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남은 조선의 살인과 재판 - <심리록>으로 읽는 조선시대의 과학수사와 재판 이야기
이번영 지음 / 이른아침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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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그 유명한 '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말을 남겼던 사건이 있었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정할 수 없는 사회의 한단면을 보는 것만 같아 씁쓸했었다. 金錢萬能주의가 되어버린 지금은 정말이지 돈만 있으면 뭐든 다 할 수 있을것 같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런 세상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보면 살면서 돈으로 안되는 일도 많다. 돈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는 걸 금새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걸 생각해보게 되었다. 단순히 범죄를 저지르고 그들을 재판하는 과정만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닌 까닭이다. 길게는 15년을 끌기도 했던 하나의 사건을 대하는 정조의 마음자세가 경이로웠다. 후세에 그 이름이 빛나게 되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는 말이다. 백성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혹여라도 잘못된 판결로 억울한 일이 생겨날까 두번 세번 살펴보던 그 마음이 감동을 전해주기도 했다.

 

조선은 엄연한 법치국가였으며 형사사건에 따르는 일체의 수사와 소송이 법률에 근거해야 했다. 예를 들어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반드시 검시의 과정을 거쳐야 했고, 피해자 가족이나 친인척은 물론 모든 관계인들의 증언을 들어야 했다. 물증을 확보하는 것은 기본이고 범인 자신의 자백까지 받아야 했으며, 이런 모든 정황과 물증과 진술과 자백이 일치하지 않으면 소송은 마무리될 수 없었다. 게다가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기초 수사의 과정은 반드시 서로 다른 관리가 맡아서 2회 이상 실시하도록 했고, 이 이중의 수사 결과가 서로 일치되지 않거나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있을 경우 수사는 3회든 4회든 한정 없이 반복되었다. (- 책머리에 중에서)

 

위의 글만 보더라도 이 책이 무엇을 담고 싶어했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저렇게까지 엄중한 과정을 거쳤음에도 분명 억울함을 호소한 사건도 있었을 게다. 그러나 정조의 최종판결을 보면 놀라움과 함께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판례가 공정해야만 한다는 정조의 말은 깊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정조가 자신이 관여했던 모든 소송의 과정과 결과, 판단의 근거들을 일일이 기록에 남겨 나중에 형사소송 판례집으로 만든 책이 <심리록>이라고 한다. 그 책에 수록되어진 사건이라고 하지만 모두 중범죄만을 다루고 있어 그 무게감이 엄청나다. 시절이 바뀌었어도 사람사는 모양새는 그대로구나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중요시하는 자세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는 걸 새삼스럽게 알게 된다.

 

중국 원나라의 왕여가 송나라의 형사사건 지침서들을 바탕으로 편찬한 <무원록>이 정조때 편찬된 법의학서의 근간이 되었다고 한다. 세종대에 우리나라 실정에 맞지않는 내용을 빼고 조선의 사정을 반영하여 <신주무원록>을 펴냈다고 하니 과연 세종이군!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 최초의 통일법전인 <대전통편>은 정조대에 만들어졌다. 그 이전까지 명나라의 <대명률>과 함께 우리나라 법전의 양대산맥이었던 <경국대전>,<속대전>을 통합한 책이라 하지만 사문화된 조항을 폐기하고 새로운 조문을 추가하여 만든 책이라 하니 과연 조선을 '기록의 나라'라 할 만하지 않은가 말이다.

