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 금강인문총서 2
석길암 지음 / 불광출판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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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서역국으로 불경을 얻으러 떠났던 삼장법사의 일행을 그렸던 <서유기>를 생각한다. 여기서 서천서역국은 단순히 중앙아시아권을 말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서역을 알면 불교를 알게 되고 불교를 알면 서역을 알게 되는 순환을 따라 서천서역국은 또 하나의 유토피아였으며 새로운 문화를 향한 우리의 목마름이기도 했었을 것이다. 단순히 무역로로만 알고 있었던 실크로드가 또하나의 종교를 품었다는 사실은 미처 챙기지 못했던 중요한 무엇처럼 내게 다가왔다. 원래는 삼장이라는 말이 인도불교에서 경과 율과 논의 삼장에 능통한 자를 칭했던 말이라 한다. 그렇지만 동아시아 불교권에서는 번역자, 즉 역경승들을 호칭하였다 하니 법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났던 자들에게 분명 그곳은 또하나의 새로운 세계였음일 것이다. 불교는 그렇게해서 모든 정보와 문화와 이념세계를 안고 동쪽으로 왔다!

수문제에서 시작되어 측천무후 시대에 가장 번성하였던 중국의 불교는 수도인 장안을 발판 삼아 그 위세를 떨쳤다. 수많은 역경승들과 구법자들이 모여들었고 너도나도 듣고 보았던 새로운 정보를 나누었을테니 그 흐름이 대단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면 그 대표적인 번역자들로는 누가 있었을까? 지금의 이란지방에 있던 나라 파르티아의 왕자였다는 안세고가 전법의 뜻을 품고 한나라로 와 불전을 번역했다. 이로부터 중국은 한문으로 된 불전을 가지게 되었고 중국불교 뿐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두번째로는 중국에서 태어나 아홉살에 인도로 가서 불경을 배웠다는 구마라집이다. 인도어를 소리나는대로 읽은 것으로 '라집' 또는 '집'이라고 부른다는 그의 경론. 그의 번역을 계기로 중국불교는 본격적으로 불교를 이해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북인도 출신의 승려 보리류지, 서인도 출신의 전제가 있었다. 중국에서 번역작업을 하였던 서역 출신의 승려들 대부분은 당시 집권자들의 후원을 받았기에 안정된 환경속에서 번역작업을 할 수가 있었다. 경전을 강의하고 해석하는데 뛰어났다는 현장도 있다. 인도의 서역에서 구법하다가 대,소승의 교학을 배웠다는 그는 불상이나 경전류등 많은 것들을 중국으로 들여오기도 했다. <대당서역기>를 당태종에게 바친 인물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 말을 들여와 내나라 말로 번역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장의 '오종불번'을 보면서 그들이 번역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심을 하였으며, 변질되어지지 않은 제대로 된 뜻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알게 된다. 그러니 역경승이라는 자들이 대단한 학식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대승불교는 자신들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는 방법으로 경전을 택했다. 경전의 내용을 나누는 기본적인 방법이 인연분, 정종분, 유통분이라 한다. 인연분은 경전이 설해지게 된 인연을 설명하고, 정종분은 경전이 말하고자 하는 중심부분이며, 유통분은 경전의 유통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보통은 인연분이나 정종분만으로 충분했지만 대승불교도들은 경전의 내용을 알리고 보증하는 일에 더 큰 공을 들였다 한다. 물론 동아시아의 불교가 받아들인 것도 대승불교였다. 따라서 불교의 흐름이 역경에서 사경으로 변천되어짐을 알 수가 있다. 사경은 경전을 필사한다는 말로 큰 도시의 사원마다 사경소를 설치하여  경전유포에 힘을 썼다. 또한 왕들이 불교를 정치이념으로 쓰기도 했으니 국가차원에서 사경원을 설치하기도 했다. 초기의 불경사경이 새로운 가르침과 문화를 전파하는 도구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일일이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는 일이었으니 사경만으로는 전법을 하기에 그다지 능률적이지 못했다. 그런 까닭으로 인쇄문화가 생겨나게 된다. 서로가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이라고 주장하는 우리나라의 <무주정광대다라니경>, 일본의 <백만탑다라니>, 중국의 <묘법연화경>도 모두가 불경의 인쇄본이었다. 불교에 의해 인쇄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불교의 힘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같은 길을 두사람이 가지 말라고 했다던 부처님의 말씀만으로도 전법의식을 대함에 있어서 얼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겼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해인사의 장경판전만이 알려져 있지만 이름난 사찰에 가보면 대개 경판을 보관하는 별도의 판전을 부속건물로 두고 있다고 한다. 그것만 보더라도 사찰이 인쇄문화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인쇄혁명이 동양에서보다 서양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읽고나니 뒷맛이 씁쓸했다.

