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내 맘 같지 않은 사람들과 잘 지내는 법
토마스 에릭손 지음, 김고명 옮김 / 시목(始木)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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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단 물어보자. 세상에 내 맘같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느냐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내 맘과 같을 수가 있는거냐고. 책 소개글에 이런 말이 보인다. 이 책은 말 그대로 ' 내 맘같지 않은 사람' 과 오해없이 관계를 맺고, 협력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이라고. 정말? 그렇기만 하다면야 진짜로 멋진 일이다. 하지만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왜 모든 사람을 내 맘같이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하는거지?  이 책에서는 사람의 유형을 빨강, 파랑, 노랑, 초록으로 구분했다. 성격이 그렇다는 말인데 각각의 색깔마다 나타내는 사람들의 성격이 재미있다. 물론 자신이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를 판단하게 해주는 질문도 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저자의 말이 보인다. 자신이 왜 이런 연구를 하게 되었는지. 흥미롭기는 했다. 진짜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저 틀안에서만 놀아준다면 걱정할 게 없을텐데.

 

①도전할 거리를 모두 없애버리고, 최대한 비효율적으로 일하라. ②중요하지 않은 것을 계속 걸고넘어지며,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고 투명인간 취급을 하라. ③다 끝낸 일을 처음부터 다시 해달라고 말하고, 벌인 일은 절대 수습하지 말라. ④즉흥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불확실성을 감수하고 일을 진행하라고 말하라... 앞에 열거한 것들은 모두 그들을 화나게 하는 방법이다. ①번은 레드 타입, ②옐로 타입, ③그린 타입, ④번은 블루 타입의 사람이다. 그래놓고는 그들의 화를 어떻게 풀어줄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내놓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어떤 타입의 사람이라도 화를 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아닐까 싶어 고개를 젓게 된다.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굳이 사람을 레드 타입이니, 그린 타입이니, 나누지 않아도 곁에서 보면 그 사람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면 그 사람과 그 때의 상황에 맞춰 대응하면 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사람을 저렇게 어떤 틀로 구분지어 놓은 것은 아무래도 세상을 좀 편하게 살자는 뜻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재미삼아 나는 어떤 타입의 사람인가 질문지에 체크를 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체크하면서도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발견했다. 어떻게 사람의 성격을 이렇게 단 한마디의 문장으로 결정할 수가 있는지... 중복적인 답이 많이 나왔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모든 사람이 상황마다 다 똑같이 대처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도 저자가 말하는 내용에 어느정도는 공감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레드 타입은 '무엇'을 묻고, 옐타입은 '누구'를 묻는다. 블루 타입은 '왜'를 묻고, 그린 타입은 '어떻게'를 알고 싶어 한다. (-197쪽)  저 한줄의 문장으로 저자의 말을 짐작해 볼 수 있을까?  문득 오래전에 배웠던 심리학에서 '좋아하는 색으로 보는 사람의 성격'이 생각났다. 빨강은 적극적이지만 충동적이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를 잘한다. 노랑은 긍정적이고 낙천적이지만 자신이 목표한 바를 위해서는 물불 안가린다. 초록은 온화한 성격으로 안정적인 걸 좋아하며 변화를 싫어한다. 그러나 자신의 성격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한꺼번에 폭발하는 경우가 있다.  파랑은 자존심이 강해서 남에게 굽히기를 싫어하지만 정의로운 면이 있다... 등등. 그러고보니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저자의 성격타입과 비슷하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또 하나의 틀에 갇혀버리는 걸까?  어쩌면 이미 그 틀안에 갇힌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지.

 

