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 치타가 달려간다 - 2009 제3회 블루픽션상 수상작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40
박선희 지음 / 비룡소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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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원치 않는 일을 하며 십대를 살아가기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니까... 이런 말에 공감하지 않는 십대가 몇명이나 될까? 나는 아들에게 가끔 이렇게 묻곤 한다. 너 엄마랑 얘기하면 답답하니? 자주는 아니고 가끔은 그래요..라고 말하는 아들녀석에게 이렇게 묻는 것은 아마도 나름대로는 소통하고 싶은 욕심이 앞서는 탓일게다. 어른들과 통하였느냐,고 묻는다면 대체적으로 꽉 막힌 벽이옵니다, 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많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요즘 아이들이 미쳐 날뛰는 모든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건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쉬운 일은 아니다. 귀를 찢는듯한 그 소음속에서도 아이들은 제각각 나름대로는 음악을 느끼고, 때리고 부수는 게임의 법칙속에도 나름대로의 룰은 있다고 아이들은 말한다. 어찌보면 우리가 어른이 되기 위해 치러야 했던 성년식과 너무도 다르기에 용납되어지지 못하는 행동일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자라왔던 시절과 지금의 아이들이 살아가는 시절이 다르다는 것은 인정해야만 한다. 단 한가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어른들은 몰라요, 라거나 어른들은 다 그래, 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었으니까.

성장소설이라는 것은 솔직하게 말해 똑같은 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단지 이름만 바뀔 뿐.  제목이 참 신선하게 다가왔던 책이었다. 파랑치타라는 말 자체가 전해주는 느낌이 약간은 신선했다고나 할까?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 파랑치타가 안고 있는 의미가 의외로 컸다. 주인공 강호가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의 이름이 파랑치타였고, 우리의 아이들이 답답한 현실속에서 찾아낸 하나의 출구로 작용했던 밴드부의 이름이 또한 달리는 파랑치타였다. 발산하지 못하는 십대다움을 쨍쨍거리는 기타와 두두두두둥 쨍 하는 드럼과 심벌즈를 통해 표현해주고 싶어하는 작가의 안타까움이 충분히 실려있던 이름이 아닌가도 싶다. 무조건 빗나가기 보다는 나름대로의 이유와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속의 주인공들은 달랐다. 마음속에 하나씩의 멘토를 설정해 두었다는 것도 멋지게 다가왔다. 무조건적인 반항과 어른들을 향한 결사적인 항전(?)을 그리기 보다는 타협의 여지를 보여주고자 했던 우리의 주인공들이 멋지게 첫 공연을 끝냈을때 나도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아니 이미 박수를 치고 있었다. 벽에 그림처럼 붙어있던 부모들이 조금씩 몸을 흔들기 시작했던 것처럼.

파랑치타를 읽으면서 완득이를 생각했다는 건 무리가 아닐 것이다. 완득이의 옆에 머물던 선생 똥주처럼 강호 패거리 옆에는 김세욱 선생이 있었고, 행복을 말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했던 완득이의 가정생활처럼 우리의 강호에게도 힘겨운 삶이 있었다. 말해 무엇할까? 어제, 세번째 엄마가 집에 들어왔다- 로 시작되어지는 첫문장이 이미 너무도 많은 것을 대변해주고 있으니... 그렇게 틀에 박힌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파랑치타를 타고 달려가는 이 소설속의 캐릭터들은 살아 있었다. 십대다움을 한껏 발산하고 있었다.  시민운동가로 살아가면서 학교를 자퇴하고자 하는 딸아이의 진로를 과감하게 수용해주는 이경의 부모를 보면서 우리의 교육현실을 모른체 할 수는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도 우리아이를 지금의 학교시스템에 맡기고 싶어하지 않았던 부모중 하나다. 대안학교에 대한 정보를 찾아 헤맸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이렇게도 못하고 저렇게도 못한 채 결국 현실의 벽에 부딪혀 그 뜻을 접어야 했지만 지금도 미련이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의 학교시스템에서 내 아이를 벗어나게 해 주고 싶다.

