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돌아왔다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이우일 그림 / 창비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은 이기적이다. 이 말은 인간이 악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가치중립적인 표현이다. 인간은 자기 중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세상의 중심에 자신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이기적이다. 이기적인 인간들은 자연히 살아가면서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이기적이다'란 명제가 진리라면 인간의 삶은 홉스의 표현대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약간의 분쟁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인간의 삶은 원활히 돌아간다. 무엇 때문일까? 난 구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이기적인 면을 가장 잘 이용한 시스템, 바로 자본주의다. 아담스미스 할아버지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자본주의의 동력은 인간의 이기심임이 자명하다.

 

현대 자본주의는 욕망을 만들어낸다. 생산이 아닌, 소비가 계급을 결정하는 오늘 날, 자본주의는 생존을 위해 인간의 이기심을 극대화 해야 했다. 인간들은 그 욕망으로 인해 서로 경쟁하고 짓밟는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모든 인간을 교환가치로 인식한다. 인간들은 자본주의 속에서 경쟁하고 짓밟히는 동시에 자신의 가치를 한 낱 물건의 수준으로 전락시켰다. 이기심을 통제해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해준 자본주의는 그렇게 다시 인간을 욕망의 덩어리로 바꿔버렸다.  결국 자본주의 구조는 인간의 이기심을 적절히 이용한 시스템이 아니었다. 그 안에서 인간들의 이기심을 극대화하여 인간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결국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을 세련된 박스 안에 담았을 뿐이다. 인간은 자본주의 안에서 더욱 교묘하고 세련되게 자신의 이기심을 추구한다. 여기에 어떤 연대는 없어 보인다.

 

이런 쓸데 없는 내용으로 책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도 김영하의 소설에는 자본주의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이기심과 추한 욕망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김영하는 냉소적으로, 아니 무덤덤하게 이를 드러내 보인다. 난 <오빠가 돌아왔다>에 실린 소설들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인간의 이기심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소설 마다 그 키워드가 적용되는 방식은 다르다 하더라도 말이다.

 

김영하 소설을 읽고 있으니 김훈이 생각났다. 김훈도 비슷하다. 김훈은 삶이 갖고 있는 무목적성을 자본주의 사회를 통해 종종 보여준다. 다만 김훈은 1인칭 시점을 이용해 한 개인이 차가운 삶의 원칙 아래 살아가고 있음을 깊이있게 보여준다면, 김영하는 3인칭 시점을 이용해 관계에서 오는 인간의 이기심을 무덤덤하게 보여준다. 다시 말해 김훈의 방점이 삶에 있다면 김영하는 인간, 관계에 있는 것이란 말이다.

 

단편 크리스마스 캐럴은 이런 모습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영수, 정식, 중권에게 진숙의 삶은 이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듯 하다. 그들에게 진숙은 욕망의 충족 대상에 다름 아니다. 진숙의 죽음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진숙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들에게 튀길 불똥이 두려울 뿐이다. 진숙과 그들에게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진숙이 독일에서 돌아와 영수에게 과거 영수가 보여준 행동을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그렇다. 진숙이 하는 이야기는 영수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추한 욕망 그 자체였다. 순간 영수는 진숙을 죽이고 싶어한다.

 

(영수는 그 순간 살의를 품었다. 그랬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걸어다니는 비디오테이프였다.  그 테이프 속에는 그의 추악한 과거의 악행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영수는 잔인하게 그녀를 죽이는 상상을 한다. 물론 실행하지는 않는다. 난 영수의 모습이 바로 인간의 모습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욕망을 알고 있는 상대방을 비디오로 생각하는, 그래서 언제든 원하면 파기하고 싶어하는, 그런 존재가 인간이란 의미다. (영수의 아내 숙경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남편이 살해 용의자란 사실을 알게 된 후 가장 먼저 자신이 살인자의 아내로 유명세를 탈 생각을 한다.)

 

보물선에는 자본주의 아래서 나타나는 인간의 이기심이 좀 더 잘 드러난다. 재만은 투기꾼이다. 편법을 이용하여 증권시세를 올리고 큰 수익을 올린 후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재만에게 대학 동창 형식이 나타난다. 하지만 재만에게 중요한 것은 수익일 뿐, 형식이 보여주는 열정은 중요치 않다. 오빠가 돌아왔다 역시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이기심을 보여준다. 가족 구성원에게 가족의 가치는 중요치 않다. 그저 개인에게 이득이 되면 좋을 뿐이다.

 

이번에 처음 김영하의 소설을 읽었다. 예전에 태어났더라면 김영하는 마당판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야기꾼이 되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정말 평범한 상황에서 극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자연히 독자들은 그의 소설에 쉽게 빠져든다. 정말 재밌다. 하지만 말초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것만도 아니다. 읽고 나면 가슴을 한 대 강하게 맞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사소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떠오른다. 위에서 언급했듯 난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적응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이기심이란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했다.

