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아요.
가서 당신의 진심을 담은 키스를 하세요.
진심을 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죽음의 키스가 되어버리고 말거예요.
그러고는 해피앤딩이다.

백설공주,빨간망토,헨젤과 그레텔,라푼젤,잠자는 숲 속의 공주,개구리 왕자...
그리고 또 뭐가 나왔었지?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이쁘냐?
고 묻던 백설공주의 왕비마녀는 그 거울속에 갇혀버린채
라푼젤의 성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것도 미이라의 모습으로.
할머니에게 가던 빨간 두건은 뭔지 모를 두려운 존재때문에
쫓기듯 뒷걸음치다가 숲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길을 잃을까봐 뜯어내던 빵조각들을 새가 먹는지도 모르던
헨젤과 그레텔 역시 숲속의 힘에 이끌려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사라진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병사들이 숲으로 들어가고
마법의 숲에 갇혀버린 그들이 길을 묻기 위해서는 개구리의 등을 핥아야 한다.
그렇게 등을 핥아대도 개구리는 왕자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끝내기 위해서는 돌무덤속에 갇힌 채
잠들어 있는 미녀에게 진심을 담아 키스를 해야한다.

그림형제의 동화속 캐릭터들이 영화속에서 그대로 재연되었다.
황당하기도 하고 어찌보면 우습기도 한
<그림형제,마르바덴의 숲>영화이야기다.
이런 영화를 왜 만들었을까?
  /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암스테르담의 커피 상인
데이비드 리스 지음, 서현정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뱀이 말했다.
여자야 저걸 봐, 맛있게 보이지 않니?
저게 뭔데?
저걸 먹으면 세상이 다르게 보일거야.
그래서 여자는 선악과를 따 먹었다. 왜 그랬을까?
단순히 그 선악과가 맛있어보여서 먹었을까? 아니면 뱀의 말에 호기심을 느껴서일까?
그리고 여자는 남자에게 그것을 권했다.
그것을 받아먹은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가 권했기 때문에라고.
단순히 여자가 권했기에 받아먹었을까? 아니면 여자의 말에 호기심을 느껴서일까?
나는 이 책을 덮으면서 선악과를 따먹었던 아담과 하와를 생각했다.
먹으라고 권했던 뱀에게도, 그것을 따먹었던 여자에게도,
그리고 또한 그것을 여자에게서 받아먹었던 남자에게도 잘잘못을 말할수는 없지 않을까?
인간속에 이미 내재되어져 있던 욕망을 충실하게 표현했을 뿐이라고만 말하고 싶다.
미후엘 리엔조.
이 책속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 남자를 보면서 나는 선악과를 따먹었던 하와를 떠올렸다.
생각했던만큼의 부를 얻지는 못했지만 빚과 힘겨움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던 선악과 커피.
그 선악과를 따먹음으로해서 인간은 노동과 임신의 고통을 겪게 되었다고 하지만
미후엘 리엔조에게 돌아온 것은 너무도 소중한 것을 잃었다는 거였다.
진정한 마음을 나누어주었던 친구 둘을 잃었으니.

이 책을 선택하면서 나는 중세의 경제상을 읽을 수 있으려니 했다.
또한 내가 꿈꾸는 나라의 여러곳을 미리 가볼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가졌었다.
하지만 나의 기대는 무참하게 짓밟혀버리고 말았다.
단순한 매개체로 선택되어진 커피는 그야말로 조연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머리좋은 두사람사이의 암투속에서 꼭두각시처럼 움직여야 했던 미후엘 리엔조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은근히 화가 나기도 했다.
상인으로서 최대한의 도리를 져버리지 않는 미후엘 리엔조의 신념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情을 내세우면서 살기에는 세상이 너무 버거운 존재였나 보다.
대칭저울의 중간쯤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미후엘 리엔조의 모습과
모든 것을 알고 난 뒤에야 느끼게 되는 진정한 친구의 의미는 참으로 안타까웠다.
조금은 지루하다 싶었던 초반부를 지나면서 왠지 추리소설속의 범인을 따라가는 듯한 느낌을
어쩌지 못한채 숨가쁘게 읽어내려갔던 책.
사실 서로에게 어떤 악의를 가졌던 건 아니었으나 작은 감정들이 모여 하나의 강물처럼 되어버리고
그때문에 서로에게 으르렁대던 표현들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똑같지 않나 싶다.
거기에 돈과 권력이 끼어든다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중세의 경제적인 모습이나 네덜란드의 풍경을 보고 싶었던 책속에서 내가 발견해낸것은
진실은 항상 거짓과 위선속에 숨어있다는 거였다.
마음이 착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옷이라는 말에 벌거벗은 채 백성들 앞에 나섰던 왕처럼
어쩌면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읽는 내내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가졌던 책이었다.
책제목밑에 쓰여진 것을 다시한번 읽어본다.
속임수와 거짓, 욕망으로 점철된 17세기 경제계의 도덕적 부패를 담은 매혹적인 팩션!
다 읽고난 뒤에야 내 눈에 띄였던 저 문장을 보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말한다면 분명히, 정말로 매혹적인 속임수와 거짓이었다고.

