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
마크 월린 지음, 정지인 옮김 / 심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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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트라우마가 그대로 아이의 트라우마가 되고 아이의 행동이나 정서 문제는 부모의 문제를 거울처럼 반영한다.( -63쪽)

책의 제목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트라우마가 유전된다고? 설마!  책을 읽으면서 왜 저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늘 들어왔던 말인데 뭔가 다른 게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제목이기는 했다. 심리분야에서 항상 하는 말이 있다. 누구나 자기 안에 아이를 품고 있다고. 그 아이와 화해를 하고 그 아이와 함께 할때 마음속의 어둠과 불안이 어느정도는 해소될 수 있는거라고. 그렇다면 그 아이의 존재는 누구일까? 바로 자기 자신이다. 어린시절의 자아다. 어린시절에 어떤 이유에서인지 상처를 입고 숨어버린 자아의 내면이라는 것이다. 가슴 깊숙히 숨겨놓은 자아와 마주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과거로 돌아간다는 건  많은 사람에게 아마도 생각보다 힘겨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가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오래전 내 부모, 조부모로부터 시작되어져 내게로까지 전이되어져 온 것이 지금의 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닌 듯 하다. 너무 깊이 각인된 트라우마를 가슴에 안고 사는 내 자신과 마주서고 싶어 관심을 갖게 된 책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동안 다가오는 느낌이 없어 당혹스러웠다. 내내 공감한다고 생각하면서 책장을 넘겼는데도 끝내 그 답답함을 풀지 못했다. 아무래도 좀 더 신중하게 다시한번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

 

'트라우마 반복'이 언제나 원래 사건을 정확히 복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컨대 어느 집안에서 누군가가 범죄를 저질렀는데 후대에 태어난 사람이 스스로 깨닫지도 못한 채 죗값을 대신 치르기도 한다. ( -82쪽)

우리는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생기면 이렇게 말하곤 한다. "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 아이구,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라고. 주변에서, 아니 나조차도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말 중의 하나다. 부모가 덕을 쌓으면 자식대에 복을 받는다거나, 부모가 못된 짓을 하면 자식을 생각하면 저러면 안되지, 라는 말도 심심찮게 하곤 한다. 그렇다면 정말 그런 일이 생겨날까? 복을 받았다는 말보다는 자식이 죗값을 대신 치루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있다. 그만큼 착하게 살라는 말인 줄 알았더니 과학적으로 증명되어진 사실이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실례를 이 책속에서 볼 수 있으니 하는 말이다. 先代의 경험인자가 후손에게까지 그대로 유전된다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더구나 그것으로 인해 후대의 행복이나 불행까지도 좌우될 수 있다니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탓이라는 말이 느닷없이 떠오른다. 왜지?

 