지독한 현실을 인정하며 동생 강이에 대한 사랑만큼은 잃지않는 강호의 무던함이 나는 좋았다. 제 나름대로의 인생여정을 받아들이며 산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닐테니 말이다.  또한 없어서 편하게 느껴지는 아버지의 존재를 불쌍하게 바라보았던 강이의 시선속에는 요즘의 십대들 심정이 담겨있는 것 같아 마음 한쪽이 시렸다. 엘리트 만들기의 희생양이 되었던 형과는 달리 엄마의 의지보다는 자신의 의지쪽으로 가닥을 잡았던 도윤의 용기도 괜찮았다. 학교는 그대로인데 너희만 상처를 받을 뿐이라던 김세욱 선생의 말처럼 아이들에게 보여지는 세상은 딱 그만큼이다. 아이적의 반항은 그저 반항일 뿐이다. 한순간 스쳐지나는 바람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바람들이 모여 훗날 어른이 되었을 때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자양분이 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이, 시간이, 세월이 우리를 그저 아이라는 틀속에만 가둬두지 않을테니 말이다. 그 아이들이 훗날 어른이 되어 다시 아이들을 본다면 어허, 나도 그때는 그랬었다 이놈들아! 이렇게 말할 것임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랬듯이... 나는 생각한다. 한 아이의 엄마로써. 한순간의 치기였다고, 그러니 가끔씩은 아이들의 십대다움을 인정하고 안아주어야 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의 아이들이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다고. 몇몇의 소수를 보고 다수를 평가하는 잘못된 잣대를 이제는 버려야 한다고...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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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26
오스카 와일드 지음, 하윤숙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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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에 대해 생각해 본다. 바꿔 말하면 내면의 세계와 현실속의 세계일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느쪽을 더 우선으로 생각할까? 아마도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분명 있을테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보다는 보이는 세계에 더 많은 관심과 유혹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도 보이는 세계일거라고 생각하며 살아가지 않을까?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하는 이정표보다는 보이는 세계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우리 주위에 더 많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보이지 않기에, 아니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면 평생을 함께 살면서도 볼 수 없는 것이 또한 내면의 세계일 것이다. 일부러 보려고 노력한다면 볼 수는 있는 것일까? 내면의 세계, 내 영혼의 삶.. 풍족한 영혼의 행복을 누리고 싶어하면서도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현실속에서 보여지는 것에만 치우쳐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쾌락 - 어쩌면 인류가 지향하고 싶어하는 가장 최고의 행복은 아닐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쾌락의 얼굴은 앞뒤로 두개인 듯 하다. 선함과 악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행복을 맞이하려고 문을 열어주었더니 불행이라는 쌍둥이 동생도 함께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던 말이 떠오른다.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과 우리가 버려야 하는 것들이 함께 존재하는 모양이다. 무서운 사실은 이 쾌락으로 인도하는 존재가 분명 악한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거다. 겉으로는 선한척 하며 다가오지만 결국은 악으로 인도하는 존재.. 누구에게나 유혹은 다가오고 누구에게나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동기나 계기는 찾아오게 마련이다.

유혹 - 살면서 유혹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유혹이라는 것은 늘 우리 가까이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듯 하다. 우리가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것에 대한 유혹은 유난히도 강렬하게 다가온다. 도리언 그레이에게도 그렇게 다가온 유혹.. 너무도 생생하게 실물처럼 그려진 자신의 초상화 앞에서 그가 무심결에 흘렸던 한마디가 치명적인 운명의 고리를 엮어버리고 말았다. 순간 나는 나르키소스가 떠올랐다. 예언자의 말처럼 정말로 그가 자신의 운명을 몰랐다면 오래 살 수 있었을까? 단언컨대 나르키소스는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했다.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여 끝내는 자살을 해야 했던 나르키소스의 운명속에는 수많은 여인들의 아픔이 잉태되어 있었다. 저토록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이, 그 빛나는  젊음의 순간만이 내게는 영원히 머물고 늙어가는 세월 모두는 저 초상화속의 자신에게 주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린 기도는 악마와의 거래였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자신의 운명을 도리언 그레이는 알았다. 그리고 그 거래에 흡족했다. 

비밀 - 사람은 누구나 비밀을 안고 살아간다.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비밀 한가지쯤은 가슴속에 품고 살아간다. 그 비밀이 어떤 형태이며 얼마만한 크기인가 하는 것만이 다를 뿐인데 그것조차도 철저하게 주관적인 개념일 뿐이다. 어느 순간 사악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초상화 앞에서 경악하던 도리언 그레이가 영혼과 맞바꾼  젊음을 유지하게 되었다는 운명을 인정해야만 했던 그 아픔도 잠시, 그의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스러져 갔다. 그 비밀을 간직하게 만들어준 동기는 물론 쾌락이었다. 한 권의 책으로 대변되는 쾌락의 의미는 참으로 짧게 다가왔다. 그러나 깊었다. 한사람을 내세워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시대들의 모든 쾌락을 알고 싶어했다던 그 이야기는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도리언 그레이의 비밀이 커텐으로 가리워져 거미줄 쳐진 다락방에 갇혀진 그 순간부터 그가 모른 척 했던 것은 영혼의 파멸이었다. 

타락 -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타락할 수 있다는 거였다. 많은 사교클럽을 왕래했고, 귀족들과 수많은 교제를 했지만 정작 자신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그의 삶. 그가 가까이했거나 그를 가까이했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둘씩 망가져가는 현실속에서도 악마는 내내 그를 몰아댔다. 그렇다고해서 그것이 너의 책임은 아니라고.. 너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거라고.. 너의 그 아름다운 젊음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반응이나 시선 따위는 무시해버려도 되는 거라고.. 끝내는 마약의 소굴까지 찾아들어가는 도리언 그레이에게 변해가는 자신의 초상화는 마음 한켠의 무거운 짐이었을 것이다. 사악하고 추하게 일그러지며 변해가는 자신의 초상화를 인정할 수 없었기에, 그것이 자신의 영혼이라고 믿을 수 없었기에 어쩌면 그는 더더욱 타락의 길로 빠져들어야만 했을 것이다.

