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새를 날려줘 어른을 위한 동화 20
이윤학 지음, 엄택수 그림 / 문학동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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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새를 날려줘>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왜 그렇게 가슴이 먹먹해졌는지 알수가 없었다.
아마도 신문지상의 도서란 카피에서 이 책을 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오랜동안을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아 끝내는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다.
故 정채봉님의 글을 엄청나게 사랑하고 있는 까닭에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말 한마디만으로도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후루룩 넘기며  훑어본 책장속의 그림들이 참 좋았다.
어느 것 하나 형식적으로 보여지지 않는 책속 세상이 왠지 아름다울 것 같아 보였다.
몇 날 며칠 바닷가 민박집에 머물면서 문을 열어놓고 파도 소리를 들었다...
이 어른을 위한 동화는 스물네 해를 살아온 어느 소녀가 들려준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였다...
그 소녀에게 이 책을 어서 보여주고 싶다...
책을 펴들고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나는 책장을 덮고 싶었다.
문을 열어놓고 들어야 했던 파도 소리는 아마도 그 소녀의 아픔을 이야기 하고 있었을 게다.

또래의 아이들보다 작아서 콩새라고 불렸던 소녀.
하지만 그 아이는 그 별명을 좋아했다.
별명을 갖는다는 건 사랑을 받는다는 말이라던 외할머니의 말씀이 아니라 해도.
그 맑고 순수한 아이의 마음속에 어른스러움을 심어주어야 했던 사람들이 미웠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는 나의 지론이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는 듯한 착각이 생겨났다.

"모든 것은 슬픔을 가지고 산단다. 슬픔은 부메랑과 같은 것이야.
 멀리 던져버려도 언젠가 다시 돌아오게 된단다. 넌 지금껏 슬픔이 주는 고통만 봐왔어.
 하지만 네 슬픔은 언젠가,네게 귀한 선물을 안겨줄 거야"

"네 슬픔을 감싸안으렴. 네 안의 슬픔이 너를 크게 할거야. 항상 좋은 일을 생각하려무나.
 좋은 일을 생각하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기게 된단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말이야"

그랬을까? 그래서 콩새의 슬픔은 콩새를 키웠고 또한 좋은 일이 생겨나게 해 주었을까?
초입부분에서 플라타너스가 콩새에게 해주었던 말속에 시작과 끝의 여운이 함께 묻어났다.
어쩌면 너무나도 평범하고 흔한 주변의 이야기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한 가정의 이야기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른들이 살아내야 할 삶의 파고가 콩새에게까지 달려들어 아프게 해야 한다는 것이
나는 정말 싫었다. 한껏 부풀려진 풍선이 언제 터질까 몰라 가슴이 조여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리의 콩새는 잘 이겨낸다.
먼저 학교를 간 친구들에게 혹은 큰이모집의 지숙이 언니에게, 혹은 이복삼촌의 엉터리같은
삶의 언저리에서조차도 콩새는 절대로 자신을 내려놓지 않는다.
버스차창으로 보여지는 엄마의 눈물앞에서 가슴 아팠을 외할머니의 마음부터 생각할 줄 아는 콩새는
어쩌면 우리가 외면한체로 살아가고 있는 또하나의 情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짐짝처럼 이리 맡겨지고 저리 맡겨져야 하는 삶을 살지만 그래도 콩새는 씩씩하기만 하다.

난 누군가로부터 늘 사랑받고 싶어.
사랑이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외할머니가 날 껴안아줄 때 난 그게 사랑이라고 느껴져.
한없이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 누군가 나를 지켜주는 느낌. 그런 게 사랑이 아닐까?

엄마, 사랑은 그런건가봐. 같이 아프고 같이 슬픈 건가봐.
이제 난 어디서든 사랑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
엄마를 생각할 때면 마음이 아픈데, 이건 내가 엄마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일거야.
<-95쪽>

