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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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뿌리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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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나를 포함한 2007년 대한민국의 20대는 자신이 매우 특별하다고 느끼면서 자라왔다. 그게 문제다. 우리는 '꿈나무'라고 귀엽게 불리던 시절부터 항상 대단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아왔다. 누가 물으면 나의 꿈인지 엄마아빠의 지나가버린 꿈인지도 모르고 의사 판사 박사 등이 될 거라고 마구 읊어댔다. 엄마아빠는 그게 아이의 꿈인지 자신이 못이룬 꿈인지도 구별 못하고 인생의 모든 걸 걸고 아이를 지원했다. 그렇게 사회가 낭만적이고 순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란 아이들은 지금 <88만원 세대>라는 불쌍한 숫자로 정의되어 허우적되고 있다. 윗 세대는 X세대, Y세대 등 문화적인 명찰을 달고 20대를 졸업하기라도 했건만. 지금은 취업 시장의 상품이 되기 위해 자신을 갈고닦다가 좌절하고 또 좌절한다. 꿈은 개뿔.   

20대는 사회적으로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넘어가야만 하는 나이인 동시에, 생물학적으로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나이다. 김영하는 그런 부분에 주목을 했던 걸까. <퀴즈쇼> '작가의 말'에 이런 말이 있다. "이 소설을 쓰는 내내 이십대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가장 아름다운 자들이  가장 불행하다는 역설. 그들은 비극을 살면서도 희극인 줄 알고 희극을 연기하면서도 비극이라고 믿는다" 하두 평이 안 좋아서 안 읽으려고 했는데, 이 문장때문에 책을 들고 읽어버렸다. <퀴즈쇼>에 나오는 20대 삶은 대충 이렇다. 어려움 없이 자란 애가 세상에 처음 나와본다. 상처받고 사이버 세계로 은둔한다. 그러다 짝을 만나 설레게 사랑을 하게된다. 아무래도 현실 생활이 안되겠기에 본격적으로 나가서 다시 부딪혀 본다. 더 크게 상처받는다. 이 시대의 20대로서 우리를 정의한 이 책을 평가할 권리가 있다면, 전체적인 의도나 내용에 불만은 없는데 뭔가 디테일한 것들이 이전 작품들에 비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성의없게 쓰여진 것 같기도 하고. 집필 의도가 집필의 결과물보다 더 낫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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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으로 아는 것들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김혜은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우리 팀에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몇 있다. 그중 한 아이가 그랬다. "기안문에 줄 안 맞췄다고, 들여쓰기 3칸씩 안 했다고 기안문을 4번인가 고쳤다니까요. 그게 왜 중요해요." 저런, 저건 내가 일년 전에 했던 말 아닌가. 입사 초기 어느날 결재를 받으러 갔다가 들여쓰기가 일정치 않았다고 어느 팀장님께 붙들려 싫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뭐 저런 좀스러운 게 다있나 싶었고 이따위 무의미한 것에 집착하는 회사 내가 다니나 봐라 이를 갈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우습다. '그깟 줄 맞춤, 해주고 말지. 대신 일이 좀 늦어도 난 몰라' 이렇게 생각하고 무심히 돌아설 자신이 있다. 그러니까 나도 약간의 내공이 생긴 것이다.  

내공을 쌓는 데는 실전 경험이 필요하지만, '느낌으로 아는 것들' 바로 이런 책을 틈틈히 읽으면 도움이 된다. 가령 3칸 들여쓰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고생한 그 아이는 '느낌으로 아는 것들'의 이런 구절을 참고할 수 있겠다. 작가가 수학 따위 배워서 어디 쓰냐고 투덜거리는 애를 만나고 돌아와 하는 말이다.   

"물론 나도 그 나이 때, 특히 기하학을 배울 때는 이 무슨 쓸데없는 동물학대인가 싶어 억울하고 황당했다 ..... 그리고 지금껏 살면서 이 물건들이 필요했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그 옛날 학교에서 배운 기하학이, 그후 인생이 내게 요구한 것들, 즉 의미없는 일을 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며 또 견뎌내는 일을 그토록 완벽히 준비시키고 단련시키지 않았던들 내가 지금 어떤 모습일지 누가 알겠는가?"     

