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에서 시집간 누나 이야기를 해야겠다.
아마, 소개가 늦은 탓에 지금쯤 누나가 살짝 삐쳤는지도 모르겠다.(그럴리는 없겠지만 누나도 여자니깐..)
나에게는 누나가 딱 한명뿐이다. 그래서 누나에 대한 느낌은 각별하다.
누나가 있다는 그자체만으로도 나는 행복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생각된다.
누나는 우리집 장녀이면서 나보다 정확히 열한살이 많다.
그런이유로 아쉽게도 나는 어릴적 누나와 함께한 기억을 많이 갖고 있지 못하다.
내가 기억이란 것을 가질수 있었던 나이가 4 ~ 5살쯤이였던것 같은데 그때 누나는 벌서 중학생이 되어 읍소재지에서 자취생활을 했다고하니 같이 했던 기억이 별로 없는것도 당연한 듯 싶다.
그러나 옛추억을 하나씩 하나씩 들추어 보면 아예 없는것도 아니다.
어리적에 누나는 " 혜은이의 감수광"을 자주 들었었고 그 이후에 최진희의 노래-그대는 나의 인생-를 많이 들었던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나는 누나등에 줄곧 업혀 키워졌다고한다.
누나가 마을친구들과 저녁에 놀러라도 갈라치면 나는 어느새 눈치를 채고 울기 시작했고, 이윽고 아버지의 큰 고함소리에 누나는 하는 수 없이 나를 데리고 마실을 다녀야했다고 한다.
나는 아마 그때부터 누나를 좋아했나보다. 누나는 내가 귀찮았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인지 누나의 정서가 내게도 많이 묻어있는 것 같다.
누나는 시집가기전 대구에서 직장생활을 할때면 휴일날 고향집에 내려와 쫄면을 해주곤했었다.
여름까만 밤하늘 수많은 별들이 그대로 쏟아지듯, 별동별 떨어지는 마당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온가족이 들마루에 둘러앉아 먹었던 그 쫄면맛은 지금도 잊을수가 없다.
그리고 명절에는 누나덕에 우리집도, 아니 나에게도 명절분위기가 났었다. -참고로 아버지가 차남인 관계로 명절때도 친지가 별로 안왔었다. 큰집이 걸어서 5분도 안되는 같은 마을에 있는 이유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게 어릴적에는 무척이나 부러웠다. 친인척들이 북적이는 명절말이다.
명절때가 되면 누나는 어김없이 설빔이나 추석빔을 사왔었고 용돈을 주는것도 빼놓지 않았었다.
누나는 내가 까까머리 중학교때 지금의 매형을 만나 결혼을 했다.
누나가 시집가던 날 어머니 아버지 다음으로 우리집에서 내가 가장 서운해 했을것이다.
그서운함은 소설"메아리"에 나오는 돌이의 섭섭한 마음보다 더하면 더했지 싶다.
그때는 매형도 사실 좋게만 보이지는 않았었다. 그냥 누나를 빼앗아가는 도둑으로만 보였을 뿐이였다.
그러나 그때는 철없을 때고 어머니께 친아들3형제가 하는것보다 더 잘하시는 매형이 지금은 고마울뿐이다. 스피치가 너무 빨라서 가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때가 있지만 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