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의 계절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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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의 기억속에 있는 계절은 사계이다. 봄,여름,가을,겨울... 저마다의 독특한 색으로 우리를 찾아오곤 한다. 하지만 그의 기억속에는 또하나의 계절이 있다. 천둥의 계절, 신의 계절이다. 겨울과 봄 사이에 찾아오는 짧은 계절을 신계神季, 혹은 뇌계雷季라 불러 봄과 겨울과는 확연하게 구분지었다는 온穩의 사람들... 이름 그대로 천둥계절인 그 때가 오면 온의 세상은 무언가 알 수 없는 일들이 찾아온다. 그 짧은 계절속에서는 그동안 어긋났던 일들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진다고 그들은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천둥계절동안 꼼짝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과 관계없이 그들은 그 천둥계절에 모든 것들이 정화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천둥계절속에는 새로운 세계가 잉태되어져 있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은 하계라고.. 그렇다면 그들은 신神일까? 아니 내가 보기에 그들은 결코 신이 아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다. 단지 살아가는 모습이 약간 다를 뿐...

쓰네카와 고타로의 작품 《야시》가 출간되었을 때 알 수 없는 매력에 이끌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책을 읽지 못했다. 그 흔한 편견의 벽을 넘지 못한 탓이다. 호러물 혹은 환상소설이라 불리워졌던 책들이 나에게 안겨 준 느낌이 그리 산뜻하지만은 않았던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너무 허무맹랑한 환상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탓도 있었고,가끔씩 이런 설정은 너무 찜찜하다 그냥 넘어가고 싶다고 생각되어지는 대목들이 내게는 마치도 기어가는 벌레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던 탓도 있었다. 하지만... 이 소설 《천둥계절》은 판타지물임에도 불구하고 산뜻하게 다가왔다.  책속의 세상으로 발을 들여놓고 한걸음씩 걸을 때마다 '참.. 맑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포장지를 뜯는 순간부터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읽게 된 책이다. 온의 세상에서 살게 된 하계의 소년 겐야를 따라가며 이야기는 시작되어지지만 어쩌면 그 소년속에 내가 들어가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소설은 가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로 구분되어져 있다. 가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는 나와 그 현실의 세계에서 가상의 세계로 들어가버린 나를 찾기 위해 가상의 세계를 찾아 나서는 내가 만나는 지점에서부터는 그야말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한다. 소설의 구성을 살펴보면서 나는 각 나라의 신화를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북유럽신화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인간이 사는 하계와 신들이 사는 천상, 그 사이 중간세계.. 소설속의 온은 어쩌면 바로 그 중간쯤인 세상일 것이다. 중간중간에 느껴졌던 일본의 무속신앙에 대한 것들은 차라리 정겹게 다가왔다. 어느 나라든 그나라만의 무속신앙은 존재한다.  특히나 아주 작은 것들에게까지도 그들만의 의미를 갖게해주는 일본의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은 볼  때마다 참으로 신비롭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인간과 자연의 끈을 이어주는 것이 무속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그런 것들이 내게는 가끔씩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하니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온穩은 어쩌면 우리의 정신세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정신세계와 육신의 세계를 넘나드는 의식은 바로 영혼일게다. 정신이 추구하는 바는 끝도 없이 넓고 깊지만 육신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은 모든 것들이 제한적이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아마도 환상적인 이미지에 매달려 사는지도 모르겠다. 영원한 삶을 꿈꾸고, 내가 찾아 헤매이던 그 꿈과 이상이 모두 이루어지는 세상.. 아무런 근심과 고통없는 평온을 꿈꾸는 그곳.. 바로 그곳이 이 소설속의 온처럼 느껴지는 까닭이 무엇일까?

우리가 살면서 힘들지 않을때가 있을까? 오로지 평온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순간들이 정말 행복하게 느껴질까?  삶의 여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기에 신의 존재도 필요할지 모른다. 힘겨울 때, 넘어져서 울고 싶을 때 생각지도 않게 신을 찾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신의 존재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는 종교관을 떠나서이다. 정말 무의식중에 나도 모르는 새 간절한 마음으로 신을 원할때가 있다. 감히 말하지만 우리의 삶이 평탄하고 원만할 때 신을 찾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왜 그럴까? 그만큼 나약하고 그만큼 미미한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은 아닐까?   소년 겐야에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찾아온 불행의 씨앗.. 그것은 진정 불행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저 왔던 자리로 되돌아가기 위한 하나의 분기점이었을 것이다. 동기가 되어주는 것은 많다. 소년 겐야에게로 바람의 새가 날아들었던 것도 자신이 알 수는 없었으나 그가 절실한 마음으로 원했던 까닭이리라.

