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브라질
장 크리스토프 뤼팽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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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이야기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실화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프랑스 역사에서 거의 완전히 잊혀져 있는 이야기.. 아니 어쩌면 잊고 싶어하는 이야기일런지도 모를... 그런 이야기.
책장에서 조용히 나를 기다려 주었던 책.. 그래서일까? 읽고 싶었던 처음의 그 열정을 잊지 않은채 이 책의 첫표지와 마주섰다. 붉은 브라질... 제목과 빨간색 표지가 주는 느낌은 참으로 강렬하게 다가왔다. 우린 적을 괴멸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에 태어났다. 하지만 인디오들은 적과 섞이려 하지. 인디오들은 자기들에게 적대적인 것을 흡수하는 놀라운 특성을 가지고 있어. 그들은 모든 것이 서로 섞여들어 풍요로워지는 숲,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먹히는 숲에서 그걸 배웠던 거야... 책 표지의 커다란 제목아래에 아주 작은 글씨로 쓰여져 있던 문장들을 보면서 나는 막연하게나마 프랑스가 브라질을 식민지화하기 위하여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던 그 과정들을 보여주겠거니 했었다. 하지만 책장을 넘겨가면서 나의 섣부른 판단을 원망해야만 했다. 결코 브라질을 정복하기위해 떠난 자들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야 할 진리에 대해 말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위그노들이나 순수한 마음속에 끝없이 파고 들고 싶어하는 종교적인 이념의 세계들은 왠지 역겹기까지 했다. 무엇때문일까? 가는 곳마다 정신적인 평안을 얻기 위한 종교를 빌어 자신들만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기 바쁜 믿음이란 실체.. 결국은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종교라는 매개체를 사용하려드는 군상들 앞에서는 구역질이 났다.

빌가뇽이란 자의 방대한 계획하에 많은 사람들이 배에 태워진다. 그들중에는 어린 남매 쥐스트와 콜롱브도 통역을 위한 역할을 배우기 위하여 동행하게 되고... 하지만 남매에게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만이 있었을 뿐이다. 오랜 항해끝에 과나바라만의 섬에 도착한 그들앞에 놓여진 것은 힘겨운 노동과 식인종으로 알려져 있는 인디오들과의 싸움이었다.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전락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빌가뇽이 성을 쌓으며 요새를 만드는 중에 섬으로 밀어닥친 프로테스탄트들과의 갈등을 예고하게 된다. 그때부터 작은 섬안에서 작은 종교전쟁이 시작되지만 승리의 여신은 빌가뇽의 손을 들어준다. 하지만 그 승리가 완전한 승리가 아니었으니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빌가뇽은 쥐스트에게 섬을 맡긴채 다시 프랑스로 배를 돌린다. 콜롱브는 어떤가? 이미 그와같은 현실들을 꿰뚫어볼 수 있었던 그녀는 인디오들의 세상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만다. 그들의 열정과 순수함에 마음을 빼앗겨버린 것이다. 아니 어쩌면 위선적인 섬사람들의 모습이 싫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를일이다. 인디오들과 살면서 많은 것을 배우는 콜롱브는 인디오들조차 마음의 지도자로 섬기는 파이-로라는 유럽노인을 만나게 되고 그들과 섞여 살면서 사람으로써 살아가야 할 기본적인 진리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 역시 파이-로의 뒤를 이어 마음의 지도자가 된다. 

