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 조선의 책과 지식은 조선사회와 어떻게 만나고 헤어졌을까?
강명관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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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세계 최초, 세계 최대 따위의 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는 보여지는 면에 치중되어 살고 있다는 말은 맞다. 단순히 보여지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마네킹 효과와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런 의미의 최고나 최초, 그것도 아니라면 동양 최고나 최대와 같은 수식이 붙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경우는 많은 듯 하다. 우리나라를 일러 '기록의 나라'라는 말을 많이 한다. 세계기록문화유산을 보더라도 꽤많은 우리의 문화유산이 등재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다. 그것을 우리는 <직지심체요절>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로 인쇄된 책이라는 것으로 증명했다. 일찌감찌 목활자를 썼던 중국이 활자를 최초로 개발한 나라이긴 하지만 금속활자를 최초로 개발한 것은 우리나라였다. 인쇄를 말하면 실과 바늘처럼 따라오는 독일 구텐베르크의 성경보다 78년이나 앞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여전히 구텐베르크의 이름을 앞세우는 까닭은 무엇일까? 인쇄기술의 발달은 그 나라 문화의 척도였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책을 많이 본 민족은 유식하다는 말일까? 그렇게 따지면 우리나라에는 그 옛날에도 책을 많이 만들어냈을까? 그리고 그 만들어낸 책을 많은 사람이 읽었거나 읽을 수 있었을까?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우리의 문맹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그다지 오래된 역사가 아닌 까닭이다. 어쩌면 그런 배경이 있었기에 현재의 우리나라가 교육강국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각설하고, 이책은 알고 싶었으나 너무나 무거운 주제였던 탓에 감히 도전(?)해보지 못했던 주제에 대해 너무나도 흥미롭게 다가서고 있다. 읽는 내내 긴장감이 나를 조여왔다. 마치 강의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각 장마다 상세한 설명도 설명이지만 부연설명처럼 세세하게 보여주고 있는 사진들은 정말 놀라웠다. 그 사진들이 각 장의 설명을 좀 더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웠던 인쇄술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보자면 이렇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책을 만들었지만 오늘날처럼 팔지 않고 몇사람만 나누어 가졌다. 왕이 누군가에게 내려주는 방식이었다는 말이다. 왜 그랬을까? 우리는 한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활자자체가 복잡하고 활자 만들기가 어려웠던 탓에 책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거기에다 유교문화이다보니 정신세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여 실제생활에 도움이 된다 하여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종대에 만들었다는 <농사직설>과 같은 책도 농민이 아닌 양반이나 관료층들만 읽었으니 오죽했을까?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지식을 지배층만의 전유물처럼 생각했다. 거기에 비하면 독일의 경우는 우리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알파벳 26자는 활자 만들기가 쉬웠을 뿐만 아니라 책을 인쇄하기도 쉬워서 많은 책을 만들 수 있었으며, 많은 사람에게 책을 팔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책을 읽고 지식을 넓힐 수가 있었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들은 물질중시의 문화였다.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을 빠르게 발전시켰음은 당연지사다. 인쇄술의 발전은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인쇄술의 발전으로 종교, 시민,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던 역사를 생각해보면 답은 바로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인쇄, 출판 문화의 큰 변화가 시작된 시기는 고려말이다. 사대부의 나라를 꿈꿨던 정도전의 기획은 인쇄와 출판으로만 가능했기에 정도전은 금속활자로 서적을 찍어내 그꿈을 이루고자 했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한글을 만든 세종의 시대는 금속활자의 시대이기도 했으나 책을 출판하는 일을 국가가 독점했던 것은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이었던 탓에 이렇다하게 커다란 성장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고려의 과거제도나 사학의 발달은 분명 책의 수요층이 방대했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책의 수요와 공급은 일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책을 유통시킬 서점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중국은 송대에,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 이후에 민간서점이 출현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에는 서점이 없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는 누가, 누구를 위해, 어떻게 책을 만들었으며 읽었을까? 대체적으로 중국은 책을 수출했으며 조선과 일본은 책을 수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책들이 사라졌다. 많은 외환과 내란은 책을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조선의 도서관이라는 홍문관의 책들도 임진왜란을 통해 모두 재로 변해버렸다.

