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 난징대학살, 그 야만적 진실의 기록
아이리스 장 지음, 윤지환 옮김 / 미다스북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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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세상에~~ 어떻게 이런일이? 라는 놀라움을 뒤로한채 저자가 이 책을 쓰는 동안 늘 마음깊이 새겼다던 이 한마디의 말이 나는 사실 더 두려웠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 작금의 일본의 행태를 보면서 저 말이 진실이 아니길 은연중에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더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변해가는 다른 어떤 것들보다 무사안일주의에 빠져있는 우리의 현실을 다시한번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은 심정은 절박하기까지 했다. 사실 일본의 만행이라는 게 어디 한둘일까? 731부대의 진실을 통해 드러났던 그들의 잔혹함 또한 우리는 잊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 책의 제목에 시선을 고정할 수 밖에 없었다. 과연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설까? 종종 우리는 역사는 누구에 의해 쓰여지는가를 묻곤 한다. 역사가 승리한 자에 의해 쓰여진다는 것쯤은 이제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렇다면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설까? 예나 지금이나 힘있는 자, 가진 자에게는 많은 사람이 함께 해 왔다. 그러니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듯 하다. 그 불편한 진실이 이 책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음이다. 외세의 침입으로 수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던 우리 민족에게도 한번 묻고 싶었다. 과연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설 것 같으냐고.

 

책을 읽으면서 20세기 최악의 사건 중 하나라는 <킬링필드>가 오버랩되었다. 캄보디아에서 공산주의 정권 크메르루주가 4년 동안 양민 200만 명을 학살한 사건이었는데 그에 관한 다큐를 보면서 얼마나 기가 막혔었는지. 그러나 난징의 강간은 그렇게 해야만 할 아무런 목적도 없었고 이유도 없었다는 사실에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 엄연하게 드러난 진실마저도 날조된 것이라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있는 일본의 만행을 보면서 저들에게도 과연 심장이 뛰고 있을까 싶었다. 책속에서 보여지는 일본군의 만행에 경악했다. 전쟁의 참상이라고 알고 있었던 수많은 전제를 모두 뒤엎어버릴만큼 경악스러웠다는 말이다. 현재까지도 역사의 증인으로 살아남아 생생한 증언을 남기고 있다는 '살아남은 자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떨렸을까? 그 목소리를 들으며 이 모든 것을 준비했던 저자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

 

책장을 넘기면서 충격적인 사진 몇 장으로 내 가슴은 이미 떨리기 시작했다. 끝까지 '설마'하는 심정으로 책장을 넘겼다면 거짓일까? 정말 그랬다. 적어도 사람이라면, 사람이었다면.... 이 책은 난징의 강간과 대학살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토록이나 처참하고 치욕적인 홀로코스트를 우리가 외면할 수 밖에 없었던 혹은 잊혀진 듯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그 배경에 대해서도 차분히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말하고 있다. 역사는 과연 누구의 편에 서는가를. 새삼스럽게 치밀어오르는 반미감정을 어찌할 수 없었다는 게 솔직한 말일 것 같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미국의 실체를 다시한번 속깊이 들여다 본 듯 하여 뒷맛이 영 개운치가 않았다. 현재의 동아시아의 정세에 대한 움직임을 보면서 난징대학살, 그 야만적인 진실에 대한 사실규명이 더 논의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역사의 증인들이 아직 살아 있을때 치유의 역사 또한 다시 써야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을 그저 지나간 이야기로만 치부하기엔 상처의 골이 너무 깊다. 아울러 우리도 기억해야만 한다. 역사는 진실로 약한자의 편에 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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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수화물이 인류를 멸망시킨다 - 당질 제한에 대한 생명과학적 고찰
나쓰이 마코토 지음, 윤지나 옮김 / 청림Life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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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밥, 빵, 면보다는 차라리 고기와 튀김을 먹어라' 라는 책띠의 글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게 하나 있다. 요즘 한창 광고를 통해 들어야 했던 밥, 빵, 면, 면, 밥, 빵을 반복해서 외치던 그 광고말이다. 결국은 맨날 똑같은 걸 순서만 달리한다는 뜻으로 쓰였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시장에 가면서도 오늘은 또 뭘 먹어야하나 고민하는 주부의 입장에서는 색다르게 들렸던 광고였다. 매일처럼 고민을 하지만 결국 오늘도 그다지 색다를 것 없다는 게 아마도 모든 주부들의 공통점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이 책을 읽고 나면 당신은 오늘 저녁부터 당장 밥을 먹을 것인지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될 것이다' 라는 책의 소개글을 읽으면서도 설마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정말 지금과 같은 식생활 패턴을 고수해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에 머리를 저었다. 원래도 좋아하지 않던 초코렛과 같은 단것들에게서 한발 더 물러난 건 사실이다. 소화기능이 약해 될수록 피했던 면종류를 더 멀리하게 될 것 같다. 그런데 이런류의 책을 보게 되면 은근 화가 치민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야? 하고 되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너도 나도 이 의견만이 진짜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아 그것조차도 저들만의 잔치에 내가 흔들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에필로그를 통해 어느정도의 가설임을 밝히고 있지만 여러사람의 체험효과를 예로 보여주고 있으니 살을 빼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도전해볼만 한 주제일거라는 공감대가 꽤나 컸다.

