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 노래 - 칼의 노래 100만부 기념 사은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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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왜 이렇게 느닷없이 김 훈이라는 사람의 작품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는지.. 무엇일까? 무엇이 그토록이나 강한 여운으로 내게 남겨지는 것일까?  세상이 알아주는 작가의 작품이라는 말은 사실 내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혹시나 하는, 그것도 아니라면 행여라도 하는 마음으로 <남한산성>이라는 작품을 집어들었을 게다. 아니 어쩌면 나도 그 흔한 베스트셀러 작품이라는 걸 읽어봤다는 내색을 하고 싶었다는 게 더 솔직한 말일런지도 모르겠다. 사실 <남한산성>을 대하면서 그 지긋지긋한 관리들의 시점을 또 만나겠거니 했었다. 그랬는데, 그랬던 내게 보여진 작품속의 세상은 정말 달라도 너무 달랐다. 간결하면서도 옹골진 작가의 문체가 너무나 좋았다. 그 문체들이 뱉어내는 한숨들이 내 살처럼 녹아들때에야 나는 가슴 서늘한 편견의 늪에 빠졌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 책 <현의 노래>를 고른 것은 역사속에서 아주 짧게만 기록되어져 있을 한사람의 악사를 어찌 그렸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그 악사와 악기를 보여주며 그의 삶속에서 녹여낼 또하나의 세상이 궁금했다. 그리고  가슴 깊이 울렸던 그의 강렬함을 다시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가야의 금.. 울림속에 담겨지는 많은 사연들이 소리를 통해 표현되어지고,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 우륵의 세상 역시 소리낼 수 없는 소리로 존재한다는 건 하나의 환상처럼 다가왔다. 한쪽으로 비켜선 채 하나의 환타지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말도 되겠다. 박물관의 유리상자속에서 잠든 하나의 악기를 바라보면서 작가의 머리와 가슴을 수도없이 떠다녔을 낱말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념이 있었을까? 우륵이 만들어내는 소리의 세상속에는 왕이라는 의미로써 존재하는 하나의 나라가 있었고 그 나라의 무너짐이 있었고 그 나라안에서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태어남이 있었고 그 나라와는 이심동체같았던 그 사람들의 죽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태어남과 무너짐의 사이에 흐름이 있었다. 세상의 흐름은 힘과 권력으로 결정지어졌다. 세상의 흐름을 짚어낼 수 있었던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은 저나름대로 그 흐름을 탈 줄 알아 처세라는 걸 할 줄 알았다.  무지몽매한 백성들은 그저 자연이 주는 양식을 입으로 먹었고 아는 것이 없으므로 세상의 흐름을 조금 안다는 사람들의 지시에 따라 그저 먹어라 하면 먹을 수 있는 또다른 양식을 몸으로 먹었다. 

소리를 찾으며 또다른 한편으로 쇠를 다루어 세상의 흐름을 읽게해 준 작가의 마음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할 때 우륵은 이미 하얗게 세어버린 수염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같은 쇠였지만 담금질을 하기에 따라 소리가 달랐으며 거기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졌고 그것을 쓰는 사람들의 손길에 의해 또한 달라졌다. 농부가 쓰면 농장기요 군사가 쓰면 병장기가 되는 쇠에게 따로이 주인이 없다던 대장장이 야로의 말과 소리 또한 비어있는 곳에서부터 생겨나 왔던 곳으로 다시 소멸되어져 간다는 우륵의 말은 삶의 화두처럼 내게 들려왔다. 아정(雅正)이란 무엇이냐? 바르고 가지런해서 흐트러짐이 없는 것입니다. 번잡이란 무엇이냐? 거칠고 급해서 종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352-353쪽) 소리는 제가끔의 길이 있다. 늘 새로움으로 덧없는 것이고 덧없음으로 늘 새롭다. 그러니 아정과 번잡은 너희들의 것이다..라던 우륵이 무너져가던 고을의 소리를 열두줄에 담은 채 가야에 속해있던 자신의 육신을 먼저 신라에게 의탁했고 가야의 금 또한 신라에게 넘겨주었다. 그렇게 피를 토하며 생을 마감했을 때 그의 가슴속에 살아 있던 그 많은 소리와 울림과 사연도 함께 죽어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나는 제자 니문의 지게위에서 살았을 때나 죽었을 때나 매한가지로 흔들리던 우륵의 다리를 만져주고 싶었다. 흔들리지 않게.