 

조선은 왜 나라에서 금속활자를 독점했을까? 한마디로 말해 그들은 체제유지를 위한 책만 찍어냈기 때문이었다. 책을 찍고 유통시키는 주체가 바로 왕과 관료들이었던 까닭에 금속활자 인쇄술은 오로지 극소수의 지배층이나 양반을 위한 것이었던 셈이다. 중종대에 성행했다는 <삼강행실도>만 보더라도 그렇다. 우리에게 지금까지 지극한 효의 형태로 알려주던 '단지'의 형태라거나 허벅지 살을 베어내는 등의 경우는 사실 기본적으로 올바른 윤리관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여 머리카락도 자르지 않았던 것과 비교해보면 모순 그 자체인 것이다. 실행대상이 힘없는 백성들이거나 양반가의 여자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걸 보면 결국 그마저도 극소수의 지배층, 즉 강자만을 위한 것이었다는 말이 된다. 활자조차도 자신들만의 세상이 지속되기를 원했던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그 중 많이 찍어냈다는 불경서적이나 농민을 위한 책조차도 백성과는 무관한 책이었던 것이다. 책을 출판하는 것조차도 지배계급의 이익이 먼저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우리가 배워 알고 있는 사찰이나 서원조차도 실재적인 인쇄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사찰은 고려시대에, 서원은 조선후기에서나 인쇄의 주체였다고 하니. 백성들은 이래저래 학문과 지식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왕과 관료들만을 위해 책을 만들어내는 것도 문제였지만 책이 있다해도 글을 읽을 수 없었으니 무용지물이었을 것이다. 세종이 한글을 만들었을 때 관료들의 반대를 생각해보면 백성들의 무지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다가 책값은 엄청나게 비쌌다. 논 두서너마지기를 주고 책 한권과 바꾼다는 건 정말이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종이를 만들어내는 일이 어렵고 까다로웠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아무런 댓가도 없이, 그것도 농번기에 일을 시키니 그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테니 책값이 비쌌던 것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당장 먹고 살 일도 힘겨운 일인데 어찌 책과 가까워질 수 있겠는가 말이다. 종이를 만드는 일도, 책을 인쇄하는 일도 모두가 백성들의 차지였지만 그들이 한 일에 비해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이 되니 이래저래 괴로운 건 백성들뿐이었다.

 

각 장의 제목만 봐도 이 책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바로 알 수 있다. 각 장을 따로따로 읽는다해도 그렇게 이상하지 않을 듯 하다.   '조선은 왜 나라에서 금속활자를 독점했을까?', '서울의 인쇄·출판 기관-주자소와 교서관', '조선의 도서관, 홍문관',  '서점은 왜 실패했는가?' 와 같은 부분은 다시 생각해봐도 상당히 흥미롭다. 마지막부분의 '임진왜란이 조선·중국·일본에 미친 영향' 을 읽으면서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지배층이 어떤 사상을 가졌는가에 따라 너무도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게 한편으로는 서글프기도 하고.  많은 것이 조선과는 너무나도 달랐던 고려가 좀 더 힘을 써서 부국강병의 나라로 발전했더라면, 임진왜란만 없었더라도, 실학에 조금만 더 일찍 눈을 떴더라면.....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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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심리학 - 18가지 위험한 심리 법칙이 당신의 뒤통수를 노린다
스티븐 브라이어스 지음, 구계원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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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Q검사, EQ검사, 적성검사, 성격유형검사와 같이 비슷한 종류의 검사를 받아본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어디 그것뿐일까? 끝도없이 쏟아져나오는 각종 설문지를 앞에 두면 도대체 이런 것들이 왜 필요한 것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그 많은 질문앞에서 나는 과연 어떤 답을 골랐는지 한번 생각해보자. 여기서 중요한 건 질문에 어떻게 답을 했는지가 아니라 어떤 답을 골랐는지를 생각해보자는 거다. 내 느낌, 내 생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이미 정형화되어진 서너개의 답속에 나를 밀어넣어야만 했던 그 순간의 낯설음이 새로운 느낌으로 내 기억속에서 다시 스멀거린다. 어쩌면 나처럼 그들이 제시한 답중에서 내게 맞는 게 없다고 생각하며 조금은 찜찜했던 사람도 꽤나 많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지금 생각해봐도 이건 아닌데...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경우가 정말 많았다. 그만큼 세상에는 사회가, 혹은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틀이 많다는 말일게다. 책속에서도 언급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토록 자유를 꿈꾸면서도 정작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란 말... 문득 오래전에 보았던 광고가 떠오른다. 남들이 모두가 아니라고 말할 때 '네'라고 할 수 있는 사람! 솔직하게 말한다면 참 무서운 광고였다. 그런 사람의 결과는 둘 중 하나다.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 행동하나로 바로 왕따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특별히 뛰어난 사람이라기보다는 뭔가 모난 성격의 소유자일거라고 믿어버린다는 거다. 그 말 한마디가 감춘 함정의 깊이는 정말 엄청나다! 그러니 한번쯤은 의심해볼 여지가 충분하지 않을까?