 

도대체 우리 삶의 주변에 널려있는 지식들은 어느정도의 사실성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저마다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위해 잘못된 것들도 멋들어지게 포장하여 마치 사실인양 외쳐대고 있는 게 어디 한둘이냐 말이다. 포장광고의 홍수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이번에도 속았군, 을 중얼거려야 했던 허망함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면 바로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의 뭔가를 끌어낸다. 제목에서 보이는 '탄수화물'의 존재가 단순히 탄수화물이라는 영양소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일전에 읽었던 <식량은 왜 사라지는가> 라는 책이 떠올랐다. 지금과 같은 배부른 세계의 종말이 바로 앞에 와 있음을, 그리고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우리의 식량이 처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거기에서도 이 책과 마찬가지로 곡창지대의 침체는 우리에게 다가올 위기의 징조라고 말했으며 기후변화로 인한 인류의 변화를 말하고 있었다. 곡류로 인하여 인류가 엄청나게 늘어나게 되었으나 그 곡류로 인하여 인류에게는 또다른 재앙이 시작되고 있었음을 이 책에서도 아주 현실감있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밥이나 빵, 면과 같은 곡류보다는 고기가 소화가 더 잘된다거나 우리몸에 좋다고 수없이 들어왔던 뿌리채소는 당질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 잎채소를 먹어야 한다거나 밥이나 빵, 면과 같은 곡류만 줄여도 살이 빠지는 걸 알 수 있다는 말은 사실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한다. 흔히들 3백을 피하라는 말을 많이 한다. 설탕을 피하고 소금을 피하고 밀가루를 피하라는 말인데 이건 그것보다 더 무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진화라고 불렀다. 지금 세상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을 생각해보게 된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우화가 떠오른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 모두가 가고자하는 오직 하나의 방향. 어쩌면 우리 인류는 나비가 되어보기도 전에 그 욕망의 애벌레탑만을 쌓다가 무너져내리는 게 아닐까? 요즈음의 시대를 둘러보면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인류의 적은 인류이며 지구 최대의 적 또한 인간이라는 말이 새롭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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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길을 묻다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신들의 땅
이훈구 글.사진 / 워크컴퍼니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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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세계의 지붕이라고 부르는 히말라야는 아시아 대륙 중앙부를 관통하고 있다.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 말로 눈을 뜻하는 '히마hima)' 와  거처를 뜻하는 '알라야(alaya)' 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만년설의 집'이라는 뜻이다. 히말라야는 파키스탄과 인도 북부, 네팔, 부탄 및 티베트 남부를 뻗어내리는 몇 개의 산맥으로 이어져 있지만  지역 구분은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그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건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이 책의 제목을 보면서 나는 얼마전에 TV에서 보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내게 너무나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남은 생을 그곳에서 살아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던 곳, 부탄.. 부처의 나라 부탄.. 아무런 욕심도 없이 그저 자연과 하나된 모습으로 살아가던 투박하지만 아름다웠던 부탄사람들의 모습.. 그 부탄을 이 책속에서 만날 수 있을거라는 기대감에 설레이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부탄은 하루의 관광인원수를 제한하고 있는 탓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말이 보여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부탄을 빼고 어찌 히말라야를 말할 수 있을까 싶은 나만의 욕심이 너무 컸던 모양이다.

