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고금통의 1 - 오늘을 위한 성찰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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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지혜서란 말에 공감한다. 우리는 왜 역사를 배워야 할까? 역사는 지나간 과거일뿐인데 왜 그토록이나 역사배우기를 강조하는 것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역사속에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를 어떻게 배우는 가는 상당히 중요하다. 어떤 관점으로 혹은 어떤 생각으로 역사에 접근하는가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는 까닭이다. 현재 역사라는 학문분야를 볼 때 나같은 무지렁이가 봐도 상당히 보수적이지 않나 싶을 때가 많다. 기존의 학자들은 자신의 주장이 오래도록 세상에 남아 있기를 바란다. 새로운 학설이 나와 그것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것이 그다지 반갑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그래서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며 등장하는 신진세력들은 자리잡기가 여간 어렵지 않을터다. 하지만 새로운 학설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다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니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이 책의 저자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자칭 마니아라고 평하기도 한다. 사실 이 책은 어느 신문지상에 연재되었던 저자의 칼럼이다. 그 때 당시에 내가 생각했던 말이 바로 역사지혜서였는데 현재의 문제를 역사속의 단면과 빗대어 어쩌면 그리도 멋지게 해결방법을 제시하는지 놀라웠을 뿐이다. 사람사는 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다지 다르지 않다. 다만 삶의 질만 약간의 차이를 둘 뿐이다. 그러니 지금을 사는 우리네가 어떻게 하면 옛날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지 지나간 일을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예나 지금이나 통하는 의는 같다.

 

영조 재위 20년, 병이 들자 신하들이 영조의 침실에 들어가 영조의 생활을 본적이 있었는데 상당히 검소했다고 한다. 여러 신하가 물러나와 임금의 검소를 찬탄했다는 이야기가 보인다. 정조의 밥상에 반찬이 두세 그릇에 지나지 않았고 그릇에 흠이 있었던 이유는 신하들이 일상으로 쓰는 도자기를 모두 사옹원 분원에서 만든 특제 도자기를 쓴다는 말을 듣고는 보통으로 구워 만든 그릇도 쓸 만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법이나 말로 가르치는 것은 몸으로 가르치는 것만 못하기에 자신의 허물을 먼저 없앴다는 이야기다. 지금 나랏일을 하는 사람이 새겨들을 만한 이야기다. 물가 상승이나 주택 문제등으로 수많은 서민이 고통을 받고 있는 지금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선조대의 도체찰사 유성룡의 예를 든 것은 새겨들을 만 하다. 복지 논쟁이 계속되는 작금의 현실속에서 사궁민四窮民을 생각해야 한다는 옛날의 문헌이 예사롭지 않다. 四窮民이란 환과고독으로 어디에도 하소연할 데 없는 백성을 일컫는다. 鰥寡孤獨... 즉 늙은 홀아비와 홀어미, 부모없는 사람이나 자식없는 사람을 말한다.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맹자도 말했단다. 此四者 天下之窮民而無告者라고... 지금의 복지논쟁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고 싶어지는 이유다. 흑산도로 유배를 갔던 정약전의 이야기를 통해 전교조에 휘둘리는 작금의 교육현실을 보게 된다. 귀한 신분이었지만 교만하지 않고 섬마을 선생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가 아이들을 가르치던 복성재가 아직 남아 있다고 하니 진정으로 학생을 위한다면 정약전의 교육정신을 본받아 마땅한 일이다. 많은 교사가 전교조라는 작은 소란때문에 진정한 교사의 모습으로 기억되지 못한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나 하나의 이야기를 허투루 볼 수 없다. 역사속에는 오래되어 향이 나는 교훈이 너무나도 많다. 직설적인 화법때문인지 날카로운 화살촉처럼 가슴속에 날아든다. 이렇게 많은 해결책들이 역사속에 감춰져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 알아도 모른 척, 들어도 못들은 척이라면 더 할말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편익만을 생각하는 우를 범하는 건 이제 그만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술자를 천시했던 역사가 무엇을 불러왔는지 되돌아 볼 때가 아닌가 싶다. 교육의 질에 변화를 추구해야 할 때라는 말이다. 국민교육헌장에서 말하듯 저마다 타고난 소질을 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 어른들의 몫이 아닐까 싶어 안타까운 마음에 하는 소리지만 역사는 이미 그 결과를 보여주고 있으니 쉽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역사를 바로 알아 그 안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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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상처는 어디에서 왔을까 - 사랑, 관계, 불안, 벗어날 수 없는 나와 가족의 심리 연대기
산드라 콘라트 지음, 박규호 옮김 / 북하우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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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도대체 '아는 사람'이라는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참 애매한 구분이 아닐수가 없다. 한두번 인사를 나눈 사람도 '아는 사람'이다. 그저 얼굴만 아는 사람도 '아는 사람'일 수 있다. 그나마 이름 석자 서로 나눈 사람이라면 그래도 '아는 사람'이라 말 할 수 있을 게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아는 사람'의 힘을 어느정도는 맹신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 '아는 사람'과 '이웃 사촌'은 또 어떻게 다를까? 멀리 있는 가족보다 가까이에 있는 이웃사촌이 낫다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냥 '아는 사람'보다는 '이웃 사촌'이 더 가까운 의미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이 모두 '아는 사람'이나 '이웃 사촌'의 범주안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하나 더 보탠다면 '가족'이라는 말이다. '가족'....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나의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는 존재. 내가 눈물 흘릴 때 눈물 닦아주며 등 두드려주는 존재.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가족'으로 인해 상처받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왜 그런걸까?

