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리라이팅 클래식 4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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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행복 찾기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요즘 내 인생의 최대 화두다. 하지만 아직 답은 찾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살면서 점점 ‘행복하기’가 참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실제로 알랭드보통은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에서 행복하기 어려운 이유로 여러 가지를 제시하는데, 그 원인으로 그는 연약한 육체, 변덕스러운 연애, 불성실한 사회생활, 위태로운 우정, 무뎌진 습관 등등을 꼽고 있다. 그런데 알랭드보통이 제시한 불행의 원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대부분의 불행이 외부(타인)에서 비롯된다는 것. 실제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요소에 대해서 잘 한 번 생각해보자. 가깝게는 말 안 듣는 가족들, 마음 안 맞는 선후배, 배신하는 연인, 더 나아가선 무능하면서 탐욕스런 기업인, 툭하면 시위하는 노동자, 머릿속에는 비리밖에 없는 정치인, 신의 이름으로 모두를 욕하는 일부 광신도들까지. 결국 내 삶과 연결된 타인의 행동들이 결국 내 행복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왜 불행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할까? 성인이 된 개인은 자신만의 세상을 굳건하게 만들어 놓고 그 안의 법칙에 따라 살아간다. ‘철수의 세상’ ‘영희의 세상’. 한 번 자신만의 세상이 형성되면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문제는 각 개인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의 모습이 너무나 다양하다는 사실. 더 나아가 개인이 만들어놓은 다양한 세상은 사회 속에서 불가피하게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 때 각 세계가 드러내는 이질성의 차이만큼 현실 속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작게는 ‘자장면이 맛있네, 짬뽕이 맛있네’ 의 문제에서부터 크게는 ‘기독교가 최고네, 이슬람교가 최고네’ 의 문제까지. 이질적인 개인들의 세상이 사회 속에서 충돌하며 갈등을 일으키고, 우리의 행복에 균열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불행의 원인은 대충 알았다. 그렇다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불행의 원인은 알지만 원인에 대한 해답은 아직 모른다. 과연 행복하게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부터의 내용은 행복을 찾기 위한 내 여정의 기록이다. 물론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과정이다.

2.방법1-외부 환경 바꾸기
       우선 불행의 직접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는, 타인들의 행동을 조절하는 방법이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맺고 있는 타인과의 관계는 너무 방대하다. 나만해도 가족에 회사 사람들, 그리고 매일 운전하며 만나는 이름 모를 운전자들, 수위아저씨에 동네 상인까지.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벌어질 일의 경우의 수만 따져 봐도 2의 1000승은 족히 넘는다. 다시 말해 불행의 원인이 되는 외부 조건을 내 스스로 컨트롤하기엔 너무나 무리가 많이 따른 다는 것이다. 내 행복을 위해 상인의 바가지를 없앨 수도, 올림픽대로 운전자들의 운전태도를 교정할 수도, 더 나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대통령의 태도를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는 없다. 결국 외부 변인(타인의 행동) 조정으로 내 행복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3,방법2-초월하기와 귀의하기
       그렇다면 결국 행복을 위해선 내부 변인의 변화, 즉 ‘내 자신’ 의 변화가 필요하겠다. 그렇다면 어떤 인간이 돼야 할까. 우선 도인이 되려는 사람들이 있다. 일종의 초월주의자다. 이 세상의 짜증과 분노를 넘어서서, 어떠한 외부 요인에도 평정심을 유지하겠다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이 초야에 묻혀 살며 ‘남이사~’ 를 주창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관심이 없다. 하지만 이런 ‘남이사’ 파에도 문제는 있다. 이들에겐 히틀러의 파시즘도 아프리카 소년의 굶주림도 전부 남의 문제다. 즉, 이들은 행복하기 위해 초월이란 이름으로 외부의 갈등을 외면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으로 초월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두 번째로 행복을 위해 절대적인 진리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부류의 대다수는 새로운 진리 속에서 마음의 평정심을 되찾았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내게 자신의 진리에 동참해보지 않겠냐며 권유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바로 상충되는 진리 속에 사는 사람을 만났을 경우다. 물론 두 사람이 ‘너는 너고 나는 나니까’ 하며 각자의 진리 속에서 행복감을 느낀다면 상관이 없는데, 대부분의 경우 ‘내가 진짜 진리다’ 라며 다투게 된다. 더 나아가 진리가 규정한 다양한 ‘~하지 마라’ 로 인해, 현실 속에서 무수한 외부 요인들과 갈등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으로 진리에 귀의하는 방법도 제외.