 

살인사건에 반드시 2회 이상 검시를 했고, 의사와 함께 반드시 전문가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정황과 물증, 증언과 자백이 모두 일치하지 않으면 함부로 형을 결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백하지 않아 15년동안이나 옥살이를 했던 죄인도 있었다!) 단순히 인력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는 말일터다. 이중수사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최첨단 수사기법을 동원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려 했던 관료들에 대해서 엄중한 처벌을 내렸다는 대목에서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책속에 펼쳐지는 사건을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볼 수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남녀간의 애정문제, 부부로써 지켜야 할 도리라거나 가족간의 불화, 시기와 질투, 부모와 자녀 혹은 형제지간의 여러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니 사건 하나하나를 가벼이 볼 수 없었다는 말이다.  기회가 된다면 정조의 <심리록>이나 정약용의 <흠흠심서>를 한번 읽어보고 싶다.  "無疑處起疑- 더는 의심할 것이 없다고 판단되는 상태에서도 다시 한 번 의심을 일으키라" 는 정조의 그말은 주는 여운이 무척이나 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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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이 품은 한국사 두 번째 이야기 지명이 품은 한국사 2
이은식 지음 / 타오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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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를 다니다보면 그 동네의 이름만으로도 그곳을 스쳐지났던 역사의 한줄기를 유추해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오래된 것일수록 그곳이 어떤 곳이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가끔 서울 시내를 지나치면서 세종로니 충정로니 퇴계로니 하는 거리의 이름을 볼 때 고개를 갸웃거릴 때가 있는데  그 地名과 역사속의 인물이 무슨 상관관계일까 싶은 까닭이다. 사찰을 다녀보면 일주문에 쓰인 'OO산OO사' 라는 현판이 붙은 걸 볼 수 있는데 가만히 살펴보면 지금의 이름보다는 옛날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경우도 많다. 옛날에는 地名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산이나 물을 소재로해서 만들었거나 지형의 특징이나 자연 자원을 소재로 하여 만든 이름도 있고, 신앙이나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아 만들었거나 교통을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말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동네이름중에서도 앞에서 열거한 이유를 근거로 만들어져 지금까지 이어져내려오는 것도 찾아보면 꽤나 많을 것이다. 더구나 한다하는 옛사람들은 사물이든 자연이든 제 흥에 겨워 이름붙이기를 좋아했다. 가까이에 있는 古宅을 찾아가보더라도 집안의 건물이 저마다의 이름을 갖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어디 그것뿐일까? 그 주변을 흐르는 물이나 바위에도 이름붙이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의미로 삼기도 했다. 그러니 동네이름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런데 내게는 지금의 地名보다는 옛地名이 훨씬 더 좋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생긴 그대로의 모습을 표현했다거나 느껴지는 혹은 보여지는 그대로의 이름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다. 장승이 서 있는 곳이라하여 장승백이라고 했는가하면 탑이 있다고해서 탑리, 미륵상이 있다고해서 미륵리, 지네를 닮았다고 하여 농다리라고 했다거나 공작새를 닮았다고 하여 공작산이라고 했다거나 하는 것만 보더라도 그 시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곱고 아름다운 심성을 가졌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강화 살창리에 관한 이야기는 씁쓸하다. 창왕과 영창 대군 두 昌이 죽었다고 하여 그들이 죽은 곳을 지금도 살창리라고 한다는데, 시대를 달리하여 죽임을 당한 두 왕의 혼이 깃들어있는 듯한 이름은 많은 느낌을 전해준다. 비록 255년이라는 간격을 두고 있지만 창왕과 영창대군의 넋은 어쩌면 그 동네를 아직도 쓸쓸히 배회하고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여 서글픔이 느껴지기도 한다. 강화 중심지 읍내에서 두 昌이 죽임을 당한 곳, 즉 殺昌里를 찾아 나서는 길은 무척 어려웠다 지은이의 말처럼 옛지명만으로 역사의 현장을 찾아낸다는 건 분명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누구에게 물어봐도 모른다는 대답을 들었을 때, 하물며 찾아간 관청에서조차 같은 답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막막했을까? 그러나 살창리처럼 지방사투리로나마 남겨진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일터다.