싫든 좋든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많은 사람과 마주쳐야 한다. 사회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형성되어지는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다보니 그 많은 사람과 부딪히지 않고 얼굴 찌푸리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세상 사람이 모두 나같지 않으니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면 상황에 따라 내가 마음 상하는 있는 일이 적어질 수도 있을테니까. 그런데 거꾸로 한번 생각해보면 오히려 답은 간단해진다. 이 책 역시 그렇다. 내가 아닌 상대방에게 초점을 맞췄다는 점이다. 이렇게 복잡하게 성격유형에 대해 왈가왈부 하지 않아도 상대방에 대한 약간의 배려와 관심만 있다면 크게 문제될 일도 없을 터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가를 곰곰 생각하는 것부터가 관심이며 그 사람의 성격에 맞춰 무언가를 진행한다는 자체가 바로 배려가 아닐까 싶어서 하는 말이다. 진심없는 관심과 배려는 아무리 이런 책을 보며 공부를 한다해도 결국 문제를 일으킬 수 밖에 없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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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떠나는 인도여행 인문여행 시리즈 1
허경희 지음 / 인문산책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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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서쪽지방에서 농업과 수렵으로 먹고 살았고, 남근과 어머니신에 대한 숭배가 강했다던 고대 드라비다인의 역사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교과서에서 배웠던 인더스 문명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인도를 중심으로 그 고대의 문화가 살아있다고 한다. 오래전 아리아인에게 정복되기도 했지만 그들의 신앙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다. 아리아인들의 브라만교와 드라비다인의 토착신앙이 서로 어우러져서 힌두교라는 종교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도의 신화속에서 보았던 창조신 브라마나 천둥의 신 인드라, 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시바가 결국은 힌두의 신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왜 나는 인도를 생각하면 힌두교보다 불교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불교적인 문화의 영향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누구든 마시기만 하면 불로장생 할 수 있다는 암리타도, 시바의 아내였다는 사티도, 가릉빈가라고도 불리우며 鳥의 형상으로 표현되는 가루다도, 살아있는 제물을 좋아했다는 여신 칼리도 모두 힌두의 문화였다는 걸 이제사 알게 된다.

 

사실 요즘처럼 여행이 테마가 되는 세상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여행서를 만나게 된다. 기행문같은 여행서도 있고, 사진을 듬뿍 실어주어 시각적인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여행서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여행서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인도라는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모두 아우르고 있는 까닭이다. 나에게는 인도, 하면 불교라는 말이 당연한듯 따라오지만 그것처럼 항상 인도라는 말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카스트제도일 것이다.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말이지만 모순되게도 그것이 그들의 일상에서 오롯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 이유가 늘 궁금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세의 행복을 위해 현세의 아픔을 감내한다는 말이 이채롭기는 하다. 뭐, 우리에게도 현세의 아픔을 잊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종교적인 문화가 있으니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시선을 끌었던 것이 <우파니샤드>라는 거였다. 찾아보니 산스크리트어로 '가까이 앉음' 이란 뜻이라는 말이 보인다. 인도의 고대 철학 경전이라고 하니 결국 사제간에 서로 주고받은 말들을 써놓은 글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원뜻처럼 스승과 제자의 철학적 토론으로 구성되어있다는 말을 보면서 아하! 한다. 불교의 모든 경전 첫머리에서 볼 수 있다는 '如是我聞' 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우파니샤드 철학이라는 건 우주의 근본원리를 가리킨다는 브라만(Brahman : )과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tman : )을 하나로 보는 범아일여() 사상으로, 인간은 윤회를 반복하지만 定과行을 통해 진리를 찾고 윤회에서 해탈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고 한다. 定과行을 통해 진리를 찾는다는 부분에서 '自燈明法燈明' 이란 말을 생각하게 되었다.  부처가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주었다는 말이다. 자신을 등불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인데 외부에서 무언가를 찾지 말고 내부에서 찾으라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쯤에서 나는 살풋 웃음이 났다. 결국 나는 불교를 알고 싶어서 이 책을 손에 넣은 것이군,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해도 인도라는 나라가 궁금했던 건 사실이다.

 

