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2
김만중 지음, 송성욱 옮김 / 민음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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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내게 경고하기를 '구운몽은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 고 했다. 유치하다거나 그저 그런 내용일것이라는 조선 시대 소설에 대한 편견들을 버려야 한다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덤벼들었다가는 큰 코 다친다고. 최대한 고전의 분위기를 살리고자 했다는 작품 해설속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쉽지 않은 문체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겁을 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주 친절하게 각주를 달아 주었으니 하는 말이다. <九雲夢>은 학창시절 국어시간에도 필수적으로 나오는 작품이었다. 그랬기에 서포 김만중이라는 지은이의 이름도 낯설지 않다. <사씨남정기>와 <구운몽九雲夢>을 대표하는 이름이 김만중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김만중은 어떤 인물일까? 대단한 집안내력은 말하지 않는다해도 그가 거쳐간 벼슬 또한 만만치가 않다. 스물아홉 살에 장원 급제하여 도승지, 대제학, 대사헌을 거쳐 예조판서를 역임했다는 그의 경력을 보더라도 대단한 학식과 재주를 가진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그런 그가 부귀영화의 부질없음을 이야기하는 책을 쓰게 된 이유가 조정에 대한 비판으로 유배생활을 해야 했던 때문이라고 하니 사람이 어떠한 상황에 처하는가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유배지에서 홀로 된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복잡한 마음을 담기 위해 썼다는 것이 바로 <구운몽九雲夢>일지도 모른다고는 하지만.

성실한 불자였던 성진은 여덟 명의 선녀와 만나  주고 받았던 말 몇마디로 인해 잠깐의 흐트러짐을 보인다. 그런 이유로 스승 육관대사에게 죄를 입어 인간 세상에 양소유라는 인물로 환생하게 된다. 그런데 그 양소유라는 사람을 통해 보여지는 현실이 그다지 현실같지가 않다. 꿈속에서 또다시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가 이미 환생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환생전의 인상을 풍긴다. (꿈속이라해도 꿈을 꾸는 사람은 여전히 나이기 때문일까?)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으로써 쉽게 이룰 수 없는 것들을 너무도 쉽게 이룬다. 그 뿐이랴! 자신에게 죄를 입힌 여덟 선녀의 환생을 다시 만나 꿈같은 생활을 이어간다.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이어지는 그들의 만남 또한 그리 어렵지 않게 다가온다. 이미 서로를 묶은 끈으로 연결되어진 듯이 하나씩 모여드는 두 명의 부인과 여섯명의 첩은 인간으로써는 보일 수 없는 관대함을 안고 있다. 양소유가 나아가는 길에는 걸림돌이 없다. 탄탄대로다. 그 탄탄대로를 따라 모든 것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구운몽九雲夢>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최대한 고전의 분위기를 살렸다는 말이 나를 유혹했다. 괜찮을까 염려도 되었지만. 처음엔 조금 껄끄럽기도 했지만 읽을수록 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그가 외로운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고는 하지만 아주 잠깐씩 내비춰지는 그 마음이 이 글을 이끌어가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양소유라는 인물을 따라 맴도는 그 자신의 부귀영화를 더욱 그리워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만큼 양소유라는 인물 주변은 화려하다. 그가 어떻게 출세하는가라는 과정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여인을 얻음으로 인해 그런 것들이 함께 따라오는 듯한 분위기도 묘하다. 그렇다고하여 그와 여덟 명의 여인들이 엮어내는 애틋한 사랑이 주된 흐름도 아닌듯 하다. 