우리는 무의식의 영역에 놓아 둔 자기 상처를 건드리는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 -287쪽)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아픔을 알아주고 보듬어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끌린다. 어린시절에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정에 약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어린시절에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사랑을 주고받는 것에 서툴다. 그렇게 따지고보면 상처를 건드리는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한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그러나 그 반대로 생각할수도 있다. 상처를 준 사람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과는 관계를 맺고 싶어하지 않는 경향도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을까? 어느쪽이 더 나은지는 알 수 없겠으나 책속에서는 상처를 건드리는 사람을 선택함으로써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기회가 될수도 있으니 전자를 그다지 나쁘게만 볼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혹여 그 상처가 덧날까 걱정스러운 까닭이다. 그렇다면 트라우마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저자는 새로운 경험을 몸에 새기는 것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치유의 문장을 외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트라우마의 원인부터 그것을 알아내고 치유하기 위한 노력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지만 그 문제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개선 역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음~ 역시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듯하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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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읽는 남자
안토니오 가리도 지음, 송병선 옮김 / 레드스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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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 역사추리 소설이라는 말을 인정한다. 그만큼 몰입도가 있다는 말이다. 서서히 빠져드는 묘미가 있다. 중반부를 넘어서면서야 겨우 범인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씨줄과 날줄이 교묘하게 얽혀 긴장감을 자아낸다. 그러면서 과연 책속의 주인공은 그 난관을 어찌 빠져나갈까 싶어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마지막까지 읽고나서야 송자가 누구인지, 이 책의 배경은 또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宋慈는 1186년 중국 푸젠성의 젠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자식의 미래를 위해 교육에 집착했다. 아버지의 기대에 따라 의학과 법학, 범죄학 수강한 후 과거 진시에 급제했고 저장성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 직책에 부임하지 못하고 말았다는 소개글이 보인다. 평생을 법의학 연구와 분석에 바쳤으며 그가 도입했던 혁신적인 기법이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고 하니 보통 인물은 아니었던 듯 하다. 인류 역사상 처음이자 가장 중요한 법의학 서적인 <세원집록>이 그의 작품이라 한다. 세원집록... 찾아보니 중국 송나라 송자가 편찬하여 1247년에 간행된 법의학서라고 나온다.  宋이전의 법의학 지식을 총정리하여  펴냈는데 檢屍, 사상자의 판별, 죽음에 이르도록 한 藥과 毒物등을 소개하였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법의학에 관한 것은 근대 과학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점이 많다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宋慈와 그의 저서에 관한 이야기다.

 

중국의 역사속에서 宋代 는 문학도 그렇지만 여러가지 산업과 기술이 발달한 시기였다. 북송과 남송의 시대를 거쳐 나침반이나 화약이 실용화되어 그 우수성이 증명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니 당연히 화약과 화기의 제조 기술도 발전했다. 책속의 배경이 바로 그 시기인듯 하다. 이야기는 막힘없이 긴박하게 흘러간다. 도망자 신세가 되어 숱한 고난을 거치면서도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가족을 모두 잃고, 자신의 삶마져 바람앞의 등불같은 처지에 놓여있을 때에도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자신을 옭가매는 사건의 진실을 추리하는 주인공의 가쁜 호흡이 내내 가슴을 졸이게 만들었다. 이분법적으로 말해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고,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를 궁지에 몰아넣는 사람도 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누군가를 시기하여 모함을 하는 일 역시 삶의 한 단면이다. 그런 모든 과정을 우리는 겪어낸다. 그리고 이기거나 지거나 둘 중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수많은 판단과 선택을 요구하며 그 판단과 선택의 결과로 기뻐하거나 후회를 하거나... 이 책속에 등장하는 인물중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이름만큼은 실명이라고 했다. 팩션이다. 역사적인 사실에 허구를 붙여 만들어낸 이야기. 그러나 책속의 배경은 결코 허구가 아닌 듯 하다. 팩션이라고는 하지만 앞서 말했던 송자라는 사람의 삶과 宋이라는 시대배경이 사실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중국 역사의 한 단면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아울러 전설처럼 전해져내려오는 악비의 이야기는 많은 걸 시사한다.

 