4.방법3-장자의 가르침, 이해하기와 망각
       끝으로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이 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통해 내 안의 행복을 유지하는 것. 이 방법이 바로 최근에 내가 읽은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100퍼센트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방법들과는 달리 행복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준 것은 분명하다. 우선 장자는 불행을 가져다 줄 수도 있는 타인과의 관계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아니, 그는 우리 삶 속에서 삶의 차이와 타자성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말한다. “차이와 낯섦을 회피하면 우리는 결국 메추라기에 머물게 될 것이고, 차이와 낯섦에 끈덕지게 마주선다면 우리는 장자가 이야기했던 한 마리의 거대한 대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52) 결국 혼자 산 속에 들어가서 타인과 관계를 끊고 지내라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좋다. 그렇다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은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 걸까? 장자는 이 질문에도 답을 해준다. 바로 망각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사람들은 저마다의 세상을 구성해놓고 살아간다. 그런데 세상의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충돌이 발생한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장자는 우선 자신의 세상을 해체하라고 말한다. 내가 당연히 옳다고 생각했던 무수한 가치들을 깨트리라는 것이다. 장자에는 노나라 임금이 자신이 사랑하던 바닷새 한 마리를 궁궐에 가둬놓고 최고 음식과 연회를 베풀어준다는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새는 슬퍼하기만 할 뿐 음식 한 점 먹지 않고 결국 죽어버린다. 장자는 여기서 비유적으로 타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이야기한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나의 세상을 기준으로 타인을 대한다. 하지만 타인의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아무리 호의를 베풀어도 타인에겐 적의로 느껴질 수 있는 법이다. 때문에 내가 구성해놓은 세상을 리모델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질적인 공동체와 조우했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는 기존의 성심(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타자와 관계할 수 있고, 아니면 새로운 성심을 구성하려는 모험을 감행할 수도 있다.” (119) 장자는 우리에게 모험을 권유한다.


       결국 소통을 위해선 타인에 대한 이해가 핵심이다. 장자는 이를 위해 남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기 위해 부단히 수양해야 한다고 말한다. 상대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가능할 때까지 판단을 중지해야만 “타자에 부합되는 새로운 관점을 고안하고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자신을 터서 비워야만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타자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195) 장자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진정한 이해를 통해 타인과 자신을 연결했다면, 이제는 완전한 소통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개인의 삶을 억압하는 국가의 그림자를 치워내고 소통과 이해 속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개인적 행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행복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는 것, 그야 말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의 또 다른 방식인 셈이다.

5.장자의 가르침
       하늘이 아닌, 땅 위에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다는 점에서 장자는 내 행복 탐험기에 좋은 이정표이자 단서가 되어주었다. 물론 장자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곳이 내 행복의 도달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수한 경험과 고민 끝에 비로소 온전한 나만의 깨달음을 얻어야 진정 행복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매 순간의 일상을 낯섦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차이의 갈등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고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장자가 내게 가르쳐 준 깨우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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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발견 - 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고명섭 지음 / 그린비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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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쉽게 설명한다는 것은 능력이다. 설명한다는 행위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설명을 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갈등은 부정확한 설명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해내는 일은 훨씬 어려운 작업이다. 우선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내기 위해선 어려운 내용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필요하다. 어려운 내용을 일단 분해하여 나만의 쉬운 방식으로 재조합을 하기 위해선 완전한 이해가 필수불가결한 선결조건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용어도 그에 상응하는 쉬운 단어로 바꿔야 할 것이며 개념이 모호한 내용은 핵심을 뽑아 깔끔하게 정리해야 할 것이다. 가끔 어려운 기사나 해설서를 보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은 이해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기존의 텍스트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발생한 결과다. 결국 대상에 대한 완벽한 이해에서 명료함이 도출되는 것이다.


