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영화는 시대의 통신이다. 나는 편지를 쓰는 것이고 내 편지를 받은 사람들만 대화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편지를 읽으라고 강요할 생각은 이제 없다.”

영화에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연민에 대한 아이러니를 그렸고
그들도 나와 같은 고민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김기덕 감독.
일만명 아니 천명이라 할지라도 내 영화를 봐주는 이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로 했다는 그.
혹자는 이랬다저랬다 말바꾸기를 한다고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까운 인재가 사장되어지는 건 아닐까 염려스러웠었다.
나는 그의 참담했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영화속 아픔을 함께 느껴줄 수는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영화를 사랑한다.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졌음 좋겠다.
다시 돌아온 그에게 감사한다. /아이비생각

“내 영화는 즐기는 영화가 아니라 느끼는 영화다. 살면서 드러내지 못하는 아픔이 있는 사람일수록 더 강하게 느낄 것이다. 행복을 주기보다 불행을 이기는 힘을 준다고 생각한다. 내 영화를 통해 자신에게 질문해 보기 바란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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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To kill a monckingbird'

<앵무새 죽이기>는 하퍼 리의 유일한 작품이다.
그녀에게 왜 두번째 작품을 발표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렇게 히트를 하고나면 그 다음에는 아래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그녀는 두번째 작품을 아직도 출간하지 않고 있다.
<폭풍의 언덕>,<바람과 함께 사라지다>,<호밀밭의 파수꾼>처럼 이 작품도
처녀작이자 마지막 작품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앵무새 죽이기>..
사실 이 책은 이미 오래전에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랐던 책이다.
문고 진열대에서 <앵무새 죽이기>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다시 만난다면
한번은 꼭 되새김질 해보겠다던 어느날의 다짐을 되짚어냈다.
왜 제목이 <앵무새 죽이기> 일까?
처음부터 그 의아심을 풀어주지는 않았다.
서문도 없이 시작되어지던 글속에서 아무것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중간쯤부터였던 것 같다. 이야기의 핵심으로 들어가던 부분에서 나는 아하! 하는 순간
너무 편하게 읽어내려가며 몰입되었던 그 느낌을 잃게 될까봐 노심초사했다.
話者인 소녀를 통해 너무나도 솔직담백하게 그려내던 인간의 내면심리에 빠져들게 되는
나를 만나게 된다.
아울러 사회라는 통념속에 어울어지며 어른이 되어간다고 자부하는 순간
우리가 잃어버리게 되는 순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던 작가의 문체에 사로잡혀
(솔직히 말하자면 번역해주신 분의 문체가) 마치도 내가 그 소설속에 들어가 메이콤의
한 일원이 되어버린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마치도 그 소녀'스카웃'이라도 되는 양.

"난 네가 뒤뜰에 나가 깡통이나 쏘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새들도 쏘게 될 거야.
 맞출수만 있다면 어치새를 모두 쏘아도 된다.
 하지만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것을 하면 죄가 된다고 아빠가 말씀하시는 걸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모디 아줌마에게 물어보았다.
"너희 아빠 말씀이 옳아"
아줌마가 말씀하셨다.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무엇을 따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지.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철저하게 실리주의적인 아메리카인들의 속성.
어쩌면 그 우월성때문에 저들이 오늘날까지 버텨내고 있는지도 모를일이다.
동화같이 가볍게 깊이있는 무게를 지탱해나가는 <앵무새 죽이기>는
정말 베스트셀러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
굳이 드러나는 인종차별 문제가 아니더라도 이 책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혹은 살아내야 할 모든 것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흑인을 위해 변론을 펼치는 아빠의 모습에서 껍데기를 표현하는 그 모든것들이
하나의 인간존엄성 자체를 이겨내지 못할 것이라는 강한 의지와
동시에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맞서 절절한 호소라도 하는양 애처롭기까지 하다.
흑인을 변호하는 백인 아빠는 아마도 국선변호인인듯 하다.
법정에 선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그 진지함속에서 아빠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를
서서히 알아가는 아들 '젬'의 모습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결국 '젬'은 어른들 세계의 부조리와 억지성에 상처를 입어 얼만큼의 열병을 앓게 되지만
그 이후로 어른이 되어갈 '젬'의 모습이 상상되어져 안타까웠다.
마지막까지 인간의 존엄성을 일깨워 준 아빠 '애티커스'변호사에게 마음으로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순수와 또 그에 따른 아름다운 열정을 잃어간다는 건 참 서글픈 일이다.
마치도 한편의 동화를 읽고 난 느낌이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

