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의 눈물 샘깊은 오늘고전 12
나만갑 지음, 양대원 그림, 유타루 글 / 알마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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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남한산성에 관한 글들은 참 많다. 이렇게 저렇게 말을 해도 왠만큼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대충 들어 아는 이야기와 소설로 만나보는 남한산성에는 참으로 많은 차이가 있었다. 한가지 사실을 두고 저마다의 시선으로 바라봄에 따라 살짝 살짝 비틀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처럼 말이다. 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관점도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은데 부끄러운 역사를 평가함에 있어 양반이나 벼슬아치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백성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남한산성의 비화를 보통의 일반적인 견해로 바라보던 나에게 새로운 인식을 심어준 것은 김 훈의 <남한산성>이었다. 양반이나 벼슬아치가 아닌 서민, 백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역사적인 사실은 그야말로 가슴 한쪽의 응어리를 확 풀어주는 것만 같았다. 너무도 답답했던, 너무도 기가 막혔던 그 이야기들이 시선 하나만 비껴갔을 뿐인데 이렇게나 많은 차이를 보여줄 수 있는거구나 싶었다. 아울러 무지몽매하다고 벼슬아치들이 내쳐버렸던 우리의 백성들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존재였다는 것을 역설적으로나마 보여줄 수 있었다는 것이 내심 통쾌하기도 했다. 양반이나 벼슬아치들만이 나라를 걱정했던 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 책 <남한산성의 눈물>은 고전 시리즈로 다시 나온 책이다. 나만갑이라는 관료가 직접 일기형식으로 남겨 둔 <병자록>이라고 한다. 그랬기에 나는 이 책을 만나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멀리서 바라보았던 남한산성의 이야기가 주였다면 이 책은 바로 자기 자신이 직접 겪었던 일을 기록으로 남겨둔 것이니 그야말로 사실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속의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는 것과 같다. 공조참의 벼슬에 있던 나만갑이 임금을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되어진다. 남한산성에서 쓴 전쟁일기... 아주 소소한 것까지 이 책속에는 기록되어져 있다. 조선이 청나라와 명나라의 힘겨루기에서 애매한 희생을 치루어야 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을 보면서 조금은 생각의 변환을 맞이할 수도 있을 듯 하다. 그 당시 조선의 정치인들이 보여주었던 치졸함속에는 이미 이런 상황이 잉태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청나라는 오랑캐나라이니 가까이 할 수 없나이다 주장했던 척화파나 어찌되었든 힘있는 나라이니 가까이해서 나쁠 것은 없나이다 주장했던 주화파의 입장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질 수는 없겠지만 왜 좀 더 깊고 넓게 생각하지 못하고 명분만 내세워야 했는지 나는 묻고 싶을 뿐이다. 김 훈의 <남한산성>에서 어렵게 배를 저어 강을 건네주었던 사공이 자신을 따르지않는다고 목을 베어버렸던 그 죽일 놈의 양반네가 떠오른다. 실리를 따지지 못하는 명분은 예나 지금이나 백성들만 괴롭힌다.

직접 보고 듣고 겪었던 일을 날마다 써내려갔던 나만갑의 심정은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척화파의 우두머리격인 김상헌과 주화파의 우두머리격인 최명길의 모습은 정말이지 볼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척화파의 김상헌은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드실 때 무던히도 반대를 했던 최만리를 떠올리게 한다. 백성은 안중에도 없었던 벼슬아치의 전형이다. 탁상공론으로 목소리만 높일 줄 알았던 그들. 상황판단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물러서거나 머뭇거리면 목을 베겠다고 말했던 그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이 이 책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 아픔을 겪어 세자와 다른 왕족들이 포로로 끌려갔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돌아온 소현세자의 죽음만 보더라도 그렇다. 어찌 생각해보면 작금의 세태보다 더한 이기주의요 개인주의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인조가 청의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치욕이었다면 그 힘겨운 상황속에서도 나라의 임금과 벼슬아치들을 위해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던 백성들의 아픔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한 이 책에서는 또다른 피난지 강화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썩어빠진 양반네들과 왕족들의 한심하기 그지없는 피난생활이라니...

