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잠으로의 여행 - 잠에 대한 놀라운 지식 프로젝트
캣 더프 지음, 서자영 옮김 / 처음북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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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면 그게 건강한 거다... 그게 행복한 삶이다.... 라는 말을 종종 듣거나 하지만 그렇게 따진다면 나는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먹는 즐거움을 알지 못하니 잘 먹지 않고, 신경이 예민한 까닭인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 그렇다면 싸기라도 잘해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니 이 얼마나 불행한 삶이냐 말이다. (말해놓고 보니 왠지 서글퍼진다. 에효~) 그렇다면 나는 정말 불행한 사람일까? 생각해보니 그렇지도 않다. 앞서 말한 세가지를 모두 내 맘대로 하지는 못해도 나름대로는 행복하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그 세가지 중에서 가장 부러운 것이 잠을 잘자는 것이다.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잔다는 사람, 머리를 대기만 하면 잠에 빠져든다는 사람, 꿈도 꾸지 않고 잔다는 사람이 나는 진짜 진짜 부럽다. 그나마 자는 잠도 깊은 수면을 취하지 못하고 어김없이 날마다 꿈을 꾸고, 깊은 잠을 자지 못하니 그 꿈 또한 좋은 꿈일리가 없다. 개꿈이다. 그러니 날마다 아침이 곤혹스럽다. 늘 피곤함을 달고 사니 어쩌면 앞서 말한 세가지중의 두가지가 아주 당연하게 따라오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서로 다른 주제가 벽장에 배치되어 있는 것처럼 내 머리에 정리되어 있다. 한 가지 생각을 그만두고 싶으면 그 서랍을 닫고 다른 서랍을 연다. 잠을 자고 싶을 때는 모든 서랍을 닫기만 하면 된다." 저 유명한 나폴레옹의 말이다. 애들말마따나 그야말로 능력자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꼭 잠을 자야만 하는 것일까? 이 책을 빌어 말해보자면 많이 잔다고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으며,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잘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잠이라고 한다. 반드시 잠을 자야만 하는 것은 수면이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생산적인 활동이며, 가장 완벽하게 기억력과 인지 능력을 향상시키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학생들을 상대로 조사해보니 시험 준비 시간과는 상관없이 잠을 더 많이 잔 쪽의 성적이 더 좋았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한다. 공부한답시고 새벽녘까지 비몽사몽인 상태로 버티는 것이 얼마나 좋지 못한 행동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 공감하게 된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공부했다고해도 머리만 복잡할 뿐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었던 까닭이다.

 

우리는 흔히 잠을 말할 때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상태를 램수면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경우인 깊은 수면의 상태, 즉 서파 수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 책을 통해 한번 짚어보자. 깊은 수면은 성장 호르몬을 나오게 하고, 뼈와 근육을 생성하며, 면역력을 강화한다. 지방을 연소하고 심장 혈관의 건강 유지에도 도움이 된다. 서파 수면에서만 성장호르몬이 분비되기 때문에 깊은 잠이 적으면 성장호르몬의 수치가 낮아진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물론 유전적인 면도 없지않아 있겠지만 잘먹고 잘자는 아이들이 잘 크는 건 사실이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서파 수면의 양이 엄청나게 감소한다는데 우리의 생애주기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잠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말이다.

 