나는 책장을 넘기면서 정복하려는 자와 정복당하는 자의 입장만을 보려고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빌가뇽이나 프로테스탄트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었던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우리들의 모습, 쥐스트의 어정쩡한 태도속에 숨겨져 있었던 인간의 이중성, 그리고 콜롱브를 통해 보여주고 싶어했던 우리들의 내부 깊숙히 숨겨져 있는 순수... 친남매인줄 알았으나 결국 친남매가 아닌 것을 알게 된 쥐스트와 콜롱브의 사랑이야기... 사람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자연과 함께 할 때에 진정한 인간의 내면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건 아닌가? 이기적인 모습, 이중적인 모습, 이념에 사로잡힌 아집 그 모든 것들이 순수를 이겨내지는 못했다는 거였다. 자연과 하나가 된 순수앞에서 그 모든 것들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는 거였다. 처음부터 그들을 반겨주지 않았던 브라질의 땅덩어리. 물과 식량이 부족했고 또한 풍토병과 전염병으로 그들을 옭아매었다. 그리고 인디오들을 통해 공포마져 선사해 주었으나 그것을 알기도 전에 그들은 종교라는 틀에 얽매여 그들만의 싸움을 하기에 바빴으니... 마지막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혼자 남게 된 쥐스트는 자신의 아집에서 벗어나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인디오의 부족들과 살고 있는 콜롱브를 찾아가게 된다. 우리를 구해줘... 구해달라, 뭘 구해달라는 거지? 그 순간만큼은 인간이 인간의 탈을 벗어버리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눈물나는 장면이 아닌가 싶었다. 콜롱브의 젖가슴에 그려져 있던 번개와 별을 나타내는 까맣고 빨간 그림들을 보고 뒷걸음치던 쥐스트에게 콜롱브가 말했었지.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마.. 콜롱브의 눈을 통해 뒤집힌 세상의 이미지를 보는 쥐스트. 쥐스트가 보았던 것은 태양속에서 반짝이는 거대한 푸른 하늘이었다.

투피족 인디오 세계에는 '홍수가 일어난 뒤에 그 땅에는 오누이 같은 한 쌍의 남자와 여자만 남았고, 이들 젊은 남녀의 결합에서 새 인류가 탄생했다'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실화와 전설을 솜씨 좋게 버무린 작품이라고 옮긴이는 말하고 있다. 나의 느낌으로는 문화적인 충돌보다 종교적인 갈등이 더 크게 부각되어지지 않았나 싶다. 현실을 무시한채 문화와 종교를 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랬기에 파이-로의 사상이 더 큰 느낌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를일이다.

"사람들이 저지른 최대의 잘못은 신을 하늘에 들여놓고 거기서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지... 신은 모든 존재와 모든 물체 속에 내재해 있어. 어떤 일이든 신의 의지를 표시하는 것이지."

"인디오들에게는 만물이 신성한 것이지. 꽃,바위,산에서 흐르는 물, 무수한 정령이 살면서 사물이며 풍경과 존재들을 보고해주는 세상. 이런 것들을 지켜주기는커녕 아무 거리낌 없이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은 이 세계의 아무것도 건드릴 수 없어."

"그들은 자연의 신성함을 벗기고 수많은 생명을 살육하는 흉악한 행위를 일삼으면서 자연을 무방비 상태로 방치해두고 있지. 그들이 섬을 어떤 꼴로 만들어놨는지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어. 거기서는 생명이 자라지 않아.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는 걸 봐. 그들이 이 땅의 주인이 된다면 죽음의 땅으로 만들어놓고 말거야."

"지상의 낙원에서 쫓겨난 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야. 그리고 인간은 창조물을 파괴하기 위해 낙원을 점령한 것이야."  <448-449쪽>

파이-로의 말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우리들을 향한 경고의 메세지가 아닐까 싶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영혼의 깊이는 얼만큼이나 될까? 느닷없이 나는 그것이 궁금해졌다. 왜일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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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속에는 네 개의 방이 들어 있다는 인도 속담이 있다.

육체의 방, 정신의 방, 감정의 방, 영혼의 방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하나의 방에서 보내는 경향이 있는데

네 개의 방을 드나들지 않는다면 완전해질 수 없다.