임진왜란이나 정묘호란, 병자호란속에서 찾을 수 있는 환향녀라는 말이 있다. 전쟁중에 끌려갔다가 되돌아온 조선의 여인들을 일컫는 말이지만 그 말이 와전되어 지금은 좋지않은 뜻으로 쓰이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모진 고초를 겪고 다시 돌아왔던 조선의 여인들. 그런 그녀들을 맞이해 준 것은 무엇이었던가?  절개를 잃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남자들이 자신의 아내와 누이들을 집단으로 따돌렸고 보란듯이 첩을 두고 살았다는... 그렇다면 백성들에게 그런 몹쓸 이름을 안겨준 것은 누구란 말인가? 이렇다할 준비도 되어있지 않으면서 오직 명분만을 내세워 참혹한 전쟁을 치뤄야했던 그 때의 상황은 되새김 할 때마다 아픔으로 다가온다. 누구의 시선으로 바라보아도 아픔이다. 하지만 그 아픔의 농도가 다를 것이며 그 아픔의 종류 또한 다를 것이다. 누가 더 아팠을까를 따지자는 건 아니다. 이렇게 사실적인 전쟁기록을 보면서 더많은 아쉬움이 느껴져 하는 말일 뿐이다. 과거를 보면서 좀 더 나은 현재와 미래를 꿈꾼다는 말은 진리일까? 문득 그런 의문이 생긴다. 작금의 세태를 바라보니 과거는 그저 과거일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지기도 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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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클래식 6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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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소설에 재도전한다는 것은 아마도 <변신>을 읽었다는 말일게다.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깨어보니 자신이 벌레로 변해있었다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해 주었던 작품 <변신>. 학계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문제작가이니 뭐니 하는 말들은 나는 모르겠다.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자면 이렇다. 유대인 부모를 두었고 프라하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여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법학은 아버지의 소망이었을 뿐. 법관이나 변호사가 될 마음이 없었기에 보험회사에서 근무하기도 한다. 오랜동안을 국영기업 법률고문관으로 죽기 2년전까지 일을 했다. 그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한 이유는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보람이 있었고 일찍 퇴근해 근무조건이 좋았던 때문이라고 나와 있다. 그래서 그에게는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말이기도 할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작품은 미완성이 많았고 그나마도 자신이 죽으면 남은 원고를 파기해 달라는 부탁을 친구에게 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친구가 미출간 원고들을 출판하게 되어 결실을 이루었다 한다. 인간 운명의 부조리와 인간 존재의 불안을 깊이 통찰했다는 그의 문학세계... 내가 들여다보기엔 너무나도 깊었던 것 같다. 

K는 성의 측량사로 초빙이 되어 밤늦게 마을에 도착하지만 그 마을은 어째 좀 수상하다. 그를 초빙했다던 성은 어둠과 안개에 쌓여 있을뿐 사람들의 접근을 거부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그를 대하는 마을 사람들조차도 뭔가 수상하다. 간신히 여관을 얻어 잠자리를 마련했지만 숙박 허가증을 보여달라며 잠을 깨우기도 하고 성에 전화를 걸어 그의 존재에 대해 확인하기도 한다. 백작의 허가가 없으면 누구도 숙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그의 조수로 배당되어진 두 명의 사내와 마을사람들, 그리고 여관집 주인과의 불협화음, 그 와중에 만난 주점 여급인 프리다와의 사랑이야기라니!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K의 이야기는 이 책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만들었다. 따라잡을 수 없이 난해했던 K의 여정이 나를 헤매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유령같은 마을사람들의 생활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어찌보면 만나기 힘든 관리들의 모습을 통하여 관리계급의 부패를 꼬집는 것 같기도 하고, 주점 여급과 마을 사람들의 일상적인 대화마져도 무언가 비틀어져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이것도 저것도 확실한 것은 없으며 간신히 만나게 되는 하급관리조차 그에게 이렇다 할 말 한마디 남겨주지 않고 떠나버린다. 그런 와중에 주점 여급 프리다와의 사랑도 어긋나버리고.....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시간만 많이 흘러갔다. K의 시간이 아니라 나의 책읽는 시간이 흘러 갔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토록 오랜 시간을 달려 마지막 부분 '카프카의 생애와 성의 해설' 편까지 와서야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아주 조금 알게 되었다. 우선은 그가 살아왔던 일생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그래야만 이 작품속에 녹아있는 등장인물들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결국은 이 책속에 그의 생애가 담겨있다는 말도 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정말이지 읽기에 힘겨운 책이다. 권력을 휘두르는 관리들의 불공정하고 무자비함을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것일까? 성의 관리 소르티니의 요구를 거절한 마을 아가씨 아말리아가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모습은 왠지 서글프다. 그들 자신들조차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단지 관리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그녀 가족과 가까이하면 안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무지함이 수직관계가 아닌 수평관계의 불합리성을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모든 것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욕심이 부합되어진 이치일 뿐이다. 주점 여급 프리다가 클람이라는 관리에 대한 욕망을 끝내 버리지 못하는 것도 자신의 욕심일 뿐이다. 어쩌면 신분상승이나 부를 얻기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성의 측량사라는 이유만으로도 무언가 얻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을사람들의 모습이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면 무엇이라도 할 것처럼, 아니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그런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런지...