용서 그리고 인정 - 이미 늦었다고 생각되어지는 순간 그에게 찾아온 자신을 향한 환멸.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자신의 모습. 결국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던 화가 바질마져 원망해야 했던 그의 절망. 그 초상화만 그리지 않았어도 자신이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거라고 절규하며 변해버린 초상화 앞에서 화가를 죽여야만 했던 도리언 그레이에게 과연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죄없는 자,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했다던 누군가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우리는 왜 그다지도 삶의 유혹에는 약한지.. 우리는 왜 그다지도 수많은 변명거리를 찾아내야만 하는지.. 아름다운 외모와 부와 젊음 모두를 갖춘 도리언 그레이에게 젊음의 유한성을 말하며 다가왔던 헨리는 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유독 그만이 도리언 그레이의 곁에서 흔들림없는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이 세상과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던 헨리 경을 세상사람들 모두는 사악한 사람이라고 말했었다. 그랬다. 도리언 그레이의 멘토를 자처하고 나섰던 그의 존재는 사악함이었다. 더욱 끔찍한 것은 도리언 그레이를 사악함으로 이끌던 헨리 경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단순히 말 몇마디만으로도 도리언 그레이를 움직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때로는 듣기에 달콤한 말로, 때로는 자기만의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말 한마디를 툭 던져줌으로써 그는 도리언 그레이를 움직였던 것이다.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서글픈 사실이 아니고 무엇인가 말이다. 도리언 그레이에게서 느껴지던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숭배했던, 그리하여 삶에 대한 열정으로  도리언 그레이의 젊음을 그림속에 담아 주었던 화가 바질은 우리가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 내면의 선함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끝내는 화가를 찔렀던 칼로 자신의 초상화를 찢어버리며 삶을 마감하는 도리언 그레이가 생각해보면 결국 승리자다. 자신의 운명을 인정했으니.. 죽는 순간만큼은 진정한 자신의 영혼을 찾을 수 있었으니.. 단지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하나의 행동이었다해도 말이다.

"우리 모두 자기 안에 천국과 지옥이 함께 들어 있지요"(-229쪽)  사실 영혼이나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내걸며 악마와 거래를 했던 이야기는 이 책만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도 몇개는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읽은 후의 느낌은 섬뜩했다. 내 안에 천국과 지옥이 함께 한다던 도리언 그레이의 말처럼 우리는 아마도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쉽게 천국같은 지옥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일까? 산다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어려운 숙제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소개글에서 살짝 오스카 와일드의 동성애적인 면을 들춰내고 있었지만 내게는 왠지 그것이 동성애적인 모습으로 보여지지 않았다. 그만큼 강한 느낌을 남겨주었던 때문일까? 도리언 그레이는 나일수도 있고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일수도 있다. 순수함을 숭배했던 화가 바질 홀워드는 선함이었고, 달콤한 말을 속삭여주던 헨리 워튼경은 악함이었을 뿐이다. 내 곁에 항상 머무는 두 친구의 모습이 왠지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시간이기도 했다. /아이비생각
  

