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라디오
이토 세이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영림카디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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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1일 일본 도호쿠 지방에서 리히터 규모 9.0의 지진이 발생했다. 지진이 잦은 일본에서조차 최대로 관측되었다던 그 날의 지진은 대형 쓰나미가 덮치면서 해변도시들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특히 후쿠시마 원전에서 방사능 누출 사고가 일어나면서 세계적인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그 피해의 여파가 남아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그러나 그 어떤 충격보다도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는 게 가장 가슴 아픈 일이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도 멀지 않은 기억속에 그런 아픔이 발생했었다.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순간이 언제 어느때 우리에게 찾아올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산 사람이란 말이 있지만 죽은 사람은 산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 책속의 말처럼 그들에 의해 다시 불려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해봤어? 안해봤으면 말을 하지마!" 아무 생각없이 뱉어내는 저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를 우리는 모른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는 말이 얼마나 처절한 절규인지를 우리는 모른다. '同病相憐'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를 애틋하게 여긴다는 뜻이지만 여기에서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 마음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잊혀지기에는 너무나도 아픈 일이기에 한번쯤은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는 취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죽은 자의 시선으로 산 자를 바라보는 것, 또한 죽은 자의 시선으로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채로웠다. 세상의 죽음에는 자신이 왜 죽어야 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를 모른 채 찾아오는 순간도 많을 터다. 자신에게 죽음이 찾아오던 순간을 기억해내는 망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이 책의 전개과정은 서글픔을 남기기도 한다.

 

中有... 사람이 죽은 뒤에 다음 생을 받을때까지 머무는 중간계를 말하는 불교용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49재의 의미를 지닌 말이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윤회의 의미이기도 하다. 굳이 이렇게 불교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무래도 죽은이들을 애도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아닌가 싶다. 그들 모두가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기를 바라는 그 마음말이다. 상상라디오를 진행하는 DJ 아크의 죽음이 안타까움을 만들어낸다. 자식의 주검이 너무 높은 삼나무 가지위에 걸려 아무도 찾아내지 못할텐데 너를 두고 어찌 내가 저쪽 세상으로 갈 수 있겠느냐며 찾아왔던 아버지의 영혼에게 담담하게 말하던 DJ 아크의 처참함을 살아남은 우리가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아무도 몰랐던, 그 누구도 상상조차해보지 않았을 그의 주검을 묘사하는 장면은 끔찍하다. 그런 생각을 어느 누가 단한번이라도 해봤을까?

 

"죽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바로 잊고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해. 정말 그래. 언제까지고 연연하고 있으면 살아남은 사람의 시간도 빼앗겨 버려. 그런데 정말로 그것만이 옳은 길일까. 시간을 들여 죽은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슬퍼하고 애도하고, 동시에 조금씩 앞으로 걸어가야 하지 않을까. 죽은 사람과 함께." - 146쪽

 

"살아남은 사람의 추억도 역시 죽은 사람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아. 아무도 죽지 않았으면, 그 사람이 지금 살아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지 않겠지. 즉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은 상부상조 관계야. 절대 일방적인 관계가 아냐. 어느 쪽만 있는 게 아니라, 둘이서 하나인 거라고." - 151쪽

 