성... 그 성이 안고 있는 메세지는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우리 모두가 갇혀 사는 우리만의 성. 누구나 하나씩은 가슴속에 쌓았을 자신만의 성. 그 성안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것은 아닌지.. 너무 깊이 팠거나 너무 높지는 않은지... 미완성의 작품이라서일까? 왠지 모르게 허전함을 느낀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 그 뒷이야기가 있다해도 나는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지 않을 것 같다. <변신>을 읽고 난 후 카프카의 작품을 다시한번 만나보고 싶어했던 것은 욕심이었을까? 책을 읽고 난 후에도 오래도록 감상문을 쓰지 못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도 내가 그레고르처럼 벌레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답답하기도 하고.. 무언가 꽉 막혀버린 듯한 그런 느낌.. 우리 삶의 모습 역시 미완성인 때문일까?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왠지 부끄럽다. 왠지 부질없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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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기사단의 검
폴 크리스토퍼 지음, 전행선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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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래저래 세상은 이분법인가? 화이트 템플기사단과 블랙 템플기사단이라고 한다. 밝히고자하는 이가 있다면 숨기고자하는 이가 있고,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지키고자하는 자가 있다. 쫓기는 자가 있다면 쫓는자도 있을 것이고 산자가 있다면 죽은자도 있을 것이다. 어둠이 있다면 밝음이 있을테고, 과거가 있었으니 미래도 있을테다. 그리고 또 사실이 있다면 거짓도 있을 터... 템플기사단 혹은 프리메이슨과 같은 소재는 수도없이 많다. 하지만 작자는 말한다. <템플기사단의 검>에는 매우 정확한 조사자료가 이용되었다고. 그러니 믿지 못하겠다면 직접 찾아가서 확인해 보기 바란다고. 사실 팩션이란 게 그런 것 같다. 역사적인 사실을 배경으로 깔아놓고 그 위에 섬세한 상상을 입히는 것. 그런것이 팩션은 아닐까 싶기도 한데... 재미있냐고? 책을 읽으면서 나는 가장 먼저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를 떠올렸다. 아니 떠올렸다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크게 이슈가 되었던 작품이기에 아직도 그 장면들이 기억속에 남아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글의 구성이 비슷하게 느껴졌다는 말이 더 솔직한 말일게다. 종교기호학 교수였던 랭던과 암호전문가인 손녀 소피가 <다빈치코드>를 이끌어갔다면, 여기서의 주인공 홀리데이 박사는 역사를 강의하는 교수이고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헨리의 손녀이자 홀리데이의 조카인 페기는 사진작가이다. <다빈치코드>가 살인을 동기로 옛 과거를 쫓아갔다면 <템플기사단의 검>에서는 죽은자가 숨겨두었던 검 하나가 옛 과거를 쫓아가는 매개체로 등장한다. 그 뒤의 이야기는 말하지 않아도 대략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다빈치코드> 뿐일까? <인디아나 존스>나 <미이라>와 같은 영화가 책을 읽는 내내 나를 따라왔다. 흥미롭냐고? 잘 짜여진 구성은 그랬다. 이 이야기를 가지고 또하나의 <인디아나 존스>를 만든다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주 솔직하게 까놓고 말하자면 그다지 흥미로울 것 없는 소재였다는 말도 되겠다. 뭔가에 짜맞춘듯이 척척 들어맞게 흘러가고 있는 이야기의 흐름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덮는 그 순간까지 <다빈치코드>를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남녀가 한팀이 되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모양새 때문이었겠지만 딱히 뭐라고 말하지 않아도 풍기는 뉘앙스가 너무도 비슷하다. 신템플기사단. 그 역사의 고리를 연결하기 위해 선택되어진 또하나의 인물. 그 닥터 홀리데이가 이미 정해진 루트를 밟아가고 있었다는 건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시원하게 풀린다. 마치도 화살표 방향처럼 주인공에게 하나씩 건네지는 메세지와 등장인물들은 그들을 방해하기보다는 도우미의 역할로 보여졌던 까닭이다. 결국 비밀의 끝에 다다랐지만 그에게 남겨진 말은 시작과 똑같은 거였다. 비밀이 너무 많다는..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뭐 이해하려고 들면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얄팍한 함정처럼 보여지던 브로드벤트 변호사라는 존재다. 초반에 등장해 뭔가 쥐고 있을것처럼 보여지던 그 인물은 약간 허탈하다.