소설속의 바람와이와이는 정령이다. 어떤 책에선가 본 것 같다. 아주 맑고 흔들림없는 영혼의 소유자에게 정령이 찾아온다고.. 소년 겐야에게 찾아와 자리잡은 바람의 새가 말했었다. 이 아이의 샘물은 마음을 편하게 한다고..  우리가 지금 잃어가고 있는 순수純粹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신화적인 의미로 볼 때 신과 인간의 세상을 넘나들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존재.. 그 정령이 새의 모습으로 소년에게 찾아와 잃어버린 소년의 기억을 되찾아가는 여정길에 동행해주지만, 바람의 새 역시도 그 소년을 통하여 해야 할 숙제가 있는 것을 보면 신은 절대로 자신의 힘을 거저 주지 않는 모양이다. 가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만난 후 다시 현실의 세계로 돌아 온 소년은 이미 소년이 아니다. 어쩌면 그 천둥계절이 가리키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일상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치열하게 살아내야 할 순간들이 머물렀던 시공간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이미 정해진 운명대로 살 수 밖에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소설속에 등장하는 여럿의 화자들은 서로 씨줄 날줄처럼 엮여진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면 서로의 기억속을 더듬어보면 된다. 그래서 나는 잠시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지만(사실 뒷부분에서 약간은 뒤엉킨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탓에 나는 화자들의 기억속을 여러번 들랑거려야만 했었다)  소년 겐야가 살아내야 했을 그 천둥계절속의 시간들은 내게 참으로 신선한 긴장감을 안겨주었다.  소설속에서 무시무시한 느낌으로 등장했던 도바 무네키의 전설.. 그 도바 무네키가 안고 있었던 것은 우리가 헤쳐나가야 할 힘겨운 장애물일수도 있고, 우리가 내려놓지 못한 채 짊어지고 가야할 등짐일수도 있을 것이다. 도바 무네키는 자신이 점찍은 사람에게는 기어코 찾아가 절망을 안겨주고 있지만 그에 대응하는 바람와이와이가 내게 있어준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삶이 나를 힘들게 하고, 길을 잃어 지쳐 있을 때 절망을 알게 해주는 귀신조 도바 무네키가 나에게도  찾아오겠지.. 그런 때 나도 바람와이와이를 외쳐 불러보고 싶다. 나에게 내려와 줘... 그러면 '당신이 필요한 힘을 나누어주겠습니다' 라고 말해주는 그런 바람의 새가 내게도 날아와 줄까?  그런데 이쯤에서 나는 생각해보지 않을수가 없다. 내가 그만큼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졌는가?  묻고 있는 지금 느닷없이 가슴이 뭉클해지는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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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서커스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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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귀고리 소녀》에 반해서 《버진 블루》를 읽었었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트레이시 슈발리에라는 여자의 글재주에 푹 빠져들었었다. 한참을 기다린 것 같았다. 다음 작품이 기대되었던 것은 전작들속에서 느낄 수 있었던 황홀한 것들을 다시한번 느껴보고 싶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우연하게 《진주귀고리 소녀》를 영화로 보고 나서 어찌나 실망을 했던지... 항상 그렇다. 글이 주는 그 묘한 매력을 영화속에서 온전하게 찾는다는 게 무리라는 걸... 이 책이 나왔다는 소개글을 보았으면서도 쉽게 다가가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트레이시 슈발리에라는 작가의 작품이 주는 유혹감을 좀 더 느껴보고 싶어서였는지도 몰랐다. 책을 손에 쥐고 내가 느꼈던 설레임은 정말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으면서 내가 그 설레임을 점점 잊어가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전작들에 비해 긴장감도 덜하고 녹아있는 감동 또한 그리 많지 않았다. 지식과 감동을 함께 전해 줄 수 있는 작가라는 말에 적극 동의를 표하던 나의 기대에 못미치는 작품이었다고나 할까?