이 책은 나에게 인도라는 나라의 역사와 문화의 형성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물론 이 책만으로 인도의 역사나 문화를 모두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이민족의 침입을 겪어내면서도 자신들의 특성을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전통을 유지하면서 변화를 받아들이는 나라. 한편으로는 부러움이 밀려오기도 한다. 역사나 문화는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겠지만 이 책 한 권을 들고 인도를 여행한다고 해도 왠지 듬직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학적인 나라로 다가왔다던 저자의 시선을 따라 나도 한번 인도여행을 하고 싶다는 꿈을 꾼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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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노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
박형서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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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속도가 세계 1위인 나라. 최고, 최대를 좋아하는 나라답게 역시 1위다. 우리나라 이야기다. 일본보다도 빠르다고 하니 나같은 낀세대에게는 불안감 백퍼센트다. 이미 2000년에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7%였다고 한다. 그리고 올해 고령사회에 진입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고령사회에 대한 준비가 얼만큼이나 되어 있을까? 내가 보기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듯 하다. 나라에서 그러니 대한민국 국민은 제 앞길 제가 닦아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엄청나게 보험가짓수만 들어난다. 그나마도 믿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게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이다. 의무사항이긴해도 그것마져 없다면 그야말로 노를 잃어버린 배와 같을 것이다. 게다가 늘어난 노인들과 젊은이들의 대립각은 이미 시작되었다. 사실 어디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젊은이보다 더 많이 보이는 게 노인들인 게 현실이다. 언론에서 초고령사회를 앞두고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고는 하지만 정작 들어야 할 사람들은 귀막고 눈막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렇게 찰떡같이 믿고 있는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은 그런 사회를 제대로 뒷받침해주기는 할까?  내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이 더 많은 구조라면 다시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바로 그 불안감에서 이 소설은 출발한다. 황당하지만 무계하지 않다는 말을 보면서 무릎을 쳤다. 이렇게 정확한 표현이라니!  실제 사정으로 봐도 이건 소설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이미 우리에게 닥친 현실이다. 베이비부머세대가 정년퇴직을 시작했으니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은 이제 받을 것보다 줄 게 많아진 상태다. 그러니 이 책속에 등장하는 모든 상황들이 단지 소설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게 되었다. 다만, 제발 현실로 다가오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부질없이 두 손을 모아 볼 뿐이다.

 

이 책의 주인공 장길도는 온 힘을 다해 국가와 조직을 위해 충성했다. 정년퇴직하는 그 날까지 그래야 한다고, 그래야만 하는거라고 믿으며. 그러나 그 믿음은 사랑하는 아내가 국민연금 수급자가 되었다는 축하메세지를 받기 전까지였다. 그가 평생을 바쳐 일해왔던 곳이 바로 국민연금공단이었다!  슬프게도 아내는 병으로 오래전부터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쯤에서 이게 현실인지 소설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노후는 뻔하다. 사느라고 노후를 준비할 틈이 없었던 사람이 늙은 몸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은 자꾸 늘어만 간다. 제 스스로 죽을 수 없다면 그렇게 죽을 때까지 살아져야만 한다. 슬픈 현실이다. 昨今의 우리 주변을 둘러봐도 책속에 등장하는 노인들의 모습은 너무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니 정말 이런 상황이 오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을까 싶은 우려가 생겨난다는 말이다. 어쩌면 청년 3명이 아니라 1명이 노인 7명을 먹여살려야 할 지도 모른다. 그만큼 우리의 고령화 현실은 급박하다. 이 급박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만 하는 것일까?

 

"왜 안 죽어? 응? 늙었는데 왜 안죽어! 그렇게 오래 살면 거북이지 그게 사람이야? 요즘 툭하면 100살이야. 늙으면 죽는 게 당연한데 대체 왜들 안 죽는 거야! 온갖 잡다한 병에 걸려 골골대면서도 살아 있으니 마냥 기분 좋아? 기분 막 째져? 어제도 출근하다 보니 어떤 노파가 횡단보도를 점거하고는 5분 동안 건너더라고. 영락없이 지각을 해서 이사장님한테 꾸중 들었지 뭐야. 나라 전체가 그래. 사방이 꽉 막혀서 썩어가고 있어. 하는 일이라고는 영혼이 떠나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게 전부인 주제에 당신들 대체 왜 우리 사회에 아직 남아 있는 거야!"  (-126쪽)


"곰곰이 따져보면 자네들도 가망 없긴 마찬가지야. 시간이 노인의 편이 아닌 것처럼 젊은이의 편도 아니지. 시간은 결국 살아 있는 모두를 배신할 걸세. 싸우다 고개를 들어보면 어느덧 자네들도 맥없이 늙어 있을테니까." (-134쪽)

 