우리 눈에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우리가 익히 알던 현실의 삶이 밤의 비현실적인 그림자를 뚫고 되돌아온다. 우리는 지난밤 떠나왔던 지점에서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틀에 박힌 습관으로 가득 차 있는 똑같은 지루한 순환속에서 에너지를 계속 써야한다는 당위성이 끔찍한 느낌으로 우리를 덮칠 것이다. 때로는 어느 날 아침 눈을 떠서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으리라는 한줄기 강렬한 갈망이 우리를 덮치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 우리에게 쾌락을 안겨주는 세상, 모든 사물이 새로운 형태와 색채를 띠고 변화된 모습으로 다른 비밀을 간직하는 세상, 과거는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고 설령 살아남더라도 의무감이나 후회를 의식하지 못하는 형태로, 심지어는 씁쓸함이 배어 있는 기쁨의 기억조차 갖지 않고 고통이 안겨준 쾌락의 기억조차 간직하지 않은 형태로 남아 있는 세상을 볼 수 있으리라는 갈망이 우리를 덮친다. (-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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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에 한번은 스페인을 만나라 - 뜨겁고 깊은 스페인 예술 기행 일생에 한번은 시리즈
최도성 지음 / 21세기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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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정을 하는 백작이 있었다. 세금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보다 못한 그의 아내가 백성들의 세금을 내려달라고 부탁을 했다. 아내의 부탁에 화가 난 백작이 말했다. 당신이 알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바퀴 돈다면 부탁을 들어주겠소.. 고민을 하던 아내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알몸으로 말을 탄 채 마을을 한바퀴 돌았다. 그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모두 집으로 들어가 창에 커튼을 내리고 아무도 내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딱 한사람을 제외하고. 그것을 바라보았던 딱 한명의 남자는 그 후 눈이 멀었다고 하는데 그녀의 이름이 바로 고디바 부인이라고 기억된다. 꽤나 오래전에 알게 된 이 이야기의 배경은 영국이었지만 문득 문득 떠오르는 이런 이야기를 기억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또한 여행의 매력일게다.  하나의 전설에 불과하겠지만 이야기가 품고 있는 뜻은 참으로 깊어 오래도록 기억되어지는 것들.. 그런 것들이 바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민담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민담들을 만나게 되니 그것 또한 책장을 넘기며 기다려지는 하나의 별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빨강으로 대비되는 정열, 열정 그리고 투우, 현란하게 다가오는 플라멩코, 그리고 요즘들어 관심을 갖게 된 축구의 나라? 그 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스페인, 아니 에스파냐.. 내가 그 나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니 그저 피상적인 단어들만 튀어나온다. 이슬람 세력에 지배당하던 소왕국들이 국토회복운동에 성공함으로써 통일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나라..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소왕국들이 갖고 있던 저마다의 특징이 상당히 강하게 다가온다. 비록 한사람의 왕이 가졌던 통치이념때문에 그랬다고는 하지만 소왕국들마다 자존심도 상당히 강하고 저마다 내세우며 쓰는 말도 달랐다.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이 나라의 정식이름이 에스타도 에스파뇰이라는 것과 스페인은 영어이름일 뿐이라는 것도 이 책을 만나게 되어 다시한번 짚어보게 되었다. 사는 것에 온통 정신을 놓다보니 그 작은 상식하나조차도 놓치고 사나 싶어 아득해지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이렇게나마 세계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일테니 위안 삼는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음악이 너무 좋아서, 아니 그 기타줄이 만들어내는 선율이 너무 좋아서 정신이 몽롱해질때까지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알함브라 궁전마져도 스페인이 품고 있다고 하니 저자의 말처럼 신비의 나라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저절로 앞선다. 바르셀로나나 마드리드같은 이름은 축구열풍 때문에 왠지 가까운 느낌을 전해주기도 했다. 소왕국이었기에 그들만의 자존심 대결이 대단하다는 그 이름앞에서 어쩌면 그만큼의 자부심이 있기에 오늘날의 스페인이 만들어졌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마드리드의 마요르 광장이나  돈키호테를 만들어냈다던 라만차, 안달루시아, 플라멩코, 그라나다, 우리나라의 마라톤을 빛내주었던 황영조 선수 공원이 있다던 몬주익, 살바도르 달리, 발렌시아, 바스크 등 멋지고 환상적인 이름들이 모두 스페인의 품안에 있었다니!  작가가 문화를 먼저 내세울 수 밖에 없었던 심정을 책을 읽어가면서 조금씩 이해하게도 된다. 돈키호테 뿐만이 아니라 <노트르담의 꼽추>에 등장했었던 집시 에스메랄다를 떠올리게 되고,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잉그리드 버그만을 떠올리게 되는 곳이 또한 스페인이라는 나라라고 하니 정말이지 문화의 향기가 얼마나 강할까 싶어 마음이 급해지기도 했다.

이 책은 일반적인 여행서와는 다른 맛을 내는 것 같다. 정해진 일정에 따라 그곳의 풍경과 특징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곳이 안고 있는 문화적인 가치와 역사의 흔적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자 애 쓴 작가의 마음이 여기저기서 느껴진다. 사진기를 메고 다니며 이곳 저곳에서 찾아내고자 했던 스페인만의 숨결.. 그가 찾아낸 많은 것들이 이 책속에 녹아 있는 듯 하다. 덕분에 가고 싶은 곳도 많아지고 읽고 싶은 책도 많아졌다. 문학의 향기를 찾아 힘겨움을 마다않고 찾아갔을 그의 발걸음이 너무도 고맙게 다가왔다. 또한 알지 못했던 역사의 숨결을 내가 느낄 수 있도록 헤매다녔을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래서일까? 여행서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은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재미있는 민담을 들려주며 그 지루함을 달래주기도 한다. 옛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아이가 아닌 어른이라해도 호기심을 느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자연에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괴테의 자연론에 영향을 받았다던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를 내가 어찌 알겠는가마는 이 책속에서 사진으로 보여지던 성가족성당의 모습은 정말 놀라웠다. 후원금으로만 지어지고 있기 때문에 진행 속도가 느리다는.. 날마다 조금씩 그 모습이 변해가고는 있지만 완성시기를 오직 신만이 알고 있다는 그 성가족 성당의 모습은 어찌보면 기괴하게도 보여지지만, 책의 제목처럼 일생에 한번 스페인을 찾는다면 가장 먼저 그곳부터 달려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만큼 신비롭게도 보이고 어떻게 직선없이 건축물이 탄생할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러고 나면 알함브라 궁전을 찾아가고 싶다. 미국 작가 워싱턴 어빙과 작곡가 타레가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그 궁전. 천국의 정원이라는 뜻을 지녔다는 헤네랄리페 정원을 꼭 한번은 가보고 싶다. 이슬람의 5계인 신앙,자비,기도,금식,메카 순례를 상징한다는 다섯손가락을 모은 손이 새겨져 있는 정의의 문을 통해 들어가 보고 싶다. 죽음과 영원한 삶을 동시에 나타낸다는 사이프러스 나무 터널 사이를 나도 걸어보고 싶다. 영원한 삶과 죽음을 안고 있다는 사이프러스 정원의 모습은 사진으로만 보기엔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내가 지금 저곳을 거닐고 있으면 참 좋겠다는 욕심으로 한참을 바라보았던 풍경이기도 했다. 책장을 넘긴다는 것이 정말 아쉬웠다.