종교와 정치가 교묘하게 서로를 이용해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건 없어 보인다. 타락된 모습의 대표급이 바로 정치와 종교일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도 아마 그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사실 그 종교를 제대로 된 종교로 바라보지 않는다. 하나의 소설을 읽고 뭐 그렇게까지 거창한 생각을 하느냐고 우습게 들릴수도 있겠지만 작금의 종교적인 모습처럼 가식적이고 거짓된 것은 아마 없을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옛날처럼 종교가 정치를 버리고 정치가 종교를 버리는 그런 순간이 또 오지 말란 법은 없을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하고 생각했었던 프리메이슨이나 템플기사단의 후예가 지금까지도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 것은 이미 오래전에 밝혀진 일이니 그리 놀랄일도 아니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아니 공개될 수 없는 복음서가 이 땅위에 존재한다는 것도 사실이고 그것은 공개되어서는 안되는 거라는 이색적인 논리에도 어느정도는 수긍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해도 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은 충격과 충돌이 존재할테니 하는 말이다. 책속에서 닥터 홀리데이에게 전해졌던 그 마지막 말 "비밀이 너무 많아" 는 우리 모두에게 전해주는 메세지처럼 들리기도 했다. 날이 갈수록 덩치만 커져가는 종교건물의 모습을 보면서 저들은 무엇이 두려워 저토록이나 두터운 벽을 둘러쳐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려는 것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형식과 허울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그런 종교를 그려본다.

유독 눈길을 끌었던 부분은 가장 마지막에 있던 작가노트였다. 오죽했으면 그렇게 말했을까 싶어서.. 그만큼 이 책의 소재에 관한 이야기들이 세상속에 많이 떠돈다는 말이 될수도 있을 것이다. 책속에서도 대화를 통해 언급하고 있듯이 자판기만 두드려대면 거짓같은 진실과 진실같은 거짓이 무작위로 쏟아져나오는 세상이다보니 그렇게 말 할 만도 했겠다 싶어진다.  작가가 어느정도는 사실에 입각하여 쓴 글이라고 했던 말처럼 책속의 주인공이 템플기사단에 관해 연구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우연은 아닌듯 싶다.  템플기사단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를 새롭게 얻을 수 있어 좋았다. 여하튼 속도감을 놓치지 않았던 책임에는 분명하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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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잡학상식
손영란, 조규미 지음, 김영진 일러스트 / 삼양미디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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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고 가장 먼저 목차를 살핀다. 우와~ 많다. 목차만 훑어보아도 정말 잡학사전이군! 할 만하다. 인체와 질병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늘 먹는 음식에 관한 것들, 과학이나 우주에 관한 것들, 동식물에 관한 것들, 문화나 유래에 관한 것들에 대하여 쉽고 재미있게 풀어주고 있음이다. 상식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알 만한 사항들도 꽤나 많다. 말처럼 상식이기 때문이다. 호기심 많거나 소소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꽤나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기야 우리 모두가 이런 잡학 상식 정도는 알고 있는만큼 도움이 되긴 하겠다. 지금은 모르는 게 약인 것보다는 아는 게 힘이 되는 세상이니 말이다. 짤막 짤막한 형식으로 되어 있으면서 양념처럼 곁들여져 있는 그림들도 재미있다. 부러 재미있게 그린 것 같은데 아이들이 보아도 무슨 내용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듯 보인다.