 

우리가 히말라야라는 말을 듣게 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일까? 단언컨데 히말라야 산맥을 이루는 높은 산봉우리들의 이름일 것이다. 14좌를 완등했다느니, 무산소등반에 성공했다느니 이런저런 소식도 참 많이 들려오고... 대체적으로 7,8천의 높이를 자랑하는 산들이니 우리나라의 산과는 정말 비교도 안되는 높이다. 그러니 당연히 산을 좀 안다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꿈을 꾸기도 할 것이다. 한때는 어쭙잖게 나도 그런 산을 한번 올라보고 싶다는 욕망을 가져보기도 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높은 산이라해도, 아무리 깊은 골이라해도, 아무리 험한 능선이라해도 사람이 산다. 어디나 사람사는 모습은 같다. 처해진 환경이 다르다보니 단지 문화적인 색깔만이 다를뿐. 그런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져 있어 좋았다.

 

글자만큼이나 많은 사진들이 들려주는 또하나의 이야기가 너무 멋졌다. 한장한장의 사진마다 어쩌면 그리도 풍성한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지 놀라웠다. 사진속에 담긴 사람들의 표정도 그렇지만 히말라야의 부분부분들이 만들어내는 절경 또한 기가 막혔다.  마치 한권의 사진첩을 손에 들고 멋진 히말라야의 이야기를 들은 그런 느낌이었다고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 싶다. 책속에서는 크게 파키스탄과 인도, 네팔을 다루고 있지만 현장감있는 말과 사진으로 더 많은 곳을 다녀온 듯 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여정을 따라가면서 나도 숨가쁘게 걸었다. 혹시나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가슴졸이면서. 비록 보고 싶었던 부탄을 보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멋진 여행이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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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학실록
이성규 지음 / 여운(주)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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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랬을까?'  '음, 그럴수도 있겠군!'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거지?' 이런 따위의 궁금증을 자아냈던 사건들은 의외로 참 많다. 굳이 역사를 들춰내지 않더라도 우리 삶속에는 그야말로 미궁으로 빠져든, 그래서 한번쯤은 되짚어 생각해볼만한 그런 일들이 꽤나 많을 거라는 말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미 지나가버린 머나먼 역사의 흔적속에서 그런 의문점을 찾아냈다. 경종이나 정조처럼 독살설에 휘말렸던 미궁의 사건들도 있지만 한때는 혜원 신윤복이 여자였다거나 하는 것처럼 어이없는 이야기들도 떠돌았었다. 하지만 이 책은 이른바 과학이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무슨 이야기일까 싶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일단은 흥미롭다. 그 시절에 정말 그런 일도 있었을까 싶은 사건도 다루지만 어디선간 한번쯤은 들어보았음직한 사건 또한 다루고 있음이다.

 