1792년 3월 런던으로 이사오는 토머스 켈러웨이 가족의 이야기는 시작되어진다. 그의 아내 앤 켈러웨이와 딸 메이지, 그리고 아들 젬... 이렇게 네명의 가족이 엮어 갈 런던이야기.  그 이야기속에는 내가 읽어보았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분명하게 선이 그어지는 주제의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다. 그 역사적인 배경속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번에는 그리 크게 와닿지 않았다는 말도 되겠지만 옮긴이의 말처럼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삶을 조명해 보고 싶었다면 그것 역시 그다지 밝게 혹은 분명하게 조명처리가 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차라리 윌리엄 블레이크라는 시인의 글을 통해 당시의 사회적인 풍자를 읽어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은 것 같다.  내가 읽어보았던 작품들에 비해 촘촘하게 느껴지는 그런 긴장감(손에서 책을 떨어뜨리고 싶지 않은 그런...)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책장을 덮고 다시한번 제목에 눈을 돌려 보았다. 시인이라면 윌리엄 블레이크를 말할 것이고 서커스라면 필립 애스틀리를 말하는 걸거라는 생각을 한다. 책속에서 느껴지는 두사람의 정신세계는 어딘가 모르게 같으면서도 다른 듯한 느낌을 준다. 글속에서도 말했듯이 무형의 그 어떤 것에 꿈과 이상과 환상을 불어넣어 그 시대의 군중들에게 정신적인 지주로써 그려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왠지 내게는 그리 크게 와닿지 않는 설정처럼 보여졌다.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생활속에서 두개의 쳇바퀴처럼 달라붙어 굴러가는 아이들 젬과 매기..  세상에 대한, 이성에 대한, 그리고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한컷 부풀대로 부푼 나이의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가 살아내고 있을 현실속의 시간들을 이해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시인과 그 아이들이 나누는 선문답같은 대화속에서 얼핏 얼핏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경험에 의해 버려지는 순수에 대한 욕망이었을까? 아니면 경험으로 인하여 버려질 수 밖에 없었던 아이들만의 순수를 말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도시로 올라왔던 젬과 메이지가 도시속에 동화되어가며 잃어버리고 있던 것들이 오히려 도시에서만 자란 매기에게는 어떤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되어지는 것 같다.

" 강 이편과 저편 사이, 강 한복판에는 뭐가 있냐고 물으셨죠? 그 답은 세상이에요. 두 극단 사이에 놓인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에요"

" 바로 그거야. 두 극단 사이의 긴장이야말로 우리를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있게 하는 거란다. 우리 인간은 어떤 한가지 측면만이 아니라 그 반대 측면까지 갖고 있는 거야. 그 두가지 상극이 우리의 내면에서 섞이고 부딪치고 불꽃을 일으키지.  빛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도 있는거야. 평화만 있는 게 아니라 갈등도 있고. 순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도 있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삶의 교훈이란다. 그래야만 꽃한송이 속에서도 세상을 볼 수 있을 테니까."(247쪽)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는 어쩌면 처해진 현실을 버리고 무시할 수 없기에 꿈을 꾸고 그것에 대한 환상을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젬과 매기처럼 함께 있음으로 해서 은연중에 서로에 대한 깊은 관심을 느껴가면서 그렇게 이 한세상을 살아내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약간의 실망감을 감추며 옮긴이의 말속에서 찾아낸 슈발리에의 말.. " 젬은 경험을 얻었고, 메이지는 순수를 잃었으며,매기는 순수를 되찾았다"... 소설의 내용을 요약했다는 이 짧은 말속에서 윌리엄 블레이크라는 시인의 삶을 조명했다던 말은 끝내 부정하고 말았다. 단지 이쪽(어른)도 아니고 저쪽(아이)도 아닌 채 육체와 정신의 모순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과 고민을 해야만 했을 청소년기의 이야기였다고만 기억되어질 것 같다. 시인의 말처럼 두 극단 사이의 긴장을 잃지 않은 채 살아가야 할 젬과 매기, 그리고 메이지의 미래가 밝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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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답사수첩 (스프링)
문화재청 지음, 이선종 사진 / 미술문화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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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녀석의 체험학습으로 문화재 답사를 택하게 된 것은 평소 문화재 답사에 관한 관심이 많았던 까닭이기도 했지만 우리의 문화에 대한 소중함을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문화재에 대한 설명을 해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던 나의 문화재 상식에 대해 일말의 부끄러움을 어찌 할 수 없던 차에 이 책을 만난 건 나에게 행운처럼 느껴졌다.
처음 받아 보았을 때는 간단한 수첩모양이었다는 게 좀 실망스럽긴 했지만 간단하게 가방에 넣고 다니기에는 그만이었다.