난 오빠보다 어리니까 엄마가 더 필요한데 엄마는 왜 날 두고 오빠를 데려갔느냐고 묻고 싶었다던
우리의 콩새가 들려주던 사랑에 대한 정의에 새삼 내가 서러웠다.
보고 또 보고 다시 보았다.  사랑은 정말 저런게 아닐까 싶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채워넣어야 할 답안지를 콩새는 벌써 알아내어 채워넣고 있었던 거다.
내가 엄마 마음을 다 이해하려면 몇 밤을 더 자야 할까.
엄마를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건 슬픈 일이야.
난 엄마를 사랑하는 만큼 엄마를 다 이해하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돼. (-97쪽)
누가 누구를 이해해야 하는 건지... 누가 누구를 위로해주어야 하는건지 묻고 싶었다.
그 작은 콩새가 엄마에게 편지를 쓰면서 아팠을 걸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심장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돈이 없어서 수술을 하지 못하던 재환이를 보면서
그동안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행한 아이라고 생각했었던 콩새의 마음이 열리고
내가 키우던 새를 네가 대신 날려달라던 재환이의 부탁을 안고 다시 죽변으로 가는 콩새.

"할무니, 나는 새가 될거야. 아주 높이 나는 새가 될 거야"
"그래. 우리 콩새는 아주 높이 나는 새가 되거라"
"할무니, 나는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는 새가 될 거야"
"그럼, 할무니가 안 보일 텐데 어쩌지?"
"아니, 내 눈엔 할무니가 보일 거야. 아주 커다랗게"
"......."
"하늘 끝까지 갔다가 금방 돌아올게, 할무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마. 알았지?"
"하늘 끝까지 가면 돌아오지 마라. 돌아올거면 뭐하러 힘들여 거기까지 가?"
"아니야, 할무니랑 외삼촌 보고 싶어서 올 거야. 기다려 줄거지, 할무니?
 금방 돌아올 테니까 꼭 기다려 줄거지?"
-마지막부분에서-

콩새는 마음속에서 키우던 새를 어디로 날려 보냈을까?
마음속에 사랑으로 남겨진 외할머니와 외삼촌이 보고 싶어지면 아마도 다시 새를 부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나는 끝내 눈물 한점을 떨구어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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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다 놀러가는데 당신 뭐야! - 아빠 엄마와 함께 떠나는 Go! Go! 역사현장체험 나들이
조승범 지음 / 푸르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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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다 놀러 가는데 당신은 뭐야 도대체! 쉬는 날이라고 이렇게 잠만 잘거야?
아이구 쉬는 날엔 나도 좀 쉬자. 응? 집에서라도 좀 쉬어야 하는거 아니니?
휴일이면 이렇게 싸워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빠가 쉬는 휴일만 목빠지게 기다리는 아내와 아이들과는 달리
사실 아빠들은 쉬는 날만큼은 정말로 쉬고 싶을게다. 아마도.
그런데 요즘의 아빠들도 그럴까? 지금의 젊은(?) 아빠들은 저렇게 싸우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잘 데리고 다니며
세상일을 구경시켜 준다고 하니 참 좋겠다. 공연한 소문만 무성한 말인가? 하하하
책을 처음 받았을 때 당신 뭐야 하는 뭐야라는 글자속에 'ㅇ'이 아주 커다란 마누라들의 입으로 그려져 있어서
한참을 웃었다. 시대를 그대로 반영한 듯한 그림 아니 글자처럼 보여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 핑게 저 핑게로 조금은 시들해졌지만 한동안 유적답사동호회 활동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을 만난다는 기대감이 나에게 색다른 설레임을 안겨주기도 했었다.
책을 받아보기 전의 내 생각은 과연 얼만큼의 분량으로 나에게 다가올 것인가였다.
유적지라거나 혹은 체험을 경험할 수 있는 곳들이 어디 한군데에 국한되어져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었다.
책을 받자마자 목록부터 살펴보았다. 그리고 슬며시 웃음 지었다. 역시 서울 경기권이 우선적이었다.
아들녀석이 책을 보면서 덩달아 좋아한다. 이미 다녀왔던 곳이 대부분이었던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속에는 우리가 너무 쉽게 생각하고 너무 쉽게 지나쳐갔던 것들을 콕콕 짚어내어
알려주고 있다는 것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별 것 아니었을 거라고 지나쳐버렸던 우리문화의 흔적들을 
지금 다시 되돌아 보며 생각해보니 너무나도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생겨났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서울권의 궁궐여행은 역시 흥미롭게 다가왔다.
경복궁의 근정전 월대난간에 장식되어져 있다는 청룡,백호,주작,현무라든가 십이지신상의 닭,말,뱀,소,범과 같은
돌짐승들의 모습은 사진으로만 보았어도 정말 이채로웠다. 와, 저런 것들도 있었구나 싶었다.
그토록 여러번 다녀왔던 경복궁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찾아내지 못한 아니 찾아낼 생각조차 갖지 못했었다는 것이
내심 부끄럽기도 했다.

