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이온 플럭스'를 봤다. 최근에 극장에 갈 여유가 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어둠의 경로(^^;)를 통해 관람을 했는데, '트레버 굿차일드' 가문의 두 형제가 그들이 개발한 백신으로 살아남은 5백여명이 생존하고 있는 도시인 '브레그나'를 4백년간 지배하기 위해 7세대에 걸쳐 자신들을 복제하며 삶을 지속시킨다는 설정을 보면서 영화속의 몇 가지 설정이 오버랩되어 글로 남길까 한다.
복제된 육체와 기억의 전수로 인간의 영생은 가능한 것일까? 이러한 설정을 극명하게 들어내는 것이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주지사가 열연한 '6번째 날(2000)'이다. 영화에서는 애완동물을 복제함에 있어서 기억을 되살려 애완동물의 영속을 제공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결국은 주인공인 '아담 깁슨' 자신까지도 복제하여 복제된 '나'를 만나게 되기까지 한다.
또 명작의 반열에 오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에서도 전뇌를 이용한 기억의 전송을 통해 인간의 육신에서 벗어나 기계속에 자리잡기까지 한다. 한발더 나아가 극장판의 경우 인간의 육신을 버린 마당에 물질에 의존할 이유가 없어져 기억으로 대변되는 정신만이 네트에 남게 된다는 극단으로 치달아버린다. 이러한 결론은 역시 애니메이션 '레인(Serial Experiments Lain 1998년 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약간의 미묘한 차이가 있으며 결말도 역시 조금씩 차이가 난다. '6번째 날'의 경우 기억은 학습되지 않고 육체와 마찬가지로 '복제'되며, 원본인 '나'와 복제본인 '나'에대한 자기 본질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공각기동대' 역시 기억은 '전뇌'속에 복제되며 '기억'으로 유지되는 '인간'과 '기억'을 저장하고 있는 기계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라는 발칙한 질문을 던지며, '기억' = '정신'이라는 전제가 성립하면 결국 인간의 본질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레인'의 경우도 같은 맥락의 질문을 던지는데, 두 애니메이션과 '6번째 날'의 차이점은 '기억'을 담고 있는 주체의 복제 여부이다. 애니메이션의 경우 '기억'의 복제는 '존재'의 유지 수단이라는 주제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복제에 대해 거부감'보다는 '육신을 버림에 대한 거부감'이 전반적인 흐름을 이끌고 있다. 하지만 '6번째 날'의 경우 복제를 통한 자아의 대량 생산에 대한 공포심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하겠다.
좀 다른 예를 든다면 영화 '아일랜드'의 경우 복제는 육체에 한정되고 복제된 장기를 통한 영생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으며, 이 영화의 쟁점은 복제된 인간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릴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다시 '이온 플럭스'로 돌아가보면 복제된 자신에게 자신의 기억을 '학습'시키므로써 자신의 본질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좀 더 고차원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론을 펼쳐내고 있다. 하지만 복제 이전의 기억이 마치 본능처럼 이어지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며 복제를 통해 본질성이 본능처럼 복제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가능성을 비치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정신을 추구하는 동양에 반하는 물질 추구의 서구적인 발상이 아닐가. 이전의 작품들이 그나마 인간의 본질성을 정신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나마 육체의 본능으로 전락시켜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닌가하여 씁쓸함만이 남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영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기억이나 본능만이 남은 인간에게 남은 존엄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런 인간이 지구상의 다른 생물들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역사를 이어가려는 것이야 말로 영혼을 버린 인간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기적인 욕심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