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
한비 지음, 김원중 옮김 / 현암사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2008. 4. 7. ~ 2008. 5. 8. 

"상앙, 한비자"라 한다면 바로 떠오르는 단어는 "법가"이다. 그런데, "법가" 하면 바로 튀어 나오는 단어는 '진나라와 진시황'이다.

고등학교 졸업한지도 벌써 16년이 넘었는데도 당시에 열심히 외웠던 제자백가들은 아직도 머리 한 구석에 남아 있다. 유가, 묵가, 법가, 도가, 명가, 병가, 종횡가, 농가, 음양가, 잡가... 그저 시험문제용으로 암기하여 머리속에 꾸역꾸역 넣기 위해 이 순서 그대로 외웠던 것들이라 생각해보면 참 유치하다.

하지만, 당시 제자백가들의 특징 등을 별생각없이 달달달 외우면서도 유독 '법가'에 대해서는 궁금증이 많았다. 어쩌면 법가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되었을 때가 바로 법학이라는 학문과의 인연 시발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솔직히 <法家>라고 하길래 한비의 100년 후배인 키케로의 법사상과 유사한 철학적 사고가 있지 않을까 해서 나름 기대를 했으나, <한비자>를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실망감 그 자체였다.

법가를 받아들였던 진시황의 진나라가 왜 망할 수밖에 없었는지 아이러니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한비자>의 핵심은 <法>이 아니고, <군주>다.  <法家>보다는 차라리 <君主家>라고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즉, 성악설을 모티브로 해서 <모든 신하와 백성은 군주를 위해 존재하며, 법도 군주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군주는 법을 수단으로 하여 군주에게 위협이 될 것으로 추정되는 신하들은 모두 죽여서 후환을 없애야 한다>가 이 책의 일관된 논리다.

언뜻, 이 책의 논조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홉스의 경우 그가 주장한 법을 통한 권력국가의 궁극적인 목적은 시민의 보호이나,  한비가 법치를 주장하는 근본 목적은 오로지 군주의 권세를 위함인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한비 사상은 형식적으로만 법치주의일 뿐 홉스와는 그 목적자체가 완전히 다른 것 같다.

물론, 간혹 머리를 끄덕이게 하는 글들도 있긴 하지만, 주로 한비의 궤변이나 일반화의 오류가 더 많고, 이 책을 거의 한달동안 읽으면서 정말 한비는 왜 이런 황망한 사상을 가지게 된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에게는 인간에 대한 지독한 불신 또는 저주가 밑바닥에 깔려 있는 듯 보였다.

단지 그러한 사상적 배경이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스러운 환경이다 라는 단순한 설명은 별로 설득력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한비의 스승이 순자라고 하는데, 이 책을 읽어보면 과연 그럴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한비와 순자의 공통적 사상은 오로지 "성악설"밖에 없는데, 혹시 성악설 때문에 순자가 한비의 스승이라고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유가에서는 "禮가 무엇이냐"에 대한 철학이 있지만, 법가에서는 "法이 무엇이냐"에 대한 철학이 없이 "군주는 법을 수단으로 자신의 권세를 누려야 한다" 이런 식인데, 아무리 옛날 사상이라고는 하지만, <실용주의>를 표방한다는 법가는 동시대의 儒家와 비교해 보았을 때,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고 철학적 사고가 매우 빈약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이 책 한권으로 법가를 통달했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한비자에 써 있는 식으로 정치를 했다가는 나라 말아먹기 최고일 것이다. 그러니 진나라가 망하지 않았겠는가?

아무튼 "法家는 法學과는 별로 상관이 없고, 한비의 法治는 法治가 아니다"  이게 <한비자>를 읽고 내가 내린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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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本民法講義 - 제4판
송영곤 지음 / 유스티니아누스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내가 법대를 다니면서 읽은 민법교과서는 곽윤직 시리즈, 이은영 시리즈, 이영준 시리즈였고, 사법시험 수험생일 때는 <김형배 민법학강의>를 10회독 정도는 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법대교수들이 쓴 교과서에 관하여 참으로 아쉬운 점은 리딩케이스 외의 판례가 너무 적고, 자신의 학설에 대한 프라이드가 너무 강해서 반대설의 논리를 제대로 담지도 않고 어떤 책은 반대설을 악의적으로 폄하하기도 하여 학자로서의 인격이 의심되기도 했다.

사실 이 책은 교과서라고 할 수 없다. 저자의 연구성과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효율적이다. 권위있는 주요 민법교과서를 정리하여 주요 쟁점에 대해 나름 깊이 있게 분석하고 방대한 판례를 읽기 좋게 정리한 민법요약서는 아마 이 책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즉 이 책의 최대 장점은  소수설, 통설, 다수설, 유력설에 대한 정리가 효율적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내가 이 책을 산 이유는 법이론을 본격적으로 복습하기 위한 예비용도로 구매한 것인데, 다른 책에 비해서 학설정리에 매우 강점이 있다.