< 사람은 왜 만족을 모르는가? > 중에서-

사람은 왜 만족을 모르는가? 를 읽으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과 느낌들이 교차했다.
단지 나 한사람의 잣대로 인하여 주변 사람들을 너무도 힘들게 한 것 같아 마음이 싸아해졌다.
이제는 어느정도 받아들이며 살아갈 나이도 되었건만 끝도 없이 내 욕심만 차린다.
반평생을 살고도 알지 못하는 삶의 아이러니...
서글픈 일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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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만족을 모르는가? - 원하는 것을 가져도 늘 부족한 사람들의 7가지 심리 분석
로리 애슈너.미치 메이어슨 지음, 조영희 옮김 / 에코의서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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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를 향해 돌진하다가 느닷없이 중단한 적이 있는가? 혹시라도 그 중단의 이유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나 자신이 무능하다고 생각이 되어서 그랬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는가?
자신의 열등감을 남으로부터 보상받으려 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내가 아니면 안된다고 늘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는가? 내가 할게...
행여라도 내 안의 상처를 드러내 보이며 그것에 대한 위안을 받고 싶어했던 적은 없었는가?
기쁠 때 진정으로 기뻐할 줄을 알며 슬플 때 진정으로 슬퍼해본 적이 있는가?
살아가고 있는 그 자체가 지루하고 매사 싫증이 난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일종의 방어라고 말해주고 있다. 일종의 무력감이라고..
어렸을 때부터 비교 당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늘 자신을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을 찾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찾는다고 한다. 그것은 비교를 통해 남과 다르지 않다는 안전감을 갖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속에서 만나는 질문과 대답은 몇가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전해주고자 하는 메세지의 여운은 강하다. 단지 7가지 증상과 그 증상에 따른 심리분석을 보여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내게 전해져 오는 것은 그것보다는 더 많았던 것 같다. 어린시절부터 우리는 부모를 통해서 무수히도 많은 비교대상을 만나게 되고 공연스레 위축되는 감정을 알게 된다. 잘해야 한다고, 아니 잘해야 할 것 같다는 강박관념에 휘둘리며 살다보니 당연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결과가 두려워지게 된다.  혹시라도 실패하면 어쩌지? 엄마가 혹은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쩌지? 이런 마음이 앞선다. 누구의 탓일까? 단지 그렇게 교육을 시켰던 부모의 탓일까? 그렇다면 우리의 교육현실을 다시한번 더 안타까워하게 된다. 그렇게밖에는 키워질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 또 안타깝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살아가지 않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단지 마음에 달려있을 뿐이라고 말해준다. 모든 것은 내 마음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본모습을 감춘 채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며 어느 누구도 그것을 피해갈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길들여진 자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평상시 보여주는 행동보다 더 착하고, 우호적이며 협조적인 모습으로 세상을 대한다. 비밀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조금씩은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는 어떤 면을 갖고 있다. <-30쪽>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을 몇이나 만나보았을까? 그렇게 솔직한 사람들을 만났을 때 나는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사실 감정을 솔직하게 다 보여준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나보다는 남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나보다는 남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배려하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어떤가? 나보다 먼저 남을 생각해주다가는 도태되기 십상이다. 오히려 짓밟히는 삶을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우리는 배운데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일까? 살아간다는 것은 끝도없는 모순의 연속인것 같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조차도 솔직하지 못한 모습을 수도 없이 보게 된다. 자신의 속내를 다 보여주지 못하는 까닭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만난 뒤에도 무언가가 더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며 만족하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겠는가? 나부터도 온전한 나를 보여주지 못하면서 상대방에게 다 보여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욕심이다. 괜찮은 사람을 만나려면 나부터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상대방이 다 보여주길 원한다면 나부터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모든것은 내게로부터 비롯되는 것을. 그러자면 내가 나를 먼저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한다. 흔한 말로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남도 사랑할 줄 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솔직해야 한다. 좋은 관계를 맺고자 하면서 위선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다. 바로 지금의 내 상태를 보여줄 줄 알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다. 관계가 무참히 깨질때까지 감정들을 쌓아 놓을 것이 아니라 항상  살아있는 감정을 공유해야 한다고. 진정한 자유는 혼자 있는 시간만을 의미하지 않고 나 자신이 될 수 있는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마음을 좀더 열고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낼 줄 알아야 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습관은 바뀐다. 당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감정을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은 진정 누구인가? 불안하다면 자신에게 물어보라. 당신의 이야기를 하거나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할 때 기꺼이 들어줄 사람이 있는가? 신뢰란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이 느끼고 바라고 있는 것을 껴안고 받아들여야만 다른 사람들을 믿는 일도 가능하다. 세상은 우리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166쪽>

