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고래
김형경 지음 / 창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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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기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을 어른이라고 한다. 사전적 혹은 사회적인 의미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어른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따로이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조차도 왠지 웃음이 난다. 우리의 주인공 니은이 엄마,아빠를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그 시간속에는 어른이 되기 위한 몸부림이 있다. 그 어른이라는 것이 어느 한순간에 습득해버릴 수 있는 자격증같은 것이라면 몇날 며칠을 밤새워가며 공부를 해서라도 그 자격증을 따고 싶은 게 그때의 니은이 마음이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했던가? 어쩌면 한꺼번에 너무 크게 다가온 상실감을 '이것이다'하고 정의내리기 전에 우리는 이미 그녀에게 이겨낼 수 없는 무게로써의 어른을 기대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커다란 삽이 허공에서 나와 가슴을 한 삽씩 퍼내었다. 아픈 것도 아니고 슬프지도 않은데 심장을 한 삽씩 잃어버리는 허전함만 생생했다.(23쪽)
아픔... 그것은 아픔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무게를 알 수 없는, 크기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우물같은 그 느낌속에 빠져서 헤어나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는 니은이를 통해서 몇년전 아버지를 보내드렸던 때가 생각났다. 다른 집 아버지들은 자식들을 다 보지 못하면 눈을 감지도 못한채 헐떡이며 기다려주었다는 데 우리 아버지는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그렇게 가버리셨다. 위독하다는 말에 고속버스에 몸을 실은지 몇분도 안되어 나는 아버지의 부음을 들어야 했었다. 눈물조차도 없던 그 이별의 순간이 떠올랐다.  니은이에게 현실이지만 현실적이지 않게 다가왔던 부모의 교통사고 소식은 어쩌면 아무런 감정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나 자신 하나만의 감정속에서 허우적거렸다는 게 옳은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주변인물을 통해 들려 주었던 '어른이 되기 위한 작전'들은 차라리 눈물겨웠다.  장포수 할아버지와 왕고래집 할머니처럼 어떤 일이 내 앞에 놓인다해도 그저 무덤덤한 눈길로 바라보아야 할 것.. 무표정하게 바라보아야 할 것.. 아프더라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

" 니은아, 니가 시원하게 못 울어서 몸이 아픈 거다. 슬픔이 몸 안에서 돌아다니면서 몸을 두드리는 거지" (64쪽)
정말 슬플 때는 크게 울어버리라고 했었다. 차라리 울어버리고나면 속은 후련할 거라고도 했었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크게 한번 울지 못하는 니은이의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수증기를 내뿜던 압력밥솥..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니은이는 결코 울지 못할것만 같았었다. 아직은 니은이에게 달라붙지 못한 그 현실감각이란 놈이 저만치에서 바라보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자기 몫의 슬픔이라고 인정하지 못하는 서글픔 때문이기도 하리라.. 아직은 어린 니은이의 철없는 어른되기가 주변사람들에게는 안타까웠을까?  말없이 니은이의 슬픔을 대신 안아주었던 그들이 있었기에 허물처럼 그렇게 하나 둘씩 슬픔을 인정하며 벗어버릴 수 있었을런지도 모르겠다. 집에서 키우던 개가 할아버지 뱃속으로 들어가던 날 개뼈를 묻어주며 울어다는 이유로 엄마는 할아버지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고 했었다. 그리곤 20년동안을 한번도 울지 않았다던 엄마의 마음은 아마도 슬픔보다는 상실감이었을 게다. 자신의 마음을 잃어버린 상실감, 태어나서 온 마음을 다해 주었던 그 情을 잃어버린 상실감이 무엇보다도 컸을게다..