"장사의 세계에는 늘 여러 가지 계획과 책략이 있게 마련입니다.
 치고 빠지기를 잘해야 하지요. 약간의 연금술만 발휘하면
 납덩이를 황금으로 만들 수 있는 게 바로 장사의 매력입니다"<206쪽>

과연 장사의 세계만이 그럴까?  알 수 없다.../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향수, 그것은 뭔지 모르는 무엇인가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욕망의 대상물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표현할 만한 말은 전혀 없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이 그리운 걸까?"

- 최복현 <특별한 내 인생을 위한 아름다운 반항>중에서


정말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그런 愚問을 가져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答을 찾지 못한채
가는 時間만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었다.
정말 무엇이 그리웠던 것일까?
창밖에는 아직도 그리운 것들이 떠다니는데...
알 . 수 . 없. 다.  /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3번째 사도의 편지 1 뫼비우스 서재
미셸 브누아 지음, 이혜정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미셸 브누아... 20년간 사제의 길을 걷다가 작가가 된, 은둔하는 수도사.
프랑스 소설가이자 신학 전문가.
기독교의 은폐된 기원에 대한 흥미진진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실제로 20년간 성 베네딕트 파 수도회의 사제였고,
바티칸에서도 5년을 보냈다.....

종교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은 사실이 되었든 소설이 되었든 예민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나 나름대로 이런 류의 책을 읽을 때 꼭 작자소개글이나 연보를 확인하곤 하는데
그 이유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종교를 아는 사람이냐 모르는 사람이냐를 알고 싶은 까닭이다.
정말로 믿음을 가졌던 사람이거나, 아니면 역사나 신학쪽의 공부를 한 사람이 아닌 경우에는
그야말로 픽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의 지독한 편견일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13번째 사도의 이야기를 하고있는 이 책의 저자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음이다.
 
현대를 살아가면서 종교라는 것은 그야말로 필요악이 아닐까 싶다.
너무나 힘겨운 세상을 버텨내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그 무엇과도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지금의 종교적인 면을 볼 때 너무나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작자는 소설을 빌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실제로 진실을 찾아 헤매이다가 결국 은둔자가 되어버리는 소설속의 주인공처럼
은둔자로서 살아가는 작자의 모습이 함께 겹쳐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소위 믿는자들이 말하는 <세상것>들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지고자 하는 모습이
지금의 종교적 믿음이라는 정의처럼 보여지니 말이다.
물론 이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 뿐이겠지만...
세상속에 있을 때,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진정한 진리의 참뜻이 펼쳐지는 건 아닐까 하는
나 혼자만의 우매(?)한 생각을 할 때도 많았지만,
그것은 단지 그들의 몫이려니 하면서 그런 생각을 접어두기로 했다.

13번째 사도는 말하고 있다.
너무나도 진실된 인간의 모습을 했었기에 결코 신격화 되어서는 안될 예수에 대해.
사랑받는 제자였으며 예수의 삶과 죽음,일거수일투족 모두를 보아왔던 그는 말한다.
예수는 결코 부활하지 않았다라고. 그러나 그의 무덤을 알려줄 수는 없노라고.
그 사실을 은폐해야만 했던 사람들에 의해 얼마나 많은 악행이 저질러져야 했는지를 말하고 있지만
결국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문제는 세상의 질서입니다. <63쪽>
사람들은 모든 문명이 기댄 종교 기반을 아무 이유없이 문제시하지는 않네! <67쪽>

늘 결과는 같다.
세상의 질서를 위해 거짓된 진실일지라도 그것은 진실일 수 밖에 없다고.
모든 문명이 기댔던 그 기둥이 무너져 내릴 때 사람들의 혼란을 한번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고.
<최후의 템플기사단>이라는 소설속에서도 같은 맥락의 글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예수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제자였으나 열두제자가 버렸던
아니 그 열두제자의 서열에서 밀려나야 했던 13번째 사도의 편지에는 무엇이 적혀 있었을까?
소설속이라해도 그 편지의 내용은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그의 존재성만을 부각시켜줄 뿐.
하지만 그의 행적을 뒤따라가며 그 진실을 이야기해주는 글의 짜임새가 참 좋았다.
범인을 쫓아가는 추리소설처럼 약간의 긴장감과 흥미로움을 느끼며 읽었던 것 같다.

"비에니,피글리오 미오, 티 아스페타보!"
 잘 왔다, 내 아들, 널 기다렸다! <240쪽>
"모든 사물이 내부까지 알려질 수는 없네. 과학은 표면일 뿐일세.
 그것을 뚫고 들어가 중심. 지식의 핵심부를 찾아야 하네....중략....
 그리고 여기서 자네는 영적 인식으로만 살게 될 걸세" <252쪽>

덮어두고자 했고, 덮어두어야만 했던 진실을 파헤쳤다는 이유로
죽음을 피해 모든 진실을 안은채 찾아왔던 주인공에게 또다른 은둔자가 해 주었던 말처럼
어쩌면 과학과 종교는 영원한 평행선이 될런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과학으로도 밝혀낼 수 없는 것이 세상엔 많이 존재할테니 말이다.
하지만 신격화된 형식의 예수보다는 차라리 13번째 사도가 말해주는 것처럼
진정한 사랑을 알고 세상을 떠났던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우리가 만난다면 어떨까?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신이었다, 인간이었다 하는 그의 존재의미가 아니라
그로부터 발생되어져 나온 사랑이라는 진리, 영적인 쉼의 의미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은데...
알 수 없지... 정말 나는 알 수 없다.

