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무시한 불행은 오래 끌기 때문에 오히려 단조로운 것이다. 그런 나날들을 겪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페스트를 겪는 그 무시무시한 나날들이 끝없이 타오르는 잔혹하고 커다란 불길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발바닥 밑에 놓이는 모든 것을 짓이겨 버리는 끝날 줄 모르는 답보 상태 같아 보이는 것이었다.
아니다. 페스트는 그 병이 유행하던 초기에 의사 리유를 성가시게 따라다녔던, 그처럼 사람을 흥분시키는 굉장한 이미지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페스트는 무엇보다도 용의주도하고 빈틈없으며 그 기능이 순조로운 하나의 행정사무였다. - P236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그들은 빈약한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페스트의 지배 속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도시에서는 이제는 아무도 거창한 감정을 품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은 단조로운 감정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끝날 때도 되었는데." 하고 시민들은 말하곤 했다. 왜냐하면 재앙이 계속되는 기간 중에 집단적인 고통이 끝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 P238

모두들 겸손해졌다. 처음으로 그들 생이별당한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헤어져 있는 사람 얘기도 하고, 제삼자 같은 말투를 쓰기도 하고, 자기들의 생이별 상태를 전염병의 통계 숫자와 똑같은 시각에서 검토해 보기도 했다. 그때까지는 자기들의 고통을 한사코 집단적인 불행과 떼어서 생각해 왔지만 이제는 두 문제를 섞어서 생각해도 좋다고 여기게 되었다. 기억도 희망도 없이, 그들은 현재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실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현재로 변해 버렸다. 페스트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의 능력을, 심지어 우정을 나눌 힘조차도 빼앗가 가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도 말해야겠다. 왜냐하면 연애를 하려면 어느 정도의 미래가 요구되는 법인데, 우리에게는 이미 현재의 순간 이외에는 남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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