어쩌면 저 말을 하고 싶었던건지도 모르겠다. 죽은 사람만 억울하지, 라는 말이 있긴 하다. 그러나 삶과 죽음을 떼어놓고 보기에 그 둘은 너무 가까운 관계이기도 하다. 그 어떤 것보다도 잊혀지는 것이 가장 커다란 슬픔이라고 어느 시인은 말하지 않았던가. 책속의 말처럼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애도하고 동시에 조금씩 앞으로 걸어가야 할 우리의 의지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재미로 읽을 책은 아닌듯 하다. 그러나 공감하기도 쉬운 책은 아닌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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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열한 역사와의 결별 징비록
배상열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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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친 전란의 원인, 전황 등을 기록했다는 '懲毖錄',“미리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豫其後患)”... 《시경》에서 나온 말이다. 오래전에 '징비록'을 읽으면서 어째서 우리는 위기를 위기로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통탄을 했었다. 그런데 이 잭의 저자 역시 묻고 있다. 우리에게 위기는 위기였을 뿐인가? 라고. 오죽했으면 눈물과 회한으로 써내려간 글이라고 했을까? 우리에게보다는 일본에서 더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징비록'의 의미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훗날까지 일본에서 조선 연구의 바이블로 각광받았다는 <징비록>의 가치가 놀랍지 않은가? 지금의 우리 현실을 돌아볼 때도 그 옛날과 다르지 않음을 볼 수가 있다. 어째서 우리는 우리것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며 살지 못하는 것일까? 전혀 자부심을 가지기는커녕 어떻게든지 현대에 맞게 뜯어고치려고만 하는 모습을 볼 때는 어쩔수 없이 화가 나기도 한다.

 

작금의 현실은 '징비록'이 쓰여지게 만들었던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당파싸움에 저희들끼리 패를 나누고, 거기서 또 뜻이 안맞으면 또다시 패를 나누는 형국이 나라를 망치게 했던 그 시절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 무엇이겠는가? 역사를 보고 배워야 할 것은 배우지 않고 못된 것만 배운 나쁜 아이와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저자의 말처럼 부검 당하는 '징비록'의 속살은 처참하기까지 하다. 그러면서도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그 시대의 상황이 전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와 새로운 느낌을 내게 전해주었다. 그 시대를 만들었던 한중일의 형국이 마치 한장의 그림처럼 보여져 아하, 그랬던거구나! 싶었던 장면이 많아 새삼스러웠다.

 

지금까지 몇 번을 말한 것이지만 나는 조선사를 통틀어 선조와 인조가 가장 싫다. 그들로 인해 조선이 잃어야했던 것이 너무도 많은 까닭이다. 현재의 우리에게 이렇다할 이름으로 기억되어지는 그 좋은 인력을 가지고도 그렇게밖에 살지 못했던 선조를 어찌 좋아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이산해와 정언신에 의해 '불차채용'으로 추천되었다는 이순신의 이야기가 시선을 붙잡았다. '不次採用'이란 현재의 관직과 서열을 일체 따지지 않고 인재를 천거한다는 의미인데 이순신의 면모를 알게 해주는 일화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한심한 시절, 전쟁은 이렇게 예정되었다'를 시작으로 소제목으로 등장하는 한줄의 글귀만 읽어도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미루어 짐작할만 하지만 각장마다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더라도 저자가 신립을 변호한 것에는 결코 공감할 수 없다. 저자의 말처럼 그정도의 무장이었다면 그런 실수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역사의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시대에 어떤 사람이 했는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어쩌면 저자의 <징비록> 부검하기는 엄청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조목조목 들여다보는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는 여정이 나쁘지 않았다.

 