양 한마리, 양 두마리.... 양도 많이 세어보았다. 몸이 피곤하지 않아서 그러는 거라고,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은거냐고 핀잔 아닌 핀잔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어쩌랴,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을. 그런 나를 안타까워하며 혈액순환에 좋다는 포도주를 사주기도 하고, 잠을 잘 자게 하는 책이라고 선물을 하던 지인도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지금은 아예 잠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기로 한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면증이라는 말에는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 책에서도 불면증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잠을 자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의 뇌는 잠을 잘 자는지 살펴보려고 계속 깨어있게 된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으니 뇌가 반응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테지만 그렇게 되면 더더욱 잠을 못자게 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니 그거야말로 대단히 서글픈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수면의 양도 중요하지만 수면의 질을 먼저 따지고 싶다. 많이 잔다고 다 좋은 건 아닐테니. 조금을 자더라도 푹 잘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간을 수면시간으로 정해놓은 것처럼 차만 타면 잠을 청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데 이 잠깐의 잠이 내게는 그야말로 꿀잠이 되고 말았으니... '행복한 잠으로의 여행' 이라는 제목이 이런 나의 눈길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어 잠이 얼마나 중요한지. 잠이란 게 도대체 어떤 것인지 다양한 잠의 얼굴을 보았을 뿐이다. 책표지에서 말하고 있듯이 잠의 과학, 잠의 문화, 잠의 비밀... 등과 같은. 知彼知己 百戰不殆 라 했는데 이제 잠에 대해 알았으니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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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아름다운 준비 - 유대인 랍비가 전하는
새러 데이비드슨.잘만 섀크터-샬로미 지음, 공경희 옮김 / 예문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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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랍비가 어쩌고~~ 하는 식의 말이 보이면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우화다. 지독한 편견이지. 그래서 이 책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는 게 솔직한 말이기도 하고. 일단 대충 을 살펴보자면 이제 죽음을 바라보는 85세 유대인 랍비 잘만과 작가인 60대 중반의 새러가 2년동안 매주 금요일마다 만나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대화 형식이다. 인생을 뒤돌아볼 나이의 랍비와 인생을 논하는 철학의 한가운데에 선 작가의 만남이 어떠했을지는 미루어 짐작하건데 그다지 가볍진 않았을 터,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생에 관해 한가지 말해보자면 공자의 말을 들수가 있을 것 같다.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니 志學이라 하고, 20세는 한창 젊음이 무르익을 때니 弱冠 혹은 芳年이라 하고, 마음이 확고하게 다져져 움직이지 않는다는 30세는 而立, 40세를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하여 不惑이라 했다. 50세가 되면 하늘의 이치를 깨달아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긴다하여 知天命, 살만큼 살아 귀가 순해졌으니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60세를 耳順이라 했다. 그 밖에도 뜻대로 행해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70세를 從이라 했으며, 하늘이 내려준 나이라 하여 100세를 上壽라 했다. 그런데 가끔 묻고 싶어진다. 공자는 무엇에 맞추어 저런 기준을 세웠던 것일까? 그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세상을 살지만 저대로만 산다면 그래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두개의 장면이 계속해서 머리속을 맴돌았다. 하나는 호스피스, 또하나는 죽음체험. 인생의 마지막을 편한 마음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호스피스라는 말이 우리 주변에 자리잡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닌 듯 싶다. 아울러 그들의 일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삶과 죽음은 종이한장 차이라는 말이 있지만 태어남과 같이 왔던 죽음을 우리는 너무 잊고 사는 것 같다. 그저 먼 이야기처럼 여겨지는 것이 죽음인 까닭이다. 왠지 나에게만은 오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느낌말이다. 언젠가 스스로가 관속으로 들어가 어둠속에서 죽음을 체험해 본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기사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사람이 그저 어두운 관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죽음이라는 말인가? 아니 죽음속에서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가 인간이었었던가? 애들말마따나 능력자가 따로 없군, 했었다. 도대체 그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기에 그토록이나 어설픈 짓을 할 수 있었는지 한번쯤은 물어보고 싶었다는 게 내 솔직한 의견이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면서 미리 유언장을 써보자는 말도 왠지 어설픈 하나의 상술로밖에는 다가오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지...

 

책을 읽으면서 마음속에 들어왔던 부분이 있어 메모해보았다. 첫번째, 병들어 죽을 것 같았던 아들을 위해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던 다윗은 아들이 죽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일어나 시편을 지으러 갔다. 사람들이 놀라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살아있는 동안에는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에 기도했지만 이제 죽었으니 내가 할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는 다윗의 일화가 의미심장하다. 공감 백퍼센트! 두번째, 큰 병인줄 알고 병원을 찾아갔지만 그저 전형적인 내이염증세일 뿐이라는 말에 의아했다는 작가 새러에게 의사는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 모두 포격을 당하고 있지요. 방향을 잃고,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배워야 하니까요. 도대체 뭐가 그렇게 당신의 등을 떠밀고 있는 것입니까?" 내이염을 이겨내기위해 그녀가 들어야 했던 말은 딱 한마디였다. '놓아도 괜찮아.', '놓으셔도 괜찮아요.'...가만히 생각해보면 작가 새러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우리를 돌아보면 그 말이 곧 우리를 향한 말이라는 걸 금새 알 수 있으니.