가끔 이렇게 몰입도가 강한 책을 만나게 되면 알수없는 흥분이 나를 찾아온다. 한장 한장 책장을 넘기며 숨고르기를 하고, 주인공을 따라가며 범인을 유추해보는 시간이 재미있다. 범인을 미리 알려주고 시작하는 형식이어도, 기가막힌 반전으로 범인을 드러내는 형식이어도 탄탄한 구도를 갖추고 있는 추리소설이라면 그 맛은 오래도록 기억되게 마련이다.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하는 세상의 진리중 하나는, 나를 가장 아프게 하는 사람은 항상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게는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는다. 아니라고?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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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리는 곳간, 서울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동서남북 우리 땅 4
황선미 지음, 이준선 그림 / 조선북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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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황선미라는 작가의 이름이었다. 저작권 문제로 한동안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작가이기도 했지만 <마당을 나온 암탉>이라는 동화가 남긴 여운이 상당히 강했던 까닭이기도 했다. 그사람은 서울이란 곳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우리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너무나도 익숙한 곳이기에 서울쯤이야, 하는 착각에 빠져 지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의 삶과는 밀접한 관계를 지닌 도시가 서울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은 서울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닌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던 곳에서 뜻밖의 이야기와 마주치기도 한다. 서울의 역사는 깊다. 그리고 넓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너무 쉽게 피상적으로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기원이 이런 책을 세상에 나오게 했을까? 아니면 그냥 서울에는 이런 곳도 있어요, 라고 안내를 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어찌되었든 이 책은 단편적이나마 서울이란 도시에 대해 다시한번 짚어주고 있다. 만약 서울을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친절한 안내서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골목마다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는 말이 보인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골목이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서울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얼마전 젠트리피케이션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의 도시 서울은 어째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할 수 없는 것인지 무척이나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순간이기도 했는데 이 책을 보면서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것만이라도 지켜내야 하지 않을까하는 마음이 앞선다. 좀 더 다양한 곳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어린이들을 위한 책인 듯 싶어 욕심을 버린다.

 

새롭게 알게 된 서울의 역사가 흥미를 끈다. 서울 최초의 상설시장이라는 남대문시장은 사실 조선시대의 칠패시장이 대한제국이 도로를 정비하면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상인들이 남대문시장의 상권을 휘어잡자 한국인들이 자본을 모아서 역시 조선시대의 배오개시장이 있던 자리에 동대문시장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동대문시장은 그렇게 일제의 힘에 대응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으로 세워진 것이라는 말이다. 알고자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진즉에 알았을 것을 이제사 알게 된다. 그건 그렇다해도 우리가 흔히 쓰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란 말은 일제강점기의 잔재인 까닭에 이제부터라도 숭례문이나 흥인지문으로 올바르게 불러주어야 한다. 서울성곽을 한양도성으로 바꿔 부르는 것처럼. 시장이름까지야 어쩔 수 없다해도 중요한 문화재의 이름만큼은 제대로 불러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하는 말이다.

 

오래전부터 서울말이 있었다는 말은 자주 들었었다. 서울사투리... 얼핏 생각하기에 서울말이 표준어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의외로 서울사투리는 내 주변에서 흔하게 들려왔던 말이었음을 알게 되고 웃음이 났다. 계란을 겨란, ~같이를 ~겉이, ~하고를 ~허구, 네가를 니가, 만들다를 맨들다, ~부터를 ~부텀, 얼마나를 을매나, 가위를 가우로... 이런 말들이 서울사투리였다는 건 처음 알았다. 그런데 계단을 가우당이라고 하는 것은 사투리가 아니라 일제의 잔재로 보여진다. 가만히 읉조려보니 서울사투리라는 게 왠지 귀여운 느낌을 준다. 그러나저러나 작금의 서울에는 서울토박이가 그다지 많지않을터이니 아마도 머지않은 시간에 서울사투리 역시 사라지는 문화의 대열에 서게 될 것 같아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각설하고, 서울은 넓다. 갈 곳도 많은데 몰라서 못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책은 친절한 안내서다. 서울의 숨은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물론 이런 책을 벗삼아 알고 가는 발걸음이라면 더욱 더 재미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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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어파슬리, 모어일러스트 - 일상이 예술이 되는 시간, 감성 손그림 수업
김혜빈 지음 / 청림Life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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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채화, 유화, 연필화, 색연필화, 담채화, 민화, 판화, 보테니컬화, 카툰, 일러스트.... 찾아보면 그림의 종류도 엄청 다양하다. 그런데 그 많은 그림이 어떤 것이라 할 것도 없이 나처럼 그림과는 너무 먼 사람에게는 부러움을 느끼게 한다. 특히나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일상적인 그림이라면 더욱 더 그렇지 않은가 싶다. 그런 그림을 보면서 와, 어떻게 그린거지? 나도 한번 그려보고 싶다... 이런 생각하지 않는 사람 몇이나 될까?  그래서 나도 시작했다. 일단 가장 기본이 될 것 같아 시작한 연필화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래도 소싯적에는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학교복도에 내 그림이 걸리기도 했었는데 말이다. 마음은 벌써 저만치로 앞서가 있는데 배워야 할 건 너무 많았다. 그렇게 한창 헤매고 있는데 눈에 띈 책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 책속에 등장하는 소소한 것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식빵, 케이크, 커피를 시작으로 프라이팬, 주전자, 컵과 같은 주방도구를 보여주더니 전화기, 시계, 선풍기, 여행가방, 카메라, 상자, 식물 등등등... 내 눈에 쏙쏙 들어오는 것들을 그리고 있다.

