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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의 7가지 상상력 프로젝트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3월
평점 :
철학은 사실 노동이 아니다. 철학이란 단어가 함유하고 있는 고리타분한 이미지를 벗긴다면 철학은 인간의 본능이자 놀이이다. 특별히 할 일이 없던 고대의 인간을 생각해보자. 그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비롯하여 다양한 경험을 한 인간이다. 어느날 문득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고찰을 시작한다. '삶을 지배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신일까? 아니면 원리가 없는 것일까?' '인간의 삶은 고통인가 아닌가?' '인간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등등. 삶에 대한 고찰이 죽음에까지 이르렀을 때, 그는 좀 더 고차원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우주의 원리는 무엇일까? 그는 이렇게 사유의 유희 차원에서 철학을 시작하게 됐다. 이것이 아마 철학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나도 애초에 사고를 유희라 생각했다. 고급스러운 정신 놀이. 아니 그다지 고급스럽지도 않다. 밖에서 고급이란 딱지를 붙여주었을 뿐, 곰곰히 생각하면 사유는 수많은 내 욕망 해소의 한 방법에 불과하다. 질문을 제기하고 나름대로 답변하고 스스로 답변에 만족스러워 하고. 정말 자연스러웠다. 난 고등학교 때부터 철학적 사유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난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옆 반의 놀면서 공부하는 놈 보다 좋은 성적을 얻지 못했다. 그 때 서서히 '노력=좋은결과'라는 공식은 초등학교 도덕책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애초에 타고난 능력이 있음을 깨닫고, 그 능력이 참 불공평하게 배분되어 있음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때 난 삶을 지배하는 특정한 정의 원칙은 없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힘든 고3시절에도 사유를 고통의 해소구로 이용했다. 시험스트레스를 받으며 공부하던 그 시절, 난 삶은 고통의 연속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때 우연히 카뮈의 <시시프스 신화>를 접하게 됐다. 그 책은 내가 개똥철학을 확립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삶의 행복을 만들어가는건 내 자유의지야!'
이처럼 사유는 유희였고 자유로운 활동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와보니 달랐다. 사유는 중노동이었던 것이다. 책을 읽고 억지로 사유를 해야 했으며 리포트를 쓰기 위해 철학적 '지식'을 쥐어 짜내야만 했다. 어느 순간 철학은 내게 노동으로 다가왔고, 사유를 통해 얻은 지식은 내 노동의 산물이 되어버렸다. 그 때 부터 난 좀 심각한 인간이 되었다. 사소한 문제도 노동 차원의 사고를 하려 들었다. 실연을 당한 친구에게 내 노동의 산물인 니체의 '초인사상'을 들려주었고, 현대의 문제점을 세련되게 비판하기 위해 엘리엇의 '황무지'를 끄집어냈다. 내 사유는 기계적으로 이뤄졌다. 점점 내 지식은 박제화된 지식이 되어 버렸다. 엘리엇의 시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내가 엘리엇이 비판하는 현대인이 되버린 것이다. 사유/지식과 삶의 괴리, 이 시작점은 사유가 노동이 된 순간이었다.
그래도 난 내 자신의 문제점을 안다. 적어도 소크라테스에겐 욕먹지 않을 상태란 의미다.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노동과 같은 사유를 통해서였을까?' 아니다. 미학자 진중권씨가 사유는 원래 놀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바로 그의 책,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을 통해. 진중권씨는 상상력을 이야기한다. 상상력은 정신의 놀이다. 동시에 상상력은 미학의 영역이며 진위와 선악의 피안에 존재한다. 어린아이가 철없이 노는 것처럼, 우리도 상상력을 이용해 사고하고 철학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때의 사고와 철학은 놀이의 한 방법이다. 사유를 노동으로 바꿔버린 근대이성주의자의 망령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택해야 하는 방법인 것이다.