 

자기계발서류의 책들, 이제는 왠만해서는 보지않는다. 뭔가 달라져야만 할 것 같아서, 지금보다는 나은 생활을 꿈꾸기 때문에, 누군가와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 혹은 간절함을 담고 있는 그 어떤 것의 의미를 위해서.... 그러나 그 많은 책을 앞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못하는 내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실망을 해야 했던지... 나만 그럴까? 그런 사람, 정말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는 다시 자기계발서를 찾는다. 왜냐고? 거기에는 실망했던 내 자신에게 위안삼을 수 있는 말도 들어있는 까닭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이 책의 제목에 망설임없이 시선을 빼앗겼던 것은. 이미 정해진 어떤 논리에 대해 한번쯤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건 짜릿함을 느끼게도 한다. 비판할 수 있다는 건 어쩌면 감정조절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인지도 모를 일이기에 나는 가끔씩 삐딱선 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재미있었느냐고? 물론이다. 전제적인 주제도 흥미로웠지만 소주제의 삐딱함이 주는 재미도 꽤나 쏠쏠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하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한다는 말이 있다. 거기에 하나 더 보탠다면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이 잘못되었어도 그 틀림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얼마나 엄청난 오류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말이 될 수도 있기에 그 말을 들었을 때 가슴 한켠이 뜨끔거렸었다.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라던 책표지의 말이 새삼스럽다.

 

이 책속에서 언급했던 많은 책중에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은 꽤나 오래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책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물론 나도 읽었다. 그리고 그 때의 충격은 상당했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이미 정형화되어진 어떤 것의 틀에 맞춰졌을 뿐이란 생각을 하니 한편으로는 허허롭다. 그것처럼 우리가 알고 있었던 많은 심리학의 법칙들에 대해 "정말 그럴까?" 라고 묻고 있는 이 책은 당돌하기까지 하다. 한동안 우리를 뜨겁게 달궜던 감성지수론에 대해 이 책은 말한다. 감성 지능을 강조함으로써 이득을 얻는 쪽은 노동자 측이기보다는 기업 측인 경우가 많다고. 왜냐하면 감성 지능이 높은 사람일수록 기업 문화에 온순하게 적응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정말? 하고 묻다가 나는 이내 공감하고 말았다. 그렇게 책을 읽으면서도 정말? 하고 묻고 싶어지는 순간이 많았는데 어쩌자고 자꾸 공감하게 되는지 알 수 없다!  내 안에 살고 있다는 상처받은 아이 하나를 달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었는가를 생각해보면 내심 억울하기까지 하다. 정리정돈을 잘하지 않아도 일의 능률은 오른다, 나의 콤플렉스는 절대로 부모 탓이 아니며 마음을 치유한다고 해서 몸도 건강해지지는 않는다 와 같이 우리 주변을 떠도는 어떠한 법칙과도 같은 말들에 대해 궤변처럼 늘어놓는 저자의 말투가 왠지 싫지 않았다.