불경을 번역함에 있어서 통일되지 못해 인도불교에서와 같은 경,율,론 삼장의 정형적 분류는 불가능했다. 저마다 제멋대로 번역했으며 번역어조차도 서로가 달랐다. 더구나 언제 어디에서 누가 어떻게 번역을 하였는지조차 확실하게 알 길이 없었다. 이런 과정을 문제로 인식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도안이었다. 도안은 번역되어진 경전들에 주석을 붙였고 그 유래를 상세하게 밝혀주었다. 이것을 기점으로 중국인들이 불경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에 표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하니 괄목할 만한 일이다. 위경이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세상은 항상 반쪽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으니.. 하지만 그 위경조차도 불교의 가르침을 새로운 땅에 정착시키기 위해서였고 그 가르침을 통해 통치의 의도를 달성하려 했다는 목적의식이 있었다 하니 불교가 얼마나 막강한 힘을 과시했는가를 알게 된다. 더구나 혼자만의 유아독존적이 아니라 토속신앙등을 함께 아우르며 상생을 도모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일 테다. 그랬음에도 출가승려가 지켜야 할 '네가지 규칙'은 왠지 생소하다. 그것이 뜻하는 바대로 수행을 하는 스님을 많이 봐오지 못했던 까닭은 아닐까? 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쉽지않은 규칙을 만들었는가를 따져보지 않을 수가 없다. 사회의 호의에 의존하라! 다시 말한다면 사회와 끝없이 소통하며 세속사회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들 삶의 목표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그 '사의 (네가지 규칙)' 를 살펴보자면 이렇다. 분소의 : 다 닳아서 해진 천조각을 모아서 꿰매어 만든 옷만 입을 수 있다. (이 말은 오래전 입적하신 해인사의 성철스님을 떠오르게 한다) 수하주 : 나무 아래에서만 생활해야 한다. (사찰의 대부분이 산중에 있는 이유일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산중을 떠난 사찰내에서 문제가 많이 발생하는 듯 하다)  걸식 : 탁발해서 얻은 음식물만으로 생활하라.(지금도 탁발은 수행과정의 일부라고 들었다)  진기약 : 소의 오줌으로 만든 약으로 이것만을 약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대목은 살짝 이해를 비켜간다. 소를 우상시하였던 인도에서부터 시작된 때문은 아니었을까?)