 

예전에 김영하가 쓴 <포스트잇>을 읽은 적이 있다. 거기서 김영하는 자신이 너무나 평범한 작가라고 이야기 했다. 자신의 무기는 평범함이라고 했다. 맞는 말 같다. 김영하는 평범하기에 모든 독자들이 수긍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한다. 그는 평범하기에 인간의 내면에 들어있는 어두움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범인들, 자기만 생각하고 어두운 욕망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지극히 소심한 그런 범인들 말이다. 그래서 더욱 쉽게 김영하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듯 하다. <오빠가 돌아왔다>는 내가 읽은 김영하의 첫 소설이다. 이는 앞으로 읽을 김영하의 소설이 많이 남아있음을 의미한다. 30권짜리 장편 무협지의 1권을 독파한 중학생처럼 설레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 듯하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10-02 1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의 7가지 상상력 프로젝트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철학은 사실 노동이 아니다. 철학이란 단어가 함유하고 있는 고리타분한 이미지를 벗긴다면 철학은 인간의 본능이자 놀이이다. 특별히 할 일이 없던 고대의 인간을 생각해보자. 그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비롯하여 다양한 경험을 한 인간이다. 어느날 문득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고찰을 시작한다. '삶을 지배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신일까? 아니면 원리가 없는 것일까?' '인간의 삶은 고통인가 아닌가?' '인간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등등. 삶에 대한 고찰이 죽음에까지 이르렀을 때, 그는 좀 더 고차원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우주의 원리는 무엇일까? 그는 이렇게 사유의 유희 차원에서 철학을 시작하게 됐다. 이것이 아마 철학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나도 애초에 사고를 유희라 생각했다. 고급스러운 정신 놀이. 아니 그다지 고급스럽지도 않다. 밖에서 고급이란 딱지를 붙여주었을 뿐, 곰곰히 생각하면 사유는 수많은 내 욕망 해소의 한 방법에 불과하다. 질문을 제기하고 나름대로 답변하고 스스로 답변에 만족스러워 하고. 정말 자연스러웠다. 난 고등학교 때부터 철학적 사유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난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옆 반의 놀면서 공부하는 놈 보다 좋은 성적을 얻지 못했다. 그 때 서서히 '노력=좋은결과'라는 공식은 초등학교 도덕책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애초에 타고난 능력이 있음을 깨닫고, 그 능력이 참 불공평하게 배분되어 있음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때 난 삶을 지배하는 특정한 정의 원칙은 없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힘든 고3시절에도 사유를 고통의 해소구로 이용했다. 시험스트레스를 받으며 공부하던 그 시절, 난 삶은 고통의 연속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때 우연히 카뮈의 <시시프스 신화>를 접하게 됐다. 그 책은 내가 개똥철학을 확립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삶의 행복을 만들어가는건 내 자유의지야!'

 

      이처럼 사유는 유희였고 자유로운 활동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와보니 달랐다. 사유는 중노동이었던 것이다. 책을 읽고 억지로 사유를 해야 했으며 리포트를 쓰기 위해 철학적 '지식'을 쥐어 짜내야만 했다. 어느 순간 철학은 내게 노동으로 다가왔고, 사유를 통해 얻은 지식은 내 노동의 산물이 되어버렸다. 그 때 부터 난 좀 심각한 인간이 되었다. 사소한 문제도 노동 차원의 사고를 하려 들었다. 실연을 당한 친구에게 내 노동의 산물인 니체의 '초인사상'을 들려주었고, 현대의 문제점을 세련되게 비판하기 위해 엘리엇의 '황무지'를 끄집어냈다. 내 사유는 기계적으로 이뤄졌다. 점점 내 지식은 박제화된 지식이 되어 버렸다. 엘리엇의 시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내가 엘리엇이 비판하는 현대인이 되버린 것이다. 사유/지식과 삶의 괴리, 이 시작점은 사유가 노동이 된 순간이었다.

 

      그래도  난 내 자신의 문제점을 안다. 적어도 소크라테스에겐 욕먹지 않을 상태란 의미다.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노동과 같은 사유를 통해서였을까?' 아니다. 미학자 진중권씨가 사유는 원래 놀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바로 그의 책,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을 통해. 진중권씨는 상상력을 이야기한다. 상상력은 정신의 놀이다. 동시에 상상력은 미학의 영역이며 진위와 선악의 피안에 존재한다. 어린아이가 철없이 노는 것처럼, 우리도 상상력을 이용해 사고하고 철학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때의 사고와 철학은 놀이의 한 방법이다. 사유를 노동으로 바꿔버린 근대이성주의자의 망령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택해야 하는 방법인 것이다.

