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타워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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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한국에서 꽤나 알려진 작가가 아닐까 싶다. 일본의 3대 여류소설가이기도 하고. 한동안 그녀의 작품에 매료되었었다. 아마도 많은 작품이 번역되었을게다. <도쿄 타워>의 초판이 2005년이라고 되어있으니 벌써 15년이나 지난 이야기다. 그런데도 그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세상으로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사실 이 작품을 읽지 않았기에 그런 호기심이 일어났을 테지만. 그래서 한번은 읽어봐야지 했던 마음을 이기지 못했다. 정말 오랜만에 젖어들었던 그녀의 작품 세계였다. 그녀의 문장은 읽으면 읽을수록 지친 마음을 쓰다듬어주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단지 도쿄 타워가 지켜봐 주는 장소의 이야기였을 뿐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지만 높은 곳에 우뚝 선 채로 묵묵히 지켜봐주는 도쿄 타워가 있어서 그렇게 많은 흔들림을 견뎌낼 수 있었던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 한낮의 도쿄 타워는 수수하고 온화한 아저씨 같다,는 표현이 보여서 하는 말이다. 수수하고 온화한, 견실하고 마음 푸근한.. 사람은 누구나 상처를 입으며 살아간다고 작품속에서 말하고 있듯이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상처를 품에 안은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로를 갈구하고 있다. 마흔 살 여자와 스무 살 남자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가 않다. 단언컨대 이건 사랑이 아닌 결핍에 관한 이야기다. 어쩌면 문화의 차이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듯 흘러가는 그들만의 사랑이라는 형태가 가끔은 껄끄럽게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이제 갓 스무살이 된 남자아이 토오루와 코우지의 사랑을 사랑이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도대체 사랑이란 말의 정의는 뭘까? 사랑이란 말에는 다분히 주관적인 느낌이 감춰져있다. 때로는 이기적이며 때로는 폭력적인... 사랑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에 의해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어쩌다 연상의 여자와 사랑에 빠져버린 토오루도, 차라리 연상의 여자가 연애하기엔 훨씬 편하다고 선택한 코우지도. 그런데 생각해보면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속 사랑은 그렇게 모두 불완전한 사랑이었던 듯 하다. 그녀의 작품속에서 다루어졌던 사랑의 형태가 대부분 그랬었다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런 사랑들을 정말 예쁘게 표현하고 있으니 그것이 에쿠니 가오리의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여자의 일상을 그녀의 남편에게 빼앗기고 있다고 생각한 토오루가 함께 살자고 말하던 날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한집에서 함께 사는 것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절대 같은 게 아니라고. 언어의 유희? 그것이 아니라면 아주 지독한 이기주의적인 표현쯤? 늘 기다리는 입장의 토오루와 코우지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문득 외로우니까 사람이라던 어느 시인의 말이 생각난다. 모자가정인 토오루도 가족이 있었던 코우지도 외로웠던 거라고. 단지 그 외로움을 상대하는 방법이 조금은 유별났던 것 뿐이라고. 기다리는 것은 힘들지만, 기다리지 않는 시간보다 훨씬 행복하다... 정말 그럴까? 그러나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은 그저 괴로움일 뿐이다. 다만 '언젠가는'이라는 이유를 앞세운 희망고문일 뿐이다. 다시한번 느껴본 에쿠니 가오리의 매력, 괜찮았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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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위한 친절한 지식 교과서 2 - 세계사, 한국사, 미술, 음악 어른을 위한 친절한 지식 교과서 2
김정화.김혜경 지음, 서원초등학교 교사연구회 감수, 박현주 기획 / 소울하우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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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인들이 믿었던 조로아스터교가 종교의 어머니라고 불린다. 그 이유는 조로아스터교의 교리가 동서양의 여러 종교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고. 조로아스터교가 빛과 어둠, 즉 선과 악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띄고 있었다는 것도, 인간이 죽으면 천국과 지옥으로 간다는 내세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인간의 의지로 선과 악을 선택할 수도 있으며 최후의 심판과 부활을 믿었다는 것도 이제사 알게 된다. 세상에! 단순히 크리스트교뿐만이 아니라 불교의 세계관까지도 담겨있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브라만교를 바탕으로 힌두교가 만들어져 확산될 당시의 인도에서 수학과 과학, 천문학이 발달했다고 한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아라비아 숫자와 0의 개념도 인도에서 시작되었다는 놀라운 사실!