 

고양시 일산의 이름이 행정구역 명칭으로 정해진 일제의 잔재라는 걸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지금의 일산 일대는 조선 태종대에 고봉현과 덕양현의 앞 글자와 뒤의 글자를 따서 고양현으로 정하였다. 일산의 옛 이름은 中面으로 그 이전에는 고봉현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1755년의 <고양군지>에도 모두 중면이라는 명칭으로 표기되어 있어 일산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랬던 것이 후에 일산신도시로 발표되었다고 하는데 일제가 임의대로 남긴 이름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문제라는 지은이의 말에 어느정도는 공감하게 된다. 신라 진흥왕 때 전국을 9주5경으로 나누어 고양지역을 한산주라고 했으며 후에 고봉현으로 개칭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하니 원래의 이름을 찾아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그렇게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로움이 필요할테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한국어 발달 과정상 한민족→위대한 민족, 한글→큰글(위대한 글, 훌륭한 글, 높은 글), 한강→큰강(넓은 강) 등의 뜻으로 볼 때 한산(큰산)→고봉산→일산으로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지은이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다.

 

하늘을 떠받들고 산다는 동네, 봉천동.. 달동네의 대표적인 이름이다. 그러나 지금의 봉천동은 옛날의 봉천동이 아니다. 새롭게 개발되어 아파트군단이 늘어선 동네로 변신했다. 그러나 여전히 못사는 동네처럼 불리워지는 이름이 싫어 거기 사는 사람들이 개명신청을 했고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때나마 그곳에서 살았던 나는 못내 섭섭함을 감출 수 없었다. 달동네 시절에 나는 그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봉천동과 신림동을 아우르는 그곳의 옛모습과 변천과정이 아직까지도 나의 기억속에는 뚜렷하게 남아 있다. 부자동네건 가난한 동네건 그 이름이 안고 있는 수많은 기억들은 이름이 바뀐다고하여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이 옛날에는 그랬었다는구나, 하면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다. 그게 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에만 치중하는 우리네 사회의 병폐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더디게 넘어간다고 지지대고개, 근심을 잊었다고하여 망우리, 제비꼬리를 닮았다고하여 연미정, 은혜를 갚고자하여 지은 절이니 봉은사... 등등등 수도없이 많은 이름이 저마다의 의미를 안고 생겨났다. 생긴대로, 보여지는대로, 느끼는대로 이름을 붙인다는 게 지금은 왠지 어설프고 낯설게 다가올지도 모르겠지만 정감어린 이름임에는 분명해보인다. 그 이름에 얽힌 우리 역사의 한조각을 들춰보는 재미도 괜찮았다. 지명이 품은 한국사 이야기를 시간날 때마다 하나씩 찾아보고 싶어진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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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아 세대 그들의 역습이 시작됐다 -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30대는 어떻게 한국을 바꾸는가
전영수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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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Y, do it yourself 의 약자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만들 수 있도록 한 상품을 말한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반제품상태의 제품을 구입해서 자신이 직접 조립하거나 제작하는 것을 우리는 DIY 상품이라고 말한다. 1950년대부터 미국에서 시작된 반면 우리나라에는 1988년부터 출시되었다고 하니 그다지 오랜 역사를 가진 말은 아니다. 뜬금없이 왠 말인가 싶겠지만 이 책의 제목에서 이케아 세대라는 말이 궁금해서 찾다보니 눈에 뜨인 것이다. 이케아라는 가구회사를 솔직히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그런 쪽에 별로 관심이 없다보니...) 경쟁업체의 압력으로 제조사로부터 물건 공급이 중단되자 회사가 가구를 직접 디자인하고 제조하기 시작한 것이 도약의 발판이 되었다는 말은 놀라웠다. 그것을 기점으로 조립식 가구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러다보니 포장, 운송, 창고비용 절감의 효과를 창출했고 그것이 제품의 가격인하로 이어져서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쓰인 이케아 세대란 말에 그렇게 좋은 의미를 부여한 것 같지는 않다.