언젠가 나를 너무도 속상하게 하는 일이 생겼었다. 그 일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던 자리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나를 힘겹게 했던 그 일은 정말 별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나만이 그런 생각, 그런 일을 겪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거기 모인 친구들 대부분이 마음속에 힘겨운 일 몇가지쯤은 모두 공통적으로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너도?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크게 웃었던 것 같다. 누군가와 비슷한 그 어떤 것을 공유한다는 것은 그사람과 좀 더 가깝게 느껴질수도 있게 한다. 좋은 일보다는 나쁜일로 그렇게 느껴지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부정적인 것에 기대어 사는 것이야말로 끔찍하고 참담한 일이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위안에 불과할 뿐, 그럴수록 점점더 부정적이게 되고 자신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각설하고 이 책속에서 말해주고자 하는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여덟가지 방법은 이렇다.
첫째,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보다 절벽위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왜 진실을 말하는 것이 그토록 힘든가.
둘째, 불만족의 증상을 파악하고 그것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이해한다. 우리가 저지르는 자기 파괴적인 행동 대부분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셋째, 삶을 돌아보며 자신의 믿음을 확인한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며 결코 남을 달라지게 할 수 없다. 즉 우리 자신을 바꾸려면 거울을 자신을 향해 돌려놓아야만 한다.
넷째,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면서 좌절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라. 진정한 목적을 찾기 위해 중요한 것을 먼저 찾아야 한다.
다섯째, 자신의 목소리를 표현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이고, 지금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 나의 생각은 이러저러하다.'라고 말할 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여섯째, 사람들과 공감대를 나눈다. 사람들과 공감할 줄 안다는 것은 편견없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상대방을 변화시키려 들거나 충고하지 않으며 그 사람 옆에 있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일곱째, 마음의 균형을 찾는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네 개의 방이 들어 있다는 인도 속담이 있다. 육체의 방, 정신의 방, 감정의 방, 영혼의 방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하나의 방에서 보내는 경향이 있는데 네 개의 방을 드나들지 않는다면 완전해질 수 없다.
여덟째, 믿음을 키운다. 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영성이 중요할까? 정신은 힘의 근원이다. 그것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의 시작이며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의 출발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고의적으로 자기계발서를 피해왔다. 뻔한 말들이 싫었던 까닭이다. 결국은 모든 것이 나로부터 비롯되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교과서적인 이론들만 무수한 책을 가까이 두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아들녀석과의 소통을 위해서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왜일까? 왜 저런 모습을 보여주는거지? 하는 끝도 없을 것 같은 의문점들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직 어린 녀석을 바라보면서 하나하나 만족하지 못하는 내 자신에게 지쳐가고 있었던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말초신경을 자극해오는 그 어떤 느낌들이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지나쳐왔던 나의 모습들이 오버랩되었다. 그랬구나, 내가 그렇게 살아왔던 거였구나 싶었다. 나를 아프게 했던 책...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던 책... 
나는 이 책을 수시로 호출할 것 같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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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사랑을 이야기하다 - 신화 속에서 찾은 24가지 사랑 이야기
최복현 지음 / 이른아침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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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매력은 끝이 없는 것 같다. 사실 뭐 그렇게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따지고보면 늘 그 얘기가 그얘긴데도 볼 때마다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든다. 아마도 내가 신화를 좋아하는 까닭이려니 생각한다. 옛날 늦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던 할머니가 빌고 빌어 아이를 낳았는데 구렁이였다. 그래도 할머니는 열심히 키웠다. 나이든 구렁이 아들이 장가를 보내달라고 했을 때 할머니는 잠시의 망설임을 뒤로 하고 옆집의 어여쁜 셋째딸과 결혼을 시킨다. 결혼 하던 날 밤에 구렁이 신랑은 멋지고 잘생긴 남자로 변하였다. 저주를 받았으나 사랑을 얻었으므로 인간의 모습이 되었다는 이야기. 그런데 그를 시샘한 두 언니가 있어 구렁이 신랑이 한양으로 올라간 뒤에 그의 허물을 태우게 하니 구렁이 신랑은 아내가 자기를 버렸음을 알고 그대로 떠나버렸다. 아내는 어찌 되었을까? 우리의 설화 한편이다.