따지고보면 현재의 아프리카등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전의 책임은 모두 유럽 열강들에게 있다. 그들이 아프리카를 점령하여 분할하면서 멋대로 점령지의 경계선을 그리는 바람에 같은 민족끼리 혹은 서로 다른 민족끼리 섞이게 되어 지금까지도 그렇게 내전이 일어나고 있다는 건 다시봐도 은근 부아가 치민다. 그것뿐일까? 동남아시아 여러나라의 이름조차도 유럽 열강들에 의해 지어졌다. 아무 의미도 없이.

세계사뿐만이 아니다. 김구가 왜 초대 대통령이 될 수 없었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이 책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어른을 위한 지식교과서1>편을 흥미롭게 보기는 했지만 2편까지는 욕심이 없었다. 하지만 2편에서 '史'를 주제로 삼았다는 걸 알았을 때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세계사, 한국사를 비롯하여 미술사나 음악사까지 들려준다고하니 어찌 흥미롭지 않겠는가 말이다.

바흐나 헨델을 음악의 아버지나 어머니로 부르게 된 것은 그다지 의미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려준다. 왜냐하면 이름붙이기를 좋아하는 일본의 출판사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악성이라든가 가곡의 왕이라든가 하는 말도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뿐일까? 꽈과과광~ 하면서 시작하는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라는 제목은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만 쓴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각자의 관심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1편보다는 2편이 훨씬 재미있게 읽혔다.

솔직히 '통상수교거부정책'이 뭘 말하는지 알지 못했다. 이미 오래전에 '쇄국정책'으로 배웠던 까닭이다.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가 슬기슬기 사람이라는 것도, 곧선 사람이 호모에렉투스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미 오래전에 '마제석기'니 '타제석기'니 하는 말로 한국사를 배웠던 까닭이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한글을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세계적인 통칭으로 불리워지는 것들은 그냥 둬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그런 것말고도 멀쩡한 한글을 이상한 말로 변화시키는 것부터 막는 게 더 우선이 아닐까 싶어서. 그저 해보는 소리다.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구성되어 요점정리가 상당히 잘 되어있다. 늘 곁에 두고 봐도 괜찮을 책이다. 시리즈로 3편도 나올 듯 하다. 다음엔 어떤 주제가 담길까 기대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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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지나간 후
상드린 콜레트 지음, 이세진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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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이 폭발했다. 그리고 이어 밀려드는 쓰나미. 쓰나미는 인간의 삶을 초토화시킨다. 수많은 인명피해와 재산을 송두리째 빼앗아간다. 거대한 지진해일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점점 조여오는 물, 그리고 섬이 되어버린 한가족의 평온했던 쉼터. 이제 모든 것을 삼켜버린 바다는 그 가족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9명의 아이들과 부모가 할 수 있었던 건 괴물처럼 스멀거리며 자신들의 쉼터를 갉아먹고 있는 바닷물을 바라보는 것 뿐이다. 작아지는 섬에서 부모는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할까? 결국 아버지는 그곳을 떠나야 한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작은 배에 탈 수 있는 인원은 고작 8명뿐이다. 누구를 남기고 누구를 데려가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아버지는 떠났다. 그리고 남겨진 아이들. 한쪽 다리를 저는 루이와 한쪽 눈이 성치않은 페린과 또래에 비해 빈약한 몸을 가진 노에. 뭔가 부족한 녀석들이 선택되었다. 이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소설은 떠난 자와 남겨진 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떠난 자도, 남겨진 자도 함께 겪어야 할 심리적인 압박감이 책을 읽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이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가 아니라 그들에게 닥쳐올 고난과 그들이 겪어내야 할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의 심장이 졸아들 수 밖에 없다. 모든 마을을 집어 삼키고도 너무나도 평온한 모습으로 그들앞에 펼쳐진 끝없는 바다가 어느 순간에 화를 내게 될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사실 그런 설정이 조금 뜬금없기는 했다. 지진해일이라는 재해가 저리도 평온한 모습으로 보여질 수 있을까 싶어서.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바다가 아니라 그 바다의 위협속에서조차 살아남아야 하는 한 가족의 고통스러움이다. 또한 버리고 떠난자와 버림을 받은 이들의 갈등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속에는 아주 작은 희망이란 것이 숨을 쉰다. 모순일까?