 

가만히 생각해본다. 과연 대한민국의 미래는 핑크빛일까?  작금의 상황으로 볼 때 그다지 밝아보이지 않는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이케아 세대라는 말은 지금의 30대 전후를 아우른다. 기성세대는 말한다. 지금의 아이들은 그저 저 좋은대로만 하고 산다고. 도무지 앞을 내다보지 않는다고. 그러나 모르는 말이다. 나 역시 베이비붐세대의 막차를 탄 사람이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안타까움이 더 많이 담겨있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누구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막다른 골목에서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것마냥  무엇엔가 쫓기듯 허허로운 발길로 시간위를 걸어가고 있는 그들이 바로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이케아 세대인 것이다. 흔히들 4050세대를 가리켜 '낀세대'라는 말을 한다.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러나 그들의 자녀가 이케아 세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한 낀세대들의 힘겨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란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문득 이케아라는 말이 그들의 삶과 닮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반제품상태에서 삶이라는 가구를 자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지 못하는 현실은 분명 답답할 것이다. 저자가 제시해주는 그들의 특징과 라이프스타일은 바로 지금 우리가 직면한 사회의 한단면이다. 모두가 대졸이나 석사이상의 학력을 가졌지만 기성세대가 누렸던 평생직장은 사라져버렸다. 연애를 꿈꾸지만 결혼은 하지 못한다. 설령 결혼을 했다하더라도 맞벌이를 해야만 하는 현실은 아이를 낳지않거나 뒤로 미루게 되는 상황을 만든다. 아이를 대학까지 졸업시키기 위해서 드는 비용이 4억에 가깝다고 하니 그거야말로 용기내야 할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그들은 혼자사는 삶을 택할 수 밖에 없다. (지난 선거에서 보듯이) 기성세대로부터 받는 소외감은 패배감과 무력감을 불러올 뿐이다. 돈이 없어 남을 배려하는 것조차 쉽지 않으니 본인을 위한 문화활동에 집착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물론 가치의 변화때문일수도 있겠으나 그들은 소유하기 위한 내 집보다는 편리를 위한 자동차를 선호하기도 한다. 그런 그들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태를 보여주는 부분은 기성세대로써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든다.

 