조금은 통속적인 그들의 만남속에서 서로를 향한 절절함은 느껴지지 않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그토록이나 훌륭한 학식과 명예를 가졌던 김만중이 왜 이런 글을 썼던 것일까?  사대부가 소설을 쓴다는 자체를 부정적으로 판단하던 그당시를 그려볼 때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책속의 문자들이 결코 어떤 형식이나 규율을 어기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걸 보면 그도 신분적인 의미를 완전히 내버릴 수 없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 속에서는 어머니를 위함이었을 것이라고 말을 하지만 좀 전에도 말했듯이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은 아주 잠깐의 스침일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덟 명의 여인들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희안하게도 여덟 명의 여인들이 제각각 저마다의 특징을 안고 있다. 성격도 다르고 출생도 다른데 마치 하나의 실로 연결된 듯이 보여진다. 불현듯 이런 생각도 든다. 김만중이라는 한 사내가 마음속에 그렸던 여인상은 아니었을까? 한번쯤은 그런 여인들과 만나 이러저러한 사랑을 나누어보고 싶다는 사내의 감춰둔 욕망은 아니었을까?  형식과 체면의 허울에 싸인 사대부들의 욕망... 어쩌면 그럴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났다. 그저 단순히 깨어보니 꿈이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가 아닌 <구운몽九雲夢>을 보았다. 환생전의 성진이 불자였다고 하여 이 책이 불교적인 모습을 담고 있지는 않다. 또 모르겠다. 성진과 양소유를 깨닫기 전과 깨달음을 얻은 뒤의 모습으로 평가할 수 있을런지도...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꿈을 꿀 수도 있겠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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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전 외 재미있다! 우리 고전 10
장철문 지음, 이현미 그림, 박지원.이옥 원작 / 창비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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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을 수 있어 좋은 고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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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전 외 재미있다! 우리 고전 10
장철문 지음, 이현미 그림, 박지원.이옥 원작 / 창비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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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과 이 옥이라... 박지원이야 <열하일기>라는 대표적인 작품이 있으니 기억속에 남는다 하지만 이 옥이라는 인물은 누구일까? 우선 그것부터가 궁금해졌다. 이 옥, 정조 때의 문신으로 박지원처럼 문체반정에 연류되었다는 사람이다. 효령대군의 후손이라 하니 그 집안의 내력이야 말할 필요가 없을 듯 하고.. 그런데 문체를 다시 돌리라는 정조의 하문에 반성문을 썼던 박지원과는 달리 이 사람은 아마도 제 고집을 꺾지 않았던 모양이다. 문제의 인물로 낙인찍혀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했다니 하는 말이다. 정조는 성균관 유생이던 이 옥에게도 전통적 격식을 갖춘 문장을 지어 바치도록 했다고 한다. 도대체 왜 세상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천박한 문체인 것일까? 전통적 예의와 도덕을 갖춘 문장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박지원의 <열하일기>로 비롯되어진 문체반정..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문체반정이 가져온 우리 문화의 퇴보는 상당했을거라고 본다. 패관문학이라고는 했지만 실상은 백성들의 참모습이었던 까닭에 어쩌면 왕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껄끄럽거나 불편한 진실이 될 수도 있었을테니 말이다.

