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흑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
스탕달 지음, 이규식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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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이라는 책의 제목만 보면 얼핏 이념을 떠올리게 된다. 이념싸움이 주를 이루는 이야기는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왠걸 은근하게 깔리는 사랑의 심리묘사가 맛깔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일까? 이미 지나쳐온 과거는 단순히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환생하는 듯 하다. 시대적인 풍습들을 보면서 하나도 변하지 않은채 답습하는 현세대를 보게 되니 하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인간본성 그 자체가 문제일 것이다.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죽은 뒤에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어지는가- 우리가 현실을 살아내면서 끌어안아야 할 숙제는 많은 듯 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두가 각자의 몫이라는 거다. 자신의 관점보다는 타인의 잣대에 더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서글프기는 하지만 어찌되었든 판단과 선택은 자신의 몫인 것이다. 때로는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내 삶의 일부분조차도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닌 온전한 내 몫!

책속의 배경은 왕정복고 시대다. 귀족사회 즉 계급사회의 모습은 이렇게 저렇게 이유를 내세워 편가르기를 일삼는 지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의 뜻보다는 주변상황에 의해 끌리다시피 한계단을 밟고 올라선 주인공 쥘리앵. 쥘리앵은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이미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특출난 외모와 심성으로 자만심을 하나의 위안으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날 그는 깨닫게 된다. 남과 다르다는 것이 미움을 낳는다는 것을. 비천한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시절부터 책읽기와 사색을 좋아했던 까닭에 아버지와 형들에게서 미움을 받았지만 그것때문에 그가 또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모순을 낳기도 한다. 자신의 출신계급을 뛰어넘으며 한계단씩 밟고 올라서는 그에게 그 자만심은 일종의 힘이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한번 맛본 것에 대한 호기심과 유혹을 견뎌내기 힘들다. 우리의 주인공 쥘리앵 역시 차츰 마음속에 욕망을 품게 되고, 드디어 파리에 입성하지만 상류사회의 권태나 속물스러움을 알게되기까지 많은 아픔을 겪게 된다. 사랑이라고 느꼈던 마틸드에 대한 감정조차도 하나의 도구처럼 쓰여지게 되는 상류사회의 메마름을 이해하기에 쥘리앵은 너무 여렸다. 일개 무명 장교였던 나폴레옹은 대륙을 정복한 뒤 누구나 장교가 될 수 있고 부자가 될 수 있으며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는 꿈을 젊은이들에게 부르짖었다고 한다. 바로 그런 까닭에 쥘리앵은 나폴레옹을 하나의 멘토로 삼았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망한 귀족들이 다시 집권했던 시기였으니 시대적으로는 불안한 때였다. 교육을 잘 받은 하류계층의 젊은이에 대한 귀족들의 불안감을 쥘리앵은 알지 못했다. 후에 처형을 당하기 전 법정에서 그가 말했던 '계급사회의 영예'라는 말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씁쓸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출세주의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흐름을 따르다보니 그렇게 되어진 쥘리앵의 삶. 자신의 의지보다는 타인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져가던 그의 삶속에서 진정한 것은 아무것도 찾을수가 없었다. 부유한 사람들의 오만이 하층계급의 용기를 꺾어버렸다는, 분개한 부르주아들만이 보인다고 법정에서 말하던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미루어 살펴보아도 서글픈 일임에 분명하다. 

이 책을 왜 그렇게 읽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쉽게 다가서지 못했던 책을 이제서야 만난다. 읽는 내내 책의 흐름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다지 난해하게 다가오는 부분도 없는 듯 하다. 그런데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책장을 덮을때까지 이상하게 나를 사로잡았던 또하나의 책이 있었다.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였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그 이야기가 자꾸만 생각이 났다. 소녀의 시선을 통해서 바라본 어른들의 세계. 그 소녀가 바라보면 느꼈던 어른들의 세계는 그다지 아름답게 다가오지 않았었다. 무언가 비틀어지고 속됨을 나타내기에 주저하지 않았던 어른들만의 세계. 흑인을 변호하게 된 백인 아버지의 일정을 바라보면서, 또 그 아버지를 비난하거나 한편으로 용기를 주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 소녀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시대적인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주었던 <앵무새 죽이기>처럼 이 책속에서도 쥘리앵이라는 한 소년이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속에서 마주치는 사회의 어둡고 습한 단면이 많이 보여지고 있음이다. 그런데 그 사회의 단면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눈길에 안스러움과 애처로움이 함께 했고 또한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처럼 부끄럽기까지 했다. 흑과 백, 적과 흑. 그 구분을 누가 지었는가.

"나의 이 이상적인 생활을 가만히 내버려둬요. 많든 적든 내게 불쾌감을 주는 당신들의 그 시시한 험담과 현실생활의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은 나를 하늘에서 끌어내릴 거요. 사람은 자기 방식대로 죽어요. 그러니 나도 내 나름대로 죽음을 생각하고 싶을 뿐이오. '남들'이 내게 무슨 상관이오? 그 '남들'과의 관계는 머지않아 갑자기 끊어져버릴 거요. 제발 더이상 그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지 마요." (-399쪽)  감옥에 갇혀있던 쥘리앵의 이 말속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우리 삶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것만 같아 서늘해지기도 한다. 도대체 내 삶의 방식이 '남들'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도대체 그 '남들'의 삶을 왜 내 삶속에 끌여들여야만 하는 것인지. 감옥에 갇힌 다음에야 진실로 평온한 삶을 얻게 되었던 쥘리앵에게 죽음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 평온함속에서 찾아냈던 진실한 자신의 사랑앞에서 절규하던 쥘리앵의 모습이 영화의 한장면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던 레날부인에게 마틸드의 존재를 "표면상으로만 사실일 뿐입니다" 라고 말하던 쥘리앵의 고백. 어쩌면 우리는 모두 '표면상으로만 보여지는 사실'에 얽매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마음까지도 '도구화'되어져가는 이 세상을 살아내기에는 너무 벅차다. 쥘리앵조차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행동했던 거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옮긴이의 말처럼 타인들이 심어놓은 가치를 좇아가는 것, 타인의 욕망을 나도 욕망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음이다. 이 책을 통하여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과연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한번 뒤돌아 볼 일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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