믿기지 않는다고? 아니야...이 모든 건 내가 겪은 일인걸. 믿어...사실이야."하고 속삭이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달의 궁전 이후 몇 편의 소설에서 처음만한 쾌감을 얻지 못하고 씁쓸해 했는데, <환상의 책>은 반갑게도 폴 오스터와의 첫만남에 필적할만 한 즐거움을 주었다. 언제나 예상과는 다른, 기대와 딴판인 어떤 결과를 내미는 작가. 환상과 현실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탁월한 이야기꾼. 매번 겪는 초반의 고전에도 불구하고 내가 폴 오스터를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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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5-17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이니즈 박스>로 검색해 봐도 원하는 이미지가 나오지 않아...그냥 한 번 그려본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chaire 2004-05-17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이니즈 박스.. 그렇군요! 그림, 너무 멋져요!

호랑녀 2004-05-17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림이 정말 멋지네요. 어릴 때 그림그려서 상 많이 타보셨겠어요...

진/우맘 2004-05-17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아니고...고3때 수업은 안 듣고 낙서만 한 결과...라고나 할까요? ^^;;
고맙습니다. 제가 뭘 해도 멋지다 하시니...인생 살 맛 납니다. ^___^

밀키웨이 2004-05-18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씨도 귀엽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