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조정육 동양미술 에세이 1
조정육 지음 / 아트북스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처음 책을 펴고 여는 글을 읽었을 때는, 글에 감정과잉이 심한 거 아닌가...하는 생각에 약간의 거부감이 들더군요. 지나치게 풍부한 감성이 자칫 신파로 흘러가는 것. 리뷰나 페이퍼를 쓰면서 제가 자주 저지르는 일이라(그래서 못마땅한지라) 다른이가 펴낸 책에서 그런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동양화와 어우러진 소박한 에피소드를 하나 하나 읽어가다 보니 어느덧 넘치는 글들이 가슴에 와 닿기 시작했습니다. 절제되지 않은 작가의 감정이, 곁에서 손을 꼭 쥐고 말을 건네는 것처럼 가슴을 덥혀주더군요. 그것은 새롭거나 감각적이지는 않지만 그렇기에 익숙한...어머니, 혹은 큰 누이의 음성이었습니다.

 글과 더불어 그림 또한 친숙하기만 했다면, 아마도 중간중간 하품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책 속에 숨어있는 동양화들은 이제껏 제 머리속에 있던 <동양화=산수화>의 공식을 깨주는, 아주 신선한 그림들이었습니다. 밭일하는 여인네의 튼실한 종아리, 번뇌하는 중국 화가의 치열한 시선, 죽음의 과정을 미간이 찌푸려지도록 생생히 그려낸 일본화를 보며 '동양화는 따분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이라는 선입견은 하나하나 깨어졌습니다. 아니, 같은 그림이라도 그녀가 이야기 해주면 조금 달랐습니다. 지겹도록 봐온 김홍도의 씨름에서, 중앙의 두 씨름꾼이 아닌 왼쪽의 엿장수로 시선을 몇 센티미터 옮겼을 뿐인데...그림은 한결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신윤복의 연당야유도가 졸지에 성교육용 그림이 된 것에는 빙그레 웃음이 나왔구요. 평범하게 보이는 주막의 그림에서, 엄마를 조르는 아이와 그 행위 속의 배고픔을 읽어내는 작가...그것은 그녀가 어머니이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동양화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발견할 수 있는 책은 아닙니다. 그냥 아무 기대 없이 눈과 마음을 편안히 쉬게 하고 싶다면, 그런 분들께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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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키웨이 2004-05-11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양화라고 하면 무조건 화투부터 생각나는 무식한 여자...ㅠㅠ
아무 기대없이 눈과 마음을 편하게 쉬게 하고 싶으신 분께 권한다니 딱 제가 읽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