"내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 정해둔 규칙 같은 건 있어. 징징거리지 않기, 변명하지 않기, 핑계대지 않기, 원망하지 않기. 그 네 가지만 안해도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하지"(220쪽)
처용과 황옥놀이를 하던 엄마 아빠의 기억을 통해서, 그리고 처용포의 수많은 전설을 통해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설정이 내 가슴속에 너무 깊이 파고 들었다. 처음엔 그저 아이의 단순한 성장통이려니 하다가, 어른이기에 겪어야 했을 사회적인 모순성들에 아파했고, 그 모순들이 엮어내던 갖가지 삶의 형태를 받아들이며 제 몫으로 하기 위해 힘겨워하던 많은 사람들때문에 더 아파해야 했다.  고래가 죽어가는 순간 마지막 숨을 쉴 때 피가 섞인 빨간 물기둥이 솟아오르지, 그것을 우리는 꽃이 핀다고 말한단다... 그래 어쩌면 우리네 인생도 거저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루어지기 위해서 혹은 이루어내기 위해서 거쳐가야할 고통의 한 순간이 분명코 오리라는 그 진리.. 징징거려서도 안되고 변명하거나 핑계대지도 말며 잘 풀리지 않는다고 누군가를 원망해서도 안되는 그런 규칙들이 필요한 때, 바로 그런때가  어른되기 작전이 이루어지는 때가 아닐까?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일은 왜 중요해요?"
"그것을 잘 떠나보내기 위해서지. 잘 떠나보낸 뒤 마음속에 살게 하기 위해서다"
"나도 기억하는 방법을 몰라서 저 물건들을 오래 붙잡고 있었다. 내 인생을 낡은 물건들을 쌓아두는 창고로 만든 셈이지. 잘 떠내보내고서 기억하고 있으면 되는 걸" (236쪽)
그랬던 장포수 할아버지도 자신속에서 살아숨쉬던 그 신화같은 삶을 잘 떠나보내지 못했다. 니은이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들을 살아내고서도..  이제 다시는 고래잡이를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고래잡이를 하던 때의 자신과 떨어질 수 없었던 할아버지는 어느 새벽 그렇게 전설 같았던 할아버지의 고래배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삶의 버팀목으로써 그것들을 붙잡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보내고나서 기억하기 보다는 차라리 안고 사는 게 할아버지에게는 더 쉬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나가 버린 것은 전설이 된다. 우리가 사용하지 못하고 버린 시간이나 사용하고 버린 시간이나 똑같이 전설이 된다. 고래잡이를 하며 살아가던 마을에 비행기가 날았고 그 비행기가 정유공장을 토해냈으며 그 정유공장은 오염과 폐수를 토해냈다. 그 오염과 폐수로 인하여 자신이 살아왔던 시간들이 죽어버릴까봐 시뻘건 언덕위에 나무를 심던 할아버지.. 다시 아버지를 생각한다. 어쩌면 자식들 보기에 부족한 삶이었다기보다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던 그 옛날의 시간들을 용서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늘 아픔이었던 나의 아버지.. 어쩌면 내게는 또하나의 전설로 남아 내가 사용해야 할 시간속에서 불쑥 불쑥 그렇게 튀어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바다를 찾아다니는 파도가 되지 않을라고 그런다"
"파도가 바다를 찾아다닌다고?"
"우리 스님이 그러더라. 파도가 온 바다를 돌아다니며 보소. 이보쇼. 바다가 어디 있는지 아오? 그런다고. 내 평생 그 꼴이 아니었나 싶다" (246쪽)
너무 무겁다. 책을 덮었으면서도 나는 책을 손에서 내려놓지를 못한다. 너무 무거워서 다시  들어올릴 수가 없다. 니은이를 통해 들었던 처용포의 슬픈 이야기속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었다. 우리가 살아낸 시절속의 아픔,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지금의 시련, 우리가 살아내야 할 먼 시간속의 애달픔이 하나로 녹아져 있음이다. 니은이 얘기를 하는가 싶었는데 이건 내 얘기를 하고 있었던 거다. 니은이가 겪어내야 할 운명같은 걸 말하는 줄 알았는데 이건 내 운명의 시간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장포수 할아버지를 대면시켜서, 왕고래집 할머니와 대면시켜서 나 자신을 한번 더 돌아보라고 한다. 바다를 찾아다니는 파도가 되지 말라고 한다. 나는 어른일까? 내 삶의 등짐을 내가 지고 가니 나는 어른이 분명할게다. 그런데도 나는 그 신화같은 삶의 고리들이 싫을 때가 많다. 나이 오십을 바라보면서도 그 삶의 고리들이 하나씩 끊어져버렸음 할 때가 있었다. 이제부터라도 니은이가 기억하고자 했던 어른되기의 규칙을 나도 따라해봐야 할까보다.  징징거리지 않기, 변명하지 않기, 핑계대지 않기, 원망하지 않기..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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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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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언제부터 읽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다가가지 못했던 책이었다. 아주 오랜동안을 책꽂이에 꽂힌 채 그 앞을 수도없이 왔다갔다 하던 나를 바라보았을 저 책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우선은 불교라는 종교에 대해 알고 싶었던 까닭이기도 하지만 이웃종교로 읽는다는 그 다음말에 왠지 마음이 동했던 처음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종교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가장 먼저 나는 왜?라는 질문부터 하게 된다. 그 끝없는 물음표들을 어떻게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지? 도대체 왜 그래야만 하는거지? 하며 끝도 없이 나를 힘겹게 했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너무도 많다싶을 정도로 그야말로 난무하는 교회의 모습이 보인다. 하늘로 아니 천당으로 가기 위한 길이 너무 많은 것이다. 하기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지옥이라 생각한다면 그 정도의 교회만으로는 천당가기 너무 힘들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적 교회 한번 안가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성가대 생활도 오래 했을 뿐 아니라 학생시절에는 학생부 임원을 할 정도로 정말 열심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지 못했을까? 