소설은 떠난 자의 시선과 남은 자의 시선을 서로 교차시킨다. 너무나 상투적인 소재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이상 기후로 인한 자연재해도 그렇고 누가 남고 누가 떠나야 하는가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기준 역시 너무나도 뻔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번쯤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면 이상 기후를 만들어내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이며, 그 판단과 선택의 기준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이다. 세명의 아이들을 남겨두고 떠났음에도 엄마는 또다시 두명의 아이를 잃게 된다. 결국 살아남았으나 돌아오겠다던 약속을 지키기위해 남겨진 아이들에게 돌아가는 엄마의 모습에서 살기 위해 떠나는 한 여자의 굳은 의지를 보게 된다. 남겨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엄마를 만났을까? 잔인하게도 작가는 독자에게 묻고 있다.

책을 읽고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오래전에 읽었던 <파이 이야기>였다. 동물원을 운영하던 파이의 가족이 동물들을 싣고 이민을 가던 중에 폭풍우를 만나 침몰하고 파이는 간신히 구명보트에 올라 타 표류하게 된다. 다친 얼룩말, 굶주린 하이에나, 오랑우탄 그리고 보트 아래에 숨어있던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함께. 굶주림으로 인해 동물들은 서로를 공격하고 결국 파이와 리처드 파커만이 배에 남게 된다. 이제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파이와 리처드 파커의 교묘한 동거가 시종일관 눈길을 사로잡았었다. 이 소설 역시 그 <파이 이야기>처럼 아주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야기의 흐름조차 껄끄럽지가 않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나 자신이 떠난자가 되기도 하고 남겨진 자가 되기도 한다. 흥미로웠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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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지음, 박규태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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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일상생활을 통해 학습되는 존재 (-26쪽)

자기만 옳다고 믿는 그런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생활 양식을 알게 됨으로써 오히려 자기 자신의 문화를 더 깊게 사랑할 수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유쾌하고 풍부한 경험의 기회를 스스로 차단해 버린다. 지나치게 자기방어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다른 나라에 대해 그들 자신의 특수한 해답을 강요하는 것말고는 다른 대안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30쪽)

일본인들은 어떤 하나의 행동 방침에 모든 것을 걸며 만일 그것이 실패할 경우에는 다른 방침을 취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했다. (-72쪽)

일본인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각자 알맞은 자리를 취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일본인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서 출발해야 한다. 계층적 위계질서에 대한 그들의 신뢰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우리의 신념과는 완전히 다르다. 일본인은 일본 국내의 문제뿐만 아니라 국제 관계의 문제도 계층적 위계질서의 관점에서 바라보려 한다. 지난 10여년간 그들은 일본이 국제적 위계질서라는 피라미드의 정점에 도달했다고 여겼다.(-75쪽)

종교적 고행에 몸을 바친 일부 종교전문가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일본에서 종교란 결코 엄격하고 금욕적인 관념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물론 일본인들은 신사와 사찰을 참배하는 종교적 순례에 열성적이지만 이는 또한 휴일을 즐기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129쪽)

일본의 조상숭배는 최근의 조상에만 한정되어 있다. 일본인은 누구의 무덤인지를 확인하려고 매년 묘비의 문자를 고쳐 쓰지만,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이미 사라져버린 조상의 묘비는 치워버린다. 또한 그런 조상의 위패는 불단에 안치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일본인은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사람외의 조상에 대한 효행은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들은 오직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집중한다. (-173쪽)