진중권씨는 과거 사람들이 보여줬던 다양한 상상력의 놀이를 보여준다. 우리는 그 놀이를 보며 함께 상상력의 놀이에 동참하게 된다. 독자들은 내용이 지겨우면 한 장(chapter)을 뛰어 넘을 수도 있다. 책을 뒤집어 보기도 하고 90도 각도로 뒤집어 볼 수도 있다. 책 자체가 하나의 장난감이다. 하지만 그 장남감 속에는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재미 뒤에 그 어떤 노동적 철학보다 예리한 메시지가 숨어있다. 아이들이 사물을 배우듯, 독자들은 놀다보면 자연스레 그 메시지를 얻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그는 우르주스 베얼리라는 독특한 작가를 소개하며 독자들에게 베얼리의 놀이에 동참하길 권유한다. 한 번 놀아보자. 베얼리는 우리네 엄마들이 늘 하듯이 미술 작품에 어질러진 물건들을 깨끗이 정리해 놓는다. 고흐가 그린 <아를의 참실>을 베얼리는 깨끗하게 정돈된 방으로 그려놓는다. 브뤼겔의 왁자지껄한 시장 그림도 썰렁한 공터로 바꿔놓는다. 미로가 그린 추상화도 모양별로 가지런히 정리하여 다시 그려놓았다. 독자들은 베얼리의 놀이를 지켜보다 보면 사람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질서와 엔트로피(무질서)의 형태가 있음을 알게 된다. (베얼리의 질서는 적어도 고흐의 그것도 달랐다.) 베얼리는 세상의 고정된 질서와 엔트로피가 없단 사실을 놀면서 우리에게 보여줬다.
하나 더. 진중권은 책에서 만화경을 소개한다. 다양한 삽화를 통해 독자들은 여러 만화경을 보는 듯한 재밌는 체험을 하게 된다. 고대 아랍의 만화경부터 근대 유럽의 만화경까지. 만화경의 원리에 대한 설명을 듣고, 만화경이 드러내는 화려한 모습을 본다. 그 뿐이다. 그저 어렸을 때 갖고 놀던 조그만 만화경을 보듯이 책을 읽는다. 그 와중에 만화경이 갖고 있는 기묘한 특성이 드러난다. 진중권씨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해보겠다.
" 만화경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하나는 차가운 수학의 얼굴이다. 만화경은 철의 필연성을 따른다. 그 속의 문양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학적으로 증식돠고, 기하학적으로 산포된다. 만화경이 연출하는 아름다움은 이 수학적 대칭의 아름다움이다. 만화경이 가진 또 다른 면모는 포근한 동화의 얼굴이다. 만화경은 집시의 요술구슬이다.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로 데려간 구멍처럼 그것은 보는 이를 순식간에 환상의 세계로 빨아들인다. 엄격한 수학적 질서가 만들어내는 몽환적 효과, 이 패러독스가 바로 만화경의 매력이다."
우리의 사고는 만화경을 가지고 놀던 차원에서 우주적 원리를 고민하는 차원까지 확장된다. 근대 유럽을 휩쓸던 Deism. 신을 포함한 이 세상은 이성의 법칙 안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인다고 믿던 사람들.. 그렇기에 이들은 신도 이성적으로 접근하려 했다. 이것이 바로 Deism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세상. 그들에게 세상은 변덕스러운 신의 장난으로 돌아가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세상의 원리를 깨닫기는 불가능 했다. 하지만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신화의 세상은 낭만이 살아 숨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세계는 어디에 더 가까울까? 만화경의 원리를 통해 알 수 있듯, 두 세상은 배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만화경과 같다. 그 안에 자연과학의 법칙도 있고 제우스신과 헤라여신의 부부싸움도 존재한다. 만화경을 바라 보다 우주의 원리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놀다가 발견한 깨달음!
진중권은 상상력을 통한 사유가 철저하게 이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무작정 노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란 의미다. 베얼리의 놀이와 만화경에서 알 수 있듯, 상상력 뒤에 숨어있는 이성도 발휘되어야 한다. "상상력 혁명은 논리적, 추론적, 선형적 사유를 배제하지 않는다. 외려 그것을 전제하고, 그 한계를 뛰어넘을 뿐이다. 그것은 합리성에 대한 무차별한 공격이 아니다. 합리성이 창의성을 억누르는 지점에서 행하는 즐거운 반역이다."
이제 내게 필요한 건 유머다. 진지함을 걷어내야 한다. 부담없이 놀아야 한다. 그 와중에 상상력 혁명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고등학교 때는 고통 속에 자연스런 사유를 시작했다. 이제 놀면서 웃으면서 자연스런 사유를 시작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