왕이 죽을 때 함께 무덤속으로 들어가야 했던 지밀시녀 아라는 왕의 무덤속으로 들어가기엔 너무 생생한 삶을 안고 있었다. 재첩국을 흘려넣던 시커먼 왕의 입속처럼 생긴 왕의 죽음속으로 멀쩡하게 들어가긴 싫었을 게다. 아니 어쩌면 두려웠을 게다. 산채로 그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 그러나 세상의 흐름은 도망친 아라를 안아주지 않았다. 미묘한 삶의 이치만을 아주 짧게 전해주었을 뿐이다. 소리처럼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 세상을 사는 이치라는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세월이 흐른 뒤 바뀐 왕의 뒤를 따라 모시던 왕의 죽음속으로 들어가야 했으니 그 흐름을 누가 막을까?  열두줄의 현이 만들어지던 그 사연들은 제각각의 울림이 달랐지만 그것은 어쩌면 하나의 울림과도 같았다. 사람사는 이치, 세상의 이치처럼..

하나의 이야기로 만나지는 역사는 흥미롭다. 그것이 없는 자들의 입장에서 혹은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엮어지는 이야기라면 더욱 더 흥미롭다. 과하지 않고 부족하지 않아서일까? 그들의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은 까닭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초록은 동색이라고 어쩌면 나 역시도 그들처럼 무지몽매한 탓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고 만다.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한다면 김훈의 소설은 좀 난해함을 품고 있다. 짧게 끊어지는 문장속에 너무나도 깊고 단호한 것들을 숨겨두고 있는 탓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간결함이 좋고 그 간결함속에 숨겨진 단호함이 좋았다. 길게 쉬는 한숨이 아니라 들숨 날숨을 번갈아 쉬게 해주는 문장의 흐름도 나는 좋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가 또다른 그의 작품에 욕심을 부리게 되었다는 것이.. <칼의 노래>를 마저 읽어보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그가 내민 화두를 다시한번 기억의 서랍장 깊숙이에 밀어넣는다. /아이비생각


니문은 엄지로 한 줄을 튕겨 올렸다. 소리가 솟구치더니 긴 떨림을 이끌고 잦아들었다.
들리지 않는 소리는 어디로 간 것입니까?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그래서 소리는 사는 일과 같다. 목숨이란 곧 흔들리는 것 아니겠느냐.
흔들리는 동안만이 사는 것이다. 금수나 초목이 다 그와 같다.
하오면 어째서 새 울음소리는 곱게 들리고 말 울음소리는 추하게 들리는 것입니까?
사람이 그 덧없는 떨림에 마음을 의탁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떨림과 소리의 떨림이 서로 스며서 함께 떨리기 때문이다. 소리는 곱거나 추하지 않다.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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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김훈 世設, 첫 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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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람들처럼 편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이쪽 아니면 저쪽이라는 극단적인 대처상황을 우리는 보고 또 보고 질리도록 보면서 산다. 작금의 우리 현실을 둘러보아도 사방이 대치하는 중이다. 그리곤 묻지, 너는 어느쪽이냐고.. 우리편이 아니라면 너는 죽어야 마땅하다는 듯이 할퀴고 상처내는 게 마치도 진실처럼 혹은 진리처럼 굳어져가는 세상속에서 우리의 발걸음은 항상 질퍽거린다. 진흙탕속에서 발을 빼낸다해도 어디선가 누군가 튕기고 지나가는 흙탕물을 뒤집어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저마다의 이익 때문이리라. 없는 자들은 없어서 있는 자들은 그나마 가진것을 놓기 싫어서.. 함께 할 수 없다면 따로 또 같이 라는 말도 있지만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 책의 제목에 선뜻 시선이 머물렀던 것은.. <남한산성>이라는 하나의 작품속에서 보여지던 작가의 날카로움에 한번 더 베이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궁금했었다는 말도 되겠다.