 

책을 펼치지 않아도 이미 책표지에 나와 있는 앙증맞은 그림들을 보게 된다. 달걀후라이나 도시락을 보면서 이야, 정말 그럴 듯 하군! 도대체 어떻게 그린거야? 하다가 나도 한번 그려볼까? 하는 마음이 생겨날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책은 친절하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부터 알려준다. 그리고 각각의 재료들, 예를들면 연필이나 색연필을 어떻게 사용하면 되는지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종이, 펜, 연필, 색연필, 지우개, 칼이나 연필깎이를 구입할 때 이런 것들은 조금 더 신경써주세요라는 말도 초보자에게는 정말 중요하다진즉부터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아마도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을 펼치고 지은이가 하라는대로 따라서 그리면 된다. 그 작은 그림 하나하나마다 마치 옆에 있는 선생님처럼 세세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나요?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시간이 답이다. 꾸준하게 그리는 것이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 노력도 없이 얻어지는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처음 그림을 시작한다고 도구를 준비할 때가 생각난다. 그 때 처음 알았다. 스케치북도 한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수채화용이나 드로잉을 위한 종이가 다르다는 것을. 같은 그림이라도 어떤 종이에 그리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르게 보인다는 것도.  먼저 시작한 선배들의 그림을 보면서 나는 왜 안되는거야? 부러웠다. 내 마음에 흡족한 그림이 나오지 않아 조바심이 났었다. 그림에 소질도 없는데 괜히 시작했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단시간에 좋아질 수 없다는 것을. 이 깜찍한 그림들과 나도 빨리 친해져야겠다. ^^*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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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불멸주의자 - 인류 문명을 움직여온 죽음의 사회심리학
셸던 솔로몬.제프 그린버그.톰 피진스키 지음, 이은경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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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이성중에서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은 어느쪽일까? 우리를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원천적인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일까?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이 우리에게 외면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죽음도 그렇다. 인간의 삶속에서 일상적으로 죽음은 외면당한다. 저 유명한 소크라테스조차 철학의 과제는 '죽는 법 배우기'라고 규정했다고 아무리 말해도, '사람이 죽음에 맞서 무엇을 하는가'를 집성한 기록이 역사라고 헤겔이 외쳐댔다고 해도, 실제적으로는 과학심리학 영역에서조차 죽음이라는 주제가 큰 주목을 끌지 못했다고 한다.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지만 책속의 실험결과는 상당히 놀라웠다. 죽음이 우리의 사고를 그토록이나 강하게 바꿔놓을 수 있다니!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일상에서 죽음을 배제시키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이 책은 그런 관점에서 시작한 것 같다. 어린시절에는 죽음에 관한 공포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언제부터, 어떻게 인간은 죽음에 관한 공포를 자각하게 되는 것일까? 죽음을 의식을 하기 시작하면 어떤 느낌이 가장 먼저 찾아오게 될까? 공포? 불안?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것 때문에? 그래서 인간은 불멸을 꿈꿔왔던 것일까?