근간에 다시한번 경복궁을 찾아가 작가가 보여주었던, 근정전을 향해 건너가는 영제교에서 만날 수 있다는
네마리의 석수는 꼭한번은 만나고 싶어진다.
네마리 모두 포복자세로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니
그 시선을 따라서 나도 한번 바라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난다.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의 문화재들이 특히나 궁궐들이 일제에 의해 얼마나 많은 손실을 입게 되었는가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침략자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그나라의 문화를 죽이는 일이라고 했던가?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빼앗아가고 또한 변형을 시키지 않았나 싶은 생각에 화가 나기도 한다.
힘없는 나라에 대해 화가 나고 그나마 남아 있는 유적들조차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에 대해 다시한번 또 화가 난다.

유적지 답사여행중에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여행이 얼마나 될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아무래도 쉽게 가볼 수 없었던 아랫녘 지방의 유적들이 아니었나 싶다.
동학의 거두 녹두장군 전봉준의 고택지에서부터 시작되어진 동학의 배경지들을 둘러보았을 때,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욕에 맞서 홀연히 일어서야 했던 그의 심정이 느껴지는 듯 했던 그때의 답사는
내가 우선 순위로 꼽는 여행중의 하나이다. 시작지점이었다던 그 시장의 감나무는 다시 회생했을까?
그 발자취를 따라 움직이면서 지금은 없어지거나 작고 초라한 비석하나만으로 남겨져야 했던 유적지들의 모습에
너무나 안타까웠던 마음이 있었다.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랬었다.
그리고 두번째로 꼽을 수 있는 답사여행이 노근리 양민학살현장과 강화도여행이다.
이 책속에서도 강화도의 일정을 아주 꼼꼼하게 잘 보여주고 있음이다.
갑곶돈대, 고려궁지,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생각했던 것보다 그곳의 유적지들은 그래도 보관상태가 꽤나 괜찮지 않았었나 싶다. 
아쉬웠던 점은 그때만 해도 아들을 위해 따로이 공부하지 못한 엄마의 불성실함으로 인하여 아들녀석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해주지 못했다는 거다.
김포군 대곶면 신안리에서 강화군 광성진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 손돌목의 전설을 들었던 생각이 났다.
고려 공민왕이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피신할 적에  왕을 모신 뱃사공의 이름이 손돌이었다.
손돌의 배가 갑곶진에서 광성에 이르렀을 때 바닷물이 소용돌이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이자
왕을 속였다 하여 그를 참수하였다는 전설, 그래서 손돌바람이란 말도 생겨났다는...
그때의 내 손에 이런 책 한권쯤 들려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멋진 사진들과 어울어진 짧고 간결한 설명들을 그때의 내가 조금이라도 알고 갔었다면....
시간에 쫓겨 나중을 기약했던 보문사의 전경을 보니 또다시 엉덩이가 들썩인다.

답사여행을 다니면서 느꼈던 것은 대부분이 너무도 초라하다는 거였다.
왕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그렇지 않았나 싶다.
물론 세월이 많이 변했다는 이유도 있었을 테지만 가는 곳마다 상업적으로 혹은 인위적으로 꾸며 놓은 모습들이
왠지 유적이라는 말에 대한 거부감이 들게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안내판들이 너무도 불친절(?)하다는 거였다. 안내판만 보면서 길을 찾아나선다는 건 무리수다.
제대로 알려주는 게시판 하나 없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런 의미에서보면 이 책은 참으로 친절하다.
저를 따라 오세요...하면서 앞서 가는것처럼 잘 정돈되어 있으니 이 책만 들고간다면
책속에 나와 있는 유적지쯤은 문제없이 다녀올 수 있을것 같다.
아쉬운 점은 역시나 멀리 떨어진 유적지 탐방의 기회를 이 책속에서도 많이 만나 볼 수 없다는 거다.
하긴 그 많은 유적지들의 간접경험을 어찌 한순간에 다 얻기를 바랄까?
아마도 후편 또 후편의 책들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그러기에 앞서 각 지자체에서 각자 자신들의 고장 곳곳에 흩어져 우리의 손길과 관심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유적들을 찾아내어 잘 가다듬고 보듬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만날 수 있도록,
그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한동안 등한시 했었던 답사여행을 다시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엄마와의 여행길이 그리운 아들녀석의 성화가 점점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엄마,우리 언제 또 유적지 보러가나요? 부도보러 또 갈거지요?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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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 1
송은일 지음 / 문이당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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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정리부터 해보자.