아들녀석에게 능에 대한 설명을 해 주면서도 늘상 그 용어를 몰라 어물쩡 넘어가기가 다반사였는데 이 책속에는 능에 관한 상설도가 그려져 있어 설명해주기에 수월했다.
아이에게 그냥 보라고 넘겨주기에는 이해하기 힘겨운 낱말들이었던 탓이다.

거기에 맞춰 능상설도에 대한 해설이 붙어 있어 참 좋았다. 언제였는지  아들녀석과 찾았던 선능에서 능 해설자를 만났던 기억이 났다. 설명이 덧붙여지지 않은 채 들려왔던 이름들은 너무나 낯설었었다. 물론 아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이 수첩을 보면서 내가 좋게 보았던 점의 하나가 왕릉 용어를 해설해 주었던 부분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음이다. 관람객들이 아주 쉽고 간편하게 조선 왕조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나온 책이라는 말처럼 어느정도는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을 듯 싶기도 하다.
아주 작은 책, 정말 수첩처럼 지니고 다니기에는 참 좋은 듯 하지만 종이의 재질을 좀 더 신경써 주었다면 더 좋았을거라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답사를 갈 때마다 팜플릿을 얻기 위해서 일부러 발걸음을 옮겨야 했던 순간을 생각하면 이 수첩 한권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를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왕릉 답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권쯤 가방에 넣고 다녀도 괜찮을 것 같다.
아주 듬직한 해설가와 동행하는 것처럼..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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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종 2010-02-20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본 책자의 사진을 촬영했던, 이선종이라고 합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역시 제작 전,후로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생각에 동감하며 몇자 남겼습니다.

아이비 2010-02-21 14:08   좋아요 0 | URL
지금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책자들이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램은 여전하지요 ^^*
항상 평안하시길요...
 
유성룡 - 설득과 통합의 리더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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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 그가 인물이었던가?  이 책을 읽고 난 뒤 유성룡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본다. 이 황의 제자. 도체찰사로써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총체적인 지휘를 하였다.. 반상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인재를 볼 줄 알아 추천하였으며 이순신이나 권율등을 기용했으고, 천민 출신의 신충원과 같은 이에게도 출세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 양반부터 노비까지 모두 군역의 의무를 지게 했던 속오군이나 토지 소유의 과다를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했던 대동법을 실시했던 것이나, 서얼이나 천인들을 발탁해 그들을 면천시키고 벼슬을 주는 등, 그가 행했던 모든 것들이 양반사대부들의 기득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는 것..  결국 그는 선조에게서 버림을 받았으며 은근짜한 선조의 회유에도 흔들림없이 초야에 묻힌채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는 것...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유성룡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적었다. 단지 이순신의 뒷배경이 되어주었다는 것만이 뚜렷하게 부각되어질 뿐이었으니 달리 무엇이라고 할 말도 없는 듯 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분연히 일어나던 화를 어쩌지 못했던 부분도 참 많았었다. 너무 엉뚱하게 그려져 있던 선조의 모습때문이었다.  현실을 외면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었던' 조정의 인물들이야 우리의 역사속에서는 너무 흔하다. 말해 무얼하랴.. 지금의 정치현실도 저와 같음을...  "중세 이후에 좋은 법과 제도가 모두 폐지되고 떨어져서, 사대부는 다만 문장의 화려함을 다듬고 헛된 말만 꾸미기에 힘쓸 뿐 세상을 다스릴 생각에는 조금도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라던 유성룡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조선의 역사속에서나 작금의 현실적인 정치배경속에서나 헛된 말만 꾸미고 세상 다스릴 생각에는 조금도 뜻을 두지 않은 것은 똑같이 보여진다는 말이다.

