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파는 남자 - KI신서 916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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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플라스틱 통이 있습니다. 거기에 그야말로 아무런 형체도 없는 시간 5분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판다고 하네요. 당신이라면 그 시간을 사시겠습니까? ... 어찌보면 참 황당하다.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그 통에 들어있는 시간을 산다면 그 5분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온전한 나만의 5분이 될 수 있다는 건 생각해 볼 문제이다. 어느날 문득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며 자산을 계산을 보던 남자는 집을 한 채 사고 그럭저럭 꾸려나갈 수 있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35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리곤 경악한다. 그렇게 계산되어진 시간속에는 오로지 타인을 위한, 어떠한 체제를 위한 시간만이 존재할 뿐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은 하나도 없다는 것에 대하여.. 붉은머리개미를 관찰하면서 살고 싶다는 아주 소박한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3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야만 한다는 것에 대하여.. 그러나 그것조차도 아주 불안하다는 것에 대하여.. 자, 이제 어찌하면 좋을까?

남자는 그 소박한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떠한 체제에 희생되어지는 자신의 시간을 계산하고 그 시간에 맞는 돈의 가치를 따지기에 이른다. 그래서 어찌되었느냐고? 아내의 성화에 이끌려 정신과치료를 받게 된다. 아주 당연한 수순이다. 단지 붉은머리개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때려치운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면 아마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치료를 하는 사람과 치료를 받는 사람 양쪽 모두 서로를 믿지 않았다. 진정으로 상대방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저 형식적인 면담이었을 뿐이지만 치료를 받는 남자의 입장에서는 우연찮게 큰 수확을 건지게 되고 결국 자신이 원했던대로 사직서를 던진다. 그러나 성공할 수 있는 시간은 그에게 일주일만이 주어졌을 뿐이다. 실패하면 가족 모두를 잃게되는 올인!

시간은 곧 돈이다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그 돈이 되는 시간을 팔기 위하여 남자의 부단한 노력은 시작되었다. 자, 남자는 시간을 팔 수 있을까? 그것도 아주 조그만 플라스틱 통에 들어있는 5분을?  하지만 이 남자, 일냈다. 특허를 따낸 것이다. 자명종시계를 사고 그 통에 5분씩 넣기 시작한다. 팔렸을까?  마케팅에 성공하지 못한 남자는 우울한 기분으로 절친한 친구를 찾아가고, 그 친구의 가게에 5분이 들어있는 플라스틱 통을 전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모든 희망은 꺾여버린 뒤다. 그러나 그 다음날 '세상에 이런일이!' 에나 나올법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친구가 지역방송에 광고를 때려버린 것이다. 그 덕에 대박났다. 5분의 효용가치를 증명해보인 것이다. 그 5분이 들어있던 플라스틱 통이 바닥나버렸다. 왜 그랬을까? 무슨 이유로?

