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 이오지마 총지휘관 栗林忠道
가케하시 쿠미코 지음, 신은혜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영화 <아버지의 깃발>을 보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일본군영쪽이 궁금했었다.
철저하게 미국식으로 각색되어져버린 하나의 이야기를 앞에 두면서 어쩌면 그들은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의 참모습은 어디에 있는거냐고.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같은 상황하에서 벌어졌던 일을
각기 다른 시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말에 선택했었던 순간부터 정말 기대가 되었다.
<아버지의 깃발>에서는 그야말로 영웅을 만들어내기 위한 전쟁신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보면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이 벌어졌던 일들이
어쩌면 이토록이나 다른 느낌을 전해줄 수 있는가 놀라웠다.
단순히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커다란 어떤 것들이 숨어 있는 듯 했다.

도쿄도 남쪽 오가사와라 제도에 있는 작은 섬 이오지마.
섭씨 60도에 달하는 높은 지열과 곳곳에서 독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유황섬 이오지마.
그 작은 섬에 비행장만 세개였다고 한다.
미국이나 일본쪽 모두에게는 정말 필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아닐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토록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까지 빼앗기 위한 싸움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오지마섬을 사수하기 위해 떠났던 쿠리바야시 장군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 살아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시작했다는 것을.
그래서였을까? 그토록이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시절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쿠리바야시는 미국이 이 전쟁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지조차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고 하니 꽤나 현실주의적인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쿠리바야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과 병사들의 목숨을 걸고
일본 본토의 민간인들을 하나라도 더 살리기 위한 계책을 세웠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휘하에 있는 병사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며
병사들을 우선적으로 챙기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고 그를 모셨던 사람들은 회고한다.

한사람의 시선과 마음을 통해 보여지는 전쟁의 단면은 참으로 서글프게 다가왔다.
그 지옥같은 전쟁속에서 살아냈던 하루라는 시간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그 긴박했던 상황속에서 치밀함과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쿠리바야시조차도
일본 본토가 불바다로 변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마지막 일전을 위해 술잔을 돌리던 그 순간이 지나
결전의 날을 기다리는 중에 너무도 초라한 늙은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말과 표정으로 표현해내지 못하는 가슴을 얼만큼이나 아프도록 쥐어짜야 했을까?

이채로운 것은 그런 와중에서도 가족들과 주고 받았던 편지내용들이다.
이 책속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편지글들은 살아 숨쉬는 느낌표 같다.
바람이 들어와 추웠다던 부엌의 틈새를 수리를 해주지 못한채 떠난 아버지의 마음은 보내는 편지에
글과 그림으로 자세하게 바람을 막는 방법을 설명할 정도로 자상하기만 하다.
또한 군인이었기에 부름을 받아 최전선으로 떠났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어려움을 겪는다하여도 꼭 살아남아 주기를 바라는 한 남자의 지극한 바람은 아내를 향한,
혹은 자식을 향한 뼈아픈 사랑의 표현이 아닐수가 없다.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다가올 앞일을 예견하며 걱정과 염려로 또는 당부의 마음으로
가족들에게 보내지던 쿠리바야시의 편지들. 그 편지들을 보내며 어쩌면 그는 꺼져가는 삶의 의지를
되살려내고 있었던건 아니었을까?  살고 싶다는, 살아 돌아가고 싶다는 내면의 소리를
그렇게 표현했던 건 아니었을까?

<아버지의 깃발>과는 달리 이 책속에서는 전쟁이란 괴물이 그리 크게 부각되어져 있지 않은 듯 보여진다.
한 인간의 흔적을 따라가며 그 사람의 체취를 느끼고 싶어하는 애절함이 흥건하다.
단 한장의 사진으로 영웅이 되어버린 미 해병대 여섯명의 병사들에 비해 지하 벙커에 숨어 마지막
한명까지도 게릴라전으로 싸움에 임하며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일본 병사의 모습은 너무도 대조적이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싸워야 했던 것일까?
그들의 죽음을 옥쇄(玉碎)라고 했다.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뜻이란다.
명예나 충절을 위하여 깨끗이 죽음을 이르는 말이란다. 과연 그랬을까?
말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옥쇄가 아니라 진정 어쩔 수 없이 선택되어져야 했던 죽음이었다면?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 저토록 크게 부각시킨 이오지마섬의 전투에 대해 일본본영쪽에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고 하니 후손에 의해 옥쇄라는 말로 만들어진 죽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뒤에 남는 자들에 의해 다듬어지게 마련일테니..
하지만 똑같은 죽음을 두고도 표현하는 방법은 천지차이였다.
영웅으로 다시 태어난 미국식의 표현방법과 후일에야 그 죽음의 의미를 되씹어야 했던 일본식의 표현방법은
달라도 너무 달랐기에 깃발을 꽂았던 깃대가 일본군이 빗물을 모아 사용하기 위해 만든 저수조에
연결되어져 있던 철제 파이프였다는 말은 참으로 가슴을 아프게 했다.
미국의 승리를 선어한 이오지마의 성조기.
그것이 묶여 있었던 파이프는 2만여 일본군들의 생명을 지탱시켜 준 도구였다. 
이 기묘하면서도 잔혹한 조합은 완벽한 사진의 일부가 되어
지금까지도 전 세계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222쪽>

편지글 형식으로 된 책을 두번째 만나는 것 같다.
책속에서 만나지는 편지글들이 전해주는 느낌은 참으로 다양하다.
김다은 작가의 <이상한 연애편지>에서처럼 하나의 모티브가 되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속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전체적인 글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 편지글들로 인하여 담담하게 다가오는 일상과 전쟁의 이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책장을 덮고 책표지에 있는 쿠리바야시 타다미찌의 사진을 본다.
그저 평범하기 이를데없는 한사람, 아버지이며 남편이었을 한 남자가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제 무덤은 어디라도 괜찮습니다.
돌 하나에 '육군중장 쿠리바야시 타다미찌의 묘'라고 쓰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형 요시마 앞으로 보냈던 그의 편지가 떠오른다. /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