 

나의 상처는 어디에서 왔을까? 라는 말은 내 가슴과 머리를 떠나지 않던 주제였기에 반가웠다. <가족의 두 얼굴>이라는 말속에서 나는 어떤 위안을 찾고 싶었던 건지 다시 물어야 했지만 어찌되었든 나는 내 안의 나와 타협하고 싶어하는 사람중의 한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가족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라는 책 표지의 말에 가슴 한켠이 아렸다. 우리의 상처 대부분이 가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말에 공감한다. 가족의 의미를 되짚어 보자는 바람이 언제부턴가 불기 시작했던 것 같다. 늘 함께 있고, 늘 그자리에 있으니 소중한 줄 몰랐던 가족. 내 투정과 불평을 두말없이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함부로 대했던 가족. 그랬기에 나로 인해 받는 상처쯤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가족. 그런데 알고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 존재이기에 더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해야만 하는 거라고, 더 많은 배려가 필요한 존재가 가족인 거라고 언제부턴가 그렇게 말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나에게 있어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어떤 의미였는지.

 

"우리 삶의 여러 층위들은 서로 아주 밀접하게 겹쳐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나중 것에서 언제나 예전 것을 만나게 된다.

해결되고 처리된 것으로서가 아닌 현재로서, 그리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으로서 말이다." - 베른하르트 슐링크

 

이 책은 가족이라는 의미가 안고 있는 아주 많은 이야기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름을 어떻게 지었느냐를 시작으로 부모로써 자식에게 거는 기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 그러나 이렇다하게 새로운 주제는 보이지 않는다. 늘 들어왔으나 늘 스쳐지났던 주제들을 다시 만나고 또 새롭게 생각하게 되는 짧은 순간과 마주한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과 실수는 정말 많았다. 되풀이되는 가족사의 아픔도 그렇고 부담이 되는 가족으로서의 의무와 책임도 그렇다. 자식을 부모의 소유물로 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도 알아야 했다. 일도, 사랑도, 관계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의 답은 가족에게 있다는 말이 헛되이 들리진 않는다. 책속에서 잠시 언급했던 카프카의 <변신> 이야기가 인상깊다. 부모의 인정과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던 그레고르 잠자는 결국 징그러운 벌레로 변신하게 되지만 끝내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 가족은 어떤 의미였는지.... "인간은 조상의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는 데 인생의 절반을 쓰고, 자녀에게 잘못된 생각을 가르치는 데 나머지 절반을 쓴다" 는 윈스턴 처칠 의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일전에 지나가는 말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아들을 부를 때 이름을 부르는 엄마보다 "아들~~~"하고 부르는 엄마가 아들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는 이야기였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아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에게 어떤 것을 강요하지는 않는지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아이비생각

 

"가슴속에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해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물음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굳게 닫힌 방과도 같고 완전히 낯선 언어로 쓰인 책과도 같은 물음들.