옛날에는 자연적인 현상마저도 정치와 무관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상상의 동물들까지 만들어내며 '성군'이니 '태평성대'니를 운운했겠는가 말이다. 우리가 서수瑞獸라고 일컫는 동물들(기린이나 봉황, 해치와 같은)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상상속의 괴수가 출현했다는 부분을 보면서 아무런 생각없이 만들어낸 것들이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메뚜기떼가 나타나 논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놀라웠다.  그야말로 성경에서나 나옴직한 이야기가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메뚜기의 특성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어 그야말로 과학적인 논리를 잣대로 들이대니 아하, 그렇구나 싶어 무릎을 치게 된다. 세종이 그토록이나 아꼈다던 인재 장영실이 어느날 갑짜기 사라져버린 이유라거나, 이순신 장군을 영웅으로 만들었던 거북선의 실체에 대해서 가끔은 혼자 궁금해하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기도 했었는데, 책을 읽으며 같은 주제를 만나게 되니 순간 반갑기도 하고 순간 긴장이 되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그럴수도 있겠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일종의 사건들이 그때 이전에 이미 있었던 일이라면 기분이 어떨까? 정조의 화성행차시 한강을 건너게 해 주었다는 배다리나 거북선과 같은 경우는 이미 그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있었던 일이라해서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했는가가 중요한 까닭이다. 설치기간만 20여일을 잡아야 했다는 배다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강에는 왜 다리가 없었을까? 그것은 한양이라는 도성의 입장에서 보면 자연해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니 도성방어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닌 듯 싶다. 조선시대에도 서양인 외인부대장이 있었다는 건 이채롭다. 돌부처가 땀을 흘리고 붉은 말이 절에 들어와 울다가 죽었다거나, 여우떼가 궁궐로 들어왔다거나, 물고기가 강변으로나와 죽었다거나,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거나 하는 것들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나 봄직한 이야기들인데, 조선시대에도 황새가 패싸움을 하니 왕후가 죽고, 개구리가 떼로 몰려와 패싸움을 하니 세자가 죽었으며, 그런 현상으로 말미암아 나라에 큰 변고가 생겼다는 이야기는 왠지 좀 그렇다.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하는 식으로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어찌되었든 아무데서나 볼 수 없다는 오로라를 조선의 밤하늘에서 어떻게 볼 수 있었는지, 자그마치 530여년간이나 운하를 파려고 했으나 끝내는 파지 못했다는 이야기, 창경원 동물들이 왜 독살당해야만 했는지와 같은 이야기들은 다음장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기도 한다. 놀라운 것은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는 '흙비'가 조선시대에도 내렸다는 사실이다. 자연현상이라는 것이 단지 문명의 폐해만은 아닌 모양이다. 역사를 배우게 되면 흔히 그 시대로 돌아가 생각해보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은 그와 반대로 역사적인 현상들을 이 시대의 잣대에 맞춰 이야기하고 있다. 왜 그래야만 했는지,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났었는지를 다시한번 되새겨보는 시간이 주는 의미는 의외로 깊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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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이야기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강신주 옮김, 조선경 그림 / 북하우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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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어떤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이는 말이라 하고, 어떤 이는 듣기만 하여도 눈물이 나는 말이라고도 한다. 솔직히 말해 나는 내 어머니에 대해 애틋한 감정보다는 안타까운 감정이 먼저 앞서곤 한다. 386이라 일컬어지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들은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이젠 나도 이미 커버린 아이를 둔 어머니가 되어 있다. 가끔 생각한다, 부모가 어떤 의미인지를. 가끔 생각한다, 엄마가 아이에게 주는 존재감은 얼만큼인지를. 나 어릴적에 우스운 이야기라고 떠벌리던, 그야말로 섬뜩한 이야기 하나가 있었다. 아들이 다 자라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 여자가 어머니의 심장을 가져온다면 너의 사랑을 받아주겠다고 했단다. 여자에게 눈이 먼 아들이 그만 몹쓸 짓을 하고 말았는데... 어머니의 심장을 들고 여자에게 뛰어가던 아들이 넘어져 아파하자 어머니의 심장이 굴러와 이렇게 말했단다. 아들아, 다치지는 않았니? 많이 아프지?  그제서야 아들이 대성통곡을 하며 후회를 했다는... 끝없는 어머니의 사랑을 이야기하고자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졌겠지만 그만큼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알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흐른다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어머니 이야기>라는 이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안데르센의 작품이다. 어린 시절 안데르센의 동화를 읽어보지 않은 아이들이 있을까?  영화의 모티브가 되어 상영되고 있는 "눈의 여왕'도 그렇고, '성냥팔이 소녀', '엄지 공주', '벌거벗은 임금님', '백조 왕자', '인어공주', '미운오리 새끼' 와 같이 제목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작품들이 모두 안데르센의 동화집에 수록된 것들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통도 다 참아낼 수 있다는 어머니의 사랑을 그리고 있는데 이야기보다는 그림이 더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죽음'의 신에게서 아이를 되찾아오기 위하여 어머니는 아름다운 눈과 머리카락을 빼앗기며 결국 '죽음'의 신에게 다가가지만 인간에게는 모두 저마다에게 주어진 삶이 있다는 사실에 절규한다.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신만이 알 수 있는, 누구나 받아들여야만 하는 그런 운명같은 것 말이다.

 

문득 목련존자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부처님의 십대제자중 한명인 목련존자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장사를 한다며 외국으로 나간 사이에 그의 어머니가 남은 재산을 탕진하며 온갖 못된 짓을 저질렀다. 집으로 돌아온 목련존자는 어머니가 죽어 지옥에서 거꾸로 매달리는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알고 부처님께 귀의하여 어머니를 구제할 방법을 물었다. 아비지옥에서 어머니를 만나게 된 목련은 어머니를 구제하기 위하여 끝없이 노력을 하였다. 그의 불심과 정성이 하늘을 감동케 하여 마침내는 어머니를 지옥에서 구제하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살펴 생각해보면 부모도 자식도 모두가 제 할 도리를 해야 한다는 말인 듯도 하다. 사랑이라는 틀속에 둥지를 만든 게 가족이다. 서로를 사랑으로 보듬을 일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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