난 어른이 되어도 하늘빛 고운 눈망울
간직하리라던 나의 꿈, 고운 꿈이 생각나네...
지나간 유행가를 떠올린다.
껍데기속에 감추어진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마치도 그것이 없으면 안된다는 양 너무도 두꺼운 껍데기들.
두꺼움마져도 숨기기 위해 색칠을 하기 시작하고
그 껍데기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애벌레처럼 산다.
겹눈을 하고 보는 세상은 아마도 인간의 세상이 아닐 것이다.
엄마, 이 책제목은 왜 앵무새 죽이기예요?
정말로 앵무새를 죽이는 이야기인가요? 아들녀석이 묻는다.
그래, 안타깝게도 정말 앵무새를 죽이는구나...  /아이비생각
 

mockingbird에 대하여...
monckingbird는 '앵무새'가 아니라 '흉내쟁이지빠귀'라는 새입니다.
몸 길이가 20~30cm정도 되는 이 새는 부리가 가늘고 강하며 날개가 짧고 둥글며 꼬리가 깁니다.
움직임이 활발하고 선명한 회색이나 갈색을 띠는 흉내쟁이지빠귀는
산림지에서 곤충이나 나무 열매를 먹으며 삽니다.
이 새의 무엇보다 큰 특징은 다른 새들의 소리를 잘 흉내낸다는 것입니다.
이미 '앵무새'라는 이름이 독자 여러분에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굳이 번역은 바꾸지 않고 여기에 실제 뜻을 밝혀 둡니다.<책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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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2-12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테디셀러군요. mockingbird 가 흉내쟁이지빠귀라는 새이군요.
지빠귀 종류인가 봐요.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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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코의 '존재성'과 미도리의 '생존성'
(...여기서 '생존성'이라함은 '생동감'일수도 있겠다.)
너무 어렵게 다가오는 느낌이라 한참을 읽었다.
무엇이라고, 무엇때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어떤 느낌으로 마지막 장을 덮는다.
아주 통속적인 그래서 어쩌면 너절하기까지 했던 표현법이라고 생각했는데
평론가들은 말한다. 너무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고.
내게는 처절하도록 슬픈 이야기였음을 누가 알까.
나의 위선을 떠올린다. 어쩌면 그리도 가식적으로 살아왔는지.
어쩌면 늘 머리속에 그리고 가슴속에 그 너절한 말과 행동을 품고 살면서
밖으로는 어떤 알지못하는 의미를 부여한채 가식적으로 쏟아내고 있었던건 아닌가.
나오코의 존재하기 위해 애쓰는 아픔이 내게로 전해져 오면서
어쩌면 스스로가 삶의 마지막을 결정짓는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그렇게 되었지만.

우리는 누구도 존재성만으로 곁에 머물기를 바라지 않지.
그래서 결국 살아 움직이는 생존성을 찾아 헤매게 되는 건 아닐까?
어쩌면 모두가 나오코가 앓고 있었던 존재성의 병을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앓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면서도 비추어지는 모습만큼은 생존성이길 바라는 건 아닐까?
끝도 없이 자기자신을 잃지 않기위해 애를 쓰던 나오코를 보내고
예상치 못한 상실감에 그만 마음을 놓아버리고 마는 주인공의 허무감.
여기가 어딘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둘러보아도 알 수 없는 위치에 자신을 표시해 놓고는
끝없이 미도리를 외쳐대던 마지막 장면이 핏빛처럼 다가온다.
진정 미도리에게 돌아갔을까?
혼돈과 미궁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미도리가 찾아내기만을 바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도리는 그를 찾아내었을까?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강은교    '숲'


너무 많아 외로운 건 아닐까 돌아본다.
처음부터 곁에 머무는 게 너무 많아서 그곳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지는 게
어쩌면 외로움이 아닐까 생각한다.
외롭다는 건 나오코가 안고 있었던 존재성에 불과하지.
그래서 늘 주변에 주변에 묻히고 싶어하고 어울어지고 싶어하고
주변에 속한 그 무엇이 되고 싶어하는게 아닐까?
그래서 나도 너의 곁에서 이렇게 머무르고 있지 않느냐고 외치고 싶은 건 아닐까?

주변이 내게로 와 살아 준다는 건, 살아지고 있다는 건, 살아 있다는 건,
어쩌면 .... 필요악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비생각


## 첫장을 넘기는 게 참으로 무거웠었다.
습관처럼 첫장을 다시 넘기기에는 너무도 멀리 와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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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로망스>의 그가 말했었지.

          "나, 웃었다.
           나, 밥 먹었다.
           그녀와 같이 있고 싶다.
           그래서 같이 밥먹고 같이 웃어주고 싶다."

          아마도 그가 저렇게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그냥 생각이 났다.
          함께 웃어주고 함께 밥을 먹어준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아니 나에게 있어 어떤 의미가 될까?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따스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건
          아마도 속깊은 사랑일것이다.

         
          왠지 쓸쓸한 날, 그런 사랑 나도 하나쯤 있었으면...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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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다시 없이 착한 것은 물이다.  上善若水

 물은 만물을 이롭게 도우면서 다투지 않는다.   水善利萬物而不淨

 사람들이 머물기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處衆人之所惡"

                   - 노자 -

물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던 이가 있었다.
강물같은 사랑을 주고 싶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물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은 왠지 좀 그랬다.
우리 사는 모습이 물같은거 아니냐고 하니
그저 고개만 흔들었던 사람.
그토록 큰 욕심을 안고 살아가기엔
내가 너무도 작은 사람인 것을...
나는 그래서 물같은 사람을 꿈꾸지 않았었다.

문득 궁금증이 인다.
그 사람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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