책 속에는 박지원과 이 옥의 작품 일곱편이 실려있다. 박지원의 작품으로 <광문자전>, <허생전>, <양반전>, <호질>이 있으며 이 옥의 작품으로는 <최생원전>, <이홍전>, <심생전>이 있다. <허생전>이나 <양반전>, <호질>은 많이 들어 낯설지 않았으나 이 옥의 작품은 생소했다. 이 책은 아이들에게 우리 고전을 읽게하고 싶은 마음이 비쳐지는 책이라 그리 어렵지않게 고전으로 다가설 수 있는 장점이 있기도 하다. 대부분 학창시절의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우리 고전의 내용을 다시한번 살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나 가까이 하게 된 책이지만 사실 아들녀석에게 읽히고픈 욕심이 더 컸다. 어느 책에선가 말하길 박지원의 <양반전>이 신분제도를 타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것임을 숨겨두었다고 했었다. 가만히 살펴보면 그런 면이 느껴지기도 한다. <허생전>을 통해서도 그런 것을 찾아볼 수가 있었다. 단순히 책만 읽던 선비가 어느날 갑짜기 책상을 물리고 세상속으로 나아가 성공한다는 것은 살아내야 할 현실이 그렇게 쉽게 용납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닌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생은 책상물림만 하는 양반이기를 고집하고 있다. 어찌보면 <호질>에서 보여지듯이 요목조목 따지고드는 호랑이의 말투를 빌어 양반을 혼내주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하지만 자신들만의 어떤 명분을 또박또박 내세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옥의 작품을 둘러보면서 미신타파라는 화두를 보게 된다. 귀신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말 자체가 자신의 마음먹기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말이기도 하니. 귀신조차 무서워했다는 최생원의 이야기가 그렇다.  천하의 사기꾼 이홍은 또 어떤가? 사람의 마음만큼 묘한 것도 없고, 사람의 마음만큼 허술한 것도 없는 듯 하다. 빈 틈을 노려 치고 들어가 자신의 허세를 당당하게 이루는 이홍이 왠지 나는 밉지만은 않았다. 또한 <심생전>을 통해 보여주는 사랑의 의미가 살갑게 와닿기도 한다. 물론 유치한 사랑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린다면 할 말은 없겠으나 심생의 사랑은 꽤나 괜찮게 보여진다. 

그저 옛글만 다루어주었더라면 이 책도 그냥 그렇고 그런 책으로 끝났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의 작품 해설이 있어 책을 읽는 사람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박지원과 이 옥의 작품 뒤에는 왜 '전傳'이라는 말이 붙어 있을까?  옛날에는 소설이라는 문학양식이 없었는데 오늘날의 소설과 비슷한 문학양식으로 '전'이 있었다고 설명해주고 있다. 오늘의 단편소설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문단편소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설명을 보면 모두가 아하,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 않을까 싶다. 고전이 어렵다고 하는 것은 그것에 맞는 풀이가 없기 깨문이다. 어려운 한자체를 본다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그 말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더더욱 다가서기 힘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되어지는 부분들을 조금씩이나마 알기 쉽게 풀이를 해 준다면 그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작품해설을 이 소설들의 시대적 배경 또한 잘 설명해주고 있다. 아울러 박지원과 이 옥의 작품세계를 통해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인지 다시한번 집어주니 우리의 고전을 그저 그런 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리며 외면하지는 않을 듯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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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혼자 올 수 있니
이석주 사진, 강성은 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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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암까지 전이된 몸을 이끌고 홀로 겨울 홋카이도와 아키타 여행을 다녀온 후 눈(雪)에 관한 사진전을 준비하던 2010년 4월, 만 스물여덟의 나이에 하늘로 돌아갔다. 이석주라는 스물여덟의 젊은이를 그렇게 보내면서 그를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은 오래도록 속깊은 울음을 참아야했을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간이었기에 그들은 사랑했던 사람 하나를 추억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그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었던거라고... 흐릿한 분위기의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그리 많지 않은 말을 하는 걸 보면 어쩌면 그들은 아직도 그를 보내지 못한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내게 다가온 이 책의 느낌은 너무 멀었다. 너무 아득했고 너무 흐렸다.

가로등...
오직 가로등빛 뿐이었다. 모든 것이 온통 잿빛이었는데 문득 다가오던 그 빛 하나. 하지만 나는 안다. 가로등은 저혼자 빛을 낼 수 없다는 것을. 어둠이 있어야 더 밝아질 수 있는 불빛, 그것이 바로 가로등인 것이다. 오직 그 빛 하나만이 밝게 보여지던 사진속의 분위기가 낯선 설렘으로 다가선다. 책 속에서 들려주던 가방이야기처럼 이별에 대한 두려움과 서로를 그리는 아픔이 어느 순간 내게 찾아왔던 첫사랑 같았다. 사진 찍었던 사람이 시작될 것 같다고 말하던 사랑은 찾아왔을까? 속으로 우는 건 아무도 모를 거라고 그렇게 매일 울고 있는거냐고 묻고 있던 당신에게 나도 묻고 싶었다. 당신도 그렇게 매일 울고 있었던 거냐고.