옛말에 처녀 시집 안간다는 말, 장사가 밑졌다는 말, 노인이 죽고싶다고 하는 말은 모두 거짓이라고 했다. 그런데 주변의 노인들은 정말 죽고싶다고 한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게 지금의 세상이라는 거다. 그래서 나는 안락사에 적극 찬성한다. 그래야 한다. 죽고 싶은 사람은 죽을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사람이 사람으로써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는 게 나의 지론인 까닭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저렇게 무서운 세상이 만들어지게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닌 '나'를 모든 것의 중심에 두고 사는 까닭이다. 세상은 '나' 하나로 만들어지는게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등골이 서늘했다. 저 무서운 현실을 코앞에 두고 있는 내가 마치 크게 한 방 맞은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노후는 암울하다. 요양원에 계시는 어느 노인의 말씀이 생각난다. 사람 목숨도 유효기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던 그 목소리에는 슬픔이 가득했었다. 오래 산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다. /아이비생각


 

육십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간다고 전해라
칠십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일이 아직남아 못간다고 전해라
팔십세에 저세상에서 날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만해서 못간다고 전해라
구십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테니 재촉말라전해라
백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날 좋은시에 간다고 전해라

팔십세에 저세상에서 또데리러 오거든
자존심 상해서 못간다고전해라
구십세에 저세상에서 또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테니 또왔냐고 전해라
백세에 저세상에서 또데리러 오거든
극락왕생 할날을 찾고있다 전해라
백오십에 저세상에서 또데리러 오거든
나는이미 극락세계 와있다고 전해라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웃지 못했었다. 오죽했으면 저런 노래가 나올까 싶었다. 그야말로 요즘 말처럼 웃픈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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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파리를 흔드는 저녁바람이 - 열두 개의 달 시화집 六月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윤동주 외 지음, 에드워드 호퍼 그림 / 저녁달고양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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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님 배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며칠전 신문을 읽다가  문득 스치던 글자에 눈길이 멈추고 말았다. 함민복 시인의 '성선설'이라는 詩였다. 늘 읽어보던 詩코너였는데도 쉽게 시선을 뗄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저 짧은 詩를 읽으면서 너무나도 많은 느낌이 나를 찾아왔었다. 세상에~ 열 달을 자신의 배속에 품어주신 어머니의 고마움을 저렇게도 표현할 수 있는거구나 싶어서 묘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말았었다. 그렇듯이 詩는 참 묘한 매력을 가졌다. 짧은 단어속에 어쩌면 그리도 많은 뜻을 담아낼 수 있는지... 짧은 단어속에 어쩌면 그리도 깊은 뜻을 넣어둘 수 있는지... 詩를 사랑한다는 건 어떤 마음일까?  가끔 묻기도 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삐딱하다면 저렇게 아름다운 글이 만들어지지 않을거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 책속에는 18명의 시인들이 등장한다.   詩는 알아도 누구의 작품인가는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 까닭에 가끔 이렇게 찾아오는 詩集이 반가울 때가 있다. 그런 연유로 그 詩人이 누구인가를 찾아보는 수고를 한번쯤은 하게 되니 一石二鳥랄까?  순전히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古池や蛙飛び込む水の音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퐁당

일본의 하이쿠다. 그 중에서도 내가 처음으로 만나고 지금까지 좋아하는 마쓰오 바쇼의 작품이다.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은 정말 신기했다. 그냥 읽었을 뿐인데도 눈앞에 영상이 펼쳐지는 듯 했었다. 놀라웠다. 아마 그 후로 하이쿠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그런데 반갑게도 이 책에서 나는 하이쿠를 만났다.

名を聞いてまた見直すや草の花

이름을 듣고/ 또다시 보게 되네/ 풀에 핀 꽃들

하이쿠에 대한 글을 찾다가 류시화시인의 하이쿠 해설집을 보게 되었다. 그 책을 통해 만나 내 수첩에 적어두었던 또하나의 하이쿠가 이 책속에 있었다. 반가워라!  이 하이쿠를 읽으면 망설임없이 튀어나오는 우리의 詩가 하나 있다.  나석주 시인의 '풀꽃' 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詩 자체만으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많은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어떠냐고. 그래서 나는 詩가 좋다.  하지만 모든 詩가 다 좋은 건 아니다.  너무 어려운 말로 꽈배기처럼 꼬아놓은 글보다  쉬운 말로 누구에게나 전달되어질 수있는 글과 이미지를 보여주는 詩가 더 좋은 건 어쩔 수가 없다. 어떤 것에 대한 느낌을 저 혼자만 아는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이 함께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는 걸 더 좋아한다는 말이다. 詩의 매력이 바로 그런 점이 아닐까 싶어서 하는 말이다.