 

      진중권씨는 과거 사람들이 보여줬던 다양한 상상력의 놀이를 보여준다. 우리는 그 놀이를 보며 함께 상상력의 놀이에 동참하게 된다. 독자들은 내용이 지겨우면 한 장(chapter)을 뛰어 넘을 수도 있다. 책을 뒤집어 보기도 하고 90도 각도로 뒤집어 볼 수도 있다. 책 자체가 하나의 장난감이다. 하지만 그 장남감 속에는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재미 뒤에 그 어떤 노동적 철학보다 예리한 메시지가 숨어있다. 아이들이 사물을 배우듯, 독자들은 놀다보면 자연스레 그 메시지를 얻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그는 우르주스 베얼리라는 독특한 작가를 소개하며 독자들에게 베얼리의 놀이에 동참하길 권유한다. 한 번 놀아보자. 베얼리는 우리네 엄마들이 늘 하듯이 미술 작품에 어질러진 물건들을 깨끗이 정리해 놓는다. 고흐가 그린 <아를의 참실>을 베얼리는 깨끗하게 정돈된 방으로 그려놓는다. 브뤼겔의 왁자지껄한 시장 그림도 썰렁한 공터로 바꿔놓는다. 미로가 그린 추상화도 모양별로 가지런히 정리하여 다시 그려놓았다. 독자들은 베얼리의 놀이를 지켜보다 보면 사람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질서와 엔트로피(무질서)의 형태가 있음을 알게 된다. (베얼리의 질서는 적어도 고흐의 그것도 달랐다.) 베얼리는 세상의 고정된 질서와 엔트로피가 없단 사실을 놀면서 우리에게 보여줬다.

 

      하나 더. 진중권은 책에서 만화경을 소개한다. 다양한 삽화를 통해 독자들은 여러 만화경을 보는 듯한 재밌는 체험을 하게 된다. 고대 아랍의 만화경부터 근대 유럽의 만화경까지. 만화경의 원리에 대한 설명을 듣고, 만화경이 드러내는 화려한 모습을 본다. 그 뿐이다. 그저 어렸을 때 갖고 놀던 조그만 만화경을 보듯이 책을 읽는다. 그 와중에 만화경이 갖고 있는 기묘한 특성이 드러난다.  진중권씨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해보겠다.

 

" 만화경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하나는 차가운 수학의 얼굴이다. 만화경은 철의 필연성을 따른다. 그 속의 문양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학적으로 증식돠고, 기하학적으로 산포된다. 만화경이 연출하는 아름다움은 이 수학적 대칭의 아름다움이다. 만화경이 가진 또 다른 면모는 포근한 동화의 얼굴이다. 만화경은 집시의 요술구슬이다.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로 데려간 구멍처럼 그것은 보는 이를 순식간에 환상의 세계로 빨아들인다. 엄격한 수학적 질서가 만들어내는 몽환적 효과, 이 패러독스가 바로 만화경의 매력이다."    

 

      우리의 사고는 만화경을 가지고 놀던 차원에서 우주적 원리를 고민하는 차원까지 확장된다. 근대 유럽을 휩쓸던 Deism. 신을 포함한 이 세상은 이성의 법칙 안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인다고 믿던 사람들.. 그렇기에 이들은 신도 이성적으로 접근하려 했다. 이것이 바로 Deism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세상. 그들에게 세상은 변덕스러운 신의 장난으로 돌아가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세상의 원리를 깨닫기는 불가능 했다. 하지만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신화의 세상은 낭만이 살아 숨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세계는 어디에 더 가까울까? 만화경의 원리를 통해 알 수 있듯, 두 세상은 배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만화경과 같다. 그 안에 자연과학의 법칙도 있고 제우스신과 헤라여신의 부부싸움도 존재한다. 만화경을 바라 보다 우주의 원리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놀다가 발견한 깨달음!

 

      진중권은 상상력을 통한 사유가 철저하게 이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무작정 노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란 의미다. 베얼리의 놀이와 만화경에서 알 수 있듯, 상상력 뒤에 숨어있는 이성도 발휘되어야 한다. "상상력 혁명은 논리적, 추론적, 선형적 사유를 배제하지 않는다. 외려 그것을 전제하고, 그 한계를 뛰어넘을 뿐이다. 그것은 합리성에 대한 무차별한 공격이 아니다. 합리성이 창의성을 억누르는 지점에서 행하는 즐거운 반역이다."

 

    이제 내게 필요한 건 유머다. 진지함을 걷어내야 한다. 부담없이 놀아야 한다. 그 와중에 상상력 혁명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고등학교 때는 고통 속에 자연스런 사유를 시작했다. 이제 놀면서 웃으면서 자연스런 사유를 시작할 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자연이, 자연의 법칙이 어둠속에 누워있었다. 신께서 말씀하셨다. ‘뉴턴이 있으라’ 그리고 모든 것은 빛이었다.”   


  나는 소설 <다빈치 코드>의 성공과 함께 유명해진 이 짧은 시구를 참 좋아한다. 성서의 숭고한 오프닝을 패러디한 유머감각이 좋다. 하지만 무엇보다 19세기를 관통하는 시대 흐름을 단 두 줄의 시구로 표현했다는 점이 더욱 좋다.  