누군가의 사적인 생각을 읽는다는 게 그리 즐겁지만은 않다. 그 사람을 온전히 히해할 수 없기에 더더욱 그러하리라.  그가 써놓은 낱말들이 하나의 줄로, 하나의 문장으로, 한 권의 책으로 불어난다고 해도 그것은 아주 찰나의 생각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너는 어느쪽이냐는 물음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단 한번도 그렇게 물어본 적이 없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랬기에 우리는 끝없이 선택을 하고 끝없이 편을 가른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그렇게 니편 내편 가르며 서로가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했을까? 사회적 편견이나 종교적 편견이 가시처럼 우리의 얇은 피부를 뚫고 들어올 때 그 아픔으로 인하여 눈물 흘려보지 않은 사람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모두가 자기 자신의 피부를 찌르며 아프다, 아프다 하는 꼴이다. 왜 그래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것 또한 愚問일테다.

이 책속에서 만나지는 낱말들은 생각대로 날카롭다. 세상에 대한 분노를 말하기도 하고  그 세상과 타협하기를 슬쩍 내비치기도 하고 이런 세상이 나는 참 좋다고 우리의 시선속에서 비켜간 또다른 형태의 삶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극히 평범하고 아주 작은 것들속에서 그는 커다란 의미를 찾아내고 있었다. 너무 주관적인 개념으로 다가올까봐 솔직히 마음 단단히 먹었었다. 그렇게 비수같은 주관적 개념은 내게 또하나의 실망이 될 수도 있는 까닭에.. 하지만 그런 느낌이 강하지는 않았다. 세상속에는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고 무겁지 않게 받아 들일 수 있어 좋았다. 특별하지 않은 조금은 평범한 그래서 누구나 한번쯤 해봄직한 그의 생각들이 의외였다고나 할까? 여자라는 것에 관하여, 나이듦에 관하여,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에 관하여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그의 낱말들이 책을 읽는 내게는 결코 아프지않은 날카로움이었다. 지금은 작가보다는 자전거 레이서로 불리워지기를 원한다는 작가의 모습을 다시한번 바라보게 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나만이 아니다. 그리고 그 세상은 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굳이 니편 내편 가려가며 살 필요도 없지 않을까?  굳이 너는 어느쪽이냐고 물을 필요도 없지 않을까?  다름을 인정하고 세상을 함께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다지 문제될 것도 없다. 작가가 즐기는 자전거바퀴처럼 그렇게 서로 같이 가면 되는 게 세상인 것이다. 한편의 글로 참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던 한 사람의 생각이 궁금했던 적이 있었을까? 그리 많지는 않았던 듯 하다. 그리하여 읽게 된 그의 글속에서 나 역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그 역시도 나는 어느쪽!이라고 결정지어놓고 살아갈지도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그 결정으로 인하여 남이 아프면 안되는거라고 속살거리고 있는 것 같다. (어찌보면 표현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하여 고개를 끄덕이게도 된다. 참 복잡한 세상을 참 어렵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그안에서 낱말로 분해되어져 있다. 나 또한 그 안에 머무르고 있으리라..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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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돌의 도시 - 생각이 금지된 구역
마누엘 F. 라모스 지음, 변선희 옮김 / 살림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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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시리즈하면 뭐니뭐니해도 주제 사라마구를 떠올리게 한다. <눈 먼 자들의 도시>와 <눈 뜬 자들의 도시>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던 그 짜릿함을 떠올렸을 게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느낌속에 다시한번 젖어들고 싶었을 게다. 하지만 아주 대단한(?) 착각이었음을 몇 초안에 알게 되었을 때의 허망함이라니... 이래서 선입견은 참 무섭다. '생각이 금지된 구역'이라는 부제처럼 어쩌면 나도 생각없이 이 책을 읽었어야 했던 것일까? 도무지 앞뒤 가리지 않고 밀려드는 어색함과 난감함때문에 당혹스러웠다. 뭐지? 책장을 넘기면서 이제는, 이제는하고 바랬던 것들이 어이없음으로 끝나버리고 말았을 때 나는 다시 되뇌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나의 독설과 께름직한 생각은 단지 문화적인 차이때문이었을거라고.