       고명섭 기자의 <지식의 발견>을 보며 명료하게 설명해내는 능력의 가치를 새삼 생각했다. 쉽지만은 않은 동서양의 철학과 정치/사회 사상 등을 고명섭은 상당히 쉽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 난해한 내용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기자 출신 필자들이 보여주는 쉽고 깔끔한 글쓰기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지식의 발견>은 고명섭 기자의 지식체험기다. 특정 주제를 정해놓고 저자는 그 주제에 대한 다양한 서적을 탐독하고 기록한다. 제목 그대로 그 과정에서 ‘발견’ 한 ‘지식’ 들을 풀어놓은 책이다. <지식의 발견>을 관통하는 커다란 줄기는 광의의 ‘근대성’ 이다. 근대성에는 민족주의와 이성, 서구주의, 민주주의 등이 모두 포함된다. 내가 해석한 저자의 화두는 ‘과연 근대성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이다. 그 근대성에 대한 저자의 고민은 서문에 김수영의 시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밭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고명섭 기자는 이 시를 통해 자기 민족의 역사에 대한 시인의 딜레마를 발견하고 있다. “제국주의의 압도적 시선 아래서 자기 역사를 부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 형편없는 역사를 통째로 긍정할 수도 없는 딜레마(7)” 근대성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 역시 김수영시인이 느낀 딜레마와 비슷했다. 근대성에 내재한 이성의 폭력이 분명 20세기의 비극을 가져왔지만, 그렇다고 근대성 자체를 부정하고 탈근대의 가치를 새롭게 부상시키는 것이 비극의 해결책인가에 대한 회의. 이러한 딜레마에서 고명섭 기자의 지적 탐구가 시작된다.


       탈근대주의자들에게 민족주의는 환상이자 억압적 이데올로기였다. 하지만 고명섭 기자는 민족주의에 대한 변호와 함께 책을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 민족주의는 “분명히 탈식민주의였고 탈냉전주의였으며, 평화주의였고, 진보적이었다. 반면에 그 이념과 운동을 압살한 국가주의는 일제 부역자들을 옹호하고 반공 이데올로기로 분단을 고착시킨 반민족주의”였다. 때문에 그는 주장한다. “민족주의의 억압적 폐해, 이른바 근대성의 억압적 성격을 과장해 철폐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것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는 짓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그가 민족주의에 내재한 근대성의 억압적 성격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그는 분명 서구에 기반을 둔 근대주의는 세계 역사에 비극을 가져왔다고 인정한다. 권용선의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을 통해 “무능력한 계몽(이성)을 반성하고 계몽(이성)을 계몽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고 말하며 김수용의 <괴퇴, 파우스트, 휴머니즘>을 통해 서구 근대성의 원류, 맹목적으로 추구되는 이성의 폭력성을 언급한다. 근대성의 폐해를 이야기하는데 니체가 빠질 리가 없으며, 권보드래의 <연애의 시대>를 통해 계보학적으로 근대성의 신화를 해체한다.


       그럼에도 고명섭은 근대성과 이성을 철저히 배제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엔 동의하지 않는다. 칼 포퍼나 하버마스의 주장처럼 근대성의 폐해를 가져 온 것도 이성이지만 이를 바로 잡는 것 역시 이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성의 폐해를 바로잡는 대안적 이성은 무엇인가? 내 독해가 맞다면, 고명섭 기자는 대안으로 ‘서구주의의 극복’ 을 내놓는다. 근대성에 내재한 문제점도 서구에서 전파됐으며, 우리가 이를 고스란히 수용하면서 근대성의 한계까지 한국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민족주의에 대한 옹호를 하면서, 그가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에 등장한 민족의 개념이 한국의 상황과 다름을 주장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저자가 근대성의 문제점을 지적한 내용에 이어 소개하는 책은 박노자의 <하얀 가면의 제국>과 김용옥의 <독기학설>이다. 모두 서구주의 극복을 고민한 저작들이다. 결국 저자는 근대성에 내재한 억압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근대성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억압성을 극복하려 않는다. 오히려 서구 근대성에 대한 반성을 통해 근대성의 재도약을 시도한다. 다양한 지식의 발견을 통해 고명섭 기자가 도달한 핵심이 아닐까 싶다.