 

자존감을 높이면 성적이 올라간다?, 속마음을 표현해야 건강하다?, 긍정 마인드가 성공을 부른다?, 대화가 문제를 해결한다?, 자기주장을 잘하면 사회생활에서 유리하다?, 무엇이든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다?,  사랑의 법칙은 기브 앤드 테이크다?, 매 순간을 소중하게 활용하라?,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자?... 이 책에서 콕콕 짚어주는 18가지의 위험한 심리법칙은 한번쯤은 재고해봄직한 이야기들이다. 그와 더불어 나는 그 심리법칙의 함정에 얼만큼 빠져있는지도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항상 말하지만 세상은 온통 '만들어진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며 끝도없는 오류의 흐름속에서 흔들린다. '모든 가치를 의심하라' 던 저자의 마지막 말을 되새긴다. 속은 편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내가 알고 있던 진실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으니. 그러나 괜찮은 주제임은 분명해보인다. /아이비생각

 

어쩌면 남들에게 내세우기 좋은 자신을 만들려고 끊임없이 갈고 닦기보다는 그냥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있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 물론 내 말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엉터리 심리학 이론으로 가득한 책들 속에 그 정답이 있지 않다는 것 또한 매우 분명하다. 우리가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나 고통을 완화시킬 전략,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지침을 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당신 자신을 미운 오리 새끼에서 눈부신 백조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고 속삭이는 목소리에 유혹당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하지만 때로는 백조가 아닌 어른 오리 (심지어 못생긴 오리라 할지라도) 로 사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점을 잊지 말도록 하자. (-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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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력 - 비전을 실현하는 힘
최재웅 지음 / 엔트리(메가스터디북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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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단에 올라 멋지게 강의해보는 꿈을 꾸어보지 않은 사람, 얼마나 될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꿈을 한번쯤은 꾸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저 생각속에만 있을 뿐이라고 자조섞인 중얼거림으로 마무리하는 사람도 꽤나 많을 것이다. 그래서 궁금했었다. 왜지? 생각해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것 같은데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그저 꿈일뿐이라고 바라만봐야 하는 거지? 이 책에서 말하듯이 거창하게 세상을 바꾸는 강의를 꿈꾸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나의 의문에 강하게 어필했던 한마디가 있었다. 여섯 살 아이에게 설명하듯이! 가만히 생각해보면 누구나 너나 할 것 없이 저 잘난맛에 살고 있다. 너도나도 개성을 이야기하며 뭔가 특별한 자신만의 매력을 보여주기 애를 쓴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새겨들어야 할 말은 제 멋에 겨워 흥흥 하다보면 망한다는 게 곧 진리라는 거였다. 여섯 살 아이에게 설명한다는 게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 까닭이다. 그만큼 상대를 읽어낼 줄 아는 배려와 관심이 필요하다는 말일게다. 멋진 강의 역시 나 혼자만으로는 이루어 낼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소주제별로 따져보면 이렇다. 누구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누구인가를 먼저 생각해야만 하고, 그 들어줄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나의 자세는 어떠한가를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가서는 자세를 제대로 배워 익혀야만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제대로 된 강의력이 갖춰진다는 것이다. 강의하는 사람으로써의 자세에 앞서 내게 먼저 다가왔던 대목은 진짜 강사로 사는 법이었다. 스타 강사이면서 진짜 강사가 될 수 있다면 그것처럼 멋진 일도 없겠지만 우선적으로 스타를 꿈꾸기 보다 진짜 강사가 될 수 있는 법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짧았지만 강했다. 세상의 진리중 하나가 쉽게 얻어지는 건 쉽게 버려진다는 것이다. 나비가 제 힘으로 고치를 빠져나와야만 날 수 있듯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첫번째로, 가르치는 대로 살아야 한다. 조금 안다고해서 제 멋대로 흥흥거리지 말라는 말이니 초심으로 모든 과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 될 수도 있겠다. 두번째로, 적고 외우고 연습하고 수정하고를 반복해야 한다.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다. 끝없이 자신의 상태를 파악해가며 다져져야 한다는 말일 게다. 세번째로, 기다려야 한다. 맛있는 과일을 먹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과정을 거쳐야 하듯이 내게도 그만큼 투자되어야 할 그런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해서 익은 과일도 먹어본 사람마다 맛에 대한 평가가 다르니 또한 그 반응에 대해 쉽사리 흔들려서도 안된다는 말이었다.