  19세기, 뉴턴은 신과 같은 존재였다. 뉴턴이 누구던가? 만유인력을 발견하고 수많은 수학적, 과학적 법칙을 발견한 사람 아니던가? 19세기 뉴턴은 이성의 상징이자 정수였다. 뉴턴의 탄생을 빛의 탄생에 비유하는 포프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당시 유럽인들이 이성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 이성은 신의 말씀과 같았다. 그들은 이성을 당시 유럽에 산재해있는 모든 문제를 풀어줄 것 같은 신비의 해독약으로 생각했다. 이때부터 유럽에서는 이성예찬이 시작된다. 100년 가까이 이성은 신의 지위를 대체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두 번의 세계 대전 이후 이성은 서서히 약발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성은 사기였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해독약이 아니었다. 이성은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낳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은 이성의 빛으로 아프리카 인을 약탈하고 민족 간 전쟁을 일으켰다. 이성은 때때로 인종 차별을 정당화해주는 과학적 근거가 되었다. 유럽인은 이성의 이름으로 발생하는 온갖 비합리적 사건들을 목도해야 했다. 그리고 2차 대전, 히틀러의 대학살 이후 유럽인들은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성은 사기였어.’  


 2006년 한국. 1900년대 유럽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던 이성이 한국으로 건너왔다. 오늘날까지도 한국인들은 문제가 많은 것으로 밝혀진 이성의 약을 계속 복용하고 있다. 모두가 이성의 신봉자다. 문제가 있건 없건 상관없다. 한국인에게 이성은 일종의 신화이자 종교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속에 각인된 이성의 법칙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 여기에 한 여성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녀는 이성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녀의 이름은 고미숙. 무기는 두꺼운 책 하나. 그 책은 <나비와 전사>.  


 그녀는 이성이 시간, 성, 몸, 지식 등 다양한 분야에 미친 영향력을 분석한다. 그녀는 이성의 세례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옥죄고 있는지 이야기하며, 우발적으로 마주친 탈근대의 자유로움을 소개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녀가 정기적 건강검진을 부정하는 것 같고, 조혼을 예찬하며 더럽고 매너 없음을 강조하는 듯하다. 게으름을 권장하는 듯하고 국어와 국사를 비판하는 듯하다. 왜 그런 것일까? 왜 그녀의 주장이 방종과 더러움을 강조하는 듯 보일까? 답은 간단하다. 이성의 눈으로 이 책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여전히 대다수 독자들은 거미줄에 속박되어, 훨훨 날아가는 그녀의 주장을 바라보기 때문인 것이다.  


 시간을 예로 들어보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간은 시계를 통해 인식하는 단위에 불과하다. 10분은 20분 보다 짧을 뿐이며 1시간은 20분보다 길 뿐이다. 그저 기계적인 시간(Mechanical Time)만이 존재할 뿐이다. 시간은 그저 앞을 향해 나아가는 추상적 존재이다. 하지만 이성이 등장하기 전의 시간은 그런 규격화된 존재가 아니었다. 시간은 개인의 감정과 공간이 함께 연결된 거대한 네트워크였다. 생각해 보아라. 아름다운 연인과 함께 하는 10분과 노교수의 강의를 듣는 10분이 어떻게 같겠는가?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하는 그 10분을 어떻게 단순한 기계적 시간으로 환원할 수 있겠는가? 영화 <아비정전>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장국영이 장만옥에게 다가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랑 1분만 함께 있자.” 이후 장국영은 이러한 얘기를 한다. “내가 당신과 했던 1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우리 둘만의 시간이다. 당신과 나만이 공유하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렇게 얘기했다. 물론 극중 장국영은 장만옥을 꼬시기 위해 한 말이겠지만 그의 말에는 이성이 지배하기 이전의 시간관념, 즉 공간과 감정이 연결된 커다란 네트워크의 시간관념이 깔려있다. 장만옥을 향한 장국영의 사랑이란 감정과 시간이 합쳐지면서 그 시간은 1분이란 단위로 환원할 수 없는 심리적 시간(Psychological Time)을 만들어 냈다. 물론 기계적 시간으로 보자면 장국영과 장만옥이 함께 했던 시간은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소비한 1분과 다를 바 없다. 그 시간이 3시 23분이었건, 4시 9분이었건 간에.

 이성은 비단 시간만을 축소시킨 것은 아니다. 인간의 몸도 좁은 공간에 넣어버렸다. 위생과 건강이란 이름으로. 자연을 대상화 시킨 도구적 이성은 이제 스스로도 대상화 시킨다. 이제 인간의 몸도 단순한 이성의 탐구 대상으로 전락했다. 인간은 이성의 법칙에 포섭된 것이다. 완벽한 이성의 법칙을 만들어낸 합리주의 신이 자신의 법칙에 지배를 받았듯이 말이다. 지식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지식이 아니다. 근대 계몽은 지식을 국수(國粹)의 위치에 가져다 놓았다. 이제 지식은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 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됐다. 모든 인간은 국가 발전을 위해서라도 공부를 해야 한다. 지식이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는 순간이다.