종교라는 의미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러면서도 왜 저렇게 형식적이어야 하는지, 왜 저토록 문자주의 혹은 율법주의라는 것에 얽매여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보이지 않는 마음들이 안타깝기만 했다. 마음도 없이 그저 '믿음'이라는 글자 앞에서 벌벌 기다시피하는 그들의 모습이 나는 싫었다. 내가 가진 것, 내가 인정한 것만이 옳다고 떠들어대는 그들이 모습이 나는 싫었다. 종교라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어져 종내는 나의 마음을 편하게 안정시켜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너무도 많이 했었다. 또하나의 구속으로 존재하는 종교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거다. 또하나의 구속이라는 말이 잘못된 것일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구속이란 의미로밖에는 보여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종교, 과연 그것이 무엇이건데 이토록 나를 힘겹게 하는가!

큰 맘 먹고 책장을 펼쳤다.  모태신앙이었던 기독교인이 왜 불교에 관한 책을 써야 했는지, 왜 불교에 관한 공부를 해야 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기독교와 불교에 관한 공부를 하면서 무엇을 느꼈는지, 우리가 생각해야 할 종교관은 이런 모습을 해야 한다는 작가의 노력과 자부심이 가득하여 나도 함께 묻어가기에 너무 좋았다. 불교의 역사적인 배경이나 동양의 불교, 서양의 불교 그리고 각 나라마다의 불교에 관하여 들려주시던 말들이 너무 편하게 다가왔다. 불교를 아는 것은 더 이상 불교 신자들만의 의무가 아니라는 말, 하나의 종교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종교와의 비교를 통한 분석과 이해가 필수라는 말('하나의 종교를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 ), 많은 불교 서적이 출간되고 있지만 불교 이론을 설명하는 책의 대부분이 주로 불교 지도자들이 쓰고 있어 어려운 불교 용어와 사상을 쉽게 풀지 않고 그대로 쓰는 것이 대부분이라 일반적인 (바로 나와같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 특히 그리스도교와 불교를 넘나들면서 예로 들어주는 여러가지 해설은 평소 내가 했던 의문점에 대한 마침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경험하고 생각했었던 것들이 모두 이 안에 들어있었다.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두가지를 서로 어울려가며 같은 맥락으로써 읽을 줄 알았던 작가의 그 커다란 마음씀씀이에 나는 정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는데 하물며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커다란 일을 함에 있어서 외골수적인 생각을 하면 안된다는 가르침앞에서는 정말 숙연해지기도 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오래 된 연못
개구리 뛰어든다
물소리 퐁당
- 일본의 가장 유명한 하이쿠 시인 바쇼의 작품(269쪽)

이름에 무엇이 있는가?
우리가 장미라고 하는 그것은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향기는 마찬가지
- 셰익스피어