"로고스! 플라톤을 읽은 체하고, 주머니에 동전 몇 푼을 받으려고
 무위도식하는 군중들에게 장광설을 늘어놓는 저잣거리 철학자들의 익명의 神聖!
 그리스인들은 이미 대장장이 불카누스를 신으로, 매춘부 비너스를 여신으로,
 질투심 많은 그의 남편 역시 신으로, 그리고 뱃사공도 신으로 변신시켰지.
 오, 얼마나 쉬운지,사람의 얼굴을 한 신이라? 얼마나 대중들이 좋아하는지!
 예수를 신격화하면서 그들은 모세가 우리를 빠져나오게 했던
 이교도의 어둠속으로 우리를 다시 던진거야."
이제 노인은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27쪽>

13번째 사도의 말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한참을 멈춘 채 바라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소설의 끝에서 작자는 말하고 있다.
진실은 감추어지지 않는다고. 다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라고.
어쩌면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하지만 그 진실은 13번째, 14번째,15번째...뒤를 이어 계속해서 이어져 갈 것이라고. /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우습게도 나는 아주 가끔씩이 아니라 너무 자주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도 죽음 뒤의 세상에 대해서는 부정을 한다.
천국이니 지옥이니 그런 말 따위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 책 <천국에서 만난 다섯사람>의 이야기는 결코 죽음뒤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지나쳐 왔던 나의 시간들.
그 시간속에서 내가 살았던 그 모습들.
그 시간속에서 내가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낯선곳에서 느껴지는 언젠가 한번 와봤던 듯한 느낌을 갖게 될때가 있다.
저자는 이 또한 하나의 인연이라고 말하고 있는듯하다.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것이 될수도 있겠다.
모든 것은 어떤 인연으로라도 나와 엮이어 있게 마련이라는 말이 될 수도 있겠다.
우리의 삶속에 죽음이 있고 그 죽음속에 우리의 삶이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듯한 이야기를 너무나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오게 만든 책이 아니었나 싶다.

모두 다섯번의 만남, 다섯 사람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또는 느껴야 할 삶의 모습들을
너무도 아프게 그러나 너무도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는것 같다.
네 번째 만남의 장을 읽어가면서 나는 가슴이 설레였다.
다섯 번째로 만날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나름대로 머리도 굴려 보았다.
나도 모르게 엮여진 인연의 고리속에서 나로 인하여 죽음을 갖게 되고
또한 나를 대신해 죽어가야 했던 사람들을 만나면서 주인공의 가슴은 어땠을까?
항상 무관심과 침묵으로 일관하던 아버지를 증오하며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끝내 삭이지 못한
주인공이 아버지에 대해 알아갔던 세번째 만남에서는 눈물이 났다.
몇년전 아버지를 보내는 길에 그토록 무심했던 나의 지난날이 생각났던 까닭이다.
첫번째 만남에서는
늘 외로웠다고 생각하던 에디의 어린시절속에서 낭비되었던 시간들을 보여주고
두번째 만남에서는
청년 에디의 방황과 갈등속에서 희생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세번째 만남에서
만날 수 있었던 아버지의 세월속에서 에디는 그분들의 삶이 있었기에
지금까지의 내 삶도 있었음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음이다.
네번째 만남,아내와의 시간들..
아내와의 행복한 시간속에 멈춰버리고 싶어하던 에디의 절규.
주인공 에디에게 주어졌던 모든 시간들속에서 그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그 삶속에 얽혀져 있던 고리의 순환을 알게 되고 뜨겁게 눈물을 흘리던 주인공 에디.
모든 사람들은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만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는가 보다.

사실 따지고보면 참으로 평범한 이야기가 될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평범함을 거부한채 나에게 다가오던 아주 특별한 느낌들이 나는 좋았다.
놓치고 지나칠 수 있는 모든것들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책이 아닌가 싶다.
속담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아주 작은 인연이라 할지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나는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 이야기가 떠올랐다.
죽음을 맞기 전에 이미 자신의 일생을 다 돌아보게 되던 스크루지의 이야기.
하지만 에디는 그러지 못했다. 죽음뒤에야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으니까.
끝이면서 시작인, 그러나 모두가 하나인 이야기는 정말 나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를 안겨주었다.
다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다른 사람은 그 옆의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세상에 사연들이 가득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결국 하나인 것을. <243쪽>
마지막에 작가가 말해 주었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는 따로 떨어진 각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말로 하나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