한때는 염전이었던 곳이 생태공원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을 했다는 그곳에 내가 찾아갔던 적이 있었다. 아직 버리지 못한 갯벌흙은 밟으니 미끄러워서 옆에 가는 사람끼리 두 손을 꼭잡고 걸어야 했었던 날.. 저 집, 영화속에 나오는 집같아... 고개를 들었던 순간 느닷없이 시선속으로 들어왔던 집을 보면서 내가 말했었다. 말하다가 그만 미끄러져 기우뚱거렸을 때 잡힌 손에서 우두둑 소리가 날 것처럼 단단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 있었다. 그 집, 영화속에 나오는 집처럼 멋지게 보였던 집은 가까이 다가가보니 황홀할 것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내 눈에는 멋지게 보였는지 알 수 없다. 소금창고.. 나무로 된 문은 반쯤 열린 채 하얀 소금을 뱉어내고 있었지. 그리곤 내게 말했었다. 맛있는 소금이라고. 이제는 몇 평 남겨두지 못한 염전에서 건져올린 거라고. 한웅큼 내게 내밀면서도 팔지는 않는다고 했었다. 소금창고.. 팔지 않는 소금을 모아두던 소금창고.. 그런데 내가 왜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왠지 모를 상실감, 그리고 알 수 없는 그리움을 그 소금창고처럼 안고있는 사진들때문이었을까?  보여주는 사진들은 너무 외롭다.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사람의 가슴처럼 그냥 먹먹해지는 느낌들이 빼곡하다. 사진이 그런건지, 사진 옆에서 꼬물거리는 글자들이 그런건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독한 외로움은 분명히 보였다. 내 기억속의 소금창고처럼.

불꽃놀이..
죽음을 선고 받았으면서도 그는 사진을 찍으러 떠났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단다. 사진이 빛을 담는 것이 아니라 빛을 비워내는 작업임을 알아가고 있는것 같다고. 어쩌면 그는 사그러드는 제 빛을 더 밝히고 싶어 다른 빛을 비워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몇 장을 사진을 모아놓고 그 덩어리마다 제목을 붙여주었는데 사랑이니 상실이니 뭐 그런거였다. 그래놓고는 너 혼자 올 수 있느냐고 묻는다. 쓸쓸하게... 소리없이 흘러 내리는 눈물이 더 슬프다던 말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들.. 그래서일까? 이 책속에서 비워낸 빛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불꽃놀이 속에서 터지는 불꽃처럼 어쩌면 그렇게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건지도 모르겠다. 터지고나면 공중분해되어 버리는 불꽃이라 할지라도 잠시 그렇게 빛을, 희망을 끌어안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춧불..
아주 작은 촛불이 있었다. 그 촛불을 끄고 자장가를 부를 때가 되었나보다. 어쩌면 사진으로 들려주고 싶었던 그 사람의 이야기들은 이런게 아니었을까? 왕자와 공주가 만나는 이야기, 먼 나라의 가난한 소녀가 맞은 성탄절 이야기, 새가 물어다 준 마법반지 이야기,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 이야기, 성냥하나로 세계를 태워버린 아이의 이야기, 기러기를 타고 먼 나라를 여행하는 이야기, 기억이 나지 않는 많은 이야기들, 누군가 들려준 이야기들...(-243쪽) 지독히도 일상적인 것들을 제 몸을 불사르는 촛불처럼 그렇게 간절하게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눈 쌓인 한 장의 사진을 보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저마다 머리속에 그려지고 있을 그 세계가 궁금해진다. 어떤 이는 부를 수 없는 이름을 생각할 수도 있겠다. 어떤 이는 이제는 볼 수 없는 얼굴 하나를 그려볼 수도 있겠다. 어떤 이는 눈때문에 날아가버린 하루벌이를 생각할 수도 있겠다. 어떤 이는 막 시작된 사랑이 그 눈위에 나란히 발자욱을 남기는 상상을 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많은 생각들이 때로는 희망으로 때로는 그리움으로 때로는 절망으로 옷을 바꿔입는다. 많은 이야기를 잉태할 수 있는 사진 한 장.. 그러나 그 사진 한 장이 뱉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나나 당신이 지금 어떤 현실속에 머물고 있느냐만이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거라고 생각하기에. 대체적으로 책 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사진들은 아련하다. 무언가 더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놓고 싶지 않아 한번은 더 보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느낌일 뿐이다. 그것도 한 순간의 느낌일 뿐이다.