 

책장을 넘기면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말이 '심리적 안정'이라는 말이었다. 어린시절에는 너무도 중요한 말이라고. 어찌보면 어린시절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속에서 가장 중요한 말일 것이다. 그 말은 곧 자존감이란 말을 내포하며 자존감으로 인해 많은 것이 좌우되기도 한다. 자존감이 결여되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며 심지어 죽음의 공포와 맞닥뜨리기도 한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죽음에 관한 의식을 갖기 시작하고, 그것을 인지하기 시작하면 죽음을 히피하기 위한 온갖 내적 수단을 사용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다시말해 죽음을 생각하기 보다는 다른 쪽으로 생각을 돌리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성장과정에서 겪는 많은 질서, 규제, 규범과 같은 것들이 죽음을 부정하는 일종의 도구 역할을 한다는 말이었다. 전지전능하게만 보였던 부모가 유약한 존재로 인식되어지기 시작하면 아이는 그때부터 자기가 속한 문화의 사회적 권위나 관습으로부터 더 안정을 느낄 수 있게 된다는 말이 어느만큼은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했다. 아이라 할지라도 죽음은 피할수도, 되돌릴수도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면 자기가 속한 문화가 규정한대로 행동하다는 말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이 세계에 가치있는 공헌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야만 안심한다. (-67쪽)  이 말에 공감하는가? 이 말이 곧 자존감이라는 의미일까? 이후로도 책은 계속해서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우리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다루고 있다. '자존감', 과연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또 그것이 왜 이 책의 주제로 등장한 죽음이나 불멸과 연관성을 갖게 되는 것일까?  인간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자기기만'을 사용하며, 낮은 자존감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기도 한다는 말이 보인다. 그것이 채워지지 못했을 경우에 나타나는 결과는 그야말로 참담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불멸을 꿈꿔온 사람들은 '실제 불명성'과 '상징적 불멸성'의 형태로 불멸의 존재가 되고자 했다. 전자는 사후세계와 영혼에 대한 믿음을 추구하고는 것이고, 후자는 죽은후에도 자신을 나타내는 상징적 자취를 남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죽지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던 진시황제나 피라미드를 만든 이집트의 파라오에 관한 기록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따지고 보면 옛날에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현재도 과학을 통해 인간은 끝없이 불멸을 꿈꾼다. 냉동인간이라거나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대체인간을 그렸던 영화속의 일들이 과연 영화로만 존재하는 것인지 묻고 싶어진다.

 

당신은 얼마나 자주 의식적으로 죽음을 생각하는가? 죽음에 관한 생각이 당신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가? ... 책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은 많았다. 심지어 강박장애나 불안장애, 정신분열증을 죽음에 저항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정말 그럴까? 살짝 의심이 생긴다. 죽음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내기 위한 학술적인 정의로밖에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자살하는 이유가 자존감이 약해서라고?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고통이 너무 커서 죽음을 택하는 것조차 죽음의 공포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자살하는 사람이 자기가 죽은 후에도 계속 살아남을 것이라고 믿는 경우가 많다는 말은 왠지 껄끄럽다. 실제 불멸성을 기원하는 바램에서 비롯되어졌다는 주장이 내게는 단지 학술적인 정의로만 다가온다는 것이다. 또하나의 테두리안에 인간을 가두어버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은 역사를 통해, 혹은 수많은 실험결과를 통해 죽음에 관한 인간의 무의식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굳이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말하지 않아도 죽음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문화를 만들어간다면 간단해진다. 죽음을 두려운 것, 공포스러운 것, 외면해야 할 것처럼 인식하게 만든 것도 문화인 까닭이다. 모든 학문이나 문화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것에 따라 인간의 삶은 좌우된다. 그러니 죽음의 공포에 대처하려는 노력을 할 필요도 없어보인다.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듯이 죽음도 삶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면 그렇게까지 복잡하지는 않을 것 같다. 아주 오래된 역사속에서도 보여지듯이 죽음을 축복의 형태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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