세상은 바쁘게 돌아간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바쁘게 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보다는 남을 위한 시간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온전하게 1분의 시간조차도 쓰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그 5분짜리 플라스틱 통 하나가 구세주였을 것이다. 내가 산 시간이니 어느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대박날 밖에.. 공장이 세워지고 5분의 시간은 날개돋힌 듯 팔려나갔다. 생각해보라, 나 5분 용기 하나만 빌려줘! 너 나한테 시간 맡겨놨냐? 이 기발한 상황이 전개되어가는 것을... 우리의 주인공, 여기서 멈출수는 없었다. 이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5분이 2시간으로, 2시간이 일주일로 단위는 점점 커간다. 문제는 없었을까? 당연히 문제가 생겨났다.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니 사람들은 일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만을 위해 그 시간을 찾아 쓸 뿐이었다.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모든 것에는 원리원칙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제 사람들은 그동안 잊고 지냈던 자신만의 시간을 사기 위해 혈안이 되고, 그런만큼 나라의 경제는 죽어가기 시작했다. 일하지 않으니 어찌 세상의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돌아가겠는가 말이다. 큰일이다. 이미 2시간짜리 플라스틱 통이 시중에 나돌았을 때 재계의 인사들은 위험성을 경고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정부가 나서야만 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일하지 않는 사람들때문에 모든 것이 정지되어버리기 전에..  어떤 대책이 세워지고 그 대책은 우리의 주인공인 시간을 파는 남자의 목덜미를 휘어 잡았다.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라. 그리고 그 5분의 시간이 도대체 얼마에 팔려나갔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아주 기상천외한 이 사건의 주인공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굳이 찾아내고자 한다면 시간개념이 아닐까 싶다. 너무 많은 시간 혹은 너무나도 부족한 시간, 그런 시간들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하여 시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것들에 대한 톱니바퀴의 울림소리에 한번쯤 귀를 기울여보는 시간도 가져볼 수 있다면 더욱 더 좋은 일이 될 수도 있겠다. 나에게 오는 1분 1초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느낌을 가질 수 있다면 더더욱이나 좋은 일이겠다. 시간과 경제의 맞물림... 시간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관념이 너무도 무겁게 다가온다. 이런 황당하고도 짜릿한 상황을 전개해나가는 스토리가 왠지 허구적이지 않게 다가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나는 내 시간을 온전히 쓰고 있는가? 묻고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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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는 비둘기 똥구멍을 그리라굽쇼? - 디자인, 디자이닝, 디자이너의 보이지 않는 세계
홍동원 지음 / 동녘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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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재밌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거부감없이 다가온다.  디자인에 대해서 뭔가 알 것도 같은 착각이 드는 것은 그래서일까? 하지만 이 책속에 디자인이 이런 것이다,라거나 이렇게 하는 것이다 따위의 정의는 없다. 단지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볼 뿐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지 잘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참 안타까운 현실을 살아내야하는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경고 또한 잊지 않는다. 요즘처럼 디자인을 외쳐대는 세상도 없었을거란 생각이 든다. 디자인 혁명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듯이..  디자인을 고려했다는 수많은 작품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나는 왜 속은 안보이는건지 모르겠다. 거죽만 있고 속은 텅비어버린 듯한 그런 느낌들...

비둘기 똥구멍을 본 적이 있는가? 아니 비둘기뿐만이 아니라 날아가는 새의 똥구멍은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는 게 정답일게다. 제목을 보면서 왠지 비뚤어진 심사를 엿보게 된다. 너같으면 그 날아가는 비둘기 똥구멍을 그릴 수 있겠냐? 하는 그 묘한 표정이 떠오른다. 제대로 알지 못한채, 혹은 상대방의 여건은 생각지도 않은 채 자신들의 뜻만 관철시키면 그만이라는 듯이 밀어부치는 우리들의 구태의연함을 비꼬는 말이라는 것을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리곤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며 공감하게 된다. 아주 사사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아주 사적인 시간에 대하여 말하면서도 하고 싶었던 말은 꼭 하고 넘어가는 저자의 그 능청스러움이 부럽기까지 하다. 아마도 일에 대한 자신감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테지만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크게 공감할 수 있었던 부분은 두가지였다. 그 하나가 우리문화를 대하는 어리석음을 꼬집어주었던 대목이었다. 우리의 문화는 근대화를 거치며 두 번 죽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일제하에서, 그리고 두 번째는 새마을 운동으로 인하여.. 그런데 나는 그 새마을 운동때문이라는 말에 의문점을 찍었다. 왜? 간단하다. 먹고 살기 위해 문화를 내다 버린 것이다,라는 저자의 말을 곰곰 생각해보니 과연 그렇다. 우리것은 좋은 것이다,라고 외쳐대면서도 정작 우리것이라는 이유로 홀대를 당해야 했던, 아니 지금도 홀대를 당하고 있는 우리문화의 현장.. 얼마전 종로 피맛골을 개발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나왔던 아주 작은 외침을 기억한다. 그것뿐이랴?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혹자는 디자인 도시를 꿈꾼다는 이유로 많은 것들이 사라져가고 있으니 정말 통탄할 일이다. 세계 어느곳을 가더라도 제 나라의 문화재 머리 위로 고가도로가 생겨 자동차가 씽씽 달려가는 곳은 우리뿐이라던가? 세계 어느곳을 가더라도 제 나라의 문화재 아래로 지하철이 쉭쉭 소리를 내며 달려가는 곳이 대한민국말고 또 있다고 했던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보물1호인 동대문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보수공사를 한다한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얼마전 남한산성 일주를 하며 동문앞을 지날 때 차도로 인하여 끊어져버린 성곽을 바라보니 가슴이 아팠었다. 우리의 편리를 위하여 스스럼없이 맥이 끊어져버리는 우리 문화의 숨결은 어딜가나 가녀리기만 하다.

