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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자연이, 자연의 법칙이 어둠속에 누워있었다. 신께서 말씀하셨다. ‘뉴턴이 있으라’ 그리고 모든 것은 빛이었다.”
나는 소설 <다빈치 코드>의 성공과 함께 유명해진 이 짧은 시구를 참 좋아한다. 성서의 숭고한 오프닝을 패러디한 유머감각이 좋다. 하지만 무엇보다 19세기를 관통하는 시대 흐름을 단 두 줄의 시구로 표현했다는 점이 더욱 좋다.
19세기, 뉴턴은 신과 같은 존재였다. 뉴턴이 누구던가? 만유인력을 발견하고 수많은 수학적, 과학적 법칙을 발견한 사람 아니던가? 19세기 뉴턴은 이성의 상징이자 정수였다. 뉴턴의 탄생을 빛의 탄생에 비유하는 포프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당시 유럽인들이 이성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 이성은 신의 말씀과 같았다. 그들은 이성을 당시 유럽에 산재해있는 모든 문제를 풀어줄 것 같은 신비의 해독약으로 생각했다. 이때부터 유럽에서는 이성예찬이 시작된다. 100년 가까이 이성은 신의 지위를 대체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두 번의 세계 대전 이후 이성은 서서히 약발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성은 사기였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해독약이 아니었다. 이성은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낳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은 이성의 빛으로 아프리카 인을 약탈하고 민족 간 전쟁을 일으켰다. 이성은 때때로 인종 차별을 정당화해주는 과학적 근거가 되었다. 유럽인은 이성의 이름으로 발생하는 온갖 비합리적 사건들을 목도해야 했다. 그리고 2차 대전, 히틀러의 대학살 이후 유럽인들은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성은 사기였어.’
2006년 한국. 1900년대 유럽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던 이성이 한국으로 건너왔다. 오늘날까지도 한국인들은 문제가 많은 것으로 밝혀진 이성의 약을 계속 복용하고 있다. 모두가 이성의 신봉자다. 문제가 있건 없건 상관없다. 한국인에게 이성은 일종의 신화이자 종교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속에 각인된 이성의 법칙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 여기에 한 여성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녀는 이성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녀의 이름은 고미숙. 무기는 두꺼운 책 하나. 그 책은 <나비와 전사>.
그녀는 이성이 시간, 성, 몸, 지식 등 다양한 분야에 미친 영향력을 분석한다. 그녀는 이성의 세례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옥죄고 있는지 이야기하며, 우발적으로 마주친 탈근대의 자유로움을 소개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녀가 정기적 건강검진을 부정하는 것 같고, 조혼을 예찬하며 더럽고 매너 없음을 강조하는 듯하다. 게으름을 권장하는 듯하고 국어와 국사를 비판하는 듯하다. 왜 그런 것일까? 왜 그녀의 주장이 방종과 더러움을 강조하는 듯 보일까? 답은 간단하다. 이성의 눈으로 이 책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여전히 대다수 독자들은 거미줄에 속박되어, 훨훨 날아가는 그녀의 주장을 바라보기 때문인 것이다.
시간을 예로 들어보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간은 시계를 통해 인식하는 단위에 불과하다. 10분은 20분 보다 짧을 뿐이며 1시간은 20분보다 길 뿐이다. 그저 기계적인 시간(Mechanical Time)만이 존재할 뿐이다. 시간은 그저 앞을 향해 나아가는 추상적 존재이다. 하지만 이성이 등장하기 전의 시간은 그런 규격화된 존재가 아니었다. 시간은 개인의 감정과 공간이 함께 연결된 거대한 네트워크였다. 생각해 보아라. 아름다운 연인과 함께 하는 10분과 노교수의 강의를 듣는 10분이 어떻게 같겠는가?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하는 그 10분을 어떻게 단순한 기계적 시간으로 환원할 수 있겠는가? 영화 <아비정전>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장국영이 장만옥에게 다가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랑 1분만 함께 있자.” 이후 장국영은 이러한 얘기를 한다. “내가 당신과 했던 1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우리 둘만의 시간이다. 당신과 나만이 공유하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렇게 얘기했다. 물론 극중 장국영은 장만옥을 꼬시기 위해 한 말이겠지만 그의 말에는 이성이 지배하기 이전의 시간관념, 즉 공간과 감정이 연결된 커다란 네트워크의 시간관념이 깔려있다. 장만옥을 향한 장국영의 사랑이란 감정과 시간이 합쳐지면서 그 시간은 1분이란 단위로 환원할 수 없는 심리적 시간(Psychological Time)을 만들어 냈다. 물론 기계적 시간으로 보자면 장국영과 장만옥이 함께 했던 시간은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소비한 1분과 다를 바 없다. 그 시간이 3시 23분이었건, 4시 9분이었건 간에.