제목을 보면서 순간 움찔했었다. 맞다, 그들의 역습은 이미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런 징조들이 우리의 사회속에 만연하고 있음을 우리가 외면할 뿐이다. 이미 노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는 우리 사회의 단면은 거부할 수 없는 세태의 물결이다. 책을 읽으면서 가슴을 쓸어내릴 수 밖에 없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멀지않은 시대에 나 역시 노령화의 길로 들어서야 할테니. 어쩌면 우리 사회는 이미 활력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세대에게 끊임없이 압박을 가면서도 그들이 느낄 그 무게의 중압감을 애써 모른 척 외면하려고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이 하나가 태어나 기성세대 일곱을 떠맡아야 한다는 말이 이렇게나 빨리 실제상황으로 다가올거라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일까? 지금까지 살아왔던 우리민족의 특성상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그들을 더 힘겹게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은 저출산으로 지구상에서 사라질 첫번째 국가가 될 것이다, 라는 인구경제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우리사회가 저출산과 노령화 사회로 접어들었음을 인지하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머리에 띠두르고 화염병을 던지며 구호를 외치는 것만이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는 방법은 아닌 것이다. 그들의 복수가 시작되었다는 말에 백퍼센트가 아니라 만퍼센트 공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이 책이 그렇게 부정적이고 좋지않은 것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그런 세대를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미 우리가 그 문제를 풀기위한 해답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위해 누구도 발벗고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 심각할 뿐이다. 기업이 나서야 한다는 말에는 어느정도 공감하나 역시 제도권을 다루는 정치의 힘이 보태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는 벌써부터 복지부동의 자세를 풀려하지 않는다. 말마다 국민의 뜻을 앞세우고 있지만 과연 저들이 국민의 뜻을 만분의 일이라도 알까 싶다. 제 앞의 이익밖에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거기서부터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항공회사 JAL의 갈등 해결 방안이나 그 결과는 정말 놀라웠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우리 모두가 이처럼 긴장하며 미래를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는 해답이 거기에 있었다. 기성세대의 용기있는 내려놓음이 필요하다 말이 절절하다. 노인의 지혜와 청년의 에너지를 잇자 말이 눈물겹게 다가온다. 노인복지가 아니라 가족복지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말이 날카롭다. 때를 놓치고 후회하는 건 미련한 짓이다. 이 책의 주제는 커다란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내용임에 분명하다. 더 늦기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시한번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더 많은 이가 이 책을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란다. 별 100개가 평점의 기준이라면 별 100개를 줘도 아깝지 않은 주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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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한옥에 살다
이상현 지음 / 채륜서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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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집은 단순히 어떤 목적, 말하자면 편리한 생활을 위한 기능적인 대상이 아니다. 이 집은 조상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신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고, 이웃과 함게 어우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렇게 우리는 집을 생활속에서 실천적으로 해석하며 살아왔다. 한옥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미학적 가치와 삶의 실존적 가치는 끊임없는 생성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자연과 든든하게 이어져 있음을 알려준다. (239-240) 책의 말미를 더듬어 일단 결론이 아닐까 싶은 이야기부터 하고 본다. 어찌되었든 한옥의 아름다움에 정말 공감하느냐 묻던 저자의 물음에 명쾌한 답을 드릴 수 없는 까닭이다. 古宅이나 전통가옥을 찾아갈 때마다 그 안에 숨은 의미보다 형태와 형식만 찾아 헤매며 너무 어렵다고 중얼거리곤 한다. 생소한 명칭들은 왜 그렇게나 많은지, 그런것들을 꼭 알아야만 마치 전통가옥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해서 어렵게 찾아간 곳에 반발짝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쉽지 않았던 게 솔직한 심정이다. 사실 그 많은 명칭들은 가옥을 보러오는 사람들을 위한 것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보여주는 이나 듣는 이나 그 명칭들앞에서 작아지곤 한다. 그런데 이 책은 그것보다 한술 더 떠서 이제는 인문학까지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 내심 불편하기도 했다. 한옥을 그냥 한옥만의 느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을 한옥에 대비시켜보라고 하니 더 어려울 밖에... 한참을 헤맸다. 그러다 문득 어쩌면 너무나도 서양적인 것에만 물들어사는 지금 우리네의 시선에 맞춰 어떻게든 한옥의 아름다움을 이해시켜보려고 한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 천천히 책장을 넘기긴 했지만... 설령 그렇다해도 내게는 쉽지않았다.

 

언론매체를 통해 종종 중국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이 사는 문화를 보면서 철저(?)하게 사대주의로 살았다는 우리네 선조들의 모습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그들이 사는 집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던 책을 본 적이 있었는데, 우리의 한옥이 중국의 사합원에서 비롯되었고 우리의 골목길과 그들의 골목길이 닮아 있다는 말은 상당히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그런 말을 보게 된다. 중국의 집은 한옥에 가까울까? 아니면 서양 집에 더 가까울까? 대부분 중국의 집이 한옥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서양 집에 더 가깝다. 중국의 주거문화도 마당이 아니라 중정에 의지하고 있어서 집의 특성으로 보면 많은 경우 우리보다 서양을 닮았다. 의외였다. 여러형태로 변형되어지던 사합원을 보면서,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그 '중정'의 의미를 새겨보면서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다시 앞쪽으로 돌아가 저자의 말을 되새겨본다. 빛을 들이기 위한 중정의 의미가 서양의 건축물 형태에서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의 주거문화가 중국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거기에서부터 비롯된 형식일거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나무뼈대를 이용하여 집을 짓는 건축 방법을 빼면 중국이나 일본은 오히려 서구적이라는 것을. 집과 난방시설이 별개인 다른 나라의 경우와는 달리 우리의 가옥은 집과 난방시설이 하나로 톻합되어 있다는 것, 구들이 우리의 것임을 익히 알고 있었으면서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까닭에 그것을 놓치고 있었구나 싶었다.