회사엔 어차피 의미없는 것으로 가득하다. 게다가 그 의미없는 것 때문에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당연히 이해가 안 갈 수밖에. 그럴 바에야 그냥 웃어주는 게 낫다. 웃음은 가장 평화롭고 부드러운 비난의 수단이라고 하니까. 사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호어스트 에버스를 닮은 사람들을 간간히 만날 수 있다. 상사가 말도 안되는 지시를 했을 때 기막혀하는 대신, '그냥 안하면 되지 뭐' 하고 "네~"라고 말하고 돌아서는 사람, 그리하여 그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인신공격이 섞인 질책이 돌아올 때도 낄낄 웃으면서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사람. 이 뻔뻔 스러움에 상사는 미쳐버리겠지만 본인은 행복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딱 느낌으로 모르겠는 것들은 일단 업신여겨주겠다는 작가의 기본 방침을, 스트레스로 인한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직장인이라면 인생에 적극 도입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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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꿈의 해석>이라는 책을 아실 것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대표 저서다. 나는 이 책을 까마득한 초딩 시절에 봤다. 읽었다는 건 아니고 그냥 봤다. 초딩답게 마루에서 뒹굴거리며 놀고 있는데, 응접세트 위에 이 책이 있었다. 프로이트가 뭐하는 양반인지 알 턱이 없던 시절인지라, 그저 "꿈해몽에 관한 책이로군" 하면서 어젯밤 꾸었던 꿈이나 찾아볼 요량으로 책을 펼쳤다. 인상깊게도 '꿈에 나온 뾰족한 것은 다 남자 성기'라고 집요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잠재기 (성에 대한 관심은 억제되고 또래집단을 통해 사회화를 진행하는.. 초딩 나이)'를 거치고 있던 내 눈에는 그게 좀 불합리해 보였다. 당시 궁금했던 건 "개가 나오면 정말 개꿈인가" 따위였고, 그래서 많이 읽지는 않고 덮었던 기억이 난다.  

대학교 때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실용적으로 만났다. "영상 커뮤니케이션 이론"이라는 수업에서 미디어 분석을 할 때였다. 우리 조는 "CF 분석"을 했는데, CF에 등장한 뾰족한 것들을 모두 집요하게 남자 성기로 몰아갔더니 좋은 점수를 받았다. 요즘 것으로 대입해 본다면, 이런 식이다. "빨간 모자를 보면 SK주유소가 생각납니다"라고 말하는 CF를 보세요. 늘씬한 빨간 모자 아가씨가 있는 주유소에 도착한 차들이 주유고 뚜껑을 발딱발딱 열어재끼죠. '발기'의 이미지로 소구하는 것입니다. CF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영리하게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웬만한 인간은 잠재의식 속에 억압된 성의식을 가지고 있다죠. 그걸 이용하는 것입니다. 발표를 마치자, 별 생각없이 등장한 촛대나 감자튀김 전봇대 같은 것들한테는 좀 미안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프로이트를 다시 생각하게 된 건 "김형경의 심리여행 에세이 - 사람풍경"을 보고 나서다. 외부를 여행하며 내부를 사유한다는 책의 컨셉이 매력적이어서 책을 구입해 읽었는데, 글쎄 결론적으로 나는 그저 그랬다. 작가가 하는 말에 공감이 전혀 안 갔던 것은 아니다. 질투 : 사랑받는 자로서의 자신감 없음, 투사 : 내면의 부정적인 면을 타인에게 옮겨 놓기 등 충실하면서도 독특한 정의는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상처를 뚫어지게 들여다보는 작가가 지나치게 자학적으로 보였다. 소매치기에게서 '시기심'을 진단해 내는 것에서는 개별적 인간에 대한 예의없음조차 읽혔다. 무엇보다도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라는 집요하게 일관된 결론이 불편했다. 어쨌든 엄마한테 좀 미안하지 않은가. 읽으실 수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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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빌려드립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하늘연못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 이게 네이버 국어사전이 정의하는' 환상'이다. 다시 말해, 세상에 잘 적응한 사람과 대화할 때 상대방이 '헛소리'로 분류하는 것들은 대체로 환상이라는 뜻이다. 가령 '팀장님 저 오늘 머리에 뿔이 나서 회사에 못 갈 거 같아요. 병원에 들러서 뽑고 가거나, 어려우면 유니콘처럼 날아다니면서 살게요'라고 했을 때 '그래 몸조리 잘하고, 혹시 유니콘이 될 거면 미리 전화를 주세요'라고 대답할 상사는 없고(상사란, 세상에 잘 적응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위 문장은 환상이다.  쏠모없는 생각.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라는 작가를 들어는 보셨는가. 나는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가 썼다는 <백년 동안의 고독>이란 책은 서점에서 몇번 들었다 놨다 한 적은 있다. 스테디셀러였기 때문인지, 항상 <까라마조프의 형제들>같이 진지한 수작들 근처에 있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때 봤었어야 하는데 시기를 놓친 고전들. 그 카테고리에 속하는 책인줄 알았다. 볼 생각도 안했다는 소리다. 그런데 이 <꿈을 빌려드립니다>는 왜 샀느냐. 바로 다음 문장 때문이다. 