저 두가지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점은 아마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게는 아무 꾸밈없는 그 처음의 세계라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속에서 모든 것을 찾으려고 하는 마음, 우리가 한번 건너뛴 시선으로 바라볼 때 그곳의 진리는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다는 느낌이었다. 어느샌가 내 손에는 볼펜이 들려져 있다. 그리고 아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과 같은 마음이 되어 있었다. 공감하며 읽어갈 수 있는 그 시간이 너무 편하고 좋았던 까닭이다. 그야말로 글자만 읽는 책읽기가 아니라 공감대를 형성해가며 이해할 수 있는 폭을 넓혀가고 싶은 욕심이었을 게다. 오로지 불교라는 종교의 배경과 특징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종교인이 되기 위해서 혹은 진정한 종교를 받아들이는 마음자세를 배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많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우리도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염원했던 부분은 바로 동야의 불교가 서양으로 넘어가서 자리를 잡게 되는 대목이었던 것 같다. 정말 너무도 욕심이 나는 대목이었다. 우리는 왜 저렇게 될 수 없는 것일까?  간단하게 요약해 보자면 이렇다.

하나, 기복적이거나 의례 중심에서 참선 혹은 명상 중심으로
둘, 스님 중심에서 재가 불자 중심으로
셋, 남녀 차별에서 남녀 평등으로
넷, 수직적  권위주의에서 수평적 대등관계로 (지도자와 불자의 위계적 차별도 적다)
다섯,가족 중심에서 개인 중심으로(각자 개인의 종교를 인정해야 한다)
여섯, 종파주의에서 연합주의로
일곱, 종교적 고립에서 종교간 대화로
여덟, 사회 고립에서 사회 참여로

책의 307쪽에 나와있는 이 여덟가지는 서양 불교의 특징과 동향에 관한 이야기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서양불교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종교적인 입장을 대변하여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하고..  베트남의 유명한 틱낫한 스님께서 수행중에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나만 이렇게 수행을 해야 하는가 하여 참여불교를 말씀하셨다는 말을 보면서 참으로 놀라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우리의 세상속을 떠돌고 있는 모든 종교는 변해야 하며 또한 변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일전에 TV를 통해 보여지던 광고가 생각난다. 성탄절에 스님들이 교회를 찾아가 함께 기뻐하고 석탄일에 모든 사람들이 함께 기뻐해주던 그 광고... 얼마나 멋진 일인가 말이다.