 

인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 용서하기! 내가 해를 입힌 사람과 나에게 해를 입힌 사람, 그리고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할... 물론 쉽진 않을테지만 이 역시 내려놓기의 일환이다. 감사 산책하기! 규칙적으로든 즉흥적으로든 감사가 습관이 될때까지... 이 역시 쉽진 않을터다. 그러나 이것 역시 내려놓기가 필요하다. 이렇든 저렇든 내 인생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내려놓기!' 뿐... 늘 우리곁에 머무는 말인데도 늘 말로써만 존재하는 의미. 내려놓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그것들을 버리자니 너무 아까워 버릴 수가 없다. 내가 어떻게해서 얻은 것인데! 굳이 랍비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법정 스님께서 돌아가신 후 남은 것이 뭐가 있었는가 한번 생각해보자. 채우기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면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 말씀도 하셨다. 인생을 아름답게 사는 것도, 인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준비하는 것도 사실은 내 안에 있음이니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볼 일이 아닐까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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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누가 듣는가 - 제1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이동효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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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은 이렇게 제목만으로는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는 책이 시선을 사로잡을 때가 있다. 거기다가 ㅇㅇ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한다면 한번쯤 읽어보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고 만다. 책을 펼쳐서 가장 먼저 찾아보았던 것이 심사평이었다. 작가의 이력부터 찾아보았던 보통때와는 다르게 수상작이 된 이유부터가 궁금했던 까닭이다. '진정성'이란 말이 보였다. 소설적 장치들이 없다는 말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미사여구가 없다는 건 날 것으로 먹는 것과 같은 느낌이 아닐까 싶어서. 책을 읽으면서 참으로 많은 시간을 책과 글에 빠졌을 법한 작가의 이력이 한눈에 들어왔다. 자전적인 냄새도 풀풀 풍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실감나게 그려낼 수가 없지, 싶어서. 그러나 모든 건 속까지 들춰봐야 안다.

 

80년대의 특징을 말하자고 한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데모현장이다. LP판으로 음악을 틀어주던 음악다방도 꽤나 유행했던 시절이었고, '밤을 잊은 그대에게'라거나 '안녕하세요, 김기덕입니다'와 같은 라디오 방송을 열심히 들었으며, 사랑하는 연인들을 안타깝게 하던 통금이 해제되었고, 일본색이 남아있었던 아이들의 교복이 자율화되었고, 소니 워크맨 하나 갖고 싶다는 소망을 가슴속에 품어보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5공화국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올림픽이 개최되었으나 그 영향으로 많은 사람이 도심주변으로 쫓겨나야 하는 모순도 발생했다.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던 시기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느닷없이 웬 80년대 타령이냐고? 맞다. 이 책의 배경이 바로 그 시대를 담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니 어느정도는 미리 짐작해 볼 수 있는 분위기로 그저 평범한 한 남자의 삶을 그리고 있다. 벗어나고 싶었던 집에 살았던 한 남자의 어린 시절과 그 남자의 학창시절을 거쳐서, 대학을 가고, 군대를 가고,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그리고 다시 돌아온 그자리....

 

그다지 돌이켜보고 싶지 않았을 기억을 꺼내며 주인공의 삶을 따라간다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청춘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살았던 7,80년대의 기억들은 내게도 추억이라는 달콤한 말로 다가오지 않는 까닭이다. 지나간 것은 모두가 아름답다고? 그런 말은 그렇게 쉽게 하는 게 아니다. 성장소설을 읽는 것처럼 주인공이 살아내는 삶의 여정에는 많은 것이 담겨있다. 자신의 꺾여진 욕망을 어쩌지 못한 채 현실을 부정하며 술로 달래는 아버지와, 어떻게든 삶의 고리를 연결시켜보고자 했던 어머니의 어긋난 사랑은 하나뿐인 자식에게 예리한 칼날처럼 가슴속에 박혀버리고 말았다. 그 아픔을 끌어안고 자신의 삶과 부딪쳐야 했던 주인공의 정서는 보여지는 것처럼 아주 당연한 수순일 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보여지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마지막에 보여준 어머니의 일기는 뭔가 알 수 없는 뭉클함에 젖어들게 한다. 누군가는 말해줘야만 할 것 같아서, 라는 어머니의 고백이 없었다면 이 책을 선택했던 이유를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 했다

 

