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으로 아는 것들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김혜은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우리 팀에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몇 있다. 그중 한 아이가 그랬다. "기안문에 줄 안 맞췄다고, 들여쓰기 3칸씩 안 했다고 기안문을 4번인가 고쳤다니까요. 그게 왜 중요해요." 저런, 저건 내가 일년 전에 했던 말 아닌가. 입사 초기 어느날 결재를 받으러 갔다가 들여쓰기가 일정치 않았다고 어느 팀장님께 붙들려 싫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뭐 저런 좀스러운 게 다있나 싶었고 이따위 무의미한 것에 집착하는 회사 내가 다니나 봐라 이를 갈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우습다. '그깟 줄 맞춤, 해주고 말지. 대신 일이 좀 늦어도 난 몰라' 이렇게 생각하고 무심히 돌아설 자신이 있다. 그러니까 나도 약간의 내공이 생긴 것이다.  

내공을 쌓는 데는 실전 경험이 필요하지만, '느낌으로 아는 것들' 바로 이런 책을 틈틈히 읽으면 도움이 된다. 가령 3칸 들여쓰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고생한 그 아이는 '느낌으로 아는 것들'의 이런 구절을 참고할 수 있겠다. 작가가 수학 따위 배워서 어디 쓰냐고 투덜거리는 애를 만나고 돌아와 하는 말이다.   

"물론 나도 그 나이 때, 특히 기하학을 배울 때는 이 무슨 쓸데없는 동물학대인가 싶어 억울하고 황당했다 ..... 그리고 지금껏 살면서 이 물건들이 필요했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그 옛날 학교에서 배운 기하학이, 그후 인생이 내게 요구한 것들, 즉 의미없는 일을 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며 또 견뎌내는 일을 그토록 완벽히 준비시키고 단련시키지 않았던들 내가 지금 어떤 모습일지 누가 알겠는가?"     

회사엔 어차피 의미없는 것으로 가득하다. 게다가 그 의미없는 것 때문에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당연히 이해가 안 갈 수밖에. 그럴 바에야 그냥 웃어주는 게 낫다. 웃음은 가장 평화롭고 부드러운 비난의 수단이라고 하니까. 사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호어스트 에버스를 닮은 사람들을 간간히 만날 수 있다. 상사가 말도 안되는 지시를 했을 때 기막혀하는 대신, '그냥 안하면 되지 뭐' 하고 "네~"라고 말하고 돌아서는 사람, 그리하여 그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인신공격이 섞인 질책이 돌아올 때도 낄낄 웃으면서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사람. 이 뻔뻔 스러움에 상사는 미쳐버리겠지만 본인은 행복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딱 느낌으로 모르겠는 것들은 일단 업신여겨주겠다는 작가의 기본 방침을, 스트레스로 인한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직장인이라면 인생에 적극 도입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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