그런데 설화속에서 만나지는 사랑의 모습을 그리스 신화속에서도 보게 된다. 두 언니들로 인하여 에로스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는 프시케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구렁이 신랑을 찾아 끝도 없는 길을 헤매던 아내는 검은 돌을 흰돌로 만들기도 하고, 끝없이 펼쳐진 돌밭을 일구기도 하고, 새의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종내는 구렁이 신랑의 지하왕국을 찾아가 남편과 해후를 하게 된다. 프시케 또한 그렇다. 어딘지도 모를 남편의 행적을 찾아 나서면서 아프로디테의 시험에 걸려들게 되지만 그 역시 신들의 도움을 받아 마지막 단계까지 다다르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설화와 그리스 신화속에서의 여인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의 구렁이 아내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구렁이 신랑에게 묘한 여운의 수수께끼같은 말을 빌어서 끝까지 자기 자신이 지키지 못한 사랑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 사랑을 다시 찾게 되지만 프시케는 다르다. 마지막까지도 호기심을 버리지 못한채 죽음의 잠에 빠져들게 되어 결국 에로스의 도움으로 사랑을 완성하게 된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모습이다. 그것뿐인가? 이 책속에서 만날 수 있는 적장을 사랑한 메가라의 공주 스킬라의 이야기는 마치도 우리의 낙랑공주 이야기와 그 흐름이 흡사하다. 호동왕자를 위하여 자명고를 찢어버린 낙랑과 적장을 사랑하게 되어 아버지의 자줏빛 머리카락을 뽑아버리는 스킬라.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건데 이토록이나 힘겨운 고통을 잉태하는가 말이다.

신기한 것은 사랑도 무슨 특권인양 다루었다는 점이다. 늘 그렇다. 너무나 멋지고 잘생겼거나 여신도 질투할 정도의 미모를 가졌거나 하는 식의 이야기는 어찌보면 다소 억지스러운 면도 있는 듯 보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을 한번 더 쳐다보게 되는 그것또한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 사랑이 잉태하고 있는 것들의 느낌은 참으로 다양하다. 믿음이나 의심, 혹은 질투와 시기, 오해와 열정,증오와 저주 따위의 힘겨운 고통도 들어있다. 프시케와 에로스에게서 나온 딸의 이름이 '환희'라는 것만 보아도 사랑의 결실을 맺기까지가 엄청 어려운 것만은 사실인듯 보인다. 작가 또한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 비록 고통을 받을지라도 한 번쯤은 죽을만큼 사랑해 볼 일이다.... 라고.

아폴론을 피해 월계수 나무가 되어버린 다프네, 꽃으로 다시 피어난 히아킨토스나 아도니스,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자아도취의 의미 나르키소스의 이야기, 제우스의 여인이었던 이오, 칼리스토,레토등 불운의 여인들,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의 운명적인 사랑, 그리고 이 책속에서는 보이지 않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죽음도 불사한 사랑이야기등 수도 없이 많은 사랑이야기가 신화속에서나 혹은 우리의 설화속에서 숨을 쉬고 있다. 한결같이 고통이 따르는 사랑이야기가 더 많은 것을 보면 누구나에게 좋고 아름다운 것들은 그것을 차지한다는 게 어렵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어느 영화속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삶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그때 그때 주지 않는다고..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제발 그 얄미운 바람이라는 여자와는 결혼하지 말아줘요... 사냥에 지쳐 잠시 쉬면서 시원하게 불어주는 바람에 속삭이던 케팔로스의 목소리를 바람이란 여자와 정분이 난 줄 알았다던 그의 아내 프로크리스가 죽어가면서 한 말이다. 그때부터 아내 외에 다른 여자와 속삭이는 사람을 바람난 사람이라고 했다나 뭐라나... 헤라의 질투때문에 제우스의 아이를 갖고도 힘겨운 나날을 견뎌야 했던 레토에게 한모금의 물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던 농부들이 목마름도 잊은 채 퍼부었던 레토의 저주로 인하여 등이 녹색으로 변하고 배가 흰색으로 변하여 죽을 때까지 물가를 떠나지 못했다는 개구리의 시조이야기는 이 책속에서 찾아낸 재미이기도 했다. 이렇듯 신화속에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머문다.

사랑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다. 어찌보면 인류의 역사는 사랑의 역사라고 했던 작자의 말처럼 세상은 온통 사랑타령이 넘쳐나는 것 같다. 좀 더 멋지거나 아름다운 상대를 차지하고 싶어하는 열망 또한 누구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 사람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고 또한 시간이 흘러서 그 사람에게 길들여지게 된다고 한다. 즉 익숙해진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이다. 이미 익숙해져버린 것에서는 새로운 느낌을 찾아볼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또다른 누군가를 찾아다니며 또다른 사랑을 꿈꾸게 된다고 하니 그야말로 사랑의 이중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들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하나의 기준이 되고 있다고? ... 알 수 없다.