우선은 선조를 먼저 알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종의 후사가 없어 왕족의 예로써 왕위에 올랐던 이가 선조다. 선조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경로로든지 그리 많이 만날 수 없었던 듯 하다. 특별히 내세울만한 것이 없어서였을까? 인재를 등용할 줄 알았고 당쟁중에도 훈구파의 공격속에서 사림파의 사기를 북돋아줄 줄도 알았다고 기록에는 나와 있다. 선대의 숙제였던 종계변무(이는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중국 명나라의 대명회전에는 이인임의 후계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것을 수정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를 바로잡기도 한 것이 또한 선조였다.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다고 나와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다보면 선조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만다. 어찌 저런 인물을 일국의 왕이라도 추대했으며 모시고 살았을까 싶기도 하다. 문득 요순시대의 선위 일화가 떠오른다. 나라를 다스릴만한 인재를 찾아내어 그 인재를 살뜰히 살며 진정한 군주로써의 면모를 갖추게 한 다음 비로소 왕의 자리를 주었다던 이야기.. 그 일화를 보면서 세습이 아닌 선위였기에 그토록 위대해보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제일먼저 피난의 짐을 쌌다던 왕, 선조.. 그 선조가 궁을 버리고 떠나자 화가 난 백성들은 배신감에 궁궐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단 한번도 맞서 싸워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던 왕, 선조.. 자신의 왕위 지키기에만 급급하여 세자책봉에도 그토록 힘겨워 했다던 왕,선조.. 그랬던 선조 곁에서 묵묵히 왕을 수호하며 자신의 뜻을 펼쳐나가던 유성룡의 이미지는 선조와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나는 문득 이런 의구심이 들었다. 정말 한나라의 왕으로써 선조는 그렇게 옹졸하고 치졸한 모습밖에는 보여주지 못한 것이었을까? 내심 작가의 의중이 궁금해졌다. 역사는 힘있는 자의 붓으로 그려진다는 말이 있듯이 혹여라도 작가의 내면에 유성룡이란 인물에 대한 과신이 숨겨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토록 선조의 잘못된 점만 쏙쏙 뽑아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 의구심을 이유로 나는 이 글의 맨 처음에 유성룡, 그가 인물이었을까? 라고 쓸 수밖에 없었다.  사실 유성룡이 실시하고자 했던 많은 것들은 이미 앞선 선각자들에 의해 한번씩은 거론되어졌던 것임을 분명히 해야한다. 명마는 주인을 잘 만나야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만큼 유성룡이란 인물을 부각시키기 위해 선조의 모습이 변화되어진 것만 같이 느껴져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기도 하다.

어찌되었든 이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 확실하게 다가왔던 것은 모든 법을 시행함에 있어서 미리 내다볼 줄 아는 혜안을 살펴볼 줄 알았다기 보다는 이미 벌어진 일에 급급하게 맞춰졌다는 점이다.  자신의 이익 챙기기에만 혈안이 되었던 지식층의 모순점은 언제 보아도 안타깝기만 하다. 앞서가는 사람이 살 수 없었던 조선시대의 사회상이 가슴 아플 뿐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생길정도로 남 잘 되는 것을 배 아파하던 조선의 시대상이 눈물날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누구의 후손인가.. 바로 그들의 후손이기에 어쩌면 지금의 우리들도 그런 속성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묻고 싶어진다.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한권의 책으로 인해 나에게 얻어지는 것은 참으로 많다는 것이다. 조선사에 관한 작가의 책을 몇 권 읽었었고 그 책으로 인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겉으로만 얄팍하게 알고 있었던듯한 임진왜란의 역사적 배경과 유성룡이란 인물에 대해 알게 된 점 또한 기쁨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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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저넌에게 꽃을
다니엘 키스 지음, 김인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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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책을 평가하는 기준에 별이 다섯개밖에 없다는 게 오늘따라 싫다. 내가 무슨 전문 평론가는 아니지만 이 책은 정말이지 가슴속을 흥건하게 적셔주는 무언가가 있다. 나는 아무래도 자연주의자인 모양이다. 이렇게 과학이나 어떤 인위적인 믿음에 반기(?)를 드는 듯한 느낌이 오는 글을 좋아하는 걸 보면 말이다. 과학조차도 인위적인 믿음이라고 생각할수밖에 없는 내가 너무 우습기도 하지만 왠지 무조건적인 믿음을 내세우는 광신도와 자신이 믿어 마땅한 그 무엇에 대한 열정으로 꽉 채워진 학자들의 믿음이 어쩌면 동일한 선상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오늘은 검사가 잇엇다. 나는 실패햇다고 생각하기 때무네 틀림업시 나를 써주지 안을 것 같다... 박사님은 생각한 것 하고 일어난 일을 자꾸자꾸 쓰라고 합니다 이제 생각나지 안키 때무네 쓸 것이 업서서 오늘은 여기서 그만 하겟다....안녕히 게세요 찰리 고든 이제 막 글을 배우기 시작하는 어린 꼬마의 말투로 시작되어지는 이 책을 펼쳐보면서 나는 나의 선택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책을 통해 알게 되어 선택되어진 나의 두번째 책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찰리의 시선으로 책속 세상을 함께 거닐었다면 거짓말일까? 