이 책을 읽고나서 나의 꿈에 약간의 수정이 필요했다. 유럽여행에 스페인을 넣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로마교황청이 있는 바티칸과 아랍왕족들의 도박장으로 유명하다는 모나코, 스페인과 프랑스가 1년씩 번갈아 통치한다는 안도라 공국,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사이에 있다는 리히텐슈타인.. 이 네나라는 유럽에서 가장 작은 나라라고 한다. 이 네나라를 꼭 한번은 가고 싶어졌다. 어찌되었든 책을 통한 여행이었지만 정말 멋진 여행이었다. 여행하기 전에 가고자 하는 곳에 대한 정보를 여러가지 미리 챙겨들고 가면 그곳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을 새삼스럽게 인정하게 만들어준 책이 아니었나 싶다. 문학과 역사를 한곳에 아우르며 멋진 모습을 자랑하고 있을 스페인에 갈 수 있는 날이 언제쯤이면 내게 오려는지...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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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의 역습 - 당신이 몰랐던 우유에 관한 거짓말 그리고 선전
티에리 수카르 지음, 김성희 옮김 / 알마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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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 무서운 책이다.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 틀림없이 나를 건강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굳게 믿었던  그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깨져버린다는 건 정말이지 생각하기 싫은 일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이유때문에 이 책은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 "당신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양의 우유를 마셨습니까? 만약 당신이 지금까지 하루 석 잔 정도의 우유를 꾸준하게 마셔왔다면 당신은 이미 망가져 가고 있을 것입니다. 아플 준비는 다 끝내셨습니까? 지금부터 당신이 마신 우유가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말씀드릴 것입니다. 단 기절하지는 말아주십시오".. 강의는 시작되었고 그 강의를 듣고 있는 동안 할 수만 있다면 살면서 마셨던 우유 모두를 토해내고 싶어졌다. 물론 악의적인 생각으로 이런 내용의 책을 낸 건 아니었겠지만 충분히 악의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책을 읽는 도중 나는 실제로 냉장고의 우유를 모두 싱크대에 쏟아 부어버렸다. 그리고 내 아이를 바라보았다. 싫다고 할 때 억지로라도 마시게 했던 그 순간들이 떠올라 눈물이 났다. 우유! 지독히도 철저하게 가려진 그 가면속의 얼굴앞에서..