스페인을 발칵 뒤집은.. 멍 때리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발칙한 경고.. 왜 이런 소개글이 필요했을까?  책을 다 읽고 나니 뭐 그럴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때는 49세기다. 전 우주가 하나로 통합되었고 모든 것, 하다못해 인간의 감정까지도 머리쓸 일이 없게 된 세상이라는 말이다. 사랑까지도.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게 21세기라고 하니 멀고도 먼 미래의 이야기쯤이라고 치부해버리고 말까? 하니 그러기엔 너무 진부하다. 이미 우리가 겪어내고 있는 현실이 그 멀고도 먼 미래, 49세기를 다루고 있는 책속에 버젓이 머물고 있는 까닭이다. 뭔가 색다른 느낌조차도 전해받지 못하고 엉뚱하지만 기발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것조차도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새롭게 끼어드는 감정이라는 물결속에서 허우적거린다. 마치 떨쳐내야할 그 어떤것과 마주한 것처럼.. 이쯤에서 나는 아하! 그런거였나? 싶은 생각하나 하게 된다. 디지털, 멀티시스템, 스피드에 뒤엉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당신들이 잃어버린 것, 잊고 살아가는 것들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는 경고성 플랭카드를 하나쯤 걸어둔 것 같다고...

억지로 꿰어 맞춘듯이 정신 사납게 헷갈리는 무슨 무슨 부처의 이름이나 장관 이름따위는 싹 잊어버리자. 단 우리의 주인공이 공무원이라는 것과 어떤 알 수 없는 사건속에 휘말려 희생양으로 처리된다는 것만은 잊어버리지 말자. 우리의 주인공 카르멜로는 내리막길만 보면 생겨나는 질주본능을 어쩌지 못하는 일종의 정신분열증환자다 (질주본능에 이끌려 다니는 현재의 우리에 비유된 모습이라고 생각되어진다).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무언가에 부딪히기 전에는 어지간해서 멈추지 않는 그가, 어느날 우연히 대통령의 소매치기를 붙잡아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지만 무슨 사연인지 쫓기는 신세가 되고 새로운 의술의 실험양까지 되고 말았다. 모든 것이 꿈이었다고 끝났으면 좋았을 그런 스토리라인이 엄청 부담스러웠던 순간이다. 졸지에 스타맨과 수퍼맨이 되어버리는 남자의 이야기. 한마디로 황당했다.

필립 K.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라는 작품이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왜 그 작품이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먼 미래의 세상을 다루고 있었던 까닭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차라리 그 작품속에서는 어느정도의 공감성도 확보되어 어색하지는 않았었던 기억이다. 현재의 정치상황을 빗댄 듯 보여지는 관리들의 잇속 챙기기 라거나 부패성 따위를 논하자고 했다면 굳이 그 멀고먼 미래 49세기를 거론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토록 먼 미래를 보여주었던 것이 어쩌면 반어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비뚤어진 현재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보다는 오히려 먼 미래에서조차 전혀 변하지 않을 거대조직의 그림자속에서 그저 물고기처럼 뻐끔거리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미래인양 그려낸 것이 왠지 서글프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야기의 끝은 어떨까? 블랙유머라고는 했지만 정말이지 나는 잘 모르겠다.  '에필로그'가 있었고 '에필로그 후편'이 있었고 그 마지막에 'Fin (에필로그 후편)'이 또하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둥근 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느냐고 묻고 있었다. 그리고 Fin (이제는 정말 끝이다)... 그래 나도 끝이다. 이 책의 끝..  옮긴이의 말이나 역자후기 하나쯤 곁들여 있었다면 좀 괜찮았으려나?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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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사사진의 모든 것 포토 라이브러리 8
브라이언 피터슨 지음, 공민희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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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사실 나는 사진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한다. 제대로 된 사진을 찍을 줄도 모르고 그렇다고 찍어놓은 작품사진을 제대로 감상할 줄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이라는 것에 대한 매력을 느낀다. 아주 대단하리만치 커다란 유혹을 느끼기도 한다. 사진을 잘 찍는 사람들을 보면 와, 소리가 절로 나온다. 피사체에 접근하는 그들의 무아지경에 놀라기도 하고, 한장의 사진속에 어떤 의미를 담아낼 수 있다는 것에 다시한번 더 놀란다. 가끔 언론매체를 통해 한장의 사진이 전해주는 감동에 대하여 보고 들을 때가 있다. 그 한장의 사진으로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렸던 그 무엇에 대하여 말할 때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 대하여 경외심까지 품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 무생물로써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는 까닭이다.