'키메라 혈액형'이라고 들어 보셨는지? 한 사람이 두가지 혈액형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말인데 글쎄다... 실제로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을 것 같다. 짬뽕 좋아하는 사람이 꽤나 많을게다. 그런데 그 짬뽕의 원래 의미가 "밥 먹었니?" 묻는 말이었단다. 중국말로 "밥 먹었니?" 라는 '츠판'의 사투리였던 '샤퐁'이라는 말을  일본사람들이 '찬폰'으로 알아들었고 그 '찬폰'이 한국으로 오면서 '짬뽕'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호떡 집에 불났다는 말처럼 우리가 흔히 쓰는 속담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실려있다. 정신없이 시끄러운 걸 보면 호떡집에 불났다는 표현을 쓰지만 실제로도 호떡집에 불이 났었다는 '만보산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의 술책으로 조선농민과 중국농민이 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전국 각지에서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나 중국 상점이나 호떡집들이 거의 모두 불에 타버렸던 사건이란다. 깨물면 꿀물 흐르는 호떡의 달콤함속에 이런 이야기가 숨어 있을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이 자겸의 물고기라고 하는 굴비에 대한 일화도 재미있다. 비겁하게 굴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 굴비였다니 하는 말이다.

햄버거의 '햄'은 '함부르크'의 앞 글자에서 나왔다거나, 마카로니는 이탈리아어로 '와, 맛있다'라는 뜻으로 '와, 맛있다 (마 카로니!)"가 마카로니로 변했다는 말, 더구나 마카로니는 이탈리아가 아닌 중국의 음식이었다는 걸 알고는 정말? 하고 눈이 동그래지기도 했다. 키위의 원래 이름은 키위가 아니었다는 걸 아는가? 뉴질랜드가 종자를 도입, 개량하면서 자신들의 국조(國鳥)인 키위새의 이름에서 '키위'를 따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하이힐이 더러움을 피하기 위해 나왔다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알테지만 그 하이힐을 맨처음 신었던 것이 남성이라는 말은 처음 알게 되었다. 키 작은 남성을 위해 만들어진 남성용이었다는 말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반신반의했지만 그중에서 가장 재미있고 놀라운 이야기를 들어보라 한다면 산타클로스 이야기를 으뜸으로 꼽을 수 있겠다.  빨간색 옷을 입고 빨간색 모자를 쓴 산타클로스가 코카콜라를 위해 태어난 인물이라면? 아마도 믿고 싶지 않을게다. 하지만 사실이다. 1931년 코카콜라는 추운 겨울에도 콜라를 팔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콜라를 마시는 산타클로스의 모습을 디자인하게 되었는데 코카콜라 회사의 상표를 상징하는 빨간색을 산타클로스의 옷으로, 코카콜라의 풍부한 거품을 상징하는 것으로  흰 수염을 그렸다고 한다. 그렇다고해서 산타클로스의 존재가 아이들에게 동심을 심어주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상업적인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다고는 생각하지 마시라! 산타클로스의 모습만 그렇다는 것 뿐이니.. 알고 있듯이 산타클로스는 실존 인물을 모델로 태어난 인물이다. 터키 지방에 살았던 성 니콜라스 주교가 매년 12월 6일 어린이들에게 작은 선물을 나누어 주던 것이 산타클로스의 배경이다. 그 후 유럽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어 매년 12월 6일을 성 니콜라스 축일로 기념하게 되었는데 미국으로 이민 가게 된 네덜란드인들에 의하여 성 니콜라스의 영어 발음인 산타클로스로 바뀌게 되었고 축제일도 12월 25일로 바뀌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크리스마스는 아기예수가 태어난 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탄일이라는 말은 없어져야 한다. 어떻게해서 그런 이야기가 생겨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도대체 이 세상속에 만들어진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좋은 의미로 전해져오는 아름다운 이야기만큼은 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익만을 위해 변질되어버리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서글픈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만약에 당신의 이름을 빨간색으로 적으라고 한다면 기분이 어떨것 같은가? 아마도 인상을 쓰지 않을까 싶은데... 그러나 안심하시라. 당신의 이름을 빨간색으로 적는다해도 무탈할테니.. 중국의 진시황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하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붉은 색이 온갖 좋은 의미를 다 가졌다고 생각한단다. 그런데 진시황이 그 좋은 의미의 색을 저 혼자만 쓰고 싶어서 누구도 붉은색으로 이름을 쓰지 못하게 했고 만약 그것을 어길 경우 죽음을 면치 못했을테니 사람들은 당연히 붉은 색으로 이름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하여 빨간색으로 이름을 쓴다는 것이 죽음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한사람의 욕심이 그토록이나 오랜 세월동안 우리의 정신을 지배해 왔다고 생각하니 참 어이가 없다. 그렇다해도 우리는 아마 붉은 색으로 자신의 이름쓰기를 꺼릴 것이다. 그만큼 이미 오래되어 굳어진 속설을 깬다는 것이 만만찮을테니... 쓴다고해도 그 꺼림직함을 이겨내기가 쉽진 않을테니..