 

강의를 듣는 청중에 대해 분석해놓은 부분은 흥미로웠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지 말고 뭔가를 보여줘야만 하는 시각형, 너만 하지말고 나도 좀 참여시켜줘 하는 청각형, 무엇을 하든 따라해 줄 의향이 있으니 나를 움직이게 해보라는 감각형, 무슨 말을 하는지 낱낱이 한번 파헤쳐보겠다고 열심히 적는 지각형... 그렇다면 나는 어떤 부류의 청중일까? 시각형, 청각형, 지각형은 맞는데 감각형은 아닌 듯 하다. 솔직히 자리잡고 앉았는데 일어나봐라, 박수쳐봐라 하는 등의 요구를 해오는 강사를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럴거면 레크레이션장으로 가지 여기 왜 와? 하는 삐딱한 심보가 내게 있는 모양이다. ^_^  그러나 간단한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거나 반복하고 따라하게 해서 청중이 참여하는 강의를 하라는 말에 그렇게만 된다면 꽤나 멋진 일일거라는 상상을 곧 하게 된다. 다시말해 저자의 말처럼 청중과 함께 이야기하라는 말이다.

 

또하나를 이야기해보자면 4MAT구조 기억하라는 것이다.  '왜' 이 강의를 들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Why, '무엇을' 이야기할지 정하는 What,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하는 How, '만약에' 당신이라면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돕는 It.. 를 말하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의 핵심은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이다. (- 163쪽)  이 법칙을 여섯 살 아이에게 말하듯이!  여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인데 내가 아무리 많은 준비를 했더라도 사람들에게 나를 어필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사실이다. 발로 뛰어가며 나를 알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시 나를 팔기(?) 위한 마켓팅은 필수다!  한번 팔았다고해서 꾸준하게 팔리는 것도 아니니 차후관리까지 철저해야 한다! (음~ 그렇지, 세상엔 거저 얻어지는 게 없으니까 ㅠ_ㅠ:) 하지만 저자도 그렇게 했다지 않은가. 그렇다해도 이 세가지만은 잊지 말자. 스스로 자신만만하라, 외우지 말고 핵심 포인트만 기억하라, 가장 편안한 사람에게 전달한다고 상상하며 연습하라.(- 108쪽) 멋진 강의를 위해 아무리 많은 방법을 제시한들 내가 해보지 않으면 결코 얻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도전해볼지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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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남은 조선의 살인과 재판 - <심리록>으로 읽는 조선시대의 과학수사와 재판 이야기
이번영 지음 / 이른아침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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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그 유명한 '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말을 남겼던 사건이 있었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정할 수 없는 사회의 한단면을 보는 것만 같아 씁쓸했었다. 金錢萬能주의가 되어버린 지금은 정말이지 돈만 있으면 뭐든 다 할 수 있을것 같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런 세상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보면 살면서 돈으로 안되는 일도 많다. 돈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는 걸 금새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걸 생각해보게 되었다. 단순히 범죄를 저지르고 그들을 재판하는 과정만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닌 까닭이다. 길게는 15년을 끌기도 했던 하나의 사건을 대하는 정조의 마음자세가 경이로웠다. 후세에 그 이름이 빛나게 되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는 말이다. 백성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혹여라도 잘못된 판결로 억울한 일이 생겨날까 두번 세번 살펴보던 그 마음이 감동을 전해주기도 했다.

 

조선은 엄연한 법치국가였으며 형사사건에 따르는 일체의 수사와 소송이 법률에 근거해야 했다. 예를 들어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반드시 검시의 과정을 거쳐야 했고, 피해자 가족이나 친인척은 물론 모든 관계인들의 증언을 들어야 했다. 물증을 확보하는 것은 기본이고 범인 자신의 자백까지 받아야 했으며, 이런 모든 정황과 물증과 진술과 자백이 일치하지 않으면 소송은 마무리될 수 없었다. 게다가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기초 수사의 과정은 반드시 서로 다른 관리가 맡아서 2회 이상 실시하도록 했고, 이 이중의 수사 결과가 서로 일치되지 않거나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있을 경우 수사는 3회든 4회든 한정 없이 반복되었다. (- 책머리에 중에서)

 