개인적으로 산을 너무 좋아하다보니 산에 오를 때마다 수학공식처럼 따라다니는 산사에 머무를 때가 많았다. 잿빛 가사를 걸치고 하얀 고무신을 신은 스님들의 그 조용한 움직임, 지붕 한 귀퉁이에 매달려 바람이 불 때마다 아주 맑은 소리로 내게 다가오던 풍경의 속삭임이 너무 좋았다. 종교적인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 산사가 안고 있던 느낌만으로도 나는 충분했다. 어느날 문득 불교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에 서점을 찾았지만 그 딱딱함으로 다가오던 문자들이 내게는 너무 생소했다. 몇권을 책을 들춰보고 읽어보고 하기를 반복하다가 끝내는 빈손으로 나오기 일쑤였다. 왜지? 이래가지고 대중적인 종교라고 할 수가 있겠나?  참 바보같은 질문이었겠지만 왠지 내 가슴 한켠에 남아 나를 느끼고 있는 산사의 이미지와 불교라는 종교를 같이 묶어버렸던 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다가 어느 틈엔가 대웅전의 불상앞에서 절을 올리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사실 어떻게 절을 해야하는지도 몰랐고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옆의 아주머니가 하시는 모양대로 따라했을 뿐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 한쪽에 바람이라도 들어온 양 그렇게 시렸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인연이었을까? 그 뒤로도 나는 산사를 자주 찾는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불교인이라는 말을 감히 하지 못한다. 종교적인 면에서보다는 모든 형식을 떠나서 그저 나를 한번 더 돌이켜 생각할 수 있는 그 시간을 허락해주는 공간이 너무 좋았고 조용하게 주변을 위해 마음을 모아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니 그저 좋을 뿐이다. 이런 내가 어찌 종교의 유무를 따질 수 있겠는가 말이다. 나에게는 정말 크나큰 도움이 되었던 책이었다. 메모를 시작하며 읽었는데 어느새 몇장의 메모가 생겼다. 책속에는 작가가 추천해주기도 했고 참고했다던 책들이 참 많다. 서점에 갈 기회가 있다면 메모를 들고 가 한번 더 찾아볼 요량이다. 그러고보니 어느샌가 인터넷 서점에 익숙해져버린 내 모습이 보인다. 발품파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종교인이라면 꼭 한번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니 굳이 종교를 갖지 않아도 좋다. 읽어본다면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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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컨스피러시 -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겨냥한 대 테러 전쟁
에이드리언 다게 지음, 정탄 옮김 / 끌림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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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읽으면서 불현듯 일전의 신문기사가 생각났다. 우리나라의 종교단체에서 봉사라는 목적으로 아랍권을 찾았다가 납치되어던 사건말이다. 꽤나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협상을 시도했다던 기사.. 그 기사로 인하여 세계각국에서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던... 테러라는 말 자체를 실감하기에 나는 너무 멀리 있는 것 같다. 미국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부르짖는 것과 또한 느닷없이 건물속에 쳐박힌 비행기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9.11테러에 관한 것들도 어떻게 저럴수가 있는지 그저 놀라울 뿐. 가만히 생각해보면 테러라는 것 또한 하나의 종교전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책속에서 만나지는 테러의 깊은 속내를 들여다보면 어김없이 종교가 등장하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일국의 그것도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하는 큰 나라의 대통령조차도 자신의 종교관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나는 또다시 생각하게 된다. 도대체 무조건적인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컨스피러시conspiracy... 찾아보면 공모共謨라고 나온다.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뜻을 모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책제목 자체가 하나의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어보기도 한다. 베이징에서 올림픽이 열린다는 상황, 그리고 그 베이징을 향한 여러 사람의 공동모의가 이 책의 가장 큰 줄기인 까닭이다. 가장 냉철하면서도 비열한 그 공모의 밑바닥엔 저마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저의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익이 생기는 일이라면 적과의 동침조차도 마다하지 않는 실리주의 원칙일까? 실상적으로 베이징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그 베이징을 향한 시선들을 따라가면서 이야기는 전개되어지고 있다.  베이징은 사실상 표적물로써의 이미지일 뿐이지 상황전개속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좀 더 알기쉽게 표현하자면 알라신을 내세운 이슬람과 전능하신 하나님을 내세운 기독교가 맞붙고 있는 것이다. 제각각 저들의 신이 더 잘났다고 떠들어대고 있는것과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거기에 한가닥 더 붙여보자면 소수민족 국가들의 권리주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덩치 큰 나라들에게 비이커안의 개구리처럼 서서히 달궈지는 소수민족 국가들이 이제는 그 뜨거워지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튀어오르기 시작했다는 거다.

책속의 설정이 가슴 떨리게 두려운 까닭은 생화학테러라는 점일 것이다. 바이러스라는 무시무시한 무기가 우리가 숨쉬는 공기속에서 우리를 공격한다고 생각해보라.  지은이는 자신이 테러리스트라고 가정하고 이 소설을 썼다고 했지만 첩보 부대에서 근무하고 베트남전에도 참전했었던 지은이의 이력을 살펴본다면 그리 과장된 설정만은 아닌 것 같아 내심 놀랍기도 했다.  인물들이야 허구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흘러가는 전개과정은 실제 상황을 방불케 하듯이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정말 지독한 힘이예요. 종교말입니다. 논리보다 믿음에 바탕을 둔다는 것. 그게 바로 종교의 문제죠." "우리는 늘 자신보다 더 나은 존재를 믿고 싶어하죠. 그게 바로 인간인가 봐요. 그리스와 로마를 봐요. 전쟁을 대변하는 신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폴로,헤르메스,제우스."(285쪽)... 지은이가 현재 호주 국립대학 아랍 이슬람 연구원으로 재직중이라는 이력을 보고나서야 테러전의 밑바탕에 종교적의식이 깔려 있는 까닭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아니 굳이 그런 지은이의 이력을 들이대지 않는다해도 이미 오래전부터 종교를 앞세운 전쟁은 끝도 없는 게 사실일게다. 신의 이름을 앞세우며 서로가 서로를 향해 전쟁을 선포한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이세상 모두가 저만이 옳타고 외쳐대고 있는 것과 다름없음이다. 지은이의 말처럼 세상이 잔인한 광기로 울부짖고 있다는 말에 조금은 공감한다.