 인간은 이성의 힘으로 더 긴 시간을, 더 수준 높은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성이 만들어준 인간의 풍요로운 삶은 시빌(Sibyl)의 삶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무녀 시빌은 그저 영원한 삶을 원했다. 그녀는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신의 말을 듣고 먼지 한 움큼을 집어 그만큼 자신을 오래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시빌은 영생에 가까운 삶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비극과 공포의 시작이었다. 젊음이 없는 무한한 삶은 고통 그 자체였던 것이다. 어떤 것도 스스로 창조해내지 못하는 무기력한 긴 인생. 이성에 지배받는 인간의 모습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신의 소원과 같은 이성의 힘으로 인간은 고통을 피하고 질병을 치료하게 되었고 긴 수명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그 대가로 인간들은 젊음의 에너지를 잃게 됐다. 질병을 치료하는 대신 몸과 자연이 일체가 되는 환희를 상실하였으며, 모든 곳을 빠르게 갈 수 있는 편리함을 얻은 대신, 여행자와 공간이 접속할 수 있는 ‘사이성’을 증발시켜 버렸다. 자연과 죽음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자연과 죽음을 삶의 밖으로 밀어내 버렸다. 이성이 인간의 삶을 무기력하게 늘려놓은 것이다. 동시에 작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도 경계할 부분이 있다. 바로 이성에 대한 부정의 반대급부로 반이성 자체를 신봉하는 일이다. 고미숙씨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속도가 빠름의 무제가 아닌 것처럼, 느림 역시 느리지 않다. 물론 속도를 거부하고 게으름을 찬양하는 것도 느림의 표상을 구성하는 요소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속도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직선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소극적인 거부일 수밖에 없다. 느림의 표상에서 진정 중요한 건 직선으로 환원되지 않는 변칙적 리듬, 다시 말해 엇박자를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속도의 반발이 속도의 반대급부인 느림의 찬양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니체는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의 두 신을 데리고 온다. 아폴로신과 디오니소스  신. 아폴로신은 이성, 질서, 낮, 합리성을 상징한다면 술의 신 디오니소스는 감성, 무질서, 밤, 비합리성을 상징한다. 니체는 이성을 신봉하던 유럽인들을 보며 디오니소스적 감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결코 아폴로 신을 버려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디오니소스적 측면만 담겨있는 인간을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야만인(Dionysian Barbarian)이라며 경계했다. 마찬가지이다. 자기 안에 있는 아폴로 신을 죽인다면 19세기 유럽인들이 디오니소스 신을 살해했을 때와 유사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디오니소스 축제 때 발생하던 비합리와 야만의 광기가 발생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이성의 신화를 깨는 것이다. 감성 및 비합리라는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고미숙의 싸움은 외로워 보인다. 아니, 외롭다기보다 그녀가 상대하는 신화가 워낙 막강하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연암이 썼던 나비의 방식과 푸코가 썼던 전사의 방식을 적절하게 섞어가며 고미숙은 이성의 신화에 적절한 딴죽을 건다. 그래서 독자들은 쉽게 그녀의 공격에 동참하게 되는 것 같다. 도그마를 깨는 일은 그 도그마가 무엇이던 간에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녀의 무기가 향하는 이성의 도그마 사냥에 동참을 원한다면 <나비와 전사>는 좋은 입문서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갈릴레오 총서 3
사이먼 싱 지음, 박병철 옮김 / 영림카디널 / 200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수학에 재미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동시에 수학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도 잘 몰랐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미분적분을 다 잊어먹은 지금, 더더욱 과거에 했던 고생을 아까워했다. 인문학을 전공했음에도 언제나 전형적인 레퍼토리로 수학을 비난했다. “이거 배워서 뭐에 써먹어?” 그러던 내가 얼마 전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만나게 됐다.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수학의 이면에 있는 엄청난 견고함과 신비함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수많은 학자들이 페르마의 정리라는 사소한 정리 증명을 위해 생을 바쳤다는 사실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수학은 매력적인 학문이었다. 실제로 나의 편견처럼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한다고 해서 돈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물론 증명에 성공한 학자는 볼프스켈 상을 받기에 경제적 이득도 있다.) 하지만 수학은 진리를 추구하려는 인간의 본성이 만들어낸 거대한 발광체였다. 빛을 보면 모여드는 나방 떼처럼 인간은 강력한 빛을 뿜어내는 수학에 몰려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수학의 강력한 불빛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수학은 완전함을 추구한다. 약간의 허술함도 용납하지 않는다. ‘1 + 1 = 2’라는 명백한 공식도 완벽한 증명을 거쳐야만 수학이 될 수 있다. ‘그럴 것 같다’는 문장은 수학에 존재할 수 없다. 자연히 끊임없이 완전함에 도달하고자 했던 인간에게 수학은 자신의 욕망을 투여할 수 있는 완벽한 대상이었다. 피타고라스 역시 ‘수학이란 모든 학문 분야 중에서 가장 철저하게 개인적 주관을 배척하는 학문’ 이라며 인간의 어설픈 분별력을 초월하여 절대의 진리를 찾는 방법으로 수학을 택했다. 학자들은 수학을 통해 무한함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수학에 전념하게 된다. 공리라는 의심할 수 없는 기반에서 시작하는 세계이기에 수학은 그 어떤 학문보다 완벽에 가깝다. 체계적인 인간의 이성이 마음껏 발휘될 수 있는 공간, 그곳이 바로 수학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수는 무한하다. 수학은 수를 다룬다는 점에서 인간을 끌어들인다. 인간은 형태를 알 수 없는 자연을 끊임없이 지배하려 했다. 그 첫 번째 단계로 등장한 것이 도구적 이성이었다. 인간은 도구적 이성을 통해 미지의 자연을 규정화했다. 이성이 자연을 규정하는 순간 자연은 인간에게 더 이상 미지의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에 지배받는 존재일 뿐이다. 인간이 수학에 몰두한 것도 같은 이치다. 수는 일종의 자연과 같은 존재다. 무한한 존재이면서 무수한 법칙을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파이’의 경우 소수점 이하 80억 자리까지 계산됐지만 완전한 크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수학은 수에 대한 법칙을 규정하고 발견하는 학문이다. 수학은 인간의 이성을 극대화하여 수를 인간이 만든 틀 안에 집어넣는다. 