책장을 덮고 나니 여우와 어린왕자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길들여진다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여우가 말했었다.
"오로지 마음으로만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단다."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기에 그것을 찾아 헤매는 건지도 모를일이다. 여우의 말처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를일이다.
"마음으로 바람을 볼 수 있을 때 엄마를 만날 수 있을거야"
<오세암>이란 영화속에서 엄마를 그리워하던 길손이에게 스님이 해주었던 말이다. 도대체 마음으로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도 요란하지 않게 마음으로 할 일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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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옛날에, 이 땅에는 거대한 공허함이 있었어요. 무엇가를 기다리고 있었죠.
채워지길 기다리며, 사랑을 줄 수 있는 누군가를...

아주 멋진 카피라는 생각을 한다. 공허함이 있었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
태초의 카오스도 아니고 너무도 지극한 그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무엇일까? 족장의 혈통으로 태어났으나 족장이 될수 없다. 족장으로서의 영민함과 자질을 충분히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족장의 후계자로 키워지지 못한다. 그러나 무언가 되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할 수 있을거라고 믿는 그 커다란 생각속에서 자라나는 파이키아.
고래등을 타고 왔다는 부족의 선조 이름이 파이키아였기에 아버지는 그 아이에게 억지로라도 파이키아라는 이름을 지어준 채 떠났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쩌면 자기 자신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책임과 의무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이유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마을의 족장이었던 할아버지만큼은 파이키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자라서, 여자이기 때문에 결단코 마을의 족장이 될 수 없었고 또한 지도자로서의 길을 갈 수 없다는  아주 단순한 전통에 의한 관념때문이다. 왜 안될까? 여자는 왜 안되는걸까?

자연을 소재로 한 영화이거나 동물 혹은 곤충들의 세계를 그려내는 영화속에는 작은 감동들이 하나씩은 자리를 차고 앉아 나 여기 있소~ 하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영화속에서는 어린 소녀 파이키아와 고래의 의사소통이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아니 인정해 줄 수 없는 지도자로서의 의무를 선조가 타고 왔다던 고래만이 인정해 주고 또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러니다. 어쩌면 그리도 고집스러운지 우리의 유교적인 관습에 젖어 여자가 어딜 감히? 라고 호통을 치던  우리네 할아버지들과 아주 똑같다. 은근슬쩍 짜증과 화가 밀려온다.  족장으로서의 길, 지도자로서의 길을 원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되야만 하는 운명을 지녔던 파이키아. 아버지의 차를 타고 떠나던 그 소녀에게 바닷속의 고래가 말을 한다. 떠나면 안된다고.  차를 세워요! 집으로 돌아가겠어요... 그러나 소녀의 귀환은 환영받지 못한다.

  


짜여진듯한 각본이지만 늘 그렇다.  배역과 배우가 얼만큼의 혼연일체가 되느냐에 따라 영화를 보는 재미가 한결 좋아지던가  아니면 별것 아닌것으로 전락하게 된다. 파이키아 역을 소화해내던 소녀 배우의 모습은 정말 가녀리다.  아마도 소녀가 소화해내야 할 배역의 의미를 더 커보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고래등에 올라 타고 발을 차며 '가자'고 말하던 소녀는 이미 맑은 영혼의 파이키라와 닮아 있었던 듯 싶다.
자연속의 모든 것들은 우리와 동화되지 못하면 소통을 원하지 않는 듯 하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위대하다는 뜻일까? 그만큼 맑고 순수해야 한다는 뜻일까?  영화한편속에서 참으로 많은 것들을 찾아낸다.  죽어가는 자연을 살리고 싶어하는 이미지와 여자와 남자의 차별에 대한 말없는 항변과  어찌보면 인종적인 그 무엇까지도 담아내고 싶었던 듯 하다. 고집스럽던 할아버지의 그 무표정과 눈물을 흘리며 할아버지에게 바치는 웅변과 노래를 하던 소녀의 가녀린 이미지가 오버랩되어 온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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