그 노래를 들었던 사람들은 공감할 수 있겠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사랑에 아파하고 삶에 대해 고민했던 사람이라면. 그 노래가 어떤 노래가 되었든 저마다의 기억속에 자리하고 있을 노래 한구절이 궁금해진다.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아있을 노래 한구절. 나는 그 시절에 어떤 노래를 들었던가. 책을 덮자 문득 뒷표지의 말이 가슴속을 파고 든다. 모두가 다 알지만 나만 모르는 비밀, 삶에는 언제나 그런 것이 숨겨져 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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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러브레터
강혜선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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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字로 쓰여진 詩... 그 느낌을 내가 알 수 있을까? 가끔은 알고 싶은 마음에 나름대로 사전을 들먹거리며 해석을 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내가 잘 알고 있는 우리말이 주는 느낌과는 정말이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쉽게 와닿는 느낌을 전해받지 못했다는 뜻일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한 건 사실이다. 오래전에 붓글씨를 배우던 친구에게서 부채를 선물 받았었다. 촤르륵, 하고 펼쳐보니 멋진 그림과 함께 漢詩 한 편이 오롯이 올라앉아 있었다. 무슨 뜻인지 알려주었을 때에야 그 그림과 글씨의 여운을 느낄 수 있었는데 직접 그리고 썼다는 것만큼의 감동은 따라오지 못했었다. 언제인가 지인에게서 부채를 선물받았다며 부채에 그려진 새우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물었던 이가 있었다. 새우는 바다의 노인이라는 뜻으로 중국에서는 '海老' 라고 한다. 그런데 그 음이 오래도록 건강하게 잘 살라는 뜻의 '百年偕老' 와 같다고 하여 그런 의미로 새우를 그려주는 것이라고 말해주니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그냥 내 생각이지만 우리의 선조들은 은유법을 상당히 좋아했던 것 같다.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을 돋보이기 위한?

 

편지로 쓰였다는 漢詩들만을 가려냈다고 하지만 역시 어렵다. 그냥 소소한 일상조차도 그렇게 어려운 漢詩로 표현해야만 했을까 싶어 슬슬 뒤통수가 근질거리기 시작한다. 하긴 그 시대의 문화적인 배경을 생각한다면 뭐 그럴수도 있겠다 싶지만 이 시대에 사는 나에게는 역시 무리다. 일전에 420년전의 편지라는 '원이 엄마의 편지'가 안동에서 발견되어 크게 회자되어진 때가 있었다. 묘지를 이장하던 중 1586년에 31세의 나이로 죽은 남자의 미라가 발견되었다. 그의 아내인 원이 엄마가 쓴 애절한 한글 편지가 미라의 가슴 위에 놓여 있었고,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가 나왔다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의 내용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었는데 그 편지가 한자로 쓰여져 있었다면 그만큼의 안타까움을 자아낼 수 있었을까?

 

어찌되었든 관심은 있었으나 다가갈 수 없었던 漢詩의 세계로 한번 들어가보기로 한다. 학창시절에 혹은 우리가 간혹 인용하며 낯이 익은 작품도 있고, 영 서먹서먹하게 다가오는 작품도 있다. 그 漢詩로 된 편지의 답장까지 있어 그나마 조금은 아하, 이런 식으로 주고받았던 편지였구나 싶은 아주 짧은 긍정의 순간도 느껴볼 수 있긴 하다. 친구끼리의 편지, 부부가 서로 주고 받았던 편지, 멀리 떨어져 서로를 그리워하는 연인의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편지, 아버지가 자식에게 주는 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조들은 아무래도 은유법을 사랑했던 게 맞을거라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다. 명분에 죽고 살았던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을 생각해본다면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는데 말이다.