반야.... 이미 무녀가 되기 위해 태어난 여인. 어릴적 철모르던 예닐곱살때부터 예지능력을 보여준다.
그토록이나 커다란 예지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라거나 맞닥뜨려야 할 힘겨운 상황까지는 볼 수 없었기에
그 작은 어깨위에 그리도 커다란 짐을 짊어지고 가야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외모는 아마도 경국지색쯤으로 치부될듯 하다.
물론 그 미모로 인하여 벌어질 애정행각은 예정되어져 있는 일이었을거란 말이다.
그러므로 그녀 곁에는 늘 남자들이 머물고 있음이다.
자신의 예지능력을 미처 컨트롤하지 못하던 어린시절부터 사람과 세상을 제몸으로 부딪혀가며 배우는
걸판진 삶의 굿판속에서 점점 변해가는 그녀의 모습은 또하나의 우리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녀를 위한 사랑은 두가지가 아닐까 싶다. 헌신적인 사랑으로 그려지는 동마로나 현무부령,
무영의 모습속에서 읽혀지게 되는 욕망의 순간들은 어찌보면 안타까울 수도 있겠다 싶지만
차라리 자신의 욕망을 위하여 덤벼드는 허울뿐인 또하나의 사랑이 더 솔직해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결국 자신보다는 타인들을 위하여 살아가야 할 혹은 살아내야 할 그녀의 운명이 참으로 가혹하다.
스물 몇살 꽃다운 나이에 자신의 운명을 매듭짓게 되는 반야..
그녀를 앞세워 보여주고 싶어하는 세상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너무 깊고 너무 먼 까닭이다.

사신계... 귀천이 없고 남녀의 차이도 따지지 않는 세상. 그런 세상속에서는 모든 이들은 똑같다고.
사람마다 동등하고 자유로울 권리가 있으니 내 마음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꿈꾼다.
얼핏 듣기에는 정말 비현실적인 세상이다. 그야말로 꿈일수도 있는 그런 것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꿈꾼다. 왜?
그런 꿈을 꾼다는 것이 우리들의 희망인 까닭이다. 그래야만 버텨낼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들 스스로 답을 내려준다.
그런 비현실적인 것 같은 세상이 현실에 있나이까 물으니
현실 안일 수도 있고 현실 밖일 수도 있으나
그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또하나의 다른 세상이라고.
그야말로 현실적인 답변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혼란이 내게 온다.
허구인듯 하나 허구가 아닌, 꿈인듯 하나 꿈이 아닌 그런 느낌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시대적인 배경이 언제쯤일까 궁금증을 갖게 될 무렵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그들이 만들어내는 배경은 이 소설속에 다시한번 빠져들게 되는 매력이 아닐수가 없다.
역사적 사실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글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하니
그야말로 읽는 이의 판단에 맡겨지는 것이다.
사신계를 논하는 부분에서 내가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동학과 유토피아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人乃天 사상을 가졌던 동학, 사람 보기를 하늘과 같이 여겨야 한다는 동학의 사상과
거의 비슷하게 맞물리고 있는 듯 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또 어떤가? 어느곳에도 없는 세상, 공상 사회소설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이상향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똑같은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 느껴지던 것은 암담하다는 거였다.
반야를 통하여 다가올 세상에 대한 미리보기가 실행되어지고
그 결과를 보여주고 있으니 그것 또한 아이러니하다.
사신계의 등급을 따져볼 때 반야가 앉아 있었던 칠요라는 자리는 꽤나 묵직한 자리가 아닐 수가 없다.
반야를 칠요에 앉힘으로 인하여 그들은 이미 스스로의 선택권을 포기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가올 것을 미리 알고 정해진 수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자들이 할 짓은 아닌듯 싶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동학이란 체제가 한수 위가 아닐까 싶기도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야를 마음속에서 내치지 못하는 것은
그녀가 대표적인 서민들의 삶속에 머무르는 까닭일 것이다.
힘겨워하는 서민들의 마음을 어우르며 만져주는 까닭일 것이다.
그녀를 통해 아픔 하나씩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는 까닭일 것이다.
하나의 위안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 미리보기를 하던 반야에게서 육안을 빼앗고 심안을 빼앗는 작가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기왕에 앞세웠으니 멋진 세상속에서 한바탕 승리를 위한 푸닥거리를 했어도 괜찮치 않았을까?
반야는... 우리곁에 늘 머물러 존재해야만하는 꿈이었을거란 생각이 든다.
끝없이 타오를 성적인 욕망,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떠는,
자신의 안위를 먼저 앞세우는 우리의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삶의 모습,
내 성공을 위한 도구로 쓰일수만 있다면 어떤 사람이라 해도 괜찮을것처럼 행동하는 우리들의 모습,
누군가 나를 위하여 희생해주기를 바라는 우리의 속내를
반야속에 모두 숨겨두고 있지는 않았는가 되돌아 생각하게 된다.
그럴수는 없는거라고 말해주고 싶어 그녀의 눈을 빼앗았고 마음의 눈 또한 멀어지게 했던건 아니었을까?