인간이 수를 규정화하는 순간 수는 수학의 대상물로 전락한다. 이성적으로 무언가를 정복하려는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충족시켜주는 학문이 수학이다. 학자들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빠져든 것도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는 과정을 보면 수학이 이성의 결정체임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헤겔이 말한 역사의 발전이 수학사에 나타난다는 점. 앤드류 와일즈가 결국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긴 했지만 결코 혼자의 작업이 아니었다. 오일러가 일단 수수께끼의 관문을 열었으며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도전한다. 이와 동시에 힐베르트가 완벽한 수학을 만들려 했으며 러셀은 수학의 토대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타니야마와 시무라는 전혀 다른 영역이던 타워방정식과 모듈방정식의 연결을 시도했다. 프레이는 타니야마-시무라 추론과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연결하여 타니야마-시무라 추론을 증명하면 자연히 페르마의 정리가 증명됨을 보인다. 이후 와일즈는 이들의 업적을 기반으로 갈루아의 군론과 콜리바긴-플라흐의 아이디어를 이용해 타니야마-시무라 추론을 증명하게 된다. 결승선은 와일즈가 통과했지만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증명 과정은 일종의 이어달리기였던 셈이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수학의 특성을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다. 수학의 문외한인 사람도 쉽게 수학의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수학은 완전함에 도달하려는 인간이 매혹될 수밖에 없던 공간이었다. 우리의 이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던 곳이었다. 논리를 훈련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학문이 수학인 것도 이 때문이다. 만약 내가 좀 더 일찍 이 책을 만났더라면 수학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달라졌을 것이다. 안타깝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수학에 대한 내 고정관념을 깰 수 있어서 다행이다. 수학을 싫어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수학이 이성의 놀이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leejaeyul 2010-01-22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4CT&FLT 증명 심사오류 내부감사 직무유기 방치
심사의견 전체 오류임을 입증하는 다음 두 가지를 조사하라.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공익법인인 대한수학회의 반례를 요구하는 방법도 있고, 수학 기초지식을 가진 제3자에게 감정 의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첫째, 다음 세 가지 공식들은 모든 피타고라스 수를 구할 수 있다.
X=(2AB)1/2+A, Y=(2AB)1/2+B, Z=(2AB)1/2+A+B
상기 공식은 c2=A=Z-Y, 2d2=B=Z-X 일 때 X=2cd+c2, Y=2cd+2d2, Z=2cd+c2+2d2 같이 된다.
위 공식은 c+d=r 일 때 X=r2-d2, Y=2rd, Z=r2+d2 같은 기존 공식이 된다.
둘째, [2{(n-1)/n}+……+2(2/n)+2(1/n)](자연수){(n-2)/n} 과 (자연수)/(무리수) 는 항상 무리수가 된다.
2006.3.3. 투고논문에 대한 2006.6.12. 심사의견이 전체적인 오류임을 지적하며 공익법인 내부감사를 의뢰하였으나 부당업무에 대한 감사도 아니하고 회신조차 아니 함에도 주무관청이 이를 방치하고 있다.
아펠과 하켄의 1976 년경 4색 구분 정리 증명은 1200시간 컴퓨터작업이 필요하고, 와일즈의 1997 년경 페르마 정리 증명은 200 쪽 방대한 분량으로서, 간단명료한 증명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우리의 간명하고 완벽한 4색 구분 정리 증명과 페르마 정리 증명을 부인하는 수학자는 국내외에 아무도 없다.
* * * 09.11.17. 감사원장 조치내용 * * *
“귀하께서는 감사원에 민원 (접수번호 제2009-08868, 08881, 08955호)를 제출하셨습니다. 검토결과, 위 민원은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조사할 사항으로 판단되어 교육과학기술부로 하여금 이를 조사 처리하고 그 결과를 귀하께 회신하도록 하였음을 알려 드립니다.”
* * * 06.6.12.이후 공익법인 부당업무 * * *
첫째, 논문심사의견 전체오류이며 편집장이 잘못된 주장만 반복하고 07.1.5.이후 회신도 없다.
둘째, 부당업무 고발에도 자체 내부 감사를 실행하지 아니 한 잘못을 하고 회신도 없다.
셋째, 주무관청의 성의를 가지고 답변하라는 요청도 무시하는 잘못을 하고 회신도 없다.
4색 구분 정리 증명과 페르마 정리 증명 요약
4색 구분 정리 증명
[1] 한 점에 접하는 모든 지역들은 3색으로 충분히 구분된다.
[증명] 한 점에 접하는 지역들 중에서 한 지역을 선택할 때, 이 선택된 지역에 접하는 주변의 모든 지역들은 2색으로 충분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2] 한 지역에 접하는 모든 지역들은 3색으로 충분히 구분된다.
[증명] 한 지역 내의 한 점과 주변 지역들의 경계선들이 한 지역의 경계선과 만나는 점들을 연결할 때, 이 지역들은 결국 한 점에 접하는 지역들과 마찬가지로서 3색으로 충분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3] 한 지역과 한 지역에 접하는 주변의 모든 지역들을 구분함에는 4색으로 충분하다. 여기에서, 한 지역은 모든 모양의 무수한 지역들을 포함할 수 있다.
[증명] 한 지역에 접하는 주변의 모든 지역들은 3색으로 충분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2 가지 방법의 페르마 정리 증명
Xn+Yn=Zn
A=Z-Y, B=Z-X
X=G(AB)1/n+A, Y=G(AB)1/n+B, Z=G(AB)1/n+A+B, X+Y-Z=G(AB)1/n
{G(AB)1/n+A}n+{G(AB)1/n+B}n={G(AB)1/n+A+B}n
n=1 일 때, G=0 이고, n=2 일 때, G=21/2>0 임.
X=(2AB)1/2+A, Y=(2AB)1/2+B, Z=(2AB)1/2+A+B
c2=A=Z-Y, 2d2=B=Z-X 일 때,
X=2cd+c2, Y=2cd+2d2 and Z=2cd+c2+2d2
c+d=e 일 때, X=e2-d2, Y=2ed, Z=e2+d2.
페르마정리 증명 제1방법
Xn+Yn=Zn
(Xn/2)2+(Yn/2)2=(Zn/2)2
a=Zn/2-Yn/2, b=Zn/2-Xn/2
{G(ab)1/2+a}2+{G(ab)1/2+b}2={G(ab)1/2+a+b}2
G=21/2>0
Xn/2=(2ab)1/2+a, Yn/2=(2ab)1/2+b, Zn/2=(2ab)1/2+a+b
Xn={(2ab)1/2+a}2, Yn={(2ab)1/2+b}2, Zn={(2ab)1/2+a+b}2
홀수 n 에서 X, Y 와 Z 가 자연수일 때, 위식의 Xn, Yn 과 Zn 는 자연수이지만, 우변의 {(2ab)1/2+a}2, {(2ab)1/2+b}2, {(2ab)1/2+a+b}2 은 자연수가 될 수 없는 모순이 발생함으로 X, Y 와 Z 는 자연수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짝수 n 에서는 위와 같은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한편, 짝수 n 에서는 모든 피타고라스 수가 거듭제곱이 될 수 없음으로 자연수 해를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페르마정리 증명 제2방법
{G(AB)1/n+A}n+{G(AB)1/n+B}n={G(AB)1/n+A+B}n
위 식에서 A=B 일 때, G=[{2(n-2)/n+…+21/n+1}n{2A(n-2)}]1/n 을 구할 수가 있고,
상기의 식들을 이용하여, 모든 자연수 A, B에서
G(AB)1/n 이 절대로 자연수가 될 수 없음이 증명된다.
[증명인: 이재율과 이유진]
 
