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모든 것은 마루벌의 좋은 그림책 18
브라이언 멜로니 글, 로버트 잉펜 그림, 이명희 옮김 / 마루벌 / 1999년 11월
평점 :
절판


<하하 아빠와 호호 엄마의...>를 읽다가, 생소한 그림책 제목을 하나 발견했다. '살아 있는 모든...것은?' 어떤 걸까 궁금해서 리뷰를 읽고, 나는 무릎을 내리쳤다. "이거야!"

작년 언제부터인가, 5살 딸아이에게 '죽음'은 심각한 고민거리가 된 듯 하다. 드라마 주인공이 피만 조금 흘려도 "저 사람 이제 죽어요?" 동생이 조금 생채기가 나도 "연우 이제 죽어요?" 그런 아이에게, 이 그림책은 좋은 선물이 될 듯 싶었다.

마침 도서관 서가에 책이 꽂혀 있기에 반갑게 집어들었다. 먼저 읽어보니, 우와...감탄이 절로 난다. 어떤 그림책은 그저 한 권의 책이 아니라 공들인 예술품, 그 자체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 책이 그랬다. 한 편의 영시를 읽는 듯 담담한 글과 차분한 사실화가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마음 속에서는 저절로 하나의 동영상이 펼쳐진다. 그런데, 넘어다 보던 친구가 말한다. "흠...좀 우울하다. 그지?" 글쎄... 아이들 그림책이 꼭 즐겁고 밝아야 한다는 편견은 버려야 겠지만, 그러게... 안 그래도 죽음을 막연히 두려운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아이에게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겠다. 그래서, 읽어 줄 때는 최대한 밝고 명랑하게, 즐거운 어투로 읽어줘야지...마음 먹었다. 

헌데 막상 펴 드니 그게 힘들었다. 아까 언급한대로 책 자체가 완결된 예술품으로서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다가, 나 역시 살아오면서 '죽음'에 대한 각인된 선입견이 있어서 일까? 처음엔 높던 목소리가 한 장 한 장 넘어가면서 차분해 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 아뿔싸! 딸아이는 "엄마, 나 이 책 안 읽고 싶어." 한다. 하필 그림도 나비의 잔해. 아이는 그림에서 막막한 슬픔을 느낀 것 같았다. "그래. 그럼, 우리 다음에 읽자.^^"  

알라딘에서 꼼꼼히 정보를 읽어보니, 대상 연령이 초등학교 1~2학년으로 되어 있다. 그 연령이 다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은 우리 아이에게는 너무 이르거나 반대로 너무 늦게 다가온 듯 하다. 죽음에 대한 선입견이 없는 나이(대략 세 살 가량이었던 듯.)에 읽었다면 별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미묘한 감정이 싹튼 지금은... 무리하기 보다는 일 이 년 후로 미루는 것이 더 좋겠다. 하지만, 아이가 읽다 관두었다고 해서 얻은 게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도리어 더 많은 것을 느낀 듯 하다. 그 짧은 순간, 아이의 흔들리는 눈빛에서 아주 성숙한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면...엄마의 과잉반응일까? 책을 덮게 만든 슬픔, 아이가 느낀 그 슬픔이 현실의 것이었다면 그것은 매우 큰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책 속이었기에, 아이는 그것을 상처 없이 '경험' 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겠지?

책을 다시 펼쳐본다. 어쩌면, 죽음에 상처 입은 어른에게서도 이 책은 눈물을 끌어낼 수 있을 것 같다. 한바탕 울고 나서 후련해지는 그런 감정... 그저 빌려 볼 게 아니라, 구입해서 책꽂이에 꽂아놓아야겠다. 언젠가 아이 스스로 찾아 들고 오게 될 날, 그리고 혹여 내가 필요할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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