모든 인간은 동등하고 자유로우며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가꿀 권리가 있다.
귀천이 없고 남녀유별도 없는 세상이지요. 그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의 목숨 값이 같습니다.
동등하고 자유롭지요. 사람마다 그럴 권리가 있고요.
내 마음이 가는 사람에게 나를 보낼 수 있고, 내가 남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 애쓰고,
억울한 사람이 없게 두루 살피며 사는 그런 세상, 들어 보신 적 있으십니까?
불법처럼 듣기 좋으나 무릉도원만큼이나 비현실 같나이다.
그런 세상이 현실에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현실 안일 수도  있고 현실 밖일 수도 있지요. 덧붙이자면 무릉도원 같은 세상이 아니라
그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또하나의 다른 세상이라 보아야겠지요.
<228쪽>

그야말로 이상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상당한 마력을 지닌 책이 아니었나 싶다. 나도 모르는 새 사신계라는 유혹속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정말로 그런 세상은 올까? 아니 있기나 한 것일까?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세상이.
평등... 과연 평등이란 말속에 숨겨진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일까? 어쩌면 꿈일런지도 모르겠다.
영원히 깨지 못할 꿈. 그래서 그런 세상에 대한 미련이 많은건지도 모르겠다.
반야라는 여인의 향기속에 묻혀버린 사상하나가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 여인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들이 너무 커져버린 여인의 존재때문에 안개속처럼 희미해지고 말았다.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세상 또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반야의 예지능력이 그리 허황하게 보여지지 않았던 것은 그토록 커다란 신통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묻지 않으면 답하지 않았던, 묻는 말에만 답해주었던 그녀의 마음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름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며 살아갈 일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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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 이오지마 총지휘관 栗林忠道
가케하시 쿠미코 지음, 신은혜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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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버지의 깃발>을 보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일본군영쪽이 궁금했었다.
철저하게 미국식으로 각색되어져버린 하나의 이야기를 앞에 두면서 어쩌면 그들은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의 참모습은 어디에 있는거냐고.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같은 상황하에서 벌어졌던 일을
각기 다른 시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말에 선택했었던 순간부터 정말 기대가 되었다.
<아버지의 깃발>에서는 그야말로 영웅을 만들어내기 위한 전쟁신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보면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이 벌어졌던 일들이
어쩌면 이토록이나 다른 느낌을 전해줄 수 있는가 놀라웠다.
단순히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커다란 어떤 것들이 숨어 있는 듯 했다.