       책 제목답게 <지식의 발견> 하나면 누구나 지식이 풍부해짐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하룻밤 시리즈’나 다양한 교양 시리즈가 유행하고 있는데, 난 <지식의 발견>이야말로 하룻밤에 교양인이 되고 싶어하는 현대인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적절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조금 아쉬웠던 점은 책에 대한 본인의 의견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 김명인의 <조연현, 비극적 세계관과 파시즘 사이>에 대해 고명섭 기자는 파시즘에 대한 비판적 해설을 달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같은 저자의 비판적 해설이 다른 책에서도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실제로 근대성이란 딜레마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그라면 충분히 비판적인 요소를 지적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참고로 이 글들은 인물과 사상에 연재한 글을 모은 것이다. 때문에 분량제한이란 제약에 부딪혔을 가능성이 높다. 내용 설명만으로도 분량이 부족했을 수도 있으니) 이 같은 옥의 티에도 불구하고 <지식의 발견>에 담겨있는 ‘알맹이를 깔끔하게 정리해낸 내용’과 (적절한 본문 인용) ‘깔끔한 문장’ 은 다시 봐도 놀랍다.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해 낸 고명섭 기자의 내공이 마냥 부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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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 - Inglourious Basterd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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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rth of New Genre?

이제 타란티노를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자. 더 이상 그의 영화를 기존의 장르형식으로 재단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액션이건 코미디건, 호러건 범죄물이건 타란티노의 손을 거친 장르는 타란티노 스타일로 재탄생된다. 그의 신작 <바스터즈;거친녀석들>은 타란티노식 장르 변환이 궁극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전쟁 영화는 장르적 관습이 공고한 영역이다. 여기에 전쟁 영화의 소재는 대부분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된다. 제작자의 활동범위는 현저히 제한된다. 때문에 많은 영화팬들은 타란티노식 장르 연금술이 이번에는 어떻게 작동될지 궁금해했다. 그리고 기대는 '설마'에서 '역시나'를 거쳐 '브라보'로 마무리됐다. 타란티노의 상상력은 사람들이 쌓아놓은 고정관념의 높은 장벽을 뛰어넘기에 충분했고, 그의 이야기 구성 능력은 3-4백년 된 만수산 드렁칡 뿌리를 깔끔하게 풀어낼 수 있을 정도로 정교했다. 자유분방한 예술가적 상상력은 이야기를 짜내는 솜씨 좋은 직물공의 기예와 맞물리면서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바스터즈;거친녀석들>가 만들어낸 타란티노 장르는 쾌감의 예술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Imagination; Pleasure of Art

MTV로 대변되는 현대 대중문화는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문화다. 이미지는 텍스트보다 훨씬 더 즉각적인 자극을 유발한다. 때문에 오늘날의 대중문화는 예전보다 더욱 단편적이고 강렬한 쾌감을 대중에게 선사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중문화 비판이 뒤따랐다. 의미는 사라지고 쾌감만 남아버린 대중문화는 저질문화라는 것이 요지였다. 하지만 영상 세대가 바라보는 시선은 기존의 대중문화 향유자와 방향 자체가 달랐다. 다시 말해 기존의 문화가 메시지와 의미에 중점을 두고 쾌감과 자극을 부차적인 요소로 바라봤다면, MTV문화는 쾌감 자체에 집중했다. 그들은 상상력을 통해 더 강력한 쾌감을 창조했고, 쾌감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물론 기존의 코드-섹스나 폭력같은-를 예측 가능한 상태로 이용한 경우는 이와 다르다. 이런 방식의 쾌감은 저급의 쾌감 창출이라 부를 수 있겠다) 쾌감의 예술이 탄생한 것이다.


타란티노의 상상력은 이미지의 쾌감을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그는 영화를 통해 심오한 이야기나 무거운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는 관객의 염통을 쥐락펴락 하며 긴장감을 높였다가 한 번의 임팩트로 관객들의 아드레날린 분비 수치를 극대화하고자 한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독일군 장교 한스와 프랑스인 농부가 긴 대화를 나누는 장면. 겉보기에는 평범한 대화 같지만 관객의 염통은 격렬하게 벌렁거리기 시작한다. 잔잔한 고요 속에 폭풍 전야의 긴장감이 맴돈다. 그 때 이어지는 단 한 번의 일격! 지하에 숨어 있는 유대인을 향해 독일군이 기관총을 난사하는 모습을 부감으로 잡는다. 마치 방광 속에 가득 찬 오줌이 단 한 순간에 뿜어져 나올 때 발생하는 원초적 쾌감이 느껴진다. 비슷한 장면 하나 더. 독일군 장교와 영국군 스파이가 술집에서 시답잖은 게임을 하며 대화를 나눈다. 대화는 꽤 길게 이어진다. 긴장감은 서서히 고조된다. 그리고 한 방의 총격전!. (이 장면은 매우 짧은 컷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10명 가까이가 칼로 찌르고 총을 쏘는 아수라장의 상황을 표현한 방식은 정말 예술이었다!) 잔잔하게 울리던 북소리가 단 한 순간에 격렬한 북 군무의 웅장한 소리로 확장되듯, 쾌감도 순간적으로 증폭된다. 타란티노의 상상력은 영상 이미지가 전달하는 쾌감을 자유자재로 조절했다. 이쯤 되면 영상의 쾌감이 제공하는 단순한 즐거움은 이제 예술 작품이 전해주던 숭고한 감동의 수준으로 격상된다.


