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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빌려드립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하늘연못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 이게 네이버 국어사전이 정의하는' 환상'이다. 다시 말해, 세상에 잘 적응한 사람과 대화할 때 상대방이 '헛소리'로 분류하는 것들은 대체로 환상이라는 뜻이다. 가령 '팀장님 저 오늘 머리에 뿔이 나서 회사에 못 갈 거 같아요. 병원에 들러서 뽑고 가거나, 어려우면 유니콘처럼 날아다니면서 살게요'라고 했을 때 '그래 몸조리 잘하고, 혹시 유니콘이 될 거면 미리 전화를 주세요'라고 대답할 상사는 없고(상사란, 세상에 잘 적응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위 문장은 환상이다. 쏠모없는 생각.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라는 작가를 들어는 보셨는가. 나는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가 썼다는 <백년 동안의 고독>이란 책은 서점에서 몇번 들었다 놨다 한 적은 있다. 스테디셀러였기 때문인지, 항상 <까라마조프의 형제들>같이 진지한 수작들 근처에 있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때 봤었어야 하는데 시기를 놓친 고전들. 그 카테고리에 속하는 책인줄 알았다. 볼 생각도 안했다는 소리다. 그런데 이 <꿈을 빌려드립니다>는 왜 샀느냐. 바로 다음 문장 때문이다.
"사실 난 아주 순진한 독자이다.
왜냐하면 난 소설가들이란 그들이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프란츠 카프카가 '그레고리오는 어느날 아침 아주 커다란 벌레로 변하여 깨어났다'고 말했을 때, 난 그것이 어떤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항상 내 마음속에 남아서 날 괴롭혔던 궁금증은 그게 과연 어떤 부류의 동물이었을까 하는 것뿐이었다.
난 실제로 양탄자가 날아다니고 마법사에 의해 천재들이 유리병 안에 갇혀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이 그런 기적을 보지 못하는 것은 바로 잘못된 문학 선생들이 우리의 눈을 이성주의라는 어둠으로 가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
그러니까 이사람, 환상을 믿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책에는 단편 소설 몇 편과, 작가가 하고싶은 말을 그냥 끄적인 글 몇 편이 있다. 단편 소설에서는 이성주의에 의해 불행해진 인간들 (남자편, 여자편, 아이편... 패키지다.) 혹은 환상이 인생이고, 환상에 의해 인생이 결정된 인간들(꿈을 꿔주고 그걸 직업삼아 사는 여자, 세상에서 가장 잘 생긴 시체를 사랑하게 된 마을 사람들) 등이 나온다.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쓴 작가는 뻔뻔하게 이런다. 난 상상을 좋아하지만, 세상에 너무 신기한 게 많아서 현실 이상의 신기한 것을 생각해 낼 수 없다고. 그래서 본인이 쓰는 소설은 다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고. 참고로 <백년 동안의 고독>은 엉덩이에서 돼지꼬리가 자라는 이야기라고 한다. 또 참고로 작가는 왕년 기자였다. 사실을 말하는 직업!
얼마전 읽은 소설 <캐비닛>은 그랬다. 너무나 현실적인 묘사와 함께 환상적인 이야기를 지껄이는 바람에 몰입되어 읽었다가, 마지막에 주의사항이랍시고 "지금까지 한 말 모두 뻥이야" 식의 무책임한 말을 써 놓아서 김이 빠졌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환상을 참으로 진지하게 다룬다. 환상을 가지고 장난하지 않고, 나처럼 소설을, 픽션을, 거짓말을, 혹으 환상을 어느정도 믿는 사람들을 배신하지 않는다. (사실 캐비닛 뿐만 아니라 대부분 소설이나 영화가 뻥을 기반으로 해서 염장을 지르고 떠난다)그러고보니 캐비닛의 시작부분에 나오는 화산 터진 마을에 감옥이 높아서 살아남은 죄수 이야기도 실제로 있던 일이라고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언급한다. <캐비닛>도 다 뻥은 아닌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