위의 글만 보더라도 이 책이 무엇을 담고 싶어했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저렇게까지 엄중한 과정을 거쳤음에도 분명 억울함을 호소한 사건도 있었을 게다. 그러나 정조의 최종판결을 보면 놀라움과 함께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판례가 공정해야만 한다는 정조의 말은 깊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정조가 자신이 관여했던 모든 소송의 과정과 결과, 판단의 근거들을 일일이 기록에 남겨 나중에 형사소송 판례집으로 만든 책이 <심리록>이라고 한다. 그 책에 수록되어진 사건이라고 하지만 모두 중범죄만을 다루고 있어 그 무게감이 엄청나다. 시절이 바뀌었어도 사람사는 모양새는 그대로구나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중요시하는 자세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는 걸 새삼스럽게 알게 된다.

 

중국 원나라의 왕여가 송나라의 형사사건 지침서들을 바탕으로 편찬한 <무원록>이 정조때 편찬된 법의학서의 근간이 되었다고 한다. 세종대에 우리나라 실정에 맞지않는 내용을 빼고 조선의 사정을 반영하여 <신주무원록>을 펴냈다고 하니 과연 세종이군!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 최초의 통일법전인 <대전통편>은 정조대에 만들어졌다. 그 이전까지 명나라의 <대명률>과 함께 우리나라 법전의 양대산맥이었던 <경국대전>,<속대전>을 통합한 책이라 하지만 사문화된 조항을 폐기하고 새로운 조문을 추가하여 만든 책이라 하니 과연 조선을 '기록의 나라'라 할 만하지 않은가 말이다.

 

살인사건에 반드시 2회 이상 검시를 했고, 의사와 함께 반드시 전문가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정황과 물증, 증언과 자백이 모두 일치하지 않으면 함부로 형을 결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백하지 않아 15년동안이나 옥살이를 했던 죄인도 있었다!) 단순히 인력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는 말일터다. 이중수사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최첨단 수사기법을 동원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려 했던 관료들에 대해서 엄중한 처벌을 내렸다는 대목에서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책속에 펼쳐지는 사건을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볼 수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남녀간의 애정문제, 부부로써 지켜야 할 도리라거나 가족간의 불화, 시기와 질투, 부모와 자녀 혹은 형제지간의 여러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니 사건 하나하나를 가벼이 볼 수 없었다는 말이다.  기회가 된다면 정조의 <심리록>이나 정약용의 <흠흠심서>를 한번 읽어보고 싶다.  "無疑處起疑- 더는 의심할 것이 없다고 판단되는 상태에서도 다시 한 번 의심을 일으키라" 는 정조의 그말은 주는 여운이 무척이나 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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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이 품은 한국사 두 번째 이야기 지명이 품은 한국사 2
이은식 지음 / 타오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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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를 다니다보면 그 동네의 이름만으로도 그곳을 스쳐지났던 역사의 한줄기를 유추해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오래된 것일수록 그곳이 어떤 곳이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가끔 서울 시내를 지나치면서 세종로니 충정로니 퇴계로니 하는 거리의 이름을 볼 때 고개를 갸웃거릴 때가 있는데  그 地名과 역사속의 인물이 무슨 상관관계일까 싶은 까닭이다. 사찰을 다녀보면 일주문에 쓰인 'OO산OO사' 라는 현판이 붙은 걸 볼 수 있는데 가만히 살펴보면 지금의 이름보다는 옛날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경우도 많다. 옛날에는 地名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산이나 물을 소재로해서 만들었거나 지형의 특징이나 자연 자원을 소재로 하여 만든 이름도 있고, 신앙이나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아 만들었거나 교통을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말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동네이름중에서도 앞에서 열거한 이유를 근거로 만들어져 지금까지 이어져내려오는 것도 찾아보면 꽤나 많을 것이다. 더구나 한다하는 옛사람들은 사물이든 자연이든 제 흥에 겨워 이름붙이기를 좋아했다. 가까이에 있는 古宅을 찾아가보더라도 집안의 건물이 저마다의 이름을 갖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어디 그것뿐일까? 그 주변을 흐르는 물이나 바위에도 이름붙이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의미로 삼기도 했다. 그러니 동네이름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런데 내게는 지금의 地名보다는 옛地名이 훨씬 더 좋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생긴 그대로의 모습을 표현했다거나 느껴지는 혹은 보여지는 그대로의 이름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다. 장승이 서 있는 곳이라하여 장승백이라고 했는가하면 탑이 있다고해서 탑리, 미륵상이 있다고해서 미륵리, 지네를 닮았다고 하여 농다리라고 했다거나 공작새를 닮았다고 하여 공작산이라고 했다거나 하는 것만 보더라도 그 시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곱고 아름다운 심성을 가졌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강화 살창리에 관한 이야기는 씁쓸하다. 창왕과 영창 대군 두 昌이 죽었다고 하여 그들이 죽은 곳을 지금도 살창리라고 한다는데, 시대를 달리하여 죽임을 당한 두 왕의 혼이 깃들어있는 듯한 이름은 많은 느낌을 전해준다. 비록 255년이라는 간격을 두고 있지만 창왕과 영창대군의 넋은 어쩌면 그 동네를 아직도 쓸쓸히 배회하고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여 서글픔이 느껴지기도 한다. 강화 중심지 읍내에서 두 昌이 죽임을 당한 곳, 즉 殺昌里를 찾아 나서는 길은 무척 어려웠다 지은이의 말처럼 옛지명만으로 역사의 현장을 찾아낸다는 건 분명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누구에게 물어봐도 모른다는 대답을 들었을 때, 하물며 찾아간 관청에서조차 같은 답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막막했을까? 그러나 살창리처럼 지방사투리로나마 남겨진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일터다.