도쿄도 남쪽 오가사와라 제도에 있는 작은 섬 이오지마.
섭씨 60도에 달하는 높은 지열과 곳곳에서 독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유황섬 이오지마.
그 작은 섬에 비행장만 세개였다고 한다.
미국이나 일본쪽 모두에게는 정말 필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아닐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토록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까지 빼앗기 위한 싸움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오지마섬을 사수하기 위해 떠났던 쿠리바야시 장군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 살아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시작했다는 것을.
그래서였을까? 그토록이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시절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쿠리바야시는 미국이 이 전쟁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지조차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고 하니 꽤나 현실주의적인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쿠리바야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과 병사들의 목숨을 걸고
일본 본토의 민간인들을 하나라도 더 살리기 위한 계책을 세웠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휘하에 있는 병사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며
병사들을 우선적으로 챙기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고 그를 모셨던 사람들은 회고한다.

한사람의 시선과 마음을 통해 보여지는 전쟁의 단면은 참으로 서글프게 다가왔다.
그 지옥같은 전쟁속에서 살아냈던 하루라는 시간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그 긴박했던 상황속에서 치밀함과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쿠리바야시조차도
일본 본토가 불바다로 변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마지막 일전을 위해 술잔을 돌리던 그 순간이 지나
결전의 날을 기다리는 중에 너무도 초라한 늙은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말과 표정으로 표현해내지 못하는 가슴을 얼만큼이나 아프도록 쥐어짜야 했을까?

이채로운 것은 그런 와중에서도 가족들과 주고 받았던 편지내용들이다.
이 책속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편지글들은 살아 숨쉬는 느낌표 같다.
바람이 들어와 추웠다던 부엌의 틈새를 수리를 해주지 못한채 떠난 아버지의 마음은 보내는 편지에
글과 그림으로 자세하게 바람을 막는 방법을 설명할 정도로 자상하기만 하다.
또한 군인이었기에 부름을 받아 최전선으로 떠났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어려움을 겪는다하여도 꼭 살아남아 주기를 바라는 한 남자의 지극한 바람은 아내를 향한,
혹은 자식을 향한 뼈아픈 사랑의 표현이 아닐수가 없다.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다가올 앞일을 예견하며 걱정과 염려로 또는 당부의 마음으로
가족들에게 보내지던 쿠리바야시의 편지들. 그 편지들을 보내며 어쩌면 그는 꺼져가는 삶의 의지를
되살려내고 있었던건 아니었을까?  살고 싶다는, 살아 돌아가고 싶다는 내면의 소리를
그렇게 표현했던 건 아니었을까?

<아버지의 깃발>과는 달리 이 책속에서는 전쟁이란 괴물이 그리 크게 부각되어져 있지 않은 듯 보여진다.
한 인간의 흔적을 따라가며 그 사람의 체취를 느끼고 싶어하는 애절함이 흥건하다.
단 한장의 사진으로 영웅이 되어버린 미 해병대 여섯명의 병사들에 비해 지하 벙커에 숨어 마지막
한명까지도 게릴라전으로 싸움에 임하며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일본 병사의 모습은 너무도 대조적이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싸워야 했던 것일까?
그들의 죽음을 옥쇄(玉碎)라고 했다.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뜻이란다.
명예나 충절을 위하여 깨끗이 죽음을 이르는 말이란다. 과연 그랬을까?
말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옥쇄가 아니라 진정 어쩔 수 없이 선택되어져야 했던 죽음이었다면?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 저토록 크게 부각시킨 이오지마섬의 전투에 대해 일본본영쪽에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고 하니 후손에 의해 옥쇄라는 말로 만들어진 죽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뒤에 남는 자들에 의해 다듬어지게 마련일테니..
하지만 똑같은 죽음을 두고도 표현하는 방법은 천지차이였다.
영웅으로 다시 태어난 미국식의 표현방법과 후일에야 그 죽음의 의미를 되씹어야 했던 일본식의 표현방법은
달라도 너무 달랐기에 깃발을 꽂았던 깃대가 일본군이 빗물을 모아 사용하기 위해 만든 저수조에
연결되어져 있던 철제 파이프였다는 말은 참으로 가슴을 아프게 했다.
미국의 승리를 선어한 이오지마의 성조기.
그것이 묶여 있었던 파이프는 2만여 일본군들의 생명을 지탱시켜 준 도구였다. 
이 기묘하면서도 잔혹한 조합은 완벽한 사진의 일부가 되어
지금까지도 전 세계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222쪽>