 모든 걸 살아보아야 한다. 그 물음들을 살아가노라면

 차츰 저도 모르는 사이 어느 낯선 날 대답 안에서 살고 있으리라."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결국 세월이 약이라는 말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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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7일 이사카 코타로 사신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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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치바를 처음 만난 게 언제였더라? 꽤나 오래전에 만난 듯 하다. 그가 나타날때는 항상 비가 왔다는 것, 그가 음악을 좋아해서 음반매장에 자주 들락거린다는 것, 항상 장갑을 끼고 다닌다는 것.... 그가 하는 일은 죽음이 결정된 사람을 일주일동안 관찰한 뒤에 죽음을 결정하거나 보류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나는 것은 인간의 문화를 배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 치바가 다시 등장했다. 역시 같은 임무,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전체적인 줄거리속에서 지금까지 내가 느끼고 있는 일본소설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일어나지만 언제부터인지 그런 것들을 외면하기 시작한 우리의 깊은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는 말이다. 나만 아니면 된다거나 단지 남의 일일 뿐인 주변의 일들이 언젠가는 너의 일이 될수도 있는거라고 경고하는 것만 같아 조금은 씁쓸하기도 하다.

 

사이코패스라는 말이나 소시오패스라는 말이 빈번하게 언론지상에 오르내리는 현실과 마주치는 시간이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다. 똑같이 반사회적 인격장애증을 앓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지만 평소에는 잠재되어 있다가 범행을 통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사이코패스라면, 스스로 범행을 인지하는 것이 소시오패스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된다. 둘 중 누가 더 무서운 존재인가를 따질 필요는 없다. 지금의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 얼굴로 변해가고 있는가를 이미 우리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형편일테니. "사람은 원래 도덕적이고 평등한 소박한 상태로 있지만 그냥 내버려두면 자연스럽게 사악해져서 타인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는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고 해요.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사회의 진보에 필요한 것이라고."(-106쪽) 참 무서운 말이다. 어찌보면 우리 모두가 사이코패스요 소시오패스라는 말도 될테니. 단지 내 안에 잠재되어진 속성을 드러낼 기회가 오지 않았을 뿐 모두가 그럴 확률이 백퍼센트라는 말도 될테니. 이런 끔찍한 상황을 누가 만들었을까? 사회의 진보에 필요한 것이라고? 아니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진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진보를 핑게로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 것일 게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협력이라는 말, 듣기엔 좋지만 인간이 그렇게 아름다운 행동만 하며 사는 건 아니야" "아, 그 말도 했어요. 인간이 서로 협력하는 건 집단에서 배제되고 싶지 않다는 의식 때문인 것도 있다고. 인간은 평판에 신경을 쓰기 때문이래요. 함께 나누지 않는 사람에게는 나쁜 평판이 생기고, 서로 도우면 동료로 인정을 받고."(-378) 잔인하다. 무엇이 문제인가를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바로 정답을 들이대는 저자의 속셈은 무엇인지. 그런 속내를 안고 사는 너 자신을 알고 있느냐고 삿대질을 하는 것만 같아 뜨끔하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착한사람 콤플렉스'에 걸려 있는 건 아닌지.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잃어버린 건 아닌지. 이 책속에 등장하는 한줄의 글귀가 왠지 커다란 울림을 안긴다. '관용'은 '불관용'에 의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어쩌면 우리 모두 '착한 사람 콤플렉스'라는 덫에서 빠져나올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인간은 이래야 한다거나, 인간이니까 그래서는 안된다는 잣대를 잘 사용하고 있는가 한번쯤은 물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책을 읽으면서 점점 이중적이며 편향적으로 변해가는 우리네 모습을 보았다. 자신의 판단보다는 남의 평판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서글픈 현실을 보았다. 스스로 만든 올가미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지금의 우리를 과연 '인간답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다시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주제가 너무 무거웠던 탓일까? 책장을 넘기는 순간들이 참 답답했다. 이야기의 흐름도 너무 밋밋하게 흘러가고 책을 읽는 동안 지루함이 느껴졌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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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계 연대기 - 지구와 그 주변의 잊혀진 역사를 찾아서
원종우 지음 / 유리창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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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황당한 이야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과학만을 신봉하는 사람도 아니다. 지독한 현실주의자인 까닭에 현실과 너무 먼 생각이나 상상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그래서인지 남들은 기가 막히게 재미있다는 <스타워즈>나 <매트릭스>와 같은 영화를 한번도 제대로 본 기억이 없다. 단지 잠깐 잠깐 스쳐지나던 몇 개의 장면만이 내 시선속에 잡혀있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 좀 황당했다. 고고학 유물, 역사 문헌, 고대 문학작품 따위와 같은 책표지의 글에 현혹되어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던 책인데 읽자마자 내심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줘야 하는거야? 도대체 뭘 말하고 싶어하는 거지? 그래놓고는 묻고 있다. 이 책이 얼마만큼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 같으냐고. 거기서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글쓴이의 말처럼 이 책은 추론이다. 그럴 것이다, 그러하지 않았을까? 와 같은 맥락에서 출발하여 결국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라는 결론이다. 그런데 이 책, 능청스럽게도 묘한 느낌을 남긴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든다. 우주를 들먹이면서 화성은 살해되었다느니 행성Z니 UFO니 외계인따위를 이야기할 때는 골치아프지만 그 이야기 끝에서 불러내는 고고학의 유물이나 역사적인 문헌의 예는 흥미롭다. 그런 생각, 나도 한번쯤은 해봤다는 말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인류의 고대문명과 결부시키는 글쓴이의 이야기가 그렇게까지 황당하게만 들리지는 않는다. 그토록이나 잘난(?) 현대의 과학으로도 풀 수 없다는 고대문명의 흔적은 현대인들에게 수많은 상상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도 대표적으로 언급되어지는 쿠푸왕의 피라미드와 같이 세계의 불가사의라 불리워지는 흔적과 맞물리는 글쓴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동안 여기저기서 주워들었던 많은 정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현대과학으로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품고 있는 탓이다. 솔직하게 말해 그들에게 지금의 우리보다 더 발달된 확실한 과학적인 사고가 있었을 거라는 데 공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의 진화 이전 혹은 진화 과정속에서 파헤칠 수 없는 어떤 사건이 있었을거라는 추론 역시 가능해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바빌론의 공중정원이나 오벨리스크, 콜로세움과 같은 유적들에 대해 속시원한 해석이 나오지 못하는 까닭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다큐형식으로 많이 다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혹은 현대인의 개념 범주안에서 해석되어지는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출애굽을 시도했던 모세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뒤로 갈수록 종교적인 주제와 겹쳐지는 바람에 조금 식상한 맛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어찌되었든 이렇게 발칙한(?)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새로운 상상을 더 많이 불러올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될수도 있겠구나 싶다. 수많은 가설이 만들어짐으로써 어쩌면 우리가 찾아내고자 하는 해답을 얻을 수도 있을테니 한마디로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 이미 정해놓은 어떤 범주안에서 멈추기보다는 그게 훨씬 낫다는 말이다.