취미생활을 하며 만날 수 있는 아주 작은 꽃들을 지나쳐가기보다는 가까이 다가가 조금씩 마음을 열고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변변한 사진기 하나 없었고 사진에 대한 어떤 최소한의 지식조차 없으면서 무작정 꽃들을 향해, 혹은 자연속의 작은 움직임을 향해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디카를 알기 전에는 몰랐던 색다름을 디카를 만나면서부터 알게 되었듯이 마음을 열고 바라보았던 작은 생명체들이 내게 전해주었던 작은 떨림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지금도 내 가방속에는 어딜가나 나와 함께 동행하는 작은 디카가 들어있다. 그리곤 아무데서나 마음가고 시선 머무는 존재라면 무조건 찰칵,이다. 얼마전 연꽃구경을 하기위해 관곡지를 찾았을 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손에 들려 있던 카메라들.. 그 카메라들은 무식(?)한 내가 보아도 참 멋져보였다. 에고고, 연꽃이 만개했을 때는 절대로 가방속에서 내 후진 디카를 꺼내지 말아야지 할 정도로..

이 책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는 잘 모르는 사진찍기의 방법을 좀 알고 싶어서였다는 게 솔직한 말이다. 그런데 이런! 나의 바램과는 조금 어긋난 내용으로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이건 나같은 사진의 문외한이 보기엔 수준있는 강의가 아닌가 싶어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자꾸만 망설여졌다. 광각렌즈,매크로렌즈,어안렌즈,클로즈업렌즈 등 가끔씩 말로만 접했던 렌즈의 많은 이름들이 나를 주눅들게 만들기도 했지만 제대로 된 사진기를 가진 사람들 혹은 사진을 찍을 줄 알거나 배우는 사람들이라면 이게 웬 횡재냐,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을 것 같다. 카메라의 장비들을 어떻게 사용하면 좀 더 나은 사진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주제를 설정함에 있어서 그리고 그 주제를 어떻게 표현하면 좀 더 멋지게 담을 수 있을지, 또한 카메라의 기능들을 어떻게 이용하면 좀 더 이로운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었기에 사진을 좀 아는 사람이었으면 참 좋았겠다라는 아쉬움을 많이 전해받았다.

나도 그랬겠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접사라는 말의 유혹을 강하게 받아 들였을게다. 가까이  좀 더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피사체의 또다른 느낌을 한번쯤은 나도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했을 거란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접사와 클로즈업 사진은 단연코 다르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게 그거 아닌가? 했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책속에서 비교하며 보여주는 선명한 이미지를 보면서 그말에 대하여 아주 조금씩 고개를 끄덕거려보기도 했다. 텅스텐 화이트밸런스라거나 VR 렌즈와 IS 렌즈라는 말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나는 모르지만 야생: 방해하지 마시오라는 부분을 읽을 때는 정말 아차!싶기도 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과 필요에 따라서 조금씩 움직임을 주는 것에 대한 느낌이 전혀 다르다는 것은 정말 간단해보이면서도 쉽지않은 일이 아닐까 싶기도 했고...