그리고 두번째는 저자가 말하는 한글의 진화론이다. 왜 파워포인트에서 멋있게 보이는 글자는 만들지 않느냐던 아이의 말에 우리나라는 아직 돈이 있는 곳에 뜻이 없고, 뜻이 있는 곳에는 돈이 없는 나라란다,고 말하던 저자의 안타까움에 왠지 가슴 한쪽이 서늘해져왔다. 너희들이 크면 가능할 것이라고 말하던 저자의 목소리가 안타까운 절규처럼 들려온다. 세종대왕이 만드신 스물여덟자의 한글이 어떻게 진화를 하였는지 만천백칠십자가 되었다는 것, 그나마도 타자기에 들어가기 위해 다이어트를 해야했던 그 스물여덟자의 한글이 열일곱 개의 자음 중에 열네 개만 살아남았고, 열한 개의 모음 중에서 한 개가 사라져 온전히 남아있지 못하다는 것.. 놀라웠다. 한글로 쓰고 말하고 듣는 생활을 하면서 단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책임을 통감한다던 저자의 말을 쉽게 넘길일은 아니지 싶었다. 우리의 것이라고 명패를 달고 있으면서 환영받고 대접받는 것들이 얼마나 될까? 정말 씁쓸한 일이다.

이 책속에도 나오는 말이지만 어릴 때 그야말로 환장할만큼 좋아했던 만화영화들이 모두 일본것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허탈했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또하나의 사실은 세계 애니메이션의 50%가 우리나라에서 그려진다는 거였다. 그렇게 잘 그리는데 왜 우리는 우리만의 만화가 없는 것일까? 이쯤에서는 진정한 우리의 캐릭터가 없다는 저자의 말이 장난스럽게 들려오지 않는다. 그렇구나, 그런거였구나 싶다. 어쩌다 커다란 행사의 상징물처럼 생겨나는 캐릭터들은 그 행사가 끝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사라져버리던 우리의 캐릭터들.. 슬프게도 냄비근성이라는 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디자인을 매개체로 하여 저자가 들려주던 이야기들은 속아픈 부분들이 참 많았다. 수다처럼 들려오는 저자의 목소리를 통해 막연하게나마 디자인이 만들어지기 위한 여정들에 대하여 들을 수 있었고, 단 하나의 상징을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준비되어야 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군데 군데 보여주고 있는 작은 일러스트라거나 도안들을 바라보면서 살며시 웃음지을 수도 있었던 시간..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역시 디자인은 배부른 자의 전문성쯤으로 여겨진다. 많은 것을 담을 수 있겠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처럼 느껴질 게 뻔한 일인듯 보여지는 까닭이다. Made in Germany의 뼈저린 아픔을 통한 성공이야기는 깊이 새겨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패전국이면서도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그들의 이야기..  그 성공처럼 거죽만 있고 내용은 없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실속있게 성공하는 Made in Korea 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아주 조금만 의식의 변화를 가져온다면 될 듯도 한데 어려울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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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심리학 - 심리학의 잣대로 분석한 도시인의 욕망과 갈등
하지현 지음 / 해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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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심리학, 도시인들의 심리학,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심리학.. 그것도 아니라면 도시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중성에 대하여... 내가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생각하게 된 말이다. 그것 말고도 또 있다. 도시에서 살아가기 위해 두개의 얼굴을 할 수 밖에 없는 현대인들에 대하여, 혹은 도시에서 버텨내기 위해 수시로 바꿔야만 하는 그들만의 가면에 대하여.. 살펴보니 다 같은 뜻인데 참 여러가지로 말했다. 왜일까? 왜 우리는 하나의 답을 위하여 여러갈래의 문제를 내야만 하는 것일까? 참 복잡하다. 원래가 그렇지는 않았을 게다.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을 게다. 살다보니 필요성에 의해 어느정도는 가식적인 얼굴을 해야만 하는 거라고 그렇게 정의내려졌을 게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가식적인 면을 앞세운다는 데 있다. 진실된 자신을 보여주기 보다는 만들어지고 포장되어진 자신을 보여주어야만 하는 세상을 만들어버린 우리들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것들을 전혀 탓하지 않는다. 그런 모습들이 정상이 되어버린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세상을 누가 만들었을까? 바로 나, 그리고 당신, 우리다...

