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김혜은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아, 개운하다. 만화책 아닌 그냥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키득거린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다. 호어스트와 함께 한 일주일, 월-화-수-목-금-토-일.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다>라는 모호한 공통분모 하에 묶인 이 이야기들은, 원래는 시기가 뒤섞인 제각각의 이야기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만큼 매끈하다.

호어스트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십년 전만해도 그에 대해 표현하자면 <백수>와 같은 부적절하고 품격 없는 말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한국에는 딱 호어스트를 위해 생성된 것 같은 고상하고 근사한 표현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귀차니스트>! 아, 왠만한 귀찬내공으로는 이 초절정 고수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그가 어느 정도의 고수냐고?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저승 문턱 너머까지 걷기가 귀찮아서 죽지도 못한 인간이다. 그래놓고 <절대절명의 순간 게으름이 내 목숨을 구했다>고, 적시에 구사하는 건강한 무기력은 황금이라고 떠벌이는 밉잖은 허풍꾼이다. 그리고 처리해야 할 일을 메모해서 붙이는 이외의 시간에 호어스트의 머리 속은 지치지도 않는 <쓸데없는 공상>으로 바삐 돌아간다. 그 공상 속에서 그는 브뢰첸(무슨, 빵이란다)과 부적절한 관계에 놓이기도 하고, <호어스트, 오늘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배> 결승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최근 <여자는성공남을좋아해>등의 강력한 신인을 영입해서 더욱 위협적인 <호어스트, 정신차려>팀과 <내일도 날>감독이 이끄는 만년 우승팀 <맥빠져>팀의 승부는 월드컵 결승전을 방불케 한다! 하긴, 이런 <쓸데없는 공상>들을 읽으며 전세계 많은 독자들이 배꼽을 잡고 있으니...이것은 이미 <쓸데가 아주 많은 유용한 공상>이 된 것인가?

사실, 월요일의 호어스트와 조우하며 배꼽을 잡은 이후 화요일과 수요일은 그닥 즐겁지만은 못했다. 호어스트의 활약은 계속되었지만, 이 수많은 에피소드를 꼭 외워서 써먹어줘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 <사오정 시리즈>나 <최불암 시리즈>를 능가하는 <호어스트 시리즈>를 구사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에 목이 뻣뻣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귀차니즘에 은근슬쩍 편입해서 그저 행간을 따르며 유유자적 낄낄거리기로 결정하고 나자 책읽기의 즐거움은 금방 배가되었다.

흐음...철학의 나라 독일에서 날아온 이 책을, 그냥 우습다고 날로 삼켜도 되는 것일까? 하는 고민도 잠시 있었다. 책 속에는 시간과 성취, 즉 일에 얽매여 삶을 누리지 못하고 삶에 지배당하고 있는 현대 사회인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녹아있는 것 아냐? 이런 걸 멋있는 말로 어떻게 정리할 수 있나....에이, 귀찮다, 그따위 <교훈>.^^ 조금만 더 고민하면 깨달아질지도 모르지만, 그 <교훈>보다는 호어스트와 함께 느긋하게 웃은 이 시간이 몇 배 더 가치있다.

오랜만에 얇고도 알찬 책을 만났다. 대개 이 정도 분량의 양장본을 읽고 나면 <이건 사기야, 함량 미달의 글을 책이랍시고 엮어 고가에 팔아넘기다니!>하고 투덜거리기 일쑤인데,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에는 그런 느낌이 없었다. 작은 사이즈, 얇은 두께... 볕 좋은 요즘, 어느 공원 벤치에 앉거나 풀밭에 자리를 펴고 누워 읽으면 딱 좋겠다.

참! 이 책을 읽으려고 하시는 분들께, 귀차니즘에 빠져 *가 붙어 있는 역자 주를 찾아보지 않고 건너 뛰는 우를 범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나 역시 특별히 찾아 읽지 않아도 되겠기에 모조리 건너 뛰었는데, 마지막에 주석이 모여있는 페이지를 살펴보니 상황이 이렇다.

노이쾰른 :  베를린의 한 지역. 소문보단 낫지만, 그래도 뭐랄까....

놀겐도르프 광장 : 아무도 이 곳에 대한 책을 쓰지 않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 우리 두 사람은 자주 혼동됨. 그 자가 그사이 몸이 좀 불었나?

미국 : 설명할 방법이 없음.

맙소사... 이 엉뚱한 주석들과 함께 했다면, 두 배는 더 웃을 수 있었을텐데!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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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04-15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이 오랜만에 흡족한 책을 만나는데 제가 방해 세력이 될뻔 했군요. ^^;;;; 일단 읽어보실만 하다고 했다는 점을 강조해야겠네요. 암튼...다행임다. 뭐, 사람마다 감상이 다른거야 어쩔 수 없다고 봅니다. ^^;;;

진/우맘 2004-04-15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책도 <인연>이 닿아야 하나 보지요. 시기상, 마냐님은 <내가 전부터 말했잖아>를 읽은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었잖아요. 저는, 오랜만에 가뿐하고 즐거운 책을 만났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