 

가끔 전통가옥을 찾아가면 나는 항상 툇마루나 쪽마루에 걸터앉아 처마밑으로 내려앉는 빛과 한동안 노닥거리곤 한다. 살포시 내려앉는 그 햇빛의 따스함이 너무 좋아서. 거기서 그렇게 온종일을 보낸다해도 너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전통가옥의 한부분은 사랑채와 마당이다. 특성상 폐쇄적인 듯 보이지만 알고보면 개방적인 그 구조가 나는 참 좋다. 막아놓은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모두가 열린 그런 분위기는 낮은 담장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빛을 받아들여 다시 건물로 쏘아보낸다는 어설픈 설명이 없어도 파란 하늘을 마당안 가득히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구조가 얼마나 멋있는지... 한옥의 미는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립된 비례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연의 흐름 속에서 가치를 가지는 본질적인 아름다움에 기반하고 있음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는 저자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자연에 가장 잘 어우러지는 선, 그것이 바로 지붕선이란 말에 주목한다. 답사를 갈 때마다 전통가옥을 보면서 쭈욱 뻗어나간 지붕선의 아름다움에 빠져보라는 말은 늘 들어왔던 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지붕선이 무엇을 얼마나 아름답게 담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우리의 가옥이나 궁궐은 그 자체만 보면 제대로 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 생각났다. 조금은 먼 발치에서 바라봤을 때 자연과 어울어진 그 모습이 제대로 보인다던 어떤 이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문을 열면 그 주변의 풍광이 집안으로 모두 들어와 그 집과 하나가 된다는 설정 자체는 정말 놀라운 일이다. 오죽했으면 借景이라는 말을 썼을까? 경회루내에서 보는 모습이 최고의 借景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가옥에서 바라보는 借景 또한 그에 못지않다는 건 분명한 일일 것이다.

 

저자가 말한 '대충'의 미에 대해 한번 생각해본다. 안성 청룡사의 기둥이 보고 싶어 찾아갔던 때를 더듬어보면서. 기둥도 대충, 대들보도 대충 만든다는 말을 하면서도 그 안에 깃든 목수의 마음을 놓치면 안된다고 말하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막돌을 주춧돌로 삼은 것도 마찬가지다. 나무의 생김새를 그대로 기둥으로 썼거나 아무렇게나 생긴 돌로 그 기둥을 받친 모습은 정말이지 너무나 정겨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움'과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의 열풍으로 유행처럼 부석사를 찾아갔던 시절이 있었다. 부석사를 찾았을 때 정말로 배흘림기둥에 기대서 있던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은 무엇을 느끼고 싶었던 것일까 생각했었다. 나도 한번 기대서볼까 하다가 피식 웃고 말았었는데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다가서고 싶은 우리의 마음, 그것 또한 또다른 하나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리문화가 形의 문화이기보다 象의 문화 라는 저자의 말이 가장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形과 象의 차이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지금 우리는 겉으로 보여지는 것으로만 모든 것을 평가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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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 열린 강좌 2014-07-04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옥연구소 대표 이상현 님의 강연이 있어, 한옥에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리고자 글을 남깁니다.

