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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남은 조선의 살인과 재판 - <심리록>으로 읽는 조선시대의 과학수사와 재판 이야기
이번영 지음 / 이른아침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우리에게 그 유명한 '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말을 남겼던 사건이 있었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정할 수 없는 사회의 한단면을 보는 것만 같아 씁쓸했었다. 金錢萬能주의가 되어버린 지금은 정말이지 돈만 있으면 뭐든 다 할 수 있을것 같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런 세상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보면 살면서 돈으로 안되는 일도 많다. 돈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는 걸 금새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걸 생각해보게 되었다. 단순히 범죄를 저지르고 그들을 재판하는 과정만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닌 까닭이다. 길게는 15년을 끌기도 했던 하나의 사건을 대하는 정조의 마음자세가 경이로웠다. 후세에 그 이름이 빛나게 되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는 말이다. 백성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혹여라도 잘못된 판결로 억울한 일이 생겨날까 두번 세번 살펴보던 그 마음이 감동을 전해주기도 했다.
조선은 엄연한 법치국가였으며 형사사건에 따르는 일체의 수사와 소송이 법률에 근거해야 했다. 예를 들어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반드시 검시의 과정을 거쳐야 했고, 피해자 가족이나 친인척은 물론 모든 관계인들의 증언을 들어야 했다. 물증을 확보하는 것은 기본이고 범인 자신의 자백까지 받아야 했으며, 이런 모든 정황과 물증과 진술과 자백이 일치하지 않으면 소송은 마무리될 수 없었다. 게다가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기초 수사의 과정은 반드시 서로 다른 관리가 맡아서 2회 이상 실시하도록 했고, 이 이중의 수사 결과가 서로 일치되지 않거나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있을 경우 수사는 3회든 4회든 한정 없이 반복되었다. (- 책머리에 중에서)
위의 글만 보더라도 이 책이 무엇을 담고 싶어했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저렇게까지 엄중한 과정을 거쳤음에도 분명 억울함을 호소한 사건도 있었을 게다. 그러나 정조의 최종판결을 보면 놀라움과 함께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판례가 공정해야만 한다는 정조의 말은 깊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정조가 자신이 관여했던 모든 소송의 과정과 결과, 판단의 근거들을 일일이 기록에 남겨 나중에 형사소송 판례집으로 만든 책이 <심리록>이라고 한다. 그 책에 수록되어진 사건이라고 하지만 모두 중범죄만을 다루고 있어 그 무게감이 엄청나다. 시절이 바뀌었어도 사람사는 모양새는 그대로구나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중요시하는 자세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는 걸 새삼스럽게 알게 된다.
중국 원나라의 왕여가 송나라의 형사사건 지침서들을 바탕으로 편찬한 <무원록>이 정조때 편찬된 법의학서의 근간이 되었다고 한다. 세종대에 우리나라 실정에 맞지않는 내용을 빼고 조선의 사정을 반영하여 <신주무원록>을 펴냈다고 하니 과연 세종이군!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 최초의 통일법전인 <대전통편>은 정조대에 만들어졌다. 그 이전까지 명나라의 <대명률>과 함께 우리나라 법전의 양대산맥이었던 <경국대전>,<속대전>을 통합한 책이라 하지만 사문화된 조항을 폐기하고 새로운 조문을 추가하여 만든 책이라 하니 과연 조선을 '기록의 나라'라 할 만하지 않은가 말이다.
살인사건에 반드시 2회 이상 검시를 했고, 의사와 함께 반드시 전문가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정황과 물증, 증언과 자백이 모두 일치하지 않으면 함부로 형을 결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백하지 않아 15년동안이나 옥살이를 했던 죄인도 있었다!) 단순히 인력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는 말일터다. 이중수사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최첨단 수사기법을 동원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려 했던 관료들에 대해서 엄중한 처벌을 내렸다는 대목에서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책속에 펼쳐지는 사건을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볼 수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남녀간의 애정문제, 부부로써 지켜야 할 도리라거나 가족간의 불화, 시기와 질투, 부모와 자녀 혹은 형제지간의 여러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니 사건 하나하나를 가벼이 볼 수 없었다는 말이다. 기회가 된다면 정조의 <심리록>이나 정약용의 <흠흠심서>를 한번 읽어보고 싶다. "無疑處起疑- 더는 의심할 것이 없다고 판단되는 상태에서도 다시 한 번 의심을 일으키라" 는 정조의 그말은 주는 여운이 무척이나 길다. /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