 

고양시 일산의 이름이 행정구역 명칭으로 정해진 일제의 잔재라는 걸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지금의 일산 일대는 조선 태종대에 고봉현과 덕양현의 앞 글자와 뒤의 글자를 따서 고양현으로 정하였다. 일산의 옛 이름은 中面으로 그 이전에는 고봉현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1755년의 <고양군지>에도 모두 중면이라는 명칭으로 표기되어 있어 일산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랬던 것이 후에 일산신도시로 발표되었다고 하는데 일제가 임의대로 남긴 이름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문제라는 지은이의 말에 어느정도는 공감하게 된다. 신라 진흥왕 때 전국을 9주5경으로 나누어 고양지역을 한산주라고 했으며 후에 고봉현으로 개칭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하니 원래의 이름을 찾아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그렇게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로움이 필요할테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한국어 발달 과정상 한민족→위대한 민족, 한글→큰글(위대한 글, 훌륭한 글, 높은 글), 한강→큰강(넓은 강) 등의 뜻으로 볼 때 한산(큰산)→고봉산→일산으로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지은이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다.

 

하늘을 떠받들고 산다는 동네, 봉천동.. 달동네의 대표적인 이름이다. 그러나 지금의 봉천동은 옛날의 봉천동이 아니다. 새롭게 개발되어 아파트군단이 늘어선 동네로 변신했다. 그러나 여전히 못사는 동네처럼 불리워지는 이름이 싫어 거기 사는 사람들이 개명신청을 했고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때나마 그곳에서 살았던 나는 못내 섭섭함을 감출 수 없었다. 달동네 시절에 나는 그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봉천동과 신림동을 아우르는 그곳의 옛모습과 변천과정이 아직까지도 나의 기억속에는 뚜렷하게 남아 있다. 부자동네건 가난한 동네건 그 이름이 안고 있는 수많은 기억들은 이름이 바뀐다고하여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이 옛날에는 그랬었다는구나, 하면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다. 그게 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에만 치중하는 우리네 사회의 병폐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더디게 넘어간다고 지지대고개, 근심을 잊었다고하여 망우리, 제비꼬리를 닮았다고하여 연미정, 은혜를 갚고자하여 지은 절이니 봉은사... 등등등 수도없이 많은 이름이 저마다의 의미를 안고 생겨났다. 생긴대로, 보여지는대로, 느끼는대로 이름을 붙인다는 게 지금은 왠지 어설프고 낯설게 다가올지도 모르겠지만 정감어린 이름임에는 분명해보인다. 그 이름에 얽힌 우리 역사의 한조각을 들춰보는 재미도 괜찮았다. 지명이 품은 한국사 이야기를 시간날 때마다 하나씩 찾아보고 싶어진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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