역사속에서 군역에 대한 제도의 보완을 이야기했던 사람은 많았다. 이이도 그랬고, 허균도 그랬고... 류성룡이 주장했다는 '제승방략'과 '진관제'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문득 임진왜란때 포로로 잡혀갔던 강항의 <간양록>이 떠올랐다. <간양록>은 강항이 돌아와 선조에게 올렸던 글이다. 강항이 일본인과의 교류를 통해 일본의 실정을 기록한 글로 일본의 지리 및 지세, 관호, 군제, 형세 등 임란 당시의 일본 정세가 상세히 담겨 있다. 그렇게 생생하고도 세세한 글이 우리에게 전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그것은 그저 책일 뿐이었으니 더 말해 무얼할까 싶기도 하고... 솔직히 말해 책을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달래며 읽어야했다. 책이 무슨 죄가 있다고.... 잘못 끼워진 단추하나로 인해 옷전체가 비틀어진 꼴이라니! 역사는 반복되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 책속에서도 똑같은 모습으로 반복되어진 우리의 역사와 만나게 된다. 어쩌면 그리도 똑같은지.... 그런 의미에서 보니 이 책의 제목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비열한 역사와의 결별... 징비록을 통해 우리가 해야 할 숙제는 아닐런지. 류성룡의 시대와 지금의 우리는 무엇이 다른가?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모두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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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만다라
Carlton Books 엮음 / 담앤북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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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라Mandala는 인도의 고대언어인 산 크리스트에서 '원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근 'manda'는 '참' 또는 '본질'을 의미하고, 접미사 'la'는 '소유' 또는 '성취'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변한다'는 의미로 말하기도 한다. 본질이 여러가지 조건에 의해 변하게 된다는 의미를 지닌 하나의 불화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만다라의 어원은 인도의 고대어에서 유래되었으나 상징으로서의 만다라는 기독교의 십자가, 원불교의 일원상, 불교사찰의 표시인 만(卍)자 외에도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인간정신 속에 있는 자기를 나타내는 상징들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다. 원상을 통하여 우리 정신속의 여러 차원과 합일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으로써 지혜를 향하게 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만다라의 정의는 중심과 본질을 얻는 것, 마음속에 참됨을 갖게 함을 원만히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아주 오래전에 TV를 통해 티베트 승려들이 만다라를 만드는 장면을 보고 마음을 빼앗겼었다. 색색의 모래를 채우며 그림을 완성해가는 과정이 신기하기도 하고, 그 색의 아름다움이 신비롭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에 집중하는 승려들의 신중함과 조심스러움이 탄성을 자아내게 했었다. 몇년 전, 내 안의 또다른 나와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만다라를 통한 심리치료를 배운 적이 있었다. 만다라를 미술치료에 적용하는 목적은 만다라를 통하여 분열된 자신을 통합하고 자신의 내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신을 집중함과 동시에 이완을 할 수 있으며, 불안이 사라지고 긴장이 완화되는 효과를 갖게 된다. 소란하고 산만한 외부 세계를 떠날 수 있게 해 주고, 한계를 받아들이고 필요한 것을 수용하는 것을 배운다는 의미와 효과를 갖는다는 말이 참 좋았다.

 

승려들에게는 예술이 아닌 수행의 과정으로 보는 까닭에 며칠이 걸릴수도 있고 몇 달이 걸릴수도 있다는 만다라. 이 책속에서 보여주는 만다라 문양 중에는 작고 복잡한 것도 많고 단순한 것도 있다. 오랜만에 만다라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정성을 다해 힘겹게 만든 모래 만다라를 스스로 없앰으로써 세상 모든 존재가 영원불변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고 하는데, 그렇게 심오한 것까지 바랄 수는 없겠으나 잠시의 평온을 느끼기에는 그만이다.