글쓰기의 최소원칙
도정일 외 지음 / 룩스문디(Lux Mundi) / 200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가 김훈은 <칼의 노래>의 첫 문장을 ‘꽃은 피었다’로 할지, ‘꽃이 피었다’로 할지를 놓고 이틀간 고민했다고 한다.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이죠. ‘꽃이 피었다’는 것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것이고, ‘꽃은 피었다’는 것은 꽃이 피었다는 물리적 사실에다 그것을 들여다보는 사람의 주관적 정서가 들어가 이는 것이죠. 그러니까 조사 한 마디에 따라서 세계가 달라져버리는 것이죠. 내가 쓰고자 했던 문장은 ‘꽃이 피었다’였어요. 내가 이걸 만약 ‘꽃은 피었다’라고 썼으면 나는 망하는 것이에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글쓰기의 오묘함에 탄복했다. 김훈은 계속 말한다. “가령 문체라고 할 때 문체의 체는 ‘이’냐 ‘은’이냐, 이 사이에서 대부분 결판나는 것입니다.” 김훈에게 조사의 사용은 미묘한 부분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그는 조사가 언어를 지배한다고 말한다. 글을 쓴다는 것도 조사 운용의 문제이다.


경희대 출판부에서 발행한 <글쓰기의 최소원칙>을 읽었다. 여러 필자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가고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사람은 역시 소설가 김훈이었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모든 사전은 동어 반복으로 이뤄져있다. ‘노랗다’를 사전에서는 ‘개나리꽃 빛이다’라고 정의해놓는다. 이는 완벽한 동어 반복이다. 동어를 반복하는 일은 하나마나한 일이다. 때문에 문학적인 글을 쓰는 일은 동어 반복의 지옥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더 나아가 단어의 개념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색깔이라는 것은 ‘노랗다’라는 추상의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무수한 사실의 변화 과정에서 존재한다. 무지개도 사실 일곱 색이 아닌, 수억 가지의 무한대 색깔로 구성되어 있다. “개념과 사실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뛰어넘고 동어반복의 지옥에 어떻게 떨어지지 않느냐 하는 것을 끝없이 고민하면서 한 자 한 자 쓸 수박에 없습니다. 이것이 문학적 글쓰기의 괴로움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 느낌을 받았다. 평소 아무 생각 없이 내지르는 단어의 나열 과정에 이렇게 깊은 숙고와 고민이 자리 잡고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일상적으로 하는 ‘걷기’에 내가 모르는 오묘함과 심오함이 깃들여 있다면, 그래서 누군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엄청난 고민 속에 떼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누구라도 예전처럼 걷기가 쉽지 않다. 마찬가지다. 김훈의 이야기를 듣고 문장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한 걸음 걷기도 어려워졌듯, 한 문장 추가하기가 쉽지 않았다.