일본인에게 영원불멸의 목표는 명예다. 이를 위해서는 타인에게 존경받는 것이 필수다. 이와같은 목적에 도달하고자 사용하는 수단은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취할수도 있고 버릴수도 있는 도구일 뿐이다. 일본인은 상황이 바뀌면 재빨리 태도를 바꾸며 그것을 서구인처럼 도덕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자기 욕망의 만족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들은 육체적 쾌락을 좋은 것, 함양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쾌락 추구가 가치있는 것으로 존중받는다. 하지만 쾌락은 그 적절한 자리에만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생의 중대한 영역을 침해하거나 침입하도록 놓아두어서는 안된다. (-234쪽, 241쪽)

각자의 영혼은 본래 새 칼이 그렇듯이 덕의 빛을 발한다. 다만 갈고 닦지 않아 녹이 슬수는 있다. 이와 관련해 일본인들은 '자기 자신의 몸에서 나온 녹'은 칼의 녹과 마찬가지로 좋지 않다고 말하곤 한다. 그래서 사람은 칼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인격이 녹슬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한다. 하지만 설사 녹이 슨다해도 그 녹 밑에는 여전히 빛나는 영혼이 있고 그것을 다시 한번 갈고 닦기만 하면 본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268쪽)

일본인은 각자의 생활이라든가 혹은 자기가 아는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판단을 내린다. 즉 그들은 의무의 법도를 저버리고 개인적 욕망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을 약자로 판단한다. 그들은 모든 일을 이런 식으로 판단한다.(-278쪽)

일본인은 죄의 중대성보다는 '하지恥'의 중대성에 더 무게를 둔다. 일본인은 '하지恥'를 도덕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즉 '하지'를 느끼기 쉬운 인간이야말로 모든 율법적 선행을 실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타인이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지 추측하면서 그 판단을 기준으로 자신의 행동 방침을 정한다. (-295, 296쪽)

일본에서는 '붓다'를 '호토케佛'라고 부른다. 불교에서 '붓다'란 원래 '깨달은 자'를 일컫는 말이지만 일본인들은 그런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희석화시켜버리고 그것을 주로 조상신의 의미로 사용한다. 이점에서 '붓다'와 '호토케'는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 양자의 결정적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단순히 '붓다'와 '호토케'를 동일시한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본문에 나오는 '붓다'는 '호토케'라고 고쳐 적어야 한다. (-332쪽 각주편)

일본인들은 나이에 따라 그때그때 상황에 적합한 행동을 지향한다. (-368쪽)

오미야마이리お宮参り: 신사참배에 관하여...

통상 남아는 생후 32일, 여야는 33일이 지난 다음 어머니와 할머니가 아기를 안고 신사에 참배해 아이의 건강한 발육과 행복을 기원한다. 한편 아이가 3세(남여공통), 5세(남아), 7세(여아)가 되는 해의 11월 15일에도 신사를 참배하는데 이런 관습을 '시치고산七五三'축하연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일본에는 성인이 된 후 남자는 25세와 42세때, 그리고 여자는 19세와 33세때 액땜을 위해 신사를 참배하는 관습도 있다. (-380 각주편)

종래 <국화와 칼>에 대한 비판자들은 베네딕트가 군국주의자들이 내세운 이데올로기에 근거해 일본문화를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해왔다. 하지만 러미스는 아예 베네딕트가 고의적이고 의식적으로 국가 이데올로기를 선택했으며, 정보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마치 국가 이데올로기가 과학적 자료인양 묘사했다고 주장한다. 뿐만아니라 러미스는 베네딕트가 일본문화를 설명하는 방식도 전혀 과학적(학문적)이지 않다고 비난한다. <국화와 칼>은 미국식 생활방식을 기준삼아 미국인이 일본인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내세우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일본인에게 무언가 더 좋게 바뀐다는 것은 곧 미국을 더 많이 닮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407쪽 각주편)