나처럼 아줌마 소리를 들어야 하는 여자들이라면 칼슘 보충제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열게 된다.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폐경이나 골다공증이라는 말들이 주변에 난무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칼슘섭취를 늘린다고 골다공증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단순히 '유제품 소비를 장려하기 위해' 낙농업계와 제약업계가 손을 잡았다는 말은 정말 충격이었다. 마치 유제품을 먹지 않으면 골다공증으로부터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거라고 말하던 수많은 광고와, 젊었을 때 우유를 먹지 않으면 훗날 후회할 일 밖에는 남지 않을 것이라고 학회와 연구소도 모자라 정부까지 나서서 캠페인을 벌였다면 믿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래서일까? 칼슘 보충으로 골밀도가 증가되어 유지되지는 않았다는 연구 결과를 보여주는 저자의 말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그러면서 저자는 또 다시 묻고 있다. 유제품을 많이 먹으면 골절을 적게 당할까? 그 질문의 답은 그렇지 않다! 이다. 현재 유제품을 많이 먹으며 칼슘 섭취량이 많은 서구적 생활 방식을 하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오히려 골절이 드물게 발생한다는 말이다. 유제품 소비 세계기록과 대퇴골 경부 골절 세계기록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스웨덴의 예를 보면서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우유소비가 적은 중국만 해도 대퇴골 경부 골절 빈도가 세계에서 가장 낮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왜 그렇게 우유를 마셔야 했을까? 지금까지 허울좋은 우유의 장단에 놀아난 꼴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마디로 우유나 유제품이 골다공증 예방에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는 말이다. 우유가 뼈를 튼튼하게 만들어준다는 근거는 없단다. 오히려 유제품을 더 많이 섭취하는 여성이 유방암이나 골다공증에 더 많이 걸린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우유를 먹으면 설사한다는 사람이 참 많다. 그런 까닭에 나 역시도 우유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락토오스라는 젖당을 소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건 이제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나만 그런가? 나는 왜 그렇지? 했었던 의문점을 풀어주는 대목이 있다. 모든 포유류는 새끼일 때 어미젖을 소화시킬 수 있는 락타아제라는 효소를 만들어내고, 락토오스를 인체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갈락토스와 글루코스로 변화시켜준다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 유아기를 지나면 그 락타아제의 활동이 줄어들어 성장하고 나면 90퍼센트나 감소한다고 하니 성장한 포유류가 우유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얘기다. 쉽게 말해 병이 아니라는 말일게다. 습관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뿐더러 많이 마신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책에서 말하고 있는 락토오스의 영향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두통, 집중력 저하, 기억력 장애, 극심한 피로, 근육과 관절의 통증, 알레르기 반응등..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일단은 저렇게 놀랍도록 부정적인 얼굴을 숨기고 있는 우유나 유제품의 감언이설에 더 이상은 속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순히 눈앞에서 우유만을 없앤다고 될 일은 아닐 것이다. 아이스크림이나 요구르트같은 유제품들처럼 락토오스가 숨어있는 곳이 많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부모들이 좋다는 건 사실 전부 다 나쁘다. 햇빛, 우유, 육류, 대학 - 우디 앨런의 말이라고 써있던 문장을 보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루빨리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거였다. 아이들의 영양을 보충해주기보다는 우유 생산업자들에게 시장을 제공해야 하는 경제적 필요성을 더 크게 보았던 탓에 아이들에게 우유 급식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자식을 둔 엄마 입장에서 듣기에 기분좋은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말을 인정해야만 했다. 사실 우유뿐만이 아니라 시장경제의 원칙이 그런 원리를 무시하고는 형성되지 못할거라는 생각마져도 들었다. 더구나 우유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완전식품이 아니었다는 말에는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사실 난 식료품에 대한 루머들을 잘 믿지 않는 편이다. 오래전 유지파동이 일어났을 때도 거리낌없이 라면을 먹었고 조류독감 때문에 온 세상이 시끄러울 때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닭고기를 먹었다. 그런데 이번 우유에 대한 사실에 대해서는 다시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소화도 잘 되지 않고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우리 식구들은 많이 먹지 못했다는 사실이 지금에 와선 오히려 위안삼아야 될 일로 여겨지니 이 무슨 일인지...

'우유의 복음' 이라는 말이 재미있다. 그 우유의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을 일러 저자는 침략자들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쓰고 있다. 설탕이나 정제된 곡류 그리고 유제품에 대한 잘못된 진실을 파헤치기까지 그가 안고 있었을 심리적 부담이나 외적인 압력, 내적 갈등이 얼마나 컸을지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호칭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칼슘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지나치지 않다고 믿게 만들었을까? 물론 지금은 칼슘은 많이 먹어도 필요한 만큼만 흡수된다고 하는 이론이 많이 들려오기는 한다. '우유로비'가 있었기에 유제품이 단독으로 하나의 식품군을 갖게 되었다는 말은 우스운 논리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정책이라는 무서운 실세를 모른척 할 수가 없으니 힘없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움츠러들 수 밖에 없다. 무언가에 길들여진다는 말처럼 무서운 말도 없을 것이다. 습관처럼 몸이 기억해버려 아무런 생각없이 움직인다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일테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거리로 나가 이제부터는 우유를 먹지 맙시다, 라고 소리친다면 사람들은 미쳤다고 할 것이다. 책 한권만으로 우유가 좋다 나쁘다를 평가하기엔 어렵다. 내가 무슨 과학자도 아니고 영양학을 논할 수 있는 그런 사람도 아니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순간적인 분노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다. 어쩌자고 인류는 스스로가 자멸의 길로 가고 있는지... 모든 것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존재한다면 이 세상은 정말이지 최악의 상태가 되어버리지는 않을까? 생뚱맞게도 우유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아주 조금씩만 상대방을 걱정해주며 살아가는 세상을 그려보게 된다.

생각해보니 가장 커다란 문제는 식생활이었다. 그것도 서구적으로 변해가는 식생활이! 식물성 단백질보다 동물성 단백질이 우리 몸에 해가 된다는 건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우유의 단백질인 카제인 성분이 든 먹이를 먹은 쥐가 모두 죽거나 빈사상태였다는 결과를 보면서 나는 설마했었다. 단백질이 암을 유발하다니! 우유를 먹으면 키가 큰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송아지의 성장을 돕기 위한 물질 IGF-1이라고 불리는 성장인자때문인데 그 성장인자가 아이들의 키를 키운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IGF-1이 우유를 통해 우리 몸속의 혈액속으로 들어가 키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세포를 더 빨리 증식시킨다는 것이었다. 암세포를 IGF-1에 노출시키면 누가 되었든 암세포가 빠르게 퍼져나간다는 사실을 우유를 만드는 낙농업계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사실을 은폐시키기에 급급했다!  전립선암과 고환암이 걱정된다면 남성들이여 우유나 치즈같은 유제품을 저멀리 던져버릴지어다! 책 속 내용에 의하면 우유나 치즈, 요구르트를 많이 먹었던 남성들이 그렇지 않은 남성들보다 70%나 더 많이 전립선암에 걸렸다는 연구보고가 있었다고 하니 하는 말이다. 또한 여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유제품을 꾸준히 먹는 여성이 거의 먹지 않는 여성에 비해 난소암의 위험이 더 높았다고 한다. 요구르트 다이어트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오히려 그 다이어트 덕분에 체중이 2kg 가량 더 늘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유제품, 즉 요구르트는 우리의 몸을 날씬하게 해 주지 못한다고 한다.