지금 세상이야 찍은 사진에 덧칠하는 프로그램도 많이 있으니 좀 더 멋지게 보일 수 있는 방법은 많을 것 같다. 쉽게 말해 포토샵 하나만 제대로 배워도 포장하는 기술은 제대로 배울 수 있을 것처럼 보여지기도 하고.. 이렇게 작은 블로그의 사진올리기 기능만 보더라고 쉽게 보정할 수 있는 기능들은 참 많다. 대부분의 내 사진들도 맘에 안들면 이 과정을 거쳐간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쉬운 점은 많다. 보정하지 않고도 멋지게 담아낼 수 있다면, 하나의 그림이 아니라 느낌을, 마음을,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는 걸보면 무언가를 제대로 해낸다는 것이 쉬운일만은 아니겠구나 자책하게 되는 순간도 있다.

77장을 활영한 노력의 결과로 76번째 촬영한 사진이 99.9퍼센트 완벽하게 나왔다는 저자의 말은 참으로 의미있게 들려왔다. 사진작가로 그리고 사진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써도 백프로의 만족을 얻어낼 수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틀에 박힌 시선으로 사물을, 자연을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는 공감한다. 자신만의 표현법이 오직 사진에만 해당되는 건 아닌 때문이기도 하다. 욕심을 부려서 만나게 된 책이었지만, 비록 지금의 내게는 많은 것을 줄 수는 없는 책일수도 있겠지만 나름대로는 사진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기도 했다. 사진을 배워보고 싶다는 욕심이 정말 욕심일까? 작고 미세한 차이점을 말해주고 있는 이 책의 이미지들을 보면서 정말 부질없는 욕심일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이든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을테니까 하나둘씩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자체만으로도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기에 나는 나대로 사진이라는 것과 조금씩 친해보려고 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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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세계의 천사와 악마
이경윤 지음 / 삼양미디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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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콘스탄틴>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천사와 악마의 싸움 중간에서 그 둘을 바라보는 인간의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문제는 천사와 악마 모두가 인간을 구원하겠다고 나선다는 것이다. 이미 악이 만연해진 인간세상에서 구원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천사뿐이라는 듯 교만을 보여주는 천사 가브리엘과 어쩌면 그런 허상과도 같은 천사의 손길을 거부할수도 있을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악마 루시퍼의 대결은 볼 만했다. 마지막 대결에서 이긴 천사 가브리엘이 어떻게 된 일인지 날개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런 천사에게 다가가 주먹을 한방 날린 인간이 이렇게 말했었다. 아픈가요? 바로 그 아픔이 인간의 고통입니다. 바로 지금 인간이 겪고 있는 현실이지요. 라고.. 어쩌면 천사든 악마든 우리 인간의 필요성에 만들어졌다는 것에 나는 공감한다. 다수를 다스리기 위한 소수의 선택이었다는 말에도 백프로 공감한다. 어찌보면 지금 이시간에도 그런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것들이 많을테니까..