가깝게 지내던 동생집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는 순간부터 동생은 말한다. 집이 지저분해요.. 하나도 안치웠는데.. 그럼 나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나 지금 호구조사 나온거 아니거든? 집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어질러졌다고 여겨지는 물건들이 하나둘씩 어디론가 사라진다. 동생의 종종걸음속에서.. 그럼 나는? 호구조사하러 나오지 않았던 나조차도 그 종종걸음을 쫓아 사라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한다. 무의식일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말하지.. 그냥 냅둬. 나중에 치워도 되잖아.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하나도 안치웠는데요, 하던 그 말처럼 그 친구는 아마도 평소에 그렇게 살것이다,라는 것이 내 지론이기 때문이다. 흉을 보자는 게 아니라 평소에 그렇게 살면서도 누군가가 오면 그것은 아주 특별한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다는 것, 그 심리의 밑바닥이 궁금한 까닭이다.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테지만 말이다. 그만큼 우리는 나를 만드는 틀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거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건 나의 이야기이고 너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이야기가 맞다고.. 그런데 왜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지, 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싶어하는 저자의 의도가 밉살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바로 코앞에서 돋보기를 들이대는 형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은 아닐것이다, 라고 비켜갈 수 없게 만드는 저자의 능청스러운 화술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가끔씩 지름신을 불러 들이는 나를 보아도 그래, 당신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 인정해주고 싶어진다. 정체성은 내가 아니라 타자에 의해 정의되고, 나와 타자와의 관계에서 내가 반응하는 방식에 의해 규정된다... 정체성은 '존재'와 '관계', 그리고 '행위'로 정의되며 자아의 경계선을 만들면서 점차 명확해진다.(-115쪽) 는 책속의 문구가 왠지 서글프게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노래방 문화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어울리지 않게 무거워지는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부르고 싶은 노래와 불러야 할 노래가 엄연히 다른 현실, 그것은 저자의 말처럼 사회적인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도 될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와 내가 부를 수 있는 노래는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좋아한다고 다 부를 수는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타인에 의하여 정해지는 나의 선택권이 어디 노래방 한 곳 뿐일까만 지독하게 개인적이고 자기취향적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타인의 기준에 맞춰야만 하는 우리의 모순, 또하나의 아이러니다.

뒤로 호박씨 깐다는 말이 있다. 앞과 뒤가 일치되지 못하는 상태를 이르기도 하는데 이 책을 읽게 되면 우리가 딱 그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저자는 그렇게밖에 살아갈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까발려놓고는 내가 이렇게 가려운데를 긁어주니까 좋지? 묻고 싶어하는 거 같다. 그런데 나는 그래서  이런 글을 썼느냐고 묻고 싶어진다. 왜냐하면 잠시 긁어준다고 그 가려움증이 아예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어쩔 수 없다. 결론은 항상 내 몫이라는 걸 인정한다. 선택 역시도 내 몫일수밖에 없다.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tv도 없고, 전화도 없는 곳에서 하나 더 보태 인터넷이 되지 않는 세상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낸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까닭이다. 어린왕자에게 여우가 말했었던 길들여짐에 대하여 다시 생각한다. 길들여진다는 건 편한 것일까? 왠지 그 길들여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인다. 왜일까?  이 책을 통하여 말하고 있는 저자의 목소리를 먹어도 먹어도 허기진 우리의 영혼을 위한 자기 위안쯤으로 여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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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방불명자 오리하라 이치의 ○○자 시리즈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기희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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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읽는 독자 모두가 궁금함과 오싹함, 상쾌함과 안도감을 모두 느끼시기를 바란다... 역자후기에 나온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땠을까? 곰곰 생각해보니 궁금함은 정말 대단했다. 책장을 넘겨가면서 범인을 찾아내고 싶어하던 나의 추리력이 열심히 활동을 했었으니까. 오싹함은? 그것도 그렇다. 사건의 전말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이렇게까지 될 수가 있는것인지 왠지 소름이 돋는 듯한 기분이었다고 할까? 하지만 상쾌함과 안도감까지는 느껴보지 못하고 책장을 덮었다는 게 솔직한 표현이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 <파일럿 피쉬>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본다. 아주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우리의 내면에 대하여 썼던 글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떨까? 이 책은 스릴러형식이지만 역시 인간이 가지고 있을 법한 내면을 살짝 비춰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사건을 파헤치기 위한 소설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복잡하다. 범인을 찾지 못한 채 미궁속으로 빠져드는 일가족 살해사건과 아무런 빌미조차 남겨두지 않은채 어느날 아침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일가족의 행방불명 사건, 이렇게 두가지 사건이 병행되면서 사건을 따라가는 시선 또한 두개다. 출발선은 둘인데 도착점은 하나인... 그렇다보니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거지? 되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행인지 일치되는 것이 하나 있긴 하다. 일가족 살해사건과 행방불명 사건을 쫓는 그 두개의 시선이 모두 작가라는 점이다. 양쪽 끝에서부터 사건을 몰아오듯이 잰걸음이다. 탐정처럼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두 작가의 걸음걸이에 보조를 맞추다보면 어느샌가 내가 쫓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되는 그런 형국이다.