음주운전을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알래스카로 가라. 달팽이도 이빨이 있다, 무려 25,600개나!  지구온난화의 주범이 소라는 걸 아시는지? 소나 양 염소같이 되새김질 하는 동물들이 뿜어내는 메탄의 양이 장난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메탄 발생량의 10%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모두 소고기를 먹지 말아야 할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동물이 무엇일까? 답은 지렁이다. 공룡과 함께 살았고 지독한 기후변화도 이겨냈으며 심지어 히로시마의 원폭속에서도 살아남은 식물이 있었다. 바로 은행나무다. 놀랍지 않은가? 일전에 읽었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처럼 거꾸로 나이를 먹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태어나서 첫돌이 되면 예순살이 된다고 하니 그사람들은 딱 예순살까지만 사는 것일까? 이래저래 참 복잡 미묘한 것이 사람사는 일인것 같다. 지금까지 말했던 이야기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만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라. 재미있고 유익한 그야말로 상식으로 알아야 할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어디 이것뿐일까? 이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좀 더 많은 욕심을 부리고 싶었을 사람들의 마음을 보게 된다. 더 많은 이야기를 통해 더 많은 상식을 전해주고 싶었을테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상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복잡한 세상을 살면서 알아두면 좋을 다양한 분야를 알기 쉽고 재미있게 다루어주고 있다. 한번쯤 읽어보아도 손해나지 않을 책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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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정벌레 살인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139
S.S. 반 다인 지음, 신상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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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추리소설에 푹 빠져 허우적거릴때가 있었다. 한번 빠져들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 추리소설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그 치밀한 구성에 혀를 내두르기도 한다. 시작하자마자 범인이 여기있소,라고 밝히는 작품이 있는가하면 끝까지 범인의 행방을 오리무중으로 몰아가는 작품도 있다. 어느것도 긴장을 늦추지 못한다. 그런데 가끔은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도무지 추리소설답지 않은 맛을 내고 있을 때는 당혹스럽다. 어디쯤에선가 추리소설의 긴박함을 찾아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며 끝까지 갔다가 내내 실망한적도 여러번 있다. 나 학창시절에는 애드거 알란 포우나 아가사 크리스티같은 작가의 작품을 주로 읽었던 것 같다. 스릴 만점이다. 그 재미로 추리소설을 읽기도 하지만 함께 범인을 찾아나서는 그 여정 또한 괜찮은 여행이다. 미리 밝혀진 범인을 상대로 심리전을 펼쳐가는 것도 놓칠 수 없는 매력이다. 내가 추격자가 되어 누군가의 뒤를 밟고 있다는 그 느낌, 참 멋지다.  나에게는 지금 한창 유행하고 있는 환타지소설보다 훨씬 더 매혹적이며 그 유혹앞에 무너지기를 거부하고 싶지 않음이다. 