칼슘의 실제 필요량은 생활습관에 따라 변한다고 한다. 칼슘 권장량이라는 것은 술책의 하나일 뿐이다. 정해진 권장량만큼 먹지 않으면 큰일날 것처럼 떠들어대는 사기였을 뿐이다.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칼슘 필요량이라는 것은 유제품을 먹지 않아도, 아주 조금만 먹는다 해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과일과 채소를 많이 먹고 싱겁게 먹는 사람에게는 그 조금의 권장량조차도 의미가 없단다. 그러니 '칼슘불안'에서 벗어나라는 말을 끝으로 저자의 강의는 마무리 된다. 콩이나 양배추, 브로콜리 같은 채소에 들어 있는 칼슘은 소화도 잘되고 흡수율이 높으며, 버섯이나 적포도주같은 채소나 과일은 뼈의 파괴과정을 줄여준다고 하니 기억해 둘 말이다. 패스트푸드를 피하고 싱겁게 먹으면서 콩이나 덩이줄기작물, 토마토, 잎채소, 바나나, 생선을 많이 먹어준다면 우리 몸의 만성적인 산중독증을 중화시키고 골밀도를 유지시키는 칼륨을 충분히 얻을 수가 있다고 한다.  우리가 웰빙이라고 말하는, 그리고 건강식품이니 꼭 먹어야 한다는 녹색채소나 호두 따위의 견과류를 많이 먹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좋다고 하는 것들을 그대로 따라한다는 것이 힘들겠지만 이렇게 한권의 책을 통해서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가에 대해 각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반은 성공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보여주었던 골다공증을 예방하기 위한 피라미드 식단의 가장 아래 1단의 식품을 소개하고 싶다. 하루 5가지~12가지를 먹는게 좋다고 하는 것들로 야채, 덩이줄기작물, 뿌리채소, 콩과 콩과식물, 생과일과 말린 과일등이다. 그러면 가장 윗쪽에 자리잡고 있어 일주일에 0~3회 어쩌다 먹는게 좋다고 나온 식품엔 무엇이 있을까? 흰빵, 콘푸레이크, 흰쌀밥, 감자, 사탕류, 제과제빵, 돼지고기 가공품 따위인데 자주 먹을 경우 소화계 암의 위험이 높아질 수도 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무서웠다. 하지만 이런 책이, 그야말로 불편한 진실과 마주설 수 있는 용기있는 책이 많이 나와준다면 참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우리를 혼돈속에 몰아넣는다해도 말이다. 혹시라도 우유나 유제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믿고 싶지 않은 진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적절한 대안을 찾은 다음에 우유를 밀어내라는 저자의 말을 기억하기 바란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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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02 0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 - 6만 입양아의 주치의이자 엄마였던 홀트아동병원 조병국 원장의 50년 의료일기
조병국 지음 / 삼성출판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함께 피를 나누었다고해서 물보다 진한 사랑이 절로 생겨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피를 나누었지만 버리고 버림을 받아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내는 일이 있는가 하면, 같은 피를 나누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아오면서 가슴으로 피를 나누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훈훈한 느낌을 전해주는 까닭이다. 정말 오랜 세월을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일을 해 오셨던 조병국 할머니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내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가 겪어왔던 수많은 아이들과의 이야기를 읽으며 눈가를 훔치기 몇 번, 책장을 넘기면서 하나의 글자로 살아숨쉬는 아이들의 이름앞에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고 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 살 부비며 산다는 말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 낳았으나 기르지 못한 엄마와, 낳지 않았으나 길러주며 살아온 엄마와의 차이는 바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입양 사실을 알고는 친부모를 찾아갔다가 16년동안 길러준 양엄마에게 되돌아온 딸을 붙들고 다시 날아갈까봐 놓을 수 없었다던 엄마의 마음. 바로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핏줄이니까 달라도 뭔가 다르겠지 하며 찾아갔다던 그 딸이 돌아와 했던 말은 그 이질감을 이겨낼 수 없었다는 거였다. 왜 그랬을까? 살을 부비며 산다는 것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사랑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토록이나 예쁘게 태어났으나 힘겨운 병과 싸워야 했던 영희, 맑은 목소리로 장애인 합창단의 일원이 되었던 현군이, 뇌성마비 장애를 극복하고 의사가 되어 나타난 영수, 입양과 파양을 네번씩이나 겪어야 했던 기원이, 모진 엄마가 선택했던 죽음과 싸워 두 다리를 잃어야 했지만 꿋꿋하게 잘 살아내 준 아이, 똥통에 버려졌으나 건져올려진 분녀... 할머니의사의 기억속에 남겨진 아이들이 어찌 이 아이들뿐이겠는가? 자신의 아이가 있으면서도 딸아이를 입양했고 그 아이가 공뇌증이란 장애를 가졌음에도 포기하지 않았던 아름이 엄마처럼은 아니더라도, 조금씩의 사랑만 나누어줄 수 있었다면 나는 입양아라고 씩씩하게 말했던 아름이의 동생과 같은 당당함으로 그들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반아이들 앞에서 나는 입양아야, 라고 말할 수 있었던 초등학교 3학년 아이의 그 당당함은 누가 만들어 주었는가? 부모라는 것이, 엄마라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힘을 지닌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아니 그 부모의, 엄마의 사랑이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 그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지를 우리가 좀 더 일찍 깨달을 수 있다면 참 좋은 일일텐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런것들에게서 자꾸만 멀어지고 있는 것만 같다.  