Storytelling; Elaborate Structure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타란티노는 아폴론적 요소와 디오니소스적 요소를 조화롭게 사용하는 예술가다. 상상력, 자유분방함, 혼란, 무질서를 의미하는 디오니소스의 에너지가 이미지를 이용해 극한의 쾌감을 뿜어냈다면, 합리성, 엄격함, 정돈, 질서를 의미하는 아폴론의 에너지는 세밀하게 구성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펄프픽션>때부터 타란티노는 옴니버스 형식이 연상될 정도로 독립적인 사건들과 다양한 등장인물로 이야기를 끌어갔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역시 마찬가지다. 독일군 장교 한스 일당, 바스터즈 무리, 영국 스파이, 쇼사나와 그의 연인, 그리고 괴벨스에 히틀러까지, 챕터가 진행될수록 등장인물과 사건은 늘어가고 이야기는 점점 확장된다.


보통 이야기의 구성은 인과와 논리가 필수적이다. 급격한 비약이나 비논리적 전개는 관객들을 이야기에서 분리시킨다.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관객들에게 영화 속 이미지는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와 다를 바가 없다. 이야기와 관객이 분리되는 순간부터, 영화는 관객을 고문하기 시작하고, 이에 관객은 쌍욕으로 영화에 화답하게 된다. 때문에 타란티노의 영화처럼 등장인물과 사건이 많아지고 복잡해진다면, 자칫 관객들을 이야기의 안드로메다로 관광 보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말러의 복잡한 교향곡이 사람들에게 더 큰 감동을 선사하듯, 마에스트로 타란티노는 다양한 인물과 복잡한 사건을 정교한 이야기의 틀 속에 넣어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각각의 챕터는 독립적인 단편 영화로 봐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완결성을 지닌다. 또한 각각 분리된 챕터들은 전체적인 구조에서 유기적으로 엮여있다. 얼핏 보면 난장판 같지만, 이 모든게 엄격한 이야기꾼이 만든 정계한 설계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챕터5는 14구 멀티 탭에 어지럽게 꽂혀있는 전원 코드들을 코드 클립으로 깔끔하게 정리한 뒤에나 맛볼 수 있는 쾌감을 선사한다. 이미지가 즉각적인 쾌감을 불러왔다면, 이야기는 지적인 쾌감을 가져왔다.