첫 장을 펼치는 순간, 당신은 결코 이 책을 손에서 놓을수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책의 뒷표지에 써 있었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도 나는 책의 초입부에서부터 이 책을 손에서 놓고 싶었다.  이제 막 소설쓰기를 배우는 학생이 원리원칙대로 배열해가며 글을 쓰고 있는 것 같다는 게 나의 첫느낌이었던 까닭이다. 그만큼 더디다는 말도 되겠지만 사실 넘겨지지 않는 책장과의 싸움은 힘겨웠다. 4장의 Chapter로 이어지고 있었지만 첫장 최종해결로 가는 길은 너무 길었지 않았나 싶다. 테러전의 긴박한 숨결을 느끼고 싶은 사람이었다면 테러전으로 가기전에 이미 지쳐 쓰러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테러전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발판이었다고 변명할 수 있을까?  지루하기까지 한 종교적 심리전이었다. 1차공격을 하고나서 그들이 외쳐대던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 나, 그에 대응하며 끝도 없이 요한계시록을 들먹이며 아마겟돈을 외쳐대던 상대편의 의식에는 정말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한편의 시나리오를 미리 읽어버린 듯한 이 느낌을 지을수가 없다. 시나리오를 읽으며 떠오르는 장면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이미 우리의 기억속에 산재되어져 있는 뻔한 장면들이란 생각이 들어 나의 기대감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적으로 다가오던 테러전의 실체에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그런 세상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일게다. 테러... 단지 언어적인 의미로써 내게 보여지던 테러라는 말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해 준 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이비생각


"마지막으로, 그들의 종교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 원리주의자들에게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대체 어떤 신이 10억의 기독교인들과 10억의 이슬람교도들, 40억이 넘는 다른 종교와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창조해놓고 그중 한 그룹에게만 지도를 준단 말입니까. 대체 어떤 신이 자신의 피조물 중에서 극히 일부만 구하고 나머지는 유황 지옥속에서 불타게 한단 말입니까. 대체 어떤 신이 자신의 위대함을 무고한 여성들과 아이들을 무수히 죽이는 것으로 보여준단 말입니까. 그런 신이라면 저는 숭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신이 잔혹한 폭력을 승인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원전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입니다. 다양한 언어로 쓰여 있는 원전을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다른 문화와 신념을 가진 분들에게 도와달라고 호소할 것입니다. 타협은 약한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것입니다." (-4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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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화분에서도 꽃은 핀다.
이미 깨져버린 화분속에는 그리 많은 흙도, 그리 많은 물도 없었지만
그래도... 저렇게 보란 듯이 꽃을 피워냈다.
기지개를 켜며 한껏 자신의 화사함에 도취되었다.
햇살도 피해가는 저 미소앞에 나는 잠시 멈춘다.
숨을 쉬지 못한다.
사람은...
사람은...
왜 저리도 아름다운 아픔을 알지 못하는가..

사랑인들 뭐 다를까?
버려진 마음속에서도 사랑은 늘 피어난다.
사랑이 끝났다고 느끼는 순간
어쩌면 새로운 사랑은 다시 잉태되어질 것이다.
밤새 내려준 빗방울이 잠시 멈춰선 까닭은
저 꽃들의 미소에 화답함이리라..
저 먼곳으로부터 나의 이름 부르는 이 있어
나의 사랑도 아직은...
진행중인가 보다...