글이 사진을 따라간건지, 사진이 글을 따라간건지 그것을 나는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외면하고 싶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의 여행이 끝나는 지점에서 그 여행을 함께 느끼고 싶었을거라고 미루어 짐작을 하면서도 그렇게 말하면 왠지 미안해질 것만 같다. 사진이 빛을 비웠다고 글도 빛을 비워버린 것 같아서... 아주 잠깐이지만 사진이 한 켠으로 밀어둔 그 빛을 찾아 글이 밝혀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거라는 생각을 한다. 사진도 글도 모두가 아득하기만 하다. 다시오지 않을 사람을 향한 기다림이 이 책의 화두같다. 어쩌면 그렇게 느끼게끔 길안내를 해주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래서 이 책은 우물처럼 자꾸만 나를 저 깊숙한 곳으로 밀어넣는다. 책장을 덮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우물속에서 나오지 못한 채 아주 작은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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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그 끝나지 않는 의문
이희근 지음 / 다우출판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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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아도 이 책을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눈치 빠른 사람은 알겠다.  한번쯤은 가져 보았음직한 의문점들을 다루어주고 있는 이 책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청소년이 읽기엔 좀 무리가 아닐까 싶다. 책 띠를 보니 '청소년을 위한 좋은 책'이라고 써 있기에 하는 말이다.  역사의 뒤편 혹은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한 사실을 안다는 것에 대해서는 옳다. 하지만 '한국사'라는 테두리가 확실하게 정해지지도 않은 아이들에게 사실이 이렇고 저렇단다 이야기 해 줄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의문은 그 다음이다. 무언가를 제대로 알고 난 뒤에 그것에 따르는 진정한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소리다. 우리 역사를 바라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물음표를 찍었음직한 주제가 많이 보인다. 예를 들자면  김수로왕의 부인이었던 허황후가 정말 인도에서 왔을까? 라거나 숙종대의 도적이었던 장길산이 의적으로 거듭나게 되는 이유처럼.. 나 역시 이런저런 역사서를 읽으면서 그 당시를 이해하지 못해 상황을 정리하기가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고해서 내가 역사를 많이 안다는 말은 아니다. 짧은 소견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점이 있었다는 말이다.

이 책은 고대사를 시작으로 고려와 조선을 지나 근현대사까지 다루고 있다. 고대사는 사실 우리에게 그저 한편의 신화처럼 다가오는 느낌이 더 크다. 알에서 태어났다 이야기쯤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주몽이 부여를 탈출하면서 자연을 부렸다는 이야기도 그다지 신비롭지 않다. 언제였던가 고대의 건국신화를 찾던 중 두 편으로 나와있던 백제의 신화를 보고 의아했던 적이 있었다. 온조와 비류가 하나가 아닌 둘로 건국신화를 갖고 있었는데 읽어보니 내용은 비슷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둘로 나뉘어져야 했을까? 그런 기록은 왜 생겨난 것일까? 궁금하기도 했었다. 사실 지금 돌이켜보는 역사의 진실 또한 어쩌면 지극히 주관적이거나 혹은 시대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당시를 살아보지 않은 이상 그것은 추론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상황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그런 주장이 나오는 것이겠지만 역시 추론일 뿐이다. 그런 것들을 좀 더 사실적으로 다가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다지 많지 않았던 백제사를 돌이켜보면서 백제가 과연 중국의 요서지방에 또하나의 백제를 건설했을까 하는 것을 밝혀내고자 하는 것처럼. 