Spirit of B-Movie

타란티노의 영화는 B급 영화의 감수성과 맞닿아있다. 애초 B급 영화라는 명칭은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조잡한 작품에 붙은 부정적 꼬리표였다. 하지만 B급 영화들은 오히려 저예산의 한계를 뚫기 위해 더 기발한 상상력을 동원했다. 제작자의 간섭이나 따라야 할 장르적 관습도 없었기에, 표현 영역도 훨씬 넓었다. 그들에게 영화는 무엇으로도 가득 채울 수 있는 하얀 도화지였다. 펜을 잡은 손은 도화지 위를 자유롭게 활보했다. B급 영화는 거침없이 당돌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타란티노의 상상력과 이야기 구성력은 활개를 폈다. 다시 말해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위대함은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던 사실을 무시할 수 있는 당돌함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를 보자. '모든 2차 대전 영화가 지켜왔던 금기 하나를 가볍게 무너뜨리는 대목에선, '콜럼버스의 달걀'이라는 찬탄을 보낼 수밖에 없다.' (백승찬 <경향신문> 기자)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구체적 시공간을 무대로 삼고도, '역사적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할 수 있는 대담한 상상력' (이동진, 영화평론가) 영상 쾌감의 극한을 보여준 그의 상상력과 이야기를 촘촘하게 짜내는 글쓰기 능력이 발휘될 수 있었던 데는 바로 타란티노의 B급 정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장르로서 타란티노는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타란티노 드라마(Tarantino Drama); (명사) <연영> 1)B급의 감수성을 바탕으로 장르적 관습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2)극한의 영상 쾌감과 탄탄한 이야기 구성을 유지하는 영화, 즉, A급과 B급의 경계에 자리 잡은 대중극. 이제 타란티노는 하나의 장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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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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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부조리(不條理)’ 란 단어가 있다. 주로 철학적 용어로 쓰이는 단어다. 일반인에게 친숙한 단어는 아니다. ‘조리에 맞지 않는’ 즉, ‘합리적으로,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정도로 간단하게 풀어쓸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부조리한 상황을 자주 접한다.(돈으로 법치를 흐리는 대표 기업의 이야기, 부유한 자식을 위장 취업 시키는 대선 후보의 이야기 등등.) 때문에 어른들은 부조리에 익숙하다. 가끔은 부조리와 조리(條理)의 경계가 흐려지기도 한다. 어느 지역에서는 넘쳐나는 음식 쓰레기에 몸부림칠 때, 또 다른 곳에서는 기아로 한 해 수천 명의 아이가 죽어가는 상황에 무덤덤해질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했던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는 기본적인 상식에서 출발하는 책이다. 아직 사회의 부조리를 모르는 아이의 눈으로 세계의 기아에 접근한다. ‘왜 부자나라의 남는 음식을 가난한 나라에게 제공하지 못하는가?’ ‘왜 힘 있는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의 내분을 막지 못하는 것일까?’ ‘왜 국제기구는 가난한 모든 나라를 충분히 돕지 못하는 것일까?’ ‘왜 기업들은 가난한 아이들의 생명보다 돈을 더 중시하는 것일까?’ ‘왜 부자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들이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일까?’ 사실 아프리카의 굶어 죽는 아이들의 모습은 퇴근길 집 앞의 가로등만큼이나 익숙한 정경이다. 익숙하기에 그들의 고통은 철저히 남의 일이다. 하지만 아이의 천진난만한 질문이 부조리를 보지 못하는 어른들의 무기력함을 흔들어 깨운다. 15,000km 밖에서 일어나는 아수라 지옥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만든다는 의미다.


현재 기아인구는 8억 3천명. 평균 700만 명의 아이들이 매년 비타민A 부족으로 실명한다. 어마어마한 수치가 숫자개념을 마비시킨다. 하지만 1984년 당시 농업생산량으로 120억 명의 인구에게 2,400-2,700 칼로리를 제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앙골라 아이들은 미국의 소 보다도 더 적은 양의 옥수수로 연명한다. 필리핀에서는 30만 명의 주민들이 스모키마운틴이라 불리는 쓰레기 산더미 주변에서 산다. 음식 쓰레기를 먹기 위해서다. 쓰레기를 먹는 빈민층은 쉽게 병에 걸린다. 그들이 낳은 아이들 역시 병에 걸린 채 태어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브라질 빈민층 마을에는 ‘이름도 없는 작은이들의 묘’ 가 있다. 나면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힌 아이들이다. 하지만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세계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 의 위력 때문이다. 기업은 때론 더 많은 이윤을 위해 곡물을 큰 저장고에 보관해놓고 풀지 않는다. 그 대가로 이들은 곡물가격 상승으로 인한 돈을 얻고, 구호단체들은 재정 부족으로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제공할 곡물을 충분히 사지 못한다. 선진국들도 아프리카 국가들의 가난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막기도 한다. 이들은 스스로 배를 채우는 국가보다는 자신들의 말에 고분고분한 가난뱅이 국가를 선호한다. 브루나키파소의 상카라가 실패했고, 칠레의 아옌데도 실패했다. 프랑스와 미국이라는 큰 산 앞에 막혀버린 것이다.


사실 굶는 아이들은 유럽에도 미국에도 있다. 한국에도 아직까지 방학 때면 급식을 먹지 못해 굶는 아이들이 많다. 하지만 시장에 지배당한 세상이 이들을 도울 방법은 많아 보이지 않는다. ‘자유로운 무역’ 이란 미명아래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굶는 아이들은 더 배를 곯게 된다. 장지그러는 자유로운 무역의 미명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라고 썼다. 시장의 완전한 자유는 억압과 착취와 죽음을 의미한다.’