앨저넌과 찰리.. 책속의 주인공은 둘이다. 내가 두명이라고 쓰지 않는데는 이유가 있다. 앨저넌은 흰쥐이기 때문이다. 32살이지만 일곱살 어린아이 같은 지능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있는 찰리.. 여기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IQ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흰쥐를 이용해 실험하는 인간의 자아도취현상 또한 그리 위대해 보이지 않는다. 일종의 조건반사라고 나는 보기 때문이다. 뜨거워지는 물을 느끼지 못한 채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 현상과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곱살의 찰리가 서른 두살의 찰리로 변해가는 과정은 눈물겹다. 아니 눈물겹도록 처절하다. IQ가 얼마나 낮고 높은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과학이라는 초현실적인 자만심 앞에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돋보기를 쓰고 보는 것처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 책속의 찰리가 너무 불쌍하다. 이제 막 글쓰기를 배우는 아이처럼 세상을 대하던 찰리가 뇌수술을 받고 난 이후 IQ180의 천재가 되었지만 그가 마음속에서 하나 둘 잃어가고 있는 것들에 대해 나는 마음이 아팠다. 실험실에서 앨저넌을 처음 보았던 어린 찰리.. 그야말로 백치같았던 찰리가 어느 순간 천재가 되어 앨저넌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바라보며 자기 자신의 변화를 예측할 때는 정말 가슴이 아팠었다. 하지만 그 예상되는 변화를 받아들이며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를 묵묵히 인정하는 찰리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기회가 된 듯 하다.

찰리 고든이 백치인가 천재인가 하는 것에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을... 천재가 된 후에야 알게된 찰리가 자신을 천재로 만들어준 박사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뭐든지 해 주었지요, 인간으로 취급하는 것만 빼고는.. 나를 위해 당신이 해준 것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나를 실험용 동물처럼 다룰 권리를 없다고...(276쪽)  적어도 빵가게에서 일하던 어린 찰리에게는 친구가 있었고 외로울 때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었으며 이렇게까지 고독하지는 않았었다고 천재찰리는 생각한다. 자신의 실제적 자아관념이 어린 찰리로 보여지며 끝내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는 상황에서조차 천재 찰리는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지금의 현실을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게다. 아니 어쩌면 그런 것들을 포기한다는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수술의 후유증으로 정서적인 변화를 보여주던 앨저넌을 바라보면서 앨저넌이 겪고 있을 변화가 천재찰리에게는 공포로 다가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천재찰리는 그 순간부터 자기 자신의 변화에 대한 리포트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자신을 체크하며 연구하는 아이러니다. 