"사실 난 아주 순진한 독자이다.
왜냐하면 난 소설가들이란 그들이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프란츠 카프카가 '그레고리오는 어느날 아침 아주 커다란 벌레로 변하여 깨어났다'고 말했을 때, 난 그것이 어떤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항상 내 마음속에 남아서 날 괴롭혔던 궁금증은 그게 과연 어떤 부류의 동물이었을까 하는 것뿐이었다.
난 실제로 양탄자가 날아다니고 마법사에 의해 천재들이 유리병 안에 갇혀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이 그런 기적을 보지 못하는  것은 바로 잘못된 문학 선생들이 우리의 눈을 이성주의라는 어둠으로 가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 
 

그러니까 이사람, 환상을 믿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책에는 단편 소설 몇 편과, 작가가 하고싶은 말을 그냥 끄적인 글 몇 편이 있다. 단편 소설에서는 이성주의에 의해 불행해진 인간들 (남자편, 여자편, 아이편... 패키지다.)  혹은 환상이 인생이고, 환상에 의해 인생이 결정된 인간들(꿈을 꿔주고 그걸 직업삼아 사는 여자, 세상에서 가장 잘 생긴 시체를 사랑하게 된 마을 사람들) 등이 나온다.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쓴 작가는 뻔뻔하게 이런다. 난 상상을 좋아하지만, 세상에 너무 신기한 게 많아서 현실 이상의 신기한 것을 생각해 낼 수 없다고. 그래서 본인이 쓰는 소설은 다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고. 참고로 <백년 동안의 고독>은 엉덩이에서 돼지꼬리가 자라는 이야기라고 한다. 또 참고로 작가는 왕년 기자였다. 사실을 말하는 직업!  

얼마전 읽은 소설 <캐비닛>은 그랬다. 너무나 현실적인 묘사와 함께 환상적인 이야기를 지껄이는 바람에 몰입되어 읽었다가, 마지막에 주의사항이랍시고 "지금까지 한 말 모두 뻥이야" 식의 무책임한 말을 써 놓아서 김이 빠졌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환상을 참으로 진지하게 다룬다. 환상을 가지고 장난하지 않고, 나처럼  소설을, 픽션을, 거짓말을, 혹으 환상을 어느정도 믿는 사람들을 배신하지 않는다. (사실 캐비닛 뿐만 아니라 대부분 소설이나 영화가 뻥을 기반으로 해서 염장을 지르고 떠난다)그러고보니 캐비닛의 시작부분에 나오는 화산 터진 마을에 감옥이 높아서 살아남은 죄수 이야기도 실제로 있던 일이라고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언급한다. <캐비닛>도 다 뻥은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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