처음, 버려진 화분속의 저 꽃을 바라보았을 때 알 수 없는 희열이 있었다. 이제는 화려했던 그 시간이 가버리고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아니 어쩌면 저토록 화려했던 순간이 원래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언제부터인가 내가 느끼는 시간들이 화려함으로 채색되어지길 바랬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내게 머무는 모든 순간들이 저렇게 보기 좋았으면 했던 것 같다. 현실은... 그렇게 오지랍이 넓지 못한데도 나는 늘.. 그렇게 세상을 향해, 삶을 향해 넓은 이해와 포용만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려놓지 못하는 등짐을 지고 시지프스처럼 그렇게 내가 오르는 일상의 언덕.. 그 언덕위에 혹은 아래에 내가 모르는 나만의 꽃들도 저렇게 꽃을 피워내고 있을까?  알.수.없.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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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 치는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꿀꺽꿀꺽 골짜기' 에 살고 있던 늑대와 '산들산들산' 에 살고 있던 어린 염소가 만난 것은 우연이었을까?  염소고기를 가장 좋아하던 늑대 '가브' 와 엉덩이가 예쁜 염소 '메이'가 만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까?  폭풍우가 쏟아지고 천둥과 번개가 함께 울던 그 밤, 그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만난 늑대와 염소..  폭풍우를 피해 뛰어들었던 그 집에서 '메이'가 착각했었던 건 목발소리였었다.  발을 다쳤던 '가브'의 그 목발소리에 한시름 놓인 '메이'..  사실 이 애니는 구성이 조금 어설프다. 철저하게 아동용도 아니고 그렇다고 보여주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어쩌면 작은 그릇속에 너무 많은 음식을 담으려했던 욕심의 덫에 걸려들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둘 다 감기때문에 냄새를 맡지 못했다는 설정도 조금 어설프기는 했지만 해피앤딩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발판쯤으로 여기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들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그늘에서 잠시 벗어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 때는 서로 같은 종족이라고 생각했었기에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한다. 서로를 확인하기 위한 암호 '폭풍우 치는 밤에'를 나누어 가진 다음 그들은 헤어졌다. 자, 그 다음날 그들은 정말 만날 수 있었을까?  만났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친구가 되기로 했다. 왜냐? 서로가 서로의 매력에 끌렸다는 설정하에서 우정을 나누기로 약속을 한거다. 함께 점심을 먹기로 한 장소로 걸음을 옮기는데 앞서가는 '메이'의 엉덩이를 보며 꿀꺽! 침을 삼키던 '가브'.. 친구가 먹이로 보인다! 과연 저 둘의 우정 지키기는 성공할 수 있을까?  둘의 만남에 숲속 동물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끝내는 무리들에게 그 소문은 퍼져나간다. 당연히 일어날 순서는 이렇다. 늑대무리는 '가브' 를 통해서 염소고기 잔치를 벌이고 싶어하고, 염소무리는 '메이' 를 통해서 늑대가 다니지 않는 곳을 알아내고 싶어한다. 순수한 우정을 뒤로한 채 마지막 만남을 갖게 되는 우리의 '가브' 와 '메이' 는 과연 어떻게 될까?  차마 자신들의 속마음을 말할 수 없었지만 비가 내리고 냇물을 건너면서 그들은 끝까지 우정을 지켜내기로 한다. 각자의 무리들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쪽으로도 돌아갈 수 없었던 둘은 급하게 흐르는 물살속으로  빠져들고 떠내려가며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폭포 아래에서 다시 만난 '가브'와 '메이'는  전설의 숲으로 가기로 한다.

이 애니는 정말 이쁘고 귀엽다.  구성자체는 어눌하지만 아이들의 마음속에 쏙 들어가기에 안성맞춤이지 싶다. 깊은 속뜻이야 전해지지 않는다해도 외모나 조건, 보여지는 것들에 치우쳐 살아가는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충분히 전달될 수 있는 주제의식도 보인다. 생긴 모습은 다르지만 서로 마음이 통했다는 사실, 또한 무리중에서 왕따를 당했던 '가브'의 외로움을 약하고 힘은 없지만 '메이'의 따스함이 감싸줄 수 있었다는 사실, 힘겨운 과정을 서로 헤쳐나가며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하나씩 발견해가는 그 순간들이 아주 잘 그려져 있음이다. 가끔  아주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있는 이런 작은 애니에게조차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고 싶어하는 그런 영화평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 그냥 이렇게 순수하게 보여지는 것만 볼 수는 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적도 있었다.  물론 같은 작품이라해도 보는 이마다 느낌이 다를 것이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너무 복잡하게 꼬인 일상만을 바라보았기에 단순한 것조차도 복잡하게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함께 보았던 아들녀석과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이 참 좋았다. 그 순수함을 잃어버리지 않고 어른이 될 수 있다면 행복할까? 그건 알 수 없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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