지금은 내가 수험생이 아니기 때문에 이 책을 수험용으로 읽는 것은 아니나, 송영곤 변호사는 정리하는 솜씨가 참 좋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많이 했다. 몇 년전만 해도 송영곤 변호사가 쓴 <민법의 쟁점>이라는 당시 수험가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책이 있었는데, 지금도 잘 팔리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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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
한비 지음, 김원중 옮김 / 현암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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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유가의 벽을 넘을 수 없는 법가의 한계를 아이러니하게 보여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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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권총론 - 개정판
김대정 지음 / 피데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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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매우 효율적인 교과서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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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튀데모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6
플라톤 지음, 김주일 옮김 / 이제이북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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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2008. 3. 26. ~ 20008. 4. 6.

고대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글귀에 큰 충격을 받았다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우리들의 가장 큰 오해는 뭐니 뭐니 해도 그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굳건히 믿는다는 것이 아닐까?

사실, 소크라테스가 서양철학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으며,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는데, 소크라테스가 남겼다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 때문에 이미 나의 마음속에서는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형식논리적이고, 말장난을 일삼는 소피스테스-여태까지 ‘소피스트’로 알고 있었으나, ‘소피스트’는 영어식 표기이며, ‘소피스테스’는 옛 그리스어 음사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우회적으로 알게 되었다-와 별다를 것이 없는 철학자’정도로 평가절하된 상태였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이러한 오해는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라는 책을 읽은 뒤에도 그다지 개선되지는 않았는데, 저자들의 전달력 부족과 논리의 오류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비록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해석될 만한 말은 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혹만 오히려 증폭될 뿐이었다.

그런데, ‘에우튀데모스’를 읽고서 소크라테스에 대한 나의 편견은 오해였음을 깨닫게 되었으니, 무지에 대한 충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에 소크라테스가 커다란 충격을 받은 이유를 어렴풋이 알 듯하다.

소크라테스는 에우튀데모스와 디오뉘소도로스 같은 소피스테스들의 논쟁술이 무익한 것임을 그의 아이러니한 행동과 대화로서 지적하고 있는데, 에우튀데모스와 디오뉘소도로스 같은 자들은 지금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는 점을 보면, 2400년전에 벌어졌던 대화임에도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소크라테스의 지적-지식이란 습득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습득된 지식을 옳게 사용하여야 참된 지식이다-은 아직도 유효한 것 같다. 이런 것을 두고 ‘溫故而知新’이라 하는가 보다.

소크라테스가 크리톤이 자식의 교육문제에 대하여 조언을 구할 때 ‘철학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쓸모 있든 쓸모 없든 상관하지 말게’라고 말한 대목이 있는데,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테스들을 공격하면서도 이들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소크라테스는 궤변론을 연구하여 상업화하는 소피스테스라 할지라도 참된 지혜를 연마할 수 있는 상대역으로서는 쓸모있는 존재라고 생각한 것 같다. 나의 해석이 맞는다면 소크라테스는 ‘학문의 자유’를 주장한 최초의 철학자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듯 싶다.

에우튀데모스와 디오뉘소도로스의 말도 안되는 궤변을 읽으면서 도대체 이해도 안가고 매우 짜증이 났지만(이로 인해 이 책을 3번이나 읽어야 했다),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현대판 에우튀데모스와 디오뉘소도로스에게 한 수 가르쳐 줄 현대판 소크라테스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닌지.

한편 나 자신도 에우튀데모스와 디오뉘소도로스처럼 내 상황에 따라 모순된 주장을 하지는 않는지, 어제 한 말과 오늘 한 말이 다른 적은 없는지, 지식도 없으면서 아는 척을 하지는 않는지, 논쟁을 통해 자가당착에 빠진 적은 없는지, 이 책을 통해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고전읽기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비교적 얄팍하고 그나마도 주석과 해설이 절반을 넘게 차지하는 책이지만, 번역작업에 얼마나 심오한 정성을 들였는지 느껴질 정도로 만족감이 매우 높았다. 일어판 또는 영어판을 중역한 것이 아니라 역자가 직접 연구하고 텍스트 자체를 완전히 소화한 상태에서 작업을 하여 마치 ‘번역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훈수하는 것 같았다.

나 자신 나름대로 꽤 많은 책을 읽어왔다고 자부하는 바이나, 이처럼 완벽에 가까운 인문학 번역서를 접해 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근래 들어 선택한 책 중에 단연 최고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체불명의 실용주의가 판을 치면서 이른바 ‘돈 되는 학문’에 밀려 그 존재마저 위태로운 인문학 초토화 위기의 시대에 남들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묵묵히 기초학문의 기반을 닦아 주시는 이 책의 역자와 같은 학자들에게 진심어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청소년을 위한 권장도서는 바로 이런 류의 책이지 제국주의와 엘리트주의를 세뇌시키는 로마인이야기 따위가 아닐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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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server 2008-05-16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서평 감사합니다. 잘 읽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