편지글 형식으로 된 책을 두번째 만나는 것 같다.
책속에서 만나지는 편지글들이 전해주는 느낌은 참으로 다양하다.
김다은 작가의 <이상한 연애편지>에서처럼 하나의 모티브가 되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속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전체적인 글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 편지글들로 인하여 담담하게 다가오는 일상과 전쟁의 이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책장을 덮고 책표지에 있는 쿠리바야시 타다미찌의 사진을 본다.
그저 평범하기 이를데없는 한사람, 아버지이며 남편이었을 한 남자가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제 무덤은 어디라도 괜찮습니다.
돌 하나에 '육군중장 쿠리바야시 타다미찌의 묘'라고 쓰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형 요시마 앞으로 보냈던 그의 편지가 떠오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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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바뀐 세계사의 진실
키류 미사오 지음, 홍성민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3월
평점 :
절판


역사는 왜곡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숨기고 싶은 것들이 그토록 많았던 것일까?
진실은 알고 싶어하면 할수록 더 멀어지는 것 같다.
왜냐하면 진실되지 못한 것들은 누군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진실한가? 하고 묻게 된다면 대게는 과학적인 어떤 해답을 요구하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과학적인 그 어떤 의미와는 다른, 과학이란 것으로 증명되어지지 않는
아니 증명되어지지 못하는 그런 진실도 꽤나 있는 듯 하다.

여기에 실린 내용은 우리가 역사적인 일화로 많이 듣고 또한 보아오던 것들이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철가면>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루이 14세 시절,
철가면이 왕의 쌍둥이 동생이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소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진실은 밝혀지지 않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다.
셰익스피어 진위 사건은 사실 처음 접하는 이야기였다.
후대에 그토록 추앙받을 작품을 쓰게 되었던 셰익스피어는 진정 누구였을까?
그런데 왜, 무엇때문에, 누가 그런 이야기들을 꾸며낸 것일까?
눈앞에서 총구를 겨눈 암살자에게 다섯발의 총알을 맞고 죽어간 존 레논 암살 사건에서는
그 암살자의 생활과 관념등을 파헤쳐가며 단순한 팬으로서의 암살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이용당했음을 말한다. FBI나 CIA등의 기관을 예로 들면서.
그 밖에도 구구절절한 삶을 살아내야 했던 러시아 황녀 아나스타샤의 이야기라던가
병사했다고 알고 있었던 나폴레옹 암살 사건 또한 그 죽음뒤에 감춰진 음모를 보여주고
베트남 전쟁과 세계적인 입지에서 난감한 입장이 되어가고 있던 케네디 대통령이나
남북전쟁에서 승리를 하던 바로 그 때에 죽어야 했던 링컨 대통령의 암살 사건에 얽힌 진실을
이 책에서는 되묻고 있다. 어떤 것이 진실로 보여지느냐고.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나는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들 모두가 정치적인 희생양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을 죽임으로써 이득을 얻을 수 있었던 사람들 또한 자국인들이었다는 거다.
그 죽음이 병사가 되었든 암살이 되었든 그들의 죽음은 단연코 정치의 희생양이었다.
사실 역사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저런 사건들은 일반적인 평민들의 삶속에서는 만나기 힘든,
아니 쉽게 드러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그렇게 숨겨져야 했던 진실이라는 이름을 불러내고 싶어하는 것일까?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이렇다.
세계사는 커다랗고 복잡한 그림 퍼즐 맞추기라고.
그러니 우리는 그 퍼즐을 얼마나 맞추고 싶어하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완성'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조각 하나 하나를 맞춰가면서 그 완성된 그림을 상상할뿐.

결국 숨기기로 작정한 진실은 끝까지 보여줄 수 없다는 말도 되지 않을까?
보여주지 않기로 작정하고 숨긴것을 열심히 찾아다녀봐야 허구만을 짚어낼 뿐이다.
무수한 억측들만을 쫓아가기 마련일테니까 말이다.
마지막 쪽에 있는 옮긴이의 말을 읽으며 나는 다시 고개를 주억거린다.

역사는 인간이 만든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욕망이 역사를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욕망이라는 흉측하고 냄새나는 괴물. 역사속에는 그 괴물이 숨어 있다.

그럼으로 우리에게는 아리아드네의 실이 필요할런지도 모른다.
아리아드네를 어디가면 만날 수 있을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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