색을 칠할 때 안에서부터 시작되면 에너지의 확산을, 밖에서부터 시작되면 에너지의 죽소를 의미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것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단, 처음의 방법이 안에서부터의 시작이었다면 그 방법을 지속하는 것이 좋다고 배웠다. 문양이나 색이 상징하는 바도 모두 다르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만다라에 분홍을 사용하는 것은 섬세한 감정과 강한 보호욕구를 나타내는 것이라거나, 밝은 파랑은 사랑과 보살핌이 긍정적으로 반영된 것이라는 것처럼... 하지만 그런것까지 신경써가며 만다라를 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그저 예전에 배울 때가 생각나서 해보는 말이다. 어찌되었든 나는 지금 만다라에 빠져있다. 그저 느껴지는대로 색을 칠하며 만다라를 만드는 시간만큼은 이 세상에 오로지 나하나뿐이다. 완성되었을 때 나타나는 형상을 보면 알 수 없는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잠자기전 조금씩 만다라를 만들어가는 짧은 시간이 참 좋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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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백작부인
레베카 존스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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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가 'The Countess 백작부인' 이다. 그런데 앞에 쓰인 '피'라는 말때문인지 왠지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긴다. 처녀들의 피로 목욕을 하면 젊음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여인. 그런데 우연인지 얼마전 TV에서 이 여인에 관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처녀들을 죽여 피로 목욕을 했다는 이 여인의 이야기가 과연 진실인가, 를 묻고 있었다. 어쩌면 정치의 희생양이 된 여인은 아니었을까? 라는 의문과 함께.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왜 이쪽의 지역일까? 드라큘라 백작도 그렇고 바토리 백작부인도 그렇고... 무엇이 이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지금도 중세의 모습과 19세기 말의 모습이 남아 있어서 대도시의 모습과 시골도시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는 부다페스트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종교개혁의 물결이 일었을 당시 헝가리는 터키의 지배 지역과 합스부르크가의 지배 지역, 그리고 트란실바니아 공국 지역으로 국토가 분열되어 있었다. 터키지역은 이슬람이었고 합스부르크가 지역은 카톨릭이었던 까닭에 개신교는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이 책속에서도 종교간의 갈등이 살짝 언급되어지는데 중요한 것은 이도 저도 아닌 감정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주세력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무심히 지나쳐갔던 중세의 생활상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전쟁의 풍랑속에 모든 것을 맡겨야 했던 당시의 남자들과 여자들의 삶을. 빼앗으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의 은밀한 거래속에서 사랑과 배신이 난무하고 승리과 패배가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각설하고 바토리 백작부인의 이야기는 사실일까?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거짓이라고 본다. 실존했던 여인의 이야기이면서 끔찍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보니 살인마로써 부각되어져야만 했던 이유가 훨씬 더 클 것이다. 백작부인이 체이테 성의 탑에 갇힌 채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여진 이 책은 부드럽게 잘 읽힌다. 어느 한군데 걸림돌이 없어 읽는 느낌이 참 좋았다.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지 못했던 당시 여인들의 삶은 고달팠다. 더구나 외세의 침략으로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졌던 귀족이란 신분은 가진 것을 지켜내기 위한 처절함마져 느끼게 한다. 작고 순수한 소녀에서 잔혹한 여인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실감난다. 여자로 태어났기에 지켜야만 했을 사랑과 자신의 가문을 위해 그렇게 살아야만 했다는 당위성에 어느정도는 공감하게 된다. 하인들의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이유가 있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그녀의 절박함이 때로는 하인들의 목숨마저 빼앗게 된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될거라는 가정교육도 그렇지만 하인을 다루는 그 당시의 처벌방식에도 문제는 있었다.

 

이 책속의 체이테 성에르체베트 바토리 백작 부인의 집으로, 에르체베트 바토리는 1575년 육군 사령관이었던 남편 페렌츠 나다스디로부터 결혼 선물로 이 성을 받았다. 남편이 전쟁 때문에 집을 떠나 있는 동안 에르체베트가 영지를 관리했다. 에르체베트에게 희생을 당한 사람들은 초기에는 성에 고용되어 일하던 지역 농부의 딸이었지만 나중에는 상류층 집안의 딸들이었다는 말이 보인다. 남편이 죽은 후에 더욱 심해진 그녀의 광기가 마침내 사회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는 말이다. 마티아스 황제가 사건을 조사하라는 명을 내렸으며, 귀족 신분과 가문 간의 유대를 생각해서 에르체베트는 처형되지 않는 대신 자택 감금형을 받았다. 그리고 4년 후에 성에서 죽었다. 체이테 성은 헝가리 반란군에 의해 점령당하고 약탈당해 쇠락하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죽인 희생자들의 수다. 36명이라는 사람도 있고 많게는 650명이라고도 말한다. 과연 에르제베트 바토리는 정말로 희대의 살인마였을까? 아니면 그녀가 주장하는 대로 정치적 음모에 연루된 희생양이었을까? 책의 장르가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faction 이니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아이비생각

 