이 책의 천사와 악마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은 아마도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너무 재미있게 보았던 까닭이리라. 물론 학창시절에 유행처럼 번졌던 그리스 로마신화를 만난 적이 있었지만 이윤기의 작품만큼 흥미진진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었다는 생각이 든다. 감미로운 스토리라인들이 얽혀 마치도 실제인양 그렇게 느껴지기도 했었으니까.. 신화라고 하면 얼핏 황당한 이야기처럼 들려질 수도 있겠지만 그 신화를 이해함으로써 내가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많았다. 오딘이나 토르, 발데르등이 나오는 <북유럽신화>와, 태양신 라, 토드,오시리스등이 주인공인 <이집트신화>, 그리고 바리데기나 조왕신, 삼신할미, 옥황상제, 염라대왕등이 나왔던 <우리의 신화>를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준 책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책 <천사와 악마> 속에도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신화의 그림자가 꽤나 짙게 드리워져 있다. 서양세계의 천사와 악마에 대한 탄생배경이나 천사의 급수, 악마의 급수, 그들은 어떤 모습이었고 그들이 담당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를 말함에 있어 철저히 성서위주로 보여주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현실적인 느낌은 찾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곳저곳에서 갈고 닦아 만들어진 그들만의 신이었고 그들만의 천사였으며 그들만의 악마였음을 인정하고 있다는것을 다분히 보여주고 있음이다. 그렇다면 동양세계의 천사와 악마는 어떨까? 서양세계의 선과 악이 철저하게 기독교적인 배경이었다면 동양세계의 선과 악은 말할 것도 없이 불교적이다. 약간의 차이를 이야기해보자면 서양의 기독교가 자신의 것외에는 모두 배척하는 분위기였다면 동양의 불교는 자신외의 것까지도 아우를 줄 알았다는 것일까? 자신의 입장에서만 천사와 악마를 규정지었다는 건 사실 맘에 들지 않는다. 내 편이면 천사고 이교도는 무조건 악마가 될 수 밖에 없었으니 하는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천사와 악마의 등급을 나누었으며 분류를 해 놓았다는 거다. 천사였다가 악마의 수장이 되는 루시퍼가 절대자의 우편에 섰던 최고등급이었다는 걸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게다. 그런데 같은 급이라고 생각했었던 가브리엘이 루시퍼보다 한참 아래라는 설정은 재미있다. 미카엘이나 우리엘, 라파엘, 가브리엘과 같은 4대천사의 이름이 세상속에 많이 떠돌기는 한다. 하지만 그에 맞서 루시퍼나 벨제브,리비야단,아프락사스등의 악마도 우리곁에서 머물기는 마찬가지다. 오죽했으면 외경이라는 <에녹서>에서 주장하기를 전체 천사의 90%가 타락하여 악마가 되었다고 주장했을까?  정말 오래전에 본 영화 <그렘린>의 모습이 떠오른다. <반지의 제왕>을 통해 우리의 기억속에 멋지게 각인되어진 골룸과 스미골이 한몸이었듯이 그렘린 역시 같은 몸이지만 선과 악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었는데 이 책속에서 그 하얗고  귀여웠던 그렘린을 다시보니 반갑기까지 하다. 비록 악마의 이름속에서 재회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천사와 악마라는 이름을 만들어 기어코 구분지어야만 했던 인간의 모습을 악마의 가장 최고등급에 올려놓는다면 딱 어울릴 듯 싶기도 하다.

내가 신화이야기를 통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듯이 이 책속에서 나열되어지는 천사나 악마의 계보를 통해서도 배울 수 있는 것은 많아 보인다. 너무 많은 이름을 열거하고자하는 욕심때문에 뒤로 갈수록 쳐지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그런데로 속도를 놓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같이 보여주는 일러스트때문이었을까?  천사나 악마를 표현하는 그림이나 이름을 볼 때 신화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들을 살짝살짝 비틀어놓은 것처럼 보여지기도 하지만 나름 흥미로웠다는 말이다. 공작이나 뱀 혹은 용의 모습을 들이대는 것에서 신화와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름과 역할까지도 비슷하다. 한 때 아이들이 즐겨보았던 만화 시리즈 <포켓몬>이나 <디지몬>은 아마도 천사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 같다.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수많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창작 혹은 창의력에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책을 읽던 중에 어깨 너머로 바라보던 아들녀석이 흥미로운지 고개를 들이민다. 그러더니  "엄마, 이거 유희왕이예요? 그 카드그림하고 똑같아요" 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카드놀이속의 그림이 이 책속의 캐릭터와 너무도 닮았다. 이처럼 우리주변을 살펴보면 신화나 천사와 악마를 다룬 소재들은 참 많은 듯 하다. 그래서 이런 류의 책도 만들어지는 모양이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알라딘의 요술램프속 주인공인 지니가 악마였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요즘의 아이들, 날개달린 아기 모습의 천사를 믿기는 할까? 머리에 뿔달고 나오는 지독한 인상파를 악마라고 생각을 하기는 할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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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비 2009-07-11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은 간단하다. 인간이 어느쪽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달라질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