안타까운 것은 지금의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너무도 홀대한다는 점이다. 얼마전부터 국립대학이나 모신문지상에서 한국사를 필수과목으로 해야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을 뿐이다. 우리의 역사도 모르면서 어찌 세계사를 논할까 싶은 나의 마음도 거기에 백퍼센트 공감하지만 과연 얼마나 힘을 얻을 수 있을런지는 두고 볼 일이다. 우리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 주변국들의 역사서가 필수라는 건 어쩌면 아이러니가 아닐까? 우리에게는 없는, 아니 우리가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를 그들은 귀하게 보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서글프게 다가온다. 어찌보면 폐쇄적이기까지 했던 우리의 역사, 그런 까닭에 더 홀대받아야 하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홀대받는 역사의 되새김을 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거울속의 자신을 보듯 역사를 보아야하기에 지금의 지배층들이 역사를 배척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럴수도 있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느정도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런 책은 꼭 한번 읽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우리 역사와 좀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물론 역사는 쓰는 자의 이념에 따라 달라졌다는 게 사실이고 보면 주관적인 견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주장에 나름대로 또하나의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을 듯 하다. 평소 고려의 무신들이 정권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왕이 되지 않았을까 궁금했었다. 고려의 불상을 보면서 미륵을 기이한 모습으로 만들었던 백성들의 속마음이 궁금하기도 했었다. 그런 궁금증에 대한 이야기를 책을 읽으면서 함께 생각할 수 있어 좋았다. 고려시대에는 지금과 같은 남녀의 차별이 없었다는 걸 알고 복잡한 현실속에서 일어났던 한 건의 소송(시집간 딸도 상속을 받아야 한다는)이 떠올라 씁쓸했다. 현실속 모든 문제의 해답은 역사속에 있다는 유명인사의 말이 다시한번 떠올랐다. 정말 역사속에 모든 해답이 들어있을 거라고 고개를 끄덕인다.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을 통해 그가 결코 신분해방을 외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는 그의 속셈을 알게 된다. 그런 저자의 생각에 공감합니다-를 외치는 나의 모습이 그 순간만큼은 어색하지 않다.

세종대왕은 정말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을까?  그토록이나 많은 장경들은 어떻게 해인사로 옮겨졌을까?  농민들이 동학에 열광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정말 억불정책을 썼을까?... 재미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공감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도 놀라웠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장승은 원래 경계선의 의미였다. 원래의 이름은 장생표로 장승은 잘못된 표기다. 사찰이 성행할 때 여기까지 혹은 여기서부터는 사찰권역입니다-라는 표시로 세워둔 것이었는데 나중에 이것이 하나의 경계표로 사용되었고, 또한 이정표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지금의 표지판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은 왜 무속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 해답은 간단했다. 우리의 풍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들만의 잣대로 선을 그어버린 초기 기독교도들에 의한 잘못된 판단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아전인수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속깊이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끝도 없을 것 같은 사건과 연대, 그 안에서 살았던 수많은 이름만 외우는 것은 죽은 역사다.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역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일제가 왜 우리 조선의 궁궐 파괴에 그토록 집착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일제가 우리의 궁궐을 파괴했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왜 그렇게 해야 했는지를 바로 알아야 제대로 된 역사인식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시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지금도 지나쳐가면 역사가 된다. 후대에 어떻게 기록되어질런지 알 수 없는 우리의 시간들. 나중에 우리가 제대로 된 역사였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외면하고 있었던 지나간 역사와 마주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한번 말을 보태고 싶다. 한국사는 필수과목이 되어야만 한다고..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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