오늘날 체이테 성은 폐허가 되어 남아 있으나 이 언덕에 희귀한 식물이 많기 때문에 주변은 국가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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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명화 한 점 - 명화 같은 인생, 휴식 같은 명화
이소영 지음 / 슬로래빗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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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언제부터인가 내게 무언가를 찾아 읽게 되는 습관이 생겼다. 언제부터인가 지하철을 타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처럼 되어버린 것, 詩 한편 읽기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두 편도 좋고 세 편도 좋다. 익히 알고 있었던 시인의 이름이나 시의 제목이라도 눈에 들어오게 되면 가끔 들어오는 지하철을 무시할 때도 있다. 그냥 그 시를 읽는 순간이 좋아서. 왜 좋으냐고? 그냥 좋다.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느낌이라서 뭐라고 말해 줄 수 없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좋아서. 그날의 상태에 따라 같은 시라도 느낌이 강한 날이 있는가 하면 그다지 앞에 머물고 싶지 않은 날도 있다. 한 편의 시가 이렇듯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그림은 또 어떨까? 그림 역시 다르지 않을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솔직하게 말해 그림을 모른다. 한마디로 그림 볼 줄을 모른다는 말도 될게다. 언젠가 내게 공부를 가르쳐주던 선생님과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았던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전시된 작품들을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할지를 몰라 그 작품들에 대해 선생님께 물었던 기억이 있다. 무엇이 느껴지길 원해요? 그냥 자신에게 다가오는 느낌이 정답일거예요... 라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오래도록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그림이 하나 있다.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되었는데 그 순간부터 내 마음을 온통 빼앗겨버린 그림이다. 단원 김홍도의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다. 그림은 볼 줄 모르지만 그림이 주는 느낌이 한없음에 놀랐던 작품이기도 하다. 채워지지 않았으나 너무나도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서 좋았던 그림이기도 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하는 그림의 형식은 진경산수화쪽인 듯 하다. 자신만 알아챌 수 있는 어떤 의도를 숨겨놓은 그림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깔끔한 그림형식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내게 추상화라는 개념은 아무런 느낌조차 전해주질 못한다. 다행인지 이 책속에서는 추상화가 보이지 않는다.

 

첫 작품으로 소개해 준 '장밋빛 인생'이란 그림이 참 좋았다. 보자마자 새콤달콤한 맛이 떠오르는 그림이라는 글쓴이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전체적인 색감이 다소 유치해보일 수 있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쩌면 저리도 상큼함을 담아낼 수 있을까 싶었다. 다시 시작되는 월요일을 위한 그림으로는 제격이다. 이 책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림은 고전파, 낭만파, 야수파, 인상파... 장르도 여러가지다. 작품마다 붙여준 화가에 대한 짧은 소개글쓴이가 부록처럼 껴넣은 미술사조를 한번 더 보게 된다. 특별하지 않은 글쓴이의 일상이 하나의 작품과 만나는 순간처럼 너무 멀지 않은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명화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같은 글, 같은 그림일지라도 사람마다 느낌은 다르다. 같은 사람일지라도 그날의 상태에 따라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니 정말 명화를 본다는 것에 대한 정답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앙리 마티스의 '노을지는 창가의 젊은 여인'과 카스파르 프리드리히(이름도 어려워라!)의 '창가의 여자', 알프레드 스티븐스의 '은하수' 라는 세 점의 그림을 다시한번 찾아서 보았다. 세 그림 모두 밖을 내다보며 서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다. 마티스의 그림은 제목처럼 노을지는 풍경이 창 밖으로 보이고, 프리드리히의 그림에서는 여인이 뒷모습을 보이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창 밖 풍경이 그다지 유쾌해 보이지는 않는다. 마지막으로 스티븐스의 그림속 여인이 바라보고 있는 창 밖의 풍경은 은하수가 쏟아져 내릴 듯한 밤바다의 풍경이다. 살풋 웃음이 난다. 이 세 점의 그림을 보면서 나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명화로 일상을 사유하고 사람들과 소통한다는 책표지의 글이 부럽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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