오랫동안 바라보기만 했던 책이었는데 혼란한 사회가 기회를 주었다. 역시 시간에 쫓기지 않으며 책을 읽으면 훨씬 더 집중할 수가 있어서 좋다. 일본문화에 대한 고전으로 취급받는다는 책이었다. 그렇다고 정석까지는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한번은 읽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내심 실망하기도 했다. 기대를 너무 크게 한 탓도 있었겠지만 일단은 이 책이 쓰여지게 된 동기나 그 시대적 배경을 알고나니 어느정도는 그 실망감이 이해되기도 한다. 책을 읽으면서 솔직히 껄끄러운 점도 없진 않았다. 그 당시에 한국이란 나라의 존재감이 얼마나 미미했는지를 다시한번 느끼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일본이란 나라에 발을 들여놓지도 않고 단순히 인터뷰만을 통해 한 나라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었던 까닭이다. 많은 일본인의 말을 차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점에서도 너무 편협적으로 판단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크게 다가왔다. 그렇게 막혔던 속을 마지막 각주편(-407쪽의)에서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솔직히 각주가 따로 있는 구성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책을 읽는데 몰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만큼은 각주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어찌되었든 한번쯤을 읽어볼 만한 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도 우리나라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연구를 엄청나게 했다는 글을 본 적 있다.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만 지배하기에 조금은 수월해지는 까닭이다. 살아보지 못한 다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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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늑대, 그리고 하느님
폴코 테르차니 지음, 니콜라 마그린 그림, 이현경 옮김 / 나무옆의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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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의 소개글을 읽으면서 인간의 본성을 찾아가는 <심우도>가 떠올랐다. 어쩌면 개와 늑대라는 두 단어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개는 늑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순간의 미묘함! 묘하게 빨려들었다. 불현듯 깨닫게 된다. 어느새 개에 동화되어버린 채 숨가쁘게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응원했다. 부디 '달의 산'을 찾아갈 수 있기를. 부디 자신의 본성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이 책은 또한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도 떠올리게 한다. 위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채 제 동료들을 밟으며 계속 올라가기만 하던 애벌레의 꿈틀거림을. 알 수 없는 존재의 응원을 받으며 꼭대기에 다다랐던 애벌레는 결국 나비가 될 수 있었다!

개는 어느날 주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삼일 낮밤을 꼬박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버려진 그 곳에서 주인을 기다렸으나 주인은 끝내 오지 않았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게 된 개는 가로등 아래서 서글프게 울었다. 새벽녘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왜 울고 있어? 주인님이 날 버렸어! 먹을 것을 주며 노랗고 강한 눈빛은 이렇게 말했다. '달의 산'을 찾아가라고. 인간으로부터의 길들여짐은 참으로 많은 것을 잃게 한다. 그러나 한번 길들여지게 되면 그것에 안주하는 삶을 살게 되지. 그리하여 개처럼 몇 날 며칠을 방황하게 된다. 개는 결국 체념끝에 '달의 산'을 찾아가보기로 한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곳을 향하여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 책은 떠돌이 개가 되어버린 길들여진 개의 여정과 함께 한다. 길 위에서 순례자 늑대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과 동행이 되어 '달의 산'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여정은 만만치가 않다. 원래는 늑대였으나 길들여짐으로 인하여 개가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고뇌와 방황과 후회가 찾아온다. 하지만 동행은 무의미하지 않았다. 서서히 변해가고 있던 개의 모습. 개는 부러운듯 바라보던 늑대들의 모습이 자신에게서도 보여지고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뉴욕에서 태어났으나 아시아에서 성장했다는 지은이의 이력이 이채로웠다.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인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껄끄럽지 않게 다가왔다. 책을 덮고도 여전히 <심우도>의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의 불성을 소에 비유했던 그림. 사찰을 찾을 때마다 심우도에 마음을 빼앗기곤 했었다. 심우도는 소를 찾기 위해 산중을 헤매다가 마침내 소를 발견하고 길들여 그 소를 타고 집에 돌아왔으나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 다시 속세로 나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과정을 열단계로 나누어 표현했는데 이 책에서 개가 '달의 산'을 찾아가는 여정이 그렇게 보였다는 말이다. 의도치 않았으나 두번을 거듭 읽게 된 책이다. 좋은 시간이었다. /아이비생각

갑자기 어떤 신비가 그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버려지지 않았다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감정이었다. 하루하루가 덧없이 지나고 밤은 그림자처럼 달려간다. 예상치 못한 일, 불행의 옷을 입은 일이 가끔 벌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경이로운 세상에 살고 있는지 절대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며, 그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 저 너머에 뭐가 있을까? 그리고 그 너머, 그 너머, 또 그 너머에는.....?' (-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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