도시 빈민으로 전락한 세네갈 사람들은 르라이으(Le Rail)라는 거주지에서 언제 쫓겨날까 매일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하지만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신자유주의의 망령을 생각할 때, 이들의 고민은 당분간 계속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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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화장품의 비밀 - 많이 바를수록 노화를 부르는
구희연.이은주 지음 / 거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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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직업에는 지켜야할 직업윤리가 있다. 언론인은 반드시 사실을 보도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고, 법조인은 법을 공정히 집행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 의사들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통해 환자에 대한 자신들의 의무를 다짐하고, 군인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선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유지한다. 물론 현실에서 모든 직업윤리가 지켜지는 건 아니다. 과장과 왜곡을 일삼는 기자도 있고, 자본의 논리를 쫒아 법을 곡해하는 법조인도 있다. 또한 모든 군인과 의사들이 목숨을 바쳐, 각각 나라와 환자를 지키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직업윤리는 어둠 속 망망대해 위의 작은 등대 같은 존재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직업윤리는 각 직업 종사자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고, 때로 그 방향과 정반대로 나아가는 사람에게 비판의 화살을 날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시대의 핵심주역인 상인의 직업윤리는 무엇일까? 영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화가, 예술비평가이자 사회개혁가인 존 러스킨은 불후의 저작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에서 상인의 윤리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상인은 자기가 파는 물건의 품질과 그것을 획득하거나 생산하는 수단을 철저히 이해하고, 물건을 완벽한 상태로 생산하거나 획득하여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 가장 싼 가격으로 분배하기 위해 모든 지혜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결국 양질의 상품을 가장 저렴하게 소비자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여기에 상인의 존재 이유가 있다. 때문에 러스킨은 폭리를 취하는 상인은 법률을 곡해하는 법조인이나 사실을 왜곡하는 언론인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사회의 상인들은 자신들의 윤리를 얼마나 잘 ‘인식’하고 있을까.(절대 ‘지키고 있을까’가 아니다.)

애석하게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상인들은 점점 더 복잡한 제품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첨단 마케팅 기법으로 제품의 강점만을 강조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인과 소비자가 얻는 정보의 양은 점점 차이가 난다. 수 만개가 넘는 복잡한 상품 앞에서 오늘날의 소비자는 눈 뜬 장님과 다름없으며, 그 앞에서 상인들은 마치 알아볼 수 없는 글씨로 처방전을 써주던 의사처럼 정체가 불분명한 제품을 자유자재로 판매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선 신뢰가 생명이다. 정보의 격차가 워낙 큰 상황에서 소비자가 생산자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게 된다. 의심을 해소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는 제품이 정말 도움이 되는지, 유기농 제품은 정말 유기농 재료로 만든 것인지, 소비자들은 일일이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선 소비자들이 생산자들을 마냥 믿고 제품을 구입하기엔, 상인들의 직업윤리를 의심케 하는 사건들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 얼마 전에도 <소비자고발>을 통해 고가의 기능성 과자에 대한 방송을 봤다. 기능성 과자엔 몸에 좋은 성분은 참새 눈물만큼 들어있었다. 하지만 과자 업체들은 그 성분의 효과를 강조하며 비싼 가격을 받아왔다. 기가 막혔다.

하지만 화장품 업체의 불편한 진실을 접하고 더 큰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전직 화장품 회사 직원 두 사람이 쓴 <대한민국 화장품의 비밀>을 읽고 과연 상인들에게 직업윤리란 존재할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책은 그동안 이야기로만 떠돌던 화장품과 제조업체의 문제점들을 전문적인 사실에 근거해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우선 화장품 가격이 책정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5만 원짜리 화장품의 제조 원가는 약 10,500원, 공급가는 19,500원이다. 이 중 원료는 3,000원, 오히려 용기나 라벨 가격은 원료 가격보다 비싼 4,300원이다. 연구 개발비도 전체 가격의 1.8% 수준인 900원이지만, 광고비와 기타 판촉 홍보비는 12,000원으로 전체 제조비용의 24%를 차지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목수가 500원에 나무를 사와서 의자를 만들고, 의자 홍보에 2,000원을 들인다는 말이다.