이성은 비단 시간만을 축소시킨 것은 아니다. 인간의 몸도 좁은 공간에 넣어버렸다. 위생과 건강이란 이름으로. 자연을 대상화 시킨 도구적 이성은 이제 스스로도 대상화 시킨다. 이제 인간의 몸도 단순한 이성의 탐구 대상으로 전락했다. 인간은 이성의 법칙에 포섭된 것이다. 완벽한 이성의 법칙을 만들어낸 합리주의 신이 자신의 법칙에 지배를 받았듯이 말이다. 지식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지식이 아니다. 근대 계몽은 지식을 국수(國粹)의 위치에 가져다 놓았다. 이제 지식은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 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됐다. 모든 인간은 국가 발전을 위해서라도 공부를 해야 한다. 지식이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는 순간이다.
인간은 이성의 힘으로 더 긴 시간을, 더 수준 높은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성이 만들어준 인간의 풍요로운 삶은 시빌(Sibyl)의 삶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무녀 시빌은 그저 영원한 삶을 원했다. 그녀는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신의 말을 듣고 먼지 한 움큼을 집어 그만큼 자신을 오래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시빌은 영생에 가까운 삶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비극과 공포의 시작이었다. 젊음이 없는 무한한 삶은 고통 그 자체였던 것이다. 어떤 것도 스스로 창조해내지 못하는 무기력한 긴 인생. 이성에 지배받는 인간의 모습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신의 소원과 같은 이성의 힘으로 인간은 고통을 피하고 질병을 치료하게 되었고 긴 수명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그 대가로 인간들은 젊음의 에너지를 잃게 됐다. 질병을 치료하는 대신 몸과 자연이 일체가 되는 환희를 상실하였으며, 모든 곳을 빠르게 갈 수 있는 편리함을 얻은 대신, 여행자와 공간이 접속할 수 있는 ‘사이성’을 증발시켜 버렸다. 자연과 죽음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자연과 죽음을 삶의 밖으로 밀어내 버렸다. 이성이 인간의 삶을 무기력하게 늘려놓은 것이다. 동시에 작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도 경계할 부분이 있다. 바로 이성에 대한 부정의 반대급부로 반이성 자체를 신봉하는 일이다. 고미숙씨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속도가 빠름의 무제가 아닌 것처럼, 느림 역시 느리지 않다. 물론 속도를 거부하고 게으름을 찬양하는 것도 느림의 표상을 구성하는 요소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속도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직선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소극적인 거부일 수밖에 없다. 느림의 표상에서 진정 중요한 건 직선으로 환원되지 않는 변칙적 리듬, 다시 말해 엇박자를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속도의 반발이 속도의 반대급부인 느림의 찬양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니체는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의 두 신을 데리고 온다. 아폴로신과 디오니소스 신. 아폴로신은 이성, 질서, 낮, 합리성을 상징한다면 술의 신 디오니소스는 감성, 무질서, 밤, 비합리성을 상징한다. 니체는 이성을 신봉하던 유럽인들을 보며 디오니소스적 감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결코 아폴로 신을 버려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디오니소스적 측면만 담겨있는 인간을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야만인(Dionysian Barbarian)이라며 경계했다. 마찬가지이다. 자기 안에 있는 아폴로 신을 죽인다면 19세기 유럽인들이 디오니소스 신을 살해했을 때와 유사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디오니소스 축제 때 발생하던 비합리와 야만의 광기가 발생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이성의 신화를 깨는 것이다. 감성 및 비합리라는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고미숙의 싸움은 외로워 보인다. 아니, 외롭다기보다 그녀가 상대하는 신화가 워낙 막강하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연암이 썼던 나비의 방식과 푸코가 썼던 전사의 방식을 적절하게 섞어가며 고미숙은 이성의 신화에 적절한 딴죽을 건다. 그래서 독자들은 쉽게 그녀의 공격에 동참하게 되는 것 같다. 도그마를 깨는 일은 그 도그마가 무엇이던 간에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녀의 무기가 향하는 이성의 도그마 사냥에 동참을 원한다면 <나비와 전사>는 좋은 입문서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