스릴러소설이다보니 원칙에 충실하게도 배경이 좀 음침하다. 구로누마, 즉 검은 늪이라는 뜻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일전에 상영되었던 우리의 영화 '검은 집'이 떠오른다. (유명배우가 주인공을 맡아 떠들썩 했었지만 흥행면에서는 실패했던걸로 기억한다.)  스릴러물의 형식대로 반전이 끝내주는 영화였는데 이 소설 역시 멋진 반전을 준비하고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 두사건의 교차점까지 가는 과정이 뭐랄까, 왠지 무언가를 빼먹고 지나간 듯한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늪.. 그 늪이 잊은듯하면 하나씩 토해내는 사건의 실마리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과 오버랩되어지는 것을 보게된다. 흔한 이야기들이지만 결코 용납되어질 수 없는 일들이 사건을 풀어가는 열쇠로 작용되어진다는 것에 대해  왠지 또 씁쓸해지고 말았다.

사건의 종착역에 이르러서야 범인의 윤곽은 밝혀진다. 하지만 여기서 그냥 지나쳐버린다면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드는 것이 하나 있다. 어머니...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당신의 모든 것을 잃어도 감수해야 했던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하여. 두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하나의 사건이 또하나의 사건을 불러오게 되는 형국속에서 우리의 위대한 어머니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무게는 참으로 무겁다. 사건을 따라가면서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존재.. 그래서 조금은 당혹스러웠고 그래서 나는 또 가족이라는 말이 안고 있는 의미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가족이라는 의미가 이미 하나의 낱말처럼 굳어져버린 것은 아닐까? 엉킨 실타래속에 숨어버린 그들의 내면에는 서로에게 힘겨워하는 가족의 모습이 담겨 있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채 버릴 수 없게 되어버린 그 무엇들을 하나씩 안고 살아가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고 있는것이다. 마치도 나외에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이 세상속에는 오직 불행만 존재하고 있다는 듯이..

