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최소원칙
도정일 외 지음 / 룩스문디(Lux Mundi)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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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훈은 <칼의 노래>의 첫 문장을 ‘꽃은 피었다’로 할지, ‘꽃이 피었다’로 할지를 놓고 이틀간 고민했다고 한다.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이죠. ‘꽃이 피었다’는 것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것이고, ‘꽃은 피었다’는 것은 꽃이 피었다는 물리적 사실에다 그것을 들여다보는 사람의 주관적 정서가 들어가 이는 것이죠. 그러니까 조사 한 마디에 따라서 세계가 달라져버리는 것이죠. 내가 쓰고자 했던 문장은 ‘꽃이 피었다’였어요. 내가 이걸 만약 ‘꽃은 피었다’라고 썼으면 나는 망하는 것이에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글쓰기의 오묘함에 탄복했다. 김훈은 계속 말한다. “가령 문체라고 할 때 문체의 체는 ‘이’냐 ‘은’이냐, 이 사이에서 대부분 결판나는 것입니다.” 김훈에게 조사의 사용은 미묘한 부분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그는 조사가 언어를 지배한다고 말한다. 글을 쓴다는 것도 조사 운용의 문제이다.


경희대 출판부에서 발행한 <글쓰기의 최소원칙>을 읽었다. 여러 필자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가고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사람은 역시 소설가 김훈이었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모든 사전은 동어 반복으로 이뤄져있다. ‘노랗다’를 사전에서는 ‘개나리꽃 빛이다’라고 정의해놓는다. 이는 완벽한 동어 반복이다. 동어를 반복하는 일은 하나마나한 일이다. 때문에 문학적인 글을 쓰는 일은 동어 반복의 지옥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더 나아가 단어의 개념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색깔이라는 것은 ‘노랗다’라는 추상의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무수한 사실의 변화 과정에서 존재한다. 무지개도 사실 일곱 색이 아닌, 수억 가지의 무한대 색깔로 구성되어 있다. “개념과 사실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뛰어넘고 동어반복의 지옥에 어떻게 떨어지지 않느냐 하는 것을 끝없이 고민하면서 한 자 한 자 쓸 수박에 없습니다. 이것이 문학적 글쓰기의 괴로움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 느낌을 받았다. 평소 아무 생각 없이 내지르는 단어의 나열 과정에 이렇게 깊은 숙고와 고민이 자리 잡고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일상적으로 하는 ‘걷기’에 내가 모르는 오묘함과 심오함이 깃들여 있다면, 그래서 누군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엄청난 고민 속에 떼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누구라도 예전처럼 걷기가 쉽지 않다. 마찬가지다. 김훈의 이야기를 듣고 문장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한 걸음 걷기도 어려워졌듯, 한 문장 추가하기가 쉽지 않았다.


고수의 칼부림을 보고 주저앉은 초보에게 또 다른 무림의 고수가 나타난다. 소설가 김영하다. 김영하는 등단 전, 제대로 소설 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특성이 김영하식 글쓰기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라고 설명한다. 자신은 글을 쓰며 이런 저런 지적을 받지 않았고, 때문에 겁 없이 즐겁게 글을 썼다고 한다. 그는 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며 절대 합평회를 시키지 않는다고 한다. 합평회를 통해 학생들의 글쓰기가 움츠러들면 어쩌나 하는 우려 때문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항상 말한다고 한다. “여기 있는 4년 동안 여러분들의 임무는 여러분 내면에 있는 ‘어린 예술가’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잘 보호해서 무사히 데리고 나가는 것이다. 글쓰기의 즐거움을 간직한 채로 학교를 졸업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걸음의 오묘함과 심오함을 느낄 필요는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고민하다보면 제대로 걷지 못하고 주저앉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신중하게 걷되, 즐겁게 걸어야만 더 많이 걸을 수 있다. 김영하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강조한다. 내 안에 있는 '어린 예술가‘는 절대로 바깥의 권위에 주눅 들어선 안 된다. 김영하의 말을 들으며, 옆에 있는 친구에게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듯 신나게 글을 써내려갔다. 김영하가 생각하는 글쓰기는 결국 즐거움이다.


김영하와 김훈이 들려준 이야기는 글쓰기의 커다란 두 축이다. 글쓰기의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 정확한 단어를 쓰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효율적이고 아름다운 글을 쓰기 위해 절차탁마하는 어려움도 감수해야 한다. 문단의 구성과 논리적인 엄정함을 고수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글쓰기는 즐거워야 한다. 글쓰기란 온갖 억압 속에서 갇힌 내면의 말들을 자유롭게 쏟아내는 행위다. 때문에 글을 쓰며 많은 사람들이 해방의 즐거움을 체험하게 된다. 글을 쓸 때의 희열, 그 순간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만 엄정하고 정확한 글도 쓰게 되는 것이다. ‘신중하게 쓰되, 그 순간을 즐겨라.’ <글쓰기의 최소원칙>을 읽고 깨달은 글쓰기의 최소원칙이다.


p.s<글쓰기의 최소원칙>은 경희대 교육대학원에서 강의한 내용을 모은 글이다. 글쓰기를 중심으로 다양한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강사의 글이 흥미로웠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설가 김훈, 김영하의 강의와 배병삼, 김수이 교수의 글은 두고 읽을 만큼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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