 

나하곤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껄끄러웠던 마음이 읽을수록 책속에 먹혀들었다. 황당해서 짜증이 났던 책임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느낌을 남겨주고 있다.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과학이나 종교에 대해, 그리고 아주 먼 시대로부터 달려왔던 사회적인 어떤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지독한 이기주의라는 속성을 안고 있는게 인간이 아닐까 싶다. 차라리 글쓴이의 말처럼 어딘가에 외계인이 존재했으면 좋겠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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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인류 - 도덕은 진화의 산물인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오준호 옮김 / 미지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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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혼란은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지식만이 필요할 뿐이라는 환상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42쪽)

과학은 인간 중심적 경향을 보인다는 말에 크게 공감한다. 저자가 보여주는 진화의 나무만 보더라도 인간이 얼마나 자기편향적인가를 알 수 있다. 오직 인간만이 무슨 대단한 존재인양 그려져 있는 그림보다 DNA에 기초한 나무에 침팬지, 보노보, 고릴라와 같은 유인원과 같이 한 가지에 매달려 있는 인간의 모습이 훨씬 더 인간적으로 보이는 건 왜일까? 유인원과 인간을 같은 가지에 매달아 놓은 진화의 그림에서 보이듯 그들을 여러방면에서 연구해본다면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을 찾아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도덕성을 이야기하면서 그 흐름을 이끌어가는 존재가 바로 유인원, 보노보인 까딹이다. 보노보는 침팬지보다 인간과 가깝다고 여겨지는 유인원이라고 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윤리나 도덕을 말하고자 하면서 굳이 유인원의 행태를 보여주고자 했던 이유를 찾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가뜩이나 재미없는 주제인데다 장황하게 느껴지는 문구들로 인해 지루한 감도 없지 않았다.