저자 초청 열린 강좌 - 이상현(한옥연구소 대표)의『인문학, 한옥에 살다』(채륜서 刊) (7월 15일 오후7시)

장소 : 서울 지하철5호선 마포역 4번출구 앞 불교방송 건물 3층 다보원
일시 : 7월 15일 화요일 저녁 7시
참가 문의 및 신청 : 02-719-2606
네이버 카페(화요 열린 강좌, http://cafe.naver.com/dharin.cafe)

*모두에게 열린 무료 강좌 입니다.*
 
어젯밤 꿈이 당신에게 말하는 것 - 우리 내면에 숨은 무의식의 정체
김현철 지음 / 나무의철학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자주 하는 말중에 하나가 '꿈 좀 안꾸고 자봤으면 좋겠다' 는 말이다. 깊은 잠을 자지 못해 힘겨워한다. 지인에게서 수면을 유도하는 방법에 관한 책까지 선물받았던 적도 있다. 그만큼 밤마다 꿈에 시달린다. 꿈이라는 게 참 묘해서 기분좋은 꿈보다는 쫓고 쫓기는 힘겨운 상황을 더 많이 보여준다. 어떤 때는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자각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꿈을 꾸고 있는 나를 내가 불안하게 바라보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 날에는 영락없이 한두시간밖에 자지 못한다. 그러니 아침이 상쾌할리가 없다. 그럴때마다 남편이 말했었다. 걱정거리가 있으면 말해서 함께 해결하자고. 그렇다고해서 내가 걱정거리가 많은 건 아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지금의 생활에 크게 불만은 없다는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일종의 정서불안일거라고 내 스스로에게 처방을 내려보기도 했었다. 이 책은 그런 이유로 내게는 엄청난 끌림으로 다가다. 이 놈의 개꿈만 꾸지 않을 수 있다면 정말 좋을거라고 생각하며 펼쳐들었는데 처음부터 한방 먹었다. 글쓴이의 첫마디가 개꿈은 없다는 거였으니 하는 말이다. 정말 그럴까?  잘 몰라서 하는 말일수도 있겠지만 개꿈도 꿀 수 있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하도 꿈을 꾸다보니 이제는 그 꿈을 가지고 자체분석도 한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내가 모르는 내 마음이 꿈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말에 어느 정도는 공감한다. 갈등을 치유하거나 결핍을 눈치채게 하기 위해 꿈으로 표현되어진다는 말도 어느 정도는 공감한다. 하지만 뭔가 정해놓은 듯한 학설(?)처럼 누군가의 꿈을 이야기하는 것에는 그다지 공감하고 싶지 않다. 물론 그것이 다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나 역시도 자체분석한 꿈해몽으로 상황에 따라 조심하기도 하고 은근히 기대를 하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고 뭔가 좋은 일이 생긴다면 기대가 충족되는 것이니 그것도 나쁠게 없으니 하는 말이다. 일종의 꿈해몽처럼 펼쳐지는 책의 내용이 내게는 깊은 울림을 주지 못했다. 길몽이든 흉몽이든 그 꿈을 통해 자신의 상태를 한번쯤 뒤돌아볼 수 있다는 건 괜찮은 일임에 분명하다. 책의 말미에 나와 있는 꿈 체크리스트를 통해 나의 불안지수를 알아보았지만 내 경우에는 그다지 체크할 만한 항목이 몇 개 되지 않았다. 체크리스트가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확시랗게 이렇다 저렇다 답을 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조금 애매했다고나 할까? 그래서 구구절절 꿈에 관한 나의 지론을 말했던 거다. 개꿈도 분명 있다고.

 

"무심코 흘려버린 당신의 꿈에 담긴 놀라운 비밀" 이란 말처럼 어쩌면 나는 나의 꿈을 통해 내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흥미로운 주제였다. 이 책을 펼쳐들기 전날에도 나는 꿈을 꾸었다. 앞서가던 아들녀석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그녀석을 찾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데 언제부터인지 아주 작은 꼬마하나가 나를 엄마라고 부르며 따라오던 꿈이었다. 요즘 아들과 엄청난 신경전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것때문에 그런 꿈을 꾸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커가는 아이의 정서를 인정해주지 못하고 마냥 어린애 취급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다시한번 묻게 된다. 꿈이 우리 내면에 숨은 무의식의 정체라는 말을 새삼스럽게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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