서른 두살의 어른이 되어버린 찰리에게 어린찰리는 그가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었던 아주 먼 기억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보여주고 싶어한다. 태어남, 그리고 그에게서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아니 어쩌면 집착의 끈으로 자신을 옭아매어버린 엄마의 모습. 동생 노마가 태어나고 엄마로부터 버림을 받은 채 공동시설로 들어가야 했던 찰리는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을 잃었다. 문득 나는 얼마전에 읽었던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가 생각났다. 지극히 평범한 부모로부터 다섯째 아이로 태어났던 벤도 저능아였었다. 찰리처럼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야 했던 벤이 어쩌면 찰리보다는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랑이 필요했던 시기에 벤에게는 이기적이지 않은 엄마의 보호가 있었던 까닭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싶어했던 엄마의 관심이 있었다. 시설에 버려졌으나 다시 가족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벤과 뇌수술로 천재가 되어 가족을 찾아갔던 찰리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버림 받지 않고 가족곁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면 오히려 행복했을지도 모를 찰리가 다시 바보가 되어가는 그 여정속에는 정말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지금 타인의 마음에 대해 제멋대로 말하고 있어요. 당신이 뭘 알겠어요? 내가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느끼며, '왜' 그렇게 느끼는지"(148쪽).. 찰리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 앨리스가 찰리를 향해 절규하며 뱉어냈던 이 말은 어쩌면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던지는 작가의 마음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이 되어 있는지 알았다.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인간. 찰리와는 달리 친구도 사귈 수 없고 타인과 타인의 문제를 생각해 줄 수도 없다. 그리고 자기자신 외에는 흥미가 없다. 거울과 마주한 그 오랫동안 나는 찰리의 눈을 통해 나 자신을 보고 내가 실제로 어떤 인간이 되었는지 깨달았다. 나는 부끄러웠다.(280쪽)... 과학이, 우리가 믿고 싶어하고 끝없이 존경해마지 않는 과학의 힘이 우리를 점점 외로움의 늪으로 인도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끝없이 변화하고 싶고 그 변화에 기쁘게 순응하고 싶어하는 우리가 과연 나 자신에 대해 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은 얼만큼이나 되는지.. 터럭만큼도 없을 우리 마음의 여유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  천재찰리의 고독은 어쩌면 당연함으로 치부될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 할지라도 그것만큼은 당연시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박사에게 심리요법을 받던 천재찰리가 다시 어린 찰리로 돌아가면서 묻고 있다. 백치한테는 본능이 있을까요?...라고. 

어째서 나는 언제나 인생을 창문 너머로 들여다 보는 것일까? (328쪽)
이제는 시간이 없다고 느끼며 과거를 떠올리려 하지 않는 찰리가 자신이 써놓았던 논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단계가 되어 있을 때 인생에 대한 시점을 논한다는 건 서글프다. 이미 손에 쥐었던 것을 놓아버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불가항력적인 힘이 가해진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같은 뇌수술로 아주 똑똑한 천재쥐였던 앨저넌이 죽었을 때 나는 오, 하느님! 제발...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심정이었다. 제발 찰리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어쨋든 나는 과학을 위해 중요한 것을 발견한 최초의 바보인간인 것은 확실하다. 나는 무언가를 햇지만 그게 뭔지 생각나지 안는다.(344쪽) 그때가 오면 다시 시설로 되돌아가야 하는 그 때가 오면 혼자서 가고 싶다던 어린 찰리에게 환영같은 그림자로 보여지는 천재찰리.. 그 사람은 얼굴도 나하고 다르고 말투도 다르지만 나하고 달믄 것 같튼데 그래도 그 사람이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내가 창문에서 그 사람을 보고 잇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343쪽) 그래, 그래도 나는 친구를 찾아 떠나는 바보찰리가 더 좋다. 옛날에는 천재였지만 지금은 읽을 줄도 쓸줄도 모르는 바보천재를 아무도 상관하지 않은 곳을 가려고 하는 나의 찰리에게 박수를.. 그의 긴 여정이 너무 힘겹지 않기를.. 그의 마지막 말을 들려주고 싶다. 인간으로 살았으나 인간취급을 당해야 했던 그의 아픔을 함께 느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리고 그의 여정에 터럭같은 마음 한자락 나눠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아이비생각


P.S. 니머 교수님한테 꼭 전해주세요. 사람이 선생님을 비웃어도 그러케 화를 내지 말라고요. 그러케 하면 선생님한테는 더 만은 친구가 생길 거니까. 남이 웃도록 내버려두면 친구를 만드는 것은 간단합니다. 나는 이제부터 갈 곳에서 친구를 만이 만들 생각입니다.

P.S. 어쩌다 우리 집을 지나갈 일이 잇으면 뒤뜰에 잇는 앨저넌의 무덤에 꼿을 바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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