고수의 칼부림을 보고 주저앉은 초보에게 또 다른 무림의 고수가 나타난다. 소설가 김영하다. 김영하는 등단 전, 제대로 소설 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특성이 김영하식 글쓰기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라고 설명한다. 자신은 글을 쓰며 이런 저런 지적을 받지 않았고, 때문에 겁 없이 즐겁게 글을 썼다고 한다. 그는 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며 절대 합평회를 시키지 않는다고 한다. 합평회를 통해 학생들의 글쓰기가 움츠러들면 어쩌나 하는 우려 때문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항상 말한다고 한다. “여기 있는 4년 동안 여러분들의 임무는 여러분 내면에 있는 ‘어린 예술가’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잘 보호해서 무사히 데리고 나가는 것이다. 글쓰기의 즐거움을 간직한 채로 학교를 졸업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걸음의 오묘함과 심오함을 느낄 필요는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고민하다보면 제대로 걷지 못하고 주저앉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신중하게 걷되, 즐겁게 걸어야만 더 많이 걸을 수 있다. 김영하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강조한다. 내 안에 있는 '어린 예술가‘는 절대로 바깥의 권위에 주눅 들어선 안 된다. 김영하의 말을 들으며, 옆에 있는 친구에게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듯 신나게 글을 써내려갔다. 김영하가 생각하는 글쓰기는 결국 즐거움이다.


김영하와 김훈이 들려준 이야기는 글쓰기의 커다란 두 축이다. 글쓰기의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 정확한 단어를 쓰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효율적이고 아름다운 글을 쓰기 위해 절차탁마하는 어려움도 감수해야 한다. 문단의 구성과 논리적인 엄정함을 고수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글쓰기는 즐거워야 한다. 글쓰기란 온갖 억압 속에서 갇힌 내면의 말들을 자유롭게 쏟아내는 행위다. 때문에 글을 쓰며 많은 사람들이 해방의 즐거움을 체험하게 된다. 글을 쓸 때의 희열, 그 순간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만 엄정하고 정확한 글도 쓰게 되는 것이다. ‘신중하게 쓰되, 그 순간을 즐겨라.’ <글쓰기의 최소원칙>을 읽고 깨달은 글쓰기의 최소원칙이다.


p.s<글쓰기의 최소원칙>은 경희대 교육대학원에서 강의한 내용을 모은 글이다. 글쓰기를 중심으로 다양한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강사의 글이 흥미로웠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설가 김훈, 김영하의 강의와 배병삼, 김수이 교수의 글은 두고 읽을 만큼 흥미로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