 

相思都在不言裡 상사도재불언리

一夜心懷鬢半絲 일야심회빈반사

欲知是妾相思苦 욕지시첩상사고

須試金環減舊圍 수시금환감구위

 

娘家在浪州 랑가재낭주

我家住京口 아가주경구

相思不相見 상사불상견

腸斷梧棟雨 장단오동우

 

부안 기생 매창과 유희경이 주고 받았다는 漢詩 편지다. ​너무 그리워서 하룻밤 시름에 머리가 세었는데 내 손가락의 금가락지가 얼마나 헐거워졌는지를 본다면 내가 당신을 얼마나 그리는지 알 수 있을거라고 매창이 편지를 보내니, 그대와 나의 집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그리워도 서로 보지 못하는데 비까지 오니 애가 끓는다는 유희경의 대답이다. 절절함을 담고 있는데 해석이 안되니 그 절절함이 너무 멀다. 그래서인지 주렁주렁 달린 주석이 반갑고 고맙다. 漢詩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주석속에서 알토란 같은 중국문학의 흔적을 찾아내는 재미도 꽤나 좋았다. 글줄이나 읽고 썼다는 옛사람들은 도연명이나 이백이나 두보같은 중국 시인이 없었으면 어찌 살았을까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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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묘지에 사는 남자
피터 S. 비글 지음, 정윤조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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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가 물어다주는 음식으로 살아가는 남자가 있다. 까마귀가 뭘, 얼마나 물어다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그것만 받아 먹으며 살아가는 남자가 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히는 것은 그 남자가 공동묘지에 산다는 거다. 더 쉽게 말하자면 그 사람이 사는 곳은 영묘다. 영묘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말하는데 이 책속에서 보여지는 영묘의 모습이 이채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긴 공동묘지라는 말이 주는 의미가 우리와는 다르니 그럴수도 있겠다 싶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어째 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곳에서 살아낸 세월이 장장 19년째다. 그 남자, 과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 사람이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무인도에 혼자 버려진 것이 아닌 다음에야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게 진리다. 그 남자의 이름은 조너선 리벡. 원래는 잘 나가던 약제사였다. 그랬던 그가 왜 이렇게 황당한 삶속으로 빠져들었을까? 세상에 상처입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단순히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입고 숨어들었다고 하기엔 뭔가 좀 께름직한 면도 보이지만 그에게는 신기한 능력이 있는지 공동묘지에서 살아가는 또다른 존재인 유령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뭐, 가끔씩은 이 세상에 실제로 그런 사람도 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문득,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죽음은 얼만큼의 거리로 다가올까 생각해본다. 리벡이야말로 죽음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죽음의 세계를 보는 것도 아닐 것이다. 작가가 말하고 있는 죽음 저편의 세계는 역시 상상일 뿐일테니까. 그런데 이야기의 흐름이 참 묘하다. 죽음의 세계를 가까이에 두고 있는 그의 삶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까마귀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어제 묻힌 남자 마이클의 유령과도 이야기를 나눈다. 더구나 교통사고로 죽은 로라라는 여자 유령과 마이클의 유령은 서로 사랑하기까지 한다. 이건 완전히 삶의 세계지 죽음의 세계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주목해 볼 만한 것은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속에 우리의 현재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속에 우리가 감추고 싶어하는 속내가 절절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서로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의 사랑은 꺼내지 못한 채 보여지는 어떤 것으로만 상대방을 평가하고 상대방을 구속하는 그런 사랑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보여진다는 사실이 조금은 씁쓸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리벡의 지난 날은 어땠을까? 책속에서 보여지고 있는 리벡은 자신의 감정보다는 타인의 감정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상처를 받았다는 게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고 생각한다면 억지일까? 그런 상황속에서 죽은 남편의 영묘를 찾아왔던 미망인 클레퍼 부인에게 들켜버리고 만다. 하지만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주는 클레퍼 부인에게 거부하고 싶은 감정이 생겨나고, 클레퍼 부인 역시 리벡을 만나기 위해 자주 공동묘지를 찾아오게 된다. 이건, 사랑일까? 리벡에게서 죽은 남편의 모습을 찾으려고 하는 그녀에게 자신의 감정을 말하고 서로에게 향하는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한 리벡. 그때까지 공동묘지에서 한걸음도 나오지 않았던 그가 과연 공동묘지에서 나와 새로운 삶을 다시 살아갈 수 있을까?

 

리벡이 사는 곳은 죽음의 공간이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그곳에서 살 수 없는... 그런 곳에서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산다. 죽은 사람이 산사람을 기억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산사람이 죽은 사람을 기억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은 산사람의 기억속에서 다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니 삶과 죽음은 따로이 존재하지 않는다던 어떤 이의 말이 생각난다. 비현실적인 이야기 같지만 묘하게 공감대가 형성되는 이야기였다. 제목이 주는 느낌과는 다르게 잔잔하게 남겨지는 여운이 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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