 

도덕법칙은 하늘에서부터 또는 탁월한 이성적 원칙으로부터 부여된 것이 아니다. 고대부터 몸에 뿌리 깊게 밴 가치들로부터 솟아났다. 그것의 근본에는 집단생활에서의 생존이라는 가치가 있다. (-329쪽)

도덕성은 두 개의 H와 관련된 규칙 체계다. '타인을 돕는 것Helping' 과 적어도 동료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 not Hurting' 이다. 이 체계는 타인의 행복과 집단을 개인보다 앞세우라고 요구한다. 물론 개인의 이익이 부정되지는 않지만 협력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개인의 이익 추구를 억제한다. ( -232쪽)

도덕성이 무엇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찾아보았더니 뭐가 그렇게 어려운지... 하여간 인간의 틀로 정의되어지는 것들은 참 복잡하다. 칸트가 이러니 저러니...그래놓고는 인간이기때문에 이런 정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해야 한다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학문적인 의미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양심' 이라는 말로 정의되는 것이 도덕성이다. 한마디로 말해 제 마음에 꺼리낌이 없어야 하고 사회규범에 어긋나지 않는 자율적인 마음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왜 이런 도덕성이 필요한 것일까? 인간은 언제부터 그렇게 도덕성을 갖추며 살았던 것일까? 그렇다면 오직 인간만이 도덕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뭐 이런 궁금증을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타깝게도 인간만이 그런 도덕성을 가졌을 거라는 편협된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생인류에 와서 새롭게 생긴것도 아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집단을 이루는 사회적인 개체속에 자연스럽게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유인원을 통해 밝혀내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그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생존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만 했다는 것은 유인원이든 인간이든 별다를 게 없어 보이니.

 

"신이 없다면 인간은 신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 볼테르

종교가 나타나기 전의 인간의 삶도 반드시 '약육강식'은 아니었다.(-144쪽)

사회적 위계질서는 거대한 금지 시스템이다. 사회적 위계질서는 의심의 여지없이 인간의 도덕성을 진화시킨 배경이다. 인간의 도덕 역시 일종의 금지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충동을 조절하는 것이 관건이다. (- 224쪽)

처음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면서부터 종교문제가 계속 따라 붙었다. 종교와 과학의 대립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아니면 종교를 통해 우리에게 도덕성이 생겨났다는 말인지 영 껄끄러웠다. 그러면서 옮긴이의 말에서 보았던 이 책의 원제에 대한 말이 생각났다. 'The Bonobo And The Atheist(보노보와 무신론자)'... 결국 우리가 갖고 있는 도덕성이라는 것은 종교와는 무관하다는 것이었는데 인류가 진화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사회적 본성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에 크게 공감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종교를 무시하는 건 아니다. 현재까지는 종교의 공백을 대체할 그 무엇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말이 섬뜩(?)하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이끌어가고 있는 존재가 유인원인 까닭인지 책을 보는 내내 얼마전에 보았던 영화의 장면들이 책속의 내용과 겹쳐졌다. 영화속에서 보여졌던 유인원의 모습이 단지 영화속의 모습만은 아니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인간처럼 아픈 동료를 보살펴주고, 싸운 뒤에는 화해를 요청하며, 혼자만 이익을 독차지하려드는 것을 응징하며 그들만의 위계질서를 잡아가는 모습, 어린 새끼를 향한 사랑, 같은 동족을 향한 따스한 동질감... 영장류에서부터 진화한 인간과 다를 바 없던 그들만의 속성이라니! 좀 따분하긴 했지만 읽고 난 뒤의 공감대는 컸다. 다시 또 생각하게 된다. 만들어진 모든 것으로부터 놓여나 자연스러움에 동화되어지는 그날은 언제 올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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