고전이라는 말이 있다. 오래된 것들. 하지만 그 오래된 것들속에는 우리 삶의 이치가 담겨있어 참 좋다. 작품 하나하나가 가벼운 재미만을 탐하지 않고 자신만의 철학을 담고 있는 것 같아 소홀히 대할 수가 없다. 정말 오랜만에 아주 오래된 추리소설을 선택해 보았다. 그리고 나는 빠져들었다. 치밀한 구성이 나를 긴장하게 했고 범인과 심리전을 벌이며 끝까지 쫓아가는 주인공 번스의 인내심에 내심 놀라기도 했다. 흔하지 않은 이집트신화를 배경으로 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파괴와 재생의 여신 사크메트를 내세워 범죄를 계획했다는 것도 그렇고 죽은 사람의 심장을 저울에 달아 생전 진실의 무게를 가늠한다는 저승의 신 아누비스를 내세워 정의를 심판하는 것도 멋졌다. 한 노인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미스터리의 세계. 책장을 넘길때마다 펼쳐지는 범인과 추격자의 심리전이 만만찮다. 그 호흡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절대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함정이 많은 까닭이다. 그 함정마져도 멋지게 드러내보이는 수법에 혀를 내두른다.

현재 있는 모든 것들은 애초에 이름이 없었다던 어느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모든 형식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그 만들어진 틀에 의해 자신들을 다시 만든다. 그래서 법의 정의조차도 때로는 범인을 감싸주고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할 때가 있다. 인간이 만든 허례와 허식으로 인하여 인간성이 말살되어버리는 경우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양이다. 이건 아니라고 한번쯤은 짚고 넘어갈 수 있는 것도 만들어진 것들에 꿰어 맞추다보니 진실이 죽어버리고 그 진실을 담고 있던 모든 것들은 살아도 숨을 쉬지 못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강하게 다가왔던 의미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너무나도 치밀하게 짜여져있던 범죄의 구성앞에서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던 형식적인 법의 틀. 그 틀조차도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알았던 범인의 치밀함앞에서 추격자 번스와 검사 매컴, 형사부장 히스는 아연실색, 법이라는 틀을 들이댄다면 더더욱 범인을 도와주는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니 어쩌랴.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께서는 결연하게 심판을 내려준다. 정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는 현실적이지 않으나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있을지도 모를 신의 이름으로. 

처음 이 책을 접하면서 예외적이지 않게 제목만으로 나는 미리 한조각의 편견을 내세우고야 말았었다. 이집트 문화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피라미드 신전이라거나 파라오의 저주와 같은 유적 발굴과 같은 류의 사건현장이 배경일거라고. 그것을 빼놓고 이집트신화를 말한다는 건 왠지 용납되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조금은 그랬다. 유적발굴에 관한 소재가 있기는 했다. 그것이 범죄의 동기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추리소설속에는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이 숨어 있었다.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던 인간의 이기심이라거나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어설픈 감정들이 이 작품의 기초를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었다는 말이다. 사랑과 욕망을 동시에 얻기 위해서 너무나도 치밀하게 짜여져 있던 범죄의 구성. 그러나 그 범죄를 감추기위한 방법이 치명적으로 다시 자신을 옭아매고 말았던거다. 지키고자했던 사랑과 욕망은 집착만으로는 지켜질 수 없는거라는 만고의 진리를 다시한번 보게 된다. 통쾌한 승리였다.

정말 오랜만에 읽었던 추리소설. 그것도 아주 오래된 작품을 읽으면서 다시 느낄 수 있었던 그 긴장감이 좋았다. 남들은 연말이라고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 얼마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긴장을 늦추지 못할수도 있고 어찌 생각하면 만사가 풀어져버리는 상황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중에 만난 이 소설은 자꾸 느슨해지려고하는 내 자신을 위한 하나의 느낌표가 되어준 것 같아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이번 기회에 다시한번 이집트신화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떠도는 이야기만으로 이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들이 너무도 많은 까닭이다. 흥미로웠던 작품이었다. 그리고 재미있었다. 추격자 번스의 인간적인 고뇌와 정의로운 심판이 나를 멋지게 휘어잡았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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