기적... 어쩌면 버려졌던 아이 하나하나가 기적은 아니었을까?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제 몫을 해 달라고 그 사람에게서 태어난 아이 자체가 어쩌면 기적은 아니었을까? 나는 책을 읽으면서 내 아이가 태어나던 순간을 떠올려 보았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느닷없이 비상사태가 벌어졌고 그 상태로는 자연 분만을 할 수 없으니 수술을 해야한다고 했었다. 나는 버텼다. 절대로 수술은 하지 않겠다고. 끝내 수술을 한다해도 엄마와 아이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던 의사의 엄포 아래 수술실로 실려갔고 그렇게해서 얻은 게 지금의 아들녀석이었기에 남들은 정말 소중한 아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에야 느낀다. 잘 자라준 아들녀석의 소중함을. 하늘보다 더 높은 아이의 소중함을.. 내가 이럴진대 그 열악한 환경속에서 버려진 아이들과 함께 살아왔던 할머니 의사와 그 담당분들의 마음이야 오죽할까 싶었다. 잔잔하게 지나간 일을 떠올리며 어쩌면 눈물 흘렸을지도 모를 할머니 의사의 모습이 보여지는 듯 했다.

처음부터 눈물바람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엄마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것도 서러운 일인테 그 작은 몸뚱아리 어디에 병마를 이길 힘이 있다고 그토록이나 모진 시련을 주시는지, 신이 있다면 나는 달려가 따져보고 싶었다. 정말이지 더 이상은 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기를 몇 번, 책장을 넘긴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가슴 떨리는 일이 될수도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창호지에 둘둘 말려 시체안치소에 들어갔던 아이가 모진 목숨 놓지 못하고 다시 꼼지락거렸을 때 빗속에 어린 생명을 버린 아이 엄마가 야속하고 매정했다는 조병국 할머니의 말씀은 백번 이해가 되었다. 살아달라고, 살아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모았다던 의료진들의 그 마음이 내 심장까지 흔들고 있었던 거다. 사랑,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길래 그 사랑에 이토록이나 목메인채 살아가야 하는가 말이다. 그토록 흔해빠진 사랑이 정작 필요한 곳에는 왜 없어야 했는가 말이다. 그 사랑, 그 사랑은 왜 필요한 곳에 머물지 못하는 것일까? 이 책을 보면서 감히 나는 말한다.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머물길 거부하기 때문일것이라고.  오래전에 우리의 가슴을 울렸던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이 떠올랐다. 지금도 제 2의, 제 3의 수잔 브링크가 끝도없이 만들어지고 있을 게다. 지금은 그래도 예전과 달리 우리의 인식이 많이 나아진 상태이지만 그 누구도 아닌 우리에게 내쫓기듯 입양되어갔던 그들에게 좀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었더라면 하던 조병국 할머니의 마음이 내게로 전해져 오는 듯 하다. 그리고 고맙다. 내게 이렇게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이.

50년이 넘는 세월을 아이들과, 그것도 버려지고 아픈 아이들과 함께 하며 늙어가셨을 그 분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힘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싶다. 그 분이 아니었다해도 사랑을 표현하고 실천했던 분들은 많았다. 이 책속에 소개되어진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누구의 관심과 시선도 받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지금 이시간에도 사랑을 나누어주고 계신 분들은 많을 것이다. 힘겨운 세상, 아직은 살만하다고 말 할 수 있는 것도 그 분들이 있는 까닭일게다. 책을 읽고나니 마음 깊숙이 부끄러움을 느낀다.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조차 부족한 내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직은 그렇게 커다란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이 두렵고 자신은 없다. 하지만 주변에서 나의 작은 힘이나마 필요로 한다면 달려갈 수 있도록 조금씩 마음을 열어야겠다고 다짐을 해 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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