 

며칠동안  이 책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크기도 작고 가벼워서 가방에 넣기에 딱 좋았다.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타고 움직일 때, 혹은 누군가를 기다릴 때 꺼내 읽기에도 딱 좋았다.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이라는 시리즈 중에서 6월편이라고 하는데 그 열두 개의 달을 모두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다정히도 불어오는 바람,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이파리를 흔드는 저녁바람이.... 각각의 달마다 붙여진 제목도 참 이쁘다. 책방에 가면 한번 찾아보리라 다짐하면서 책꽂이에서 내게 눈짓하고 있는 지나간 詩集을 꺼내 내가 좋아하는 詩들을 다시한번 찾아본다. 역시 좋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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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렉터스 컷 - 살인을 생중계합니다
우타노 쇼고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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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였는지 소설이었는지.... 인터넷과 연결하여 조회수가 많아지면 사람이 죽어가도록 만든 살인범의 이야기를 본 기억이 있다. 조회를 하면 할수록 피해자가 죽어가는대도 사람들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조회를 하고... 그런 상황이라면 살인자는 과연 누구일까? 그런 장치를 만들어놓은 사람이 살인자일까? 조회하면 죽는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조회수를 늘려가는 사람이 살인자일까?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모순의 쳇바퀴일지도 모르겠다. 인터넷의 익명성에 대한 말이 종종 이슈가 되기도 한다. 실명제를 해야 한다느니, 그러면 안된다느니...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실명제를 했으면 좋겠지만 어차피 가상의 세계라는 점을 보면 익명성도 어느 정도는 보장이 되어야 옳은 것도 같다. 우리 사회의 딜레마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러나 익명성 뒤에 숨어 옳치않은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엄중한 처벌이 따라야 한다고 본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인터넷과 방송의 의미, 혹은 역할에 대해 깊이있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갈 길을 잃고 헤매는 방송이 가야할 길과 제대로 된 인터넷의 용도는 과연 무엇일까? 또한 무의미한 가상세계안에서 허우적거리는 현대인을 꼬집고 있다.  이 세상에 진짜가 있기는 한거야? 책을 덮으면서 제일 먼저 떠올랐던 생각이다. 그리고 짜증이 났다. 기분도 나빴다. 도대체 이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 모양이냐 싶었다. 단지 소설일 뿐이라고? 그렇게 말하기에는 뭔가 찜찜하다.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 말로써 말을 이기는 세상, 진심은 없고 가식만 떠다니는 세상. 모두가 그런 세상이 싫다고 말하면서도 그런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나도 그렇게 살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세상이 나를 그렇게 만들고 있다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세상으로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다는 거다.

 

소설책을 읽고 이렇게 흥분하다니! 그런데 픽션이라기보다 팩트에 가깝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나만 그런걸까? 가상의 세계를 이용하여 연쇄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 살인범은 멀리 있지 않았다. 좀 더 자극적인 방송소재를 찾기 위해 사람을 동원하여 억지로 상황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인지하기는 할까? 실제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그 '악마의 편집'이 소설속에서 시커먼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혹은 유튜브와 같은 SNS매체를 통해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실시간으로 타인에게 전송되어지는 우리의 일상처럼 가상세계를 통해 전해지고 있는 살인의 과정들...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펜이 굴러가는대로 글을 썼다는 저자의 말처럼 이야기의 숨고르기는 약간 거친 듯 하다. 다듬어지지 않아서일까? 픽션인지 팩트인지... 무슨 까닭인지 변별력을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되어진다는 말이 무섭다. 반전에 반전을 넘어서며 누가 살인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다시한번 묻는 저자의 치밀함이 한편으로는 두렵다. 살인을 당할 뻔 했다는 사람이 살인자가 된다는 설정이 왠지 억지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건 또 왜일까?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라는 책으로 저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반전의 묘미를 잘 살리는 작가라는 말도 기억한다. 현대인들이 죽고 못사는 SNS라는 공간과 아무 생각없이  SNS의 뒷꽁무니만 좇아가는 방송 세계의 뒷이야기는 엄청나게 씁쓸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제 갈길을 잃어버린 방송매체의 민낯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아울러 점점 늘어만가는 소시오패스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한다. 우리가 지금 만들어가고 있는 세상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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