이쯤 되면 도대체 그놈의 홍보라는 것이 무엇인 데 그렇게 엄청난 비용을 들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간단하다. 화장품 회사들이 기적의 원료를 개발한 것처럼 떠드는 것들도 대부분 사실은 업계 사이에선 다 알고 있었던 그 나물의 그 밥인 원료들이다.(기존에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성분이 뜨면 새로 만든 성분일 거라 생각하겠지만, 기실 그 성분들은 이미 화장품 성분 사전에 거의 100% 다 나와 있는 것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 성분’의 정체는 대부분 화장품 원료 명단에서 오랜 기다림 끝에 발탁된 재료일 뿐이다.) 결국 원료 차이로는 승부를 낼 수 없다. 오히려 그 원료를 얼마나 대단하고 기발한 원료인 것처럼 보이게 하느냐에 따라 경쟁의 승부가 갈린다. 자연히 원료비나 연구 개발비보다 홍보 마케팅에 치중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심지어 같은 회사에서 고가 브랜드 A와 저가 브랜드 B를 갖고 있다고 한다면, 주요 성분은 같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가 저가의 구분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렇다. 브랜드다.

더 기가 막힌 사실은 제품의 실제 효능 여부다. 최근 줄기 세포 화장품 등 다양한 기능성 화장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광고만 보면 전부 임수정의 뽀얀 피부와 전인화의 젊은 피부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요즘은 화장품 기능이 워낙 다양해져, 마치 의약품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하지만 화장품 업체들이 기능성 화장품을 식약청에 등록하면서 하는 말을 한 번 들어보면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식약청에 화장품을 등록할 때는 줄기 세포 또는 그 배양액이 미미해 의약품 같은 효과는 낼 수 없으며, 그에 따라 부작용이 일어날 확률도 매우 적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돌아서서 소비자에게 광고를 할 때는 그 제품 하나면 주름이 쫙 펴질 듯한 각종 문구로 유혹한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기능이 없는 제품을 있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더 나쁜 건, 피부에 해로운 제품을 좋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다. 대부분의 화장품엔 피부에 해로운 방부제가 들어있으며, 눈가 주름을 없애준다는 아이크림은 눈가에 과도한 영양을 공급해 오히려 눈가 주름을 더 빨리 생기게 한다. 립스틱과 색조화장은 말할 필요도 없다. 화장품에 들어가는 타르 색소 90종 중 79종은 식품첨가물로 금지된 것들로 대부분 암이나 간장 부종을 유발한다. 책의 결론은 간단하다. 우리의 피부는 노화할 수밖에 없다. 의학으로 피부의 젊음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는 있다. 하지만 화장품은 결코 의약품이 아닌, 그저 화장품일 뿐이다. 때문에 화장품이 당신의 피부를 한 순간에 임수정의 피부로 바꿔줄 것 같은 착각은 버려야 한다. 더 나아가 오히려 과도한 화장품은 노화를 촉진한다. 클렌징-화장수-크림-자외선 차단제 정도의 기본 화장품만으로도 충분하다. 제품 판매를 위해 화장품 회사가 만들어놓은 논리에 절대 빠져들어선 안 된다.

다행이 얼마 전부터 화장품의 모든 성분을 공개해야 하는 전성분 표시제가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성분의 이름은 복잡하기만 하다. 디부틸하드록시톨루엔, 부틸하이드록시아니솔, 소르빈산...등등. 때문에 성분만 보고는 화장품의 유해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결국 소비자가 공부해야만 한다. 소비자의 노력으로 생산자와의 정보 격차를 줄여야 한다. 생산자의 도덕에 모든 것을 맡기기엔, 이미 자본주의의 핵심인 신뢰가 깨진지 오래다. 깨진 신뢰는 자본주의 사회의 토대를 뒤흔든다. 결국 자본주의를 진정 좀먹는 벌레는 규제와 관리가 아닌, 상인들의 부도덕이다. 물론 모든 직업이 윤리대로 깨끗하게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인의 영역에서처럼, 일정부분의 과장과 누락이 공공연하게 허용되는 직업은 없다. 사실 의사가 환자의 생명을 신경 쓰는 것만큼이나 상인은 제품의 생명에 신경을 써야함에도 말이다. 모공 관리 화장품은 알코올 함량이 높아 피부를 부어오르게 만들어, 일시적으로 모공의 크기를 줄여주지만, 모공 자체의 크기를 줄여주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모공 관리 화장품을 팔며, ‘이건 모공을 줄여줍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 지역 땅값 금방 오른다'며 투자자 모아놓고, 황무지 팔아버리는 사기꾼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행위다. 부디 모든 소비자들이 아보벤젠과 폴리에틸렌글리콜을 암기하며 화학자들이 되기 전에, 상인들의 분명한 직업윤리가 강조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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