현재와 과거가 어울리는 플래쉬 백효과처럼 보여지는 느낌, 그리고 한편의 연극을 관람하고 있는 듯한 느낌,  책을 읽으면서 다가왔던 느낌은 두가지였다. 과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어느샌가 현재로 보여진다. 결말 부분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또하나의 존재는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던 사건의 구도는 참 좋았다. 그랬기에 책을 읽는 속도감도 꽤나 좋았을 게다. 그런데 결말 부분이 왠지 꽈배기처럼 배배꼬인 듯 보여 영 개운치가 않다. 잡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었던 이야기의 핵심을 놓쳐버리고 말았다는 허탈감이라니... 그래도 더위와 싸우기엔 괜찮은 설정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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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입은 봉황 선덕여왕
김용희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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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가게문 열고 여자가 첫손님이면 재수없다, 여자 목소리가 어찌 담장 밖을 넘을 수 있는가, 여자가 배워서 뭘하려고? 여자가 감히! 등등 우리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시절부터 여자이기 때문에 서러웠을 시절이 참 많았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 시대에는 그렇게 살아야하는 거라고 배웠던 까닭에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서럽지는 않았으리라. 세상이 변했으니 이제는 여자가 어쩌고하는 말을 하게 되면 구석기시대사람 취급을 당하기 십상이다. 드라마를 통해 보더라도 지금은 당당하게 큰소리치는 여자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가 있다. 조금은 과장된 듯 보여지기는 하지만 시대가 여성성만을 요구하지는 않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아이러니는 존재한다. 마냥 무엇이고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해놓고선 수퍼우먼이 될 수는 없는거라고 숨어버리기 일쑤다. 가끔씩은 이런 생각도 해 보게 된다. 정말 여자라서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여자라는 것을 내세워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책의 주인공 덕만공주가 선덕여왕이 되기까지는 참으로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 했던 모양이다. 여자였기에 힘겨웠을 점들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면 말이다. 하물며 타국의 왕에게조차 멸시아닌 멸시를 받았다고 하니 그 심적 고통이야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여자가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망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던 <삼국사기>의 글은 지금 읽어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처음에는 선덕여왕이라는 한 여자를 그려주는 소설쯤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책장을 넘겨가면서 소설이 아닌 한권의 역사서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삼국사기>나 <화랑세기>, <삼국유사>등에서 빌려오는 글들만 봐도 그렇고 이런저런 경로를 파헤쳐가며 한사람의 여제가 탄생되어지기까지의 여정을 따라가고 있음이다. 삼국시대의 이야기가 배경으로 깔려 있으면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이겨내기 힘들었을 여제 탄생의 과정이 순서에 맞게 잘 펼쳐져 있다. 깊이 베인 불교의 이념속에서 성장해가는 신라의 모습과 고구려와 백제를 합한 삼국의 상황들이 함께 어울려 마치 한편의 설화를 읽고 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너무 오래된 탓인지 학창시절 역사시간에나 배웠음직한 호칭들은 좀 낯설게 다가오기도 했지만 낯익은 이름들이 많이 보여 시대적인 흐름을 짚어낼 수 있었다. 항간에 세명의 왕을 주무르며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조종했다던 '미실'이라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지금보다는 개방적이었던 성적 풍속도를 그려주고 있어 그녀에 대한 이해를 훨씬 쉽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설화를 많이 만날 수 있어 좋았다. 특별한 것들은 아니다. 그림을 보고 꽃에 향기가 없을거라고 했던 이야기나 지귀설화처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설화일뿐이다. 하지만 요소요소에 맞게  들려주는 설화 한편 한편을 통해 그 시대의 풍류와 이야기의 흐름을 알 수 있게 해주니 그 또한 고마운 일임엔 분명하다.

선덕여왕이 어떻게해서 왕이 되었으며 또한 어떤 정치이념으로 백성을 보살폈는지, 그녀의 정적으로는 누가 있었으며 그들을 또 어떻게 다루었는지, 그리고 그녀의 죽음은 어떠했는지 이 책은 잘 다루어주고 있다. 그런데 나는 백성의 생활속으로 들어온 그녀의 모습이 조금은 이채로웠다. 죽은 뒤에도 백성들이 그리워할 수 있는 왕이었다는 건 그녀가 결코 패배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의 불교가 인도와 그토록이나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도 조금은 놀라웠다. 어찌되었거나 백성을 위한 정치를 했다는 그녀는 여자였기에 그리고 말년에 정치적인 패배의 맛을 보았기에 역사속에 기록되어지지 못한 이야기들이 더 많았다고 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역사속에서 사라져버릴뻔한 한사람의 여제를 위한 글, 마치도 그녀가 왜 그렇게 되어야만 했는지 변론해주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어떠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사장되어져 버리기엔 아까운 인물도 세상에는 많이 있으니 그녀들의 이름이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나올 수 있다면 좋은 일일게다. 조금은 밋밋하고 조금은 싱거운 맛이긴 하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게 더 솔직한 표현일까? 아무리봐도 왠지 뭔가 부족한 느낌이 남아 자꾸만 내려놓은 책을 쳐다보게 된다. 무엇일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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