불상이야기속에서 보게되는 독특한 보살상들이 있다. 낯설지 않은 포대화상의 모습.. 뚱뚱한 몸집에 배는 불룩하지만 그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한.. 지팡이 끝에 커다란 자루를 메고 다녔는데 그 속에서 중생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내주었다는 그를 사람들은 미륵보살의 화현으로 여겨 그 모양을 그린 후 존경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한다. 베품의 상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지장보살이 바로 신라의 왕자 김교각 스님을 말한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지옥같은 이 현실속에서 자신을 구할 수 있는 대상으로 그려진 그를 일본에서는 참회의 대상으로 더 깊이 신앙한다고 한다.  불교를 통한 문화의 전승과 전파과정이 흥미로웠다. 그리스로마신화와 우리신화속의 주인공들이 갖는 일체감에는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에로스를 되찾기 위해 저승으로 떠났던 프쉬케의 이야기와 바리데기 공주가 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서천서역국으로 떠나는 이야기는 그만큼 오랜시간을 우리 민족의 의식이나 기억속에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불교의 특징적인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다못해 억불숭유 정책을 썼던 조선에서도 불교가 무교와 함께 우리곁에 살아남았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것으로 인해 불교와 무교의 경계선이 모호해지기는 했지만 역설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불교와 무교의 정체성은 분명하게 다른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세종대왕이 한글의 실용화를 테스트하기 위해 첫번째 대상으로 불서를 꼽았다는 것은 우리의 실생활속에서 불교적 언어 생활을 외면하고는 새로운 말과 글의 사용이 불가능 했던 까닭이라고 한다. 그만큼 일상생활속에서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말부터 넋두리까지 불교아닌 것이 없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시껍했네'라는 말이 불교의 '십겁'으로부터 왔으며, '이판사판'이라는 말 또한 공부하는 승려와 잡역에 종사하는 승려를 나누었던 말이라는 것은 몰랐던 사실이다. '찰나'라는 말도 그럴 것이다. 그렇듯 우리의 말길과 뜻길에서도 만날 수 있는 것이 불교였다. 사흘이라는 행사기간동안 마지막 셋째날은 송나라나 여진등 타국의 사신도 참여하여 특산물을 바쳤다는 팔관회.. 단순한 불교행사가 아니라 불교행사라는 명목을 내세워 고려의 입지를 동아시아에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는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전래문화를 사이비니 구닥다리니 하면서 남의 문화만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일침이 상당한 아픔을 남기기도 했다.  '전통으로의 복귀', 전통으로의 복귀는 이미 복귀가 아니라 또다른 방식의 나아감이었던 것이다. 역사는 선택을 강요하기 마련이고 가치의 우위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훗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때 우리가 놓친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때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하는 것에 대한 냉정한 평가이다. 그것은 선택의 선악을 가리자는 것이 아니며, 끊임없이 선택의 길목에 서야 할 우리가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준비 작업이기 때문이다. (254쪽)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이 글을 다시한번 되새겨본다. 이 책을 통해 단순히 불교라는 이념만을 보게 될 것이라는 짐작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불교길을 따라 너무나도 많은 것을 보고 배웠던 시간이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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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역사 - 상식으로 꼭 알아야
이경윤 지음 / 삼양미디어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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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하나, 말이 끄는 두 대의 마차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온다.. 경쟁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뭇 진지하기까지 하다. 장면 둘, 넓은 원형의 경기장 안으로 장정 두 사람이 들어온다.. 그들 중 어느 한사람이 죽을 때까지 그들은 싸운다.. 그리고 스텐드에 앉아 그들을 보며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장면 셋, 어린 꼬마가 부모와 떨어져 혹독한 훈련을 받으러 떠난다.. 늑대와 마주쳐 싸워도 이길 수 있는 아이.. 그리고 그 아이는 전사가 되어 돌아온다. 끝도 없을 것같은 경쟁과 죽음을 함께 보여주는 시대적 배경이 압권이었던 영화 <벤허>, <글래디에이터>, <300> 의 장면들이다. 그 영화의 장면이 되는 배경이 바로 로마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전에 존재했었다던 로마가 지금까지도 이렇게 깊이 우리의 의식속에서 회자되어진다는 것만 보아도 대단한 국가였음엔 틀림없어 보인다.

로마라는 소리를 듣게 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아마도 카이사르 (보통은 율리우스 시저 라고 부름) 와 그의 부하 안토니우스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하나 더 곁들인다면 그들 곁에 존재했었던 이집트의 여인 클레오파트라를 빼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로마가 번성했을 때 도로가 많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생겨난 것도 그때문이다. 그 도로를 건설하게 되는 목적은 수많은 속주를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로마는 정복한 나라들을 모두 속주로 삼아 다스렸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당시의 로마인들이 육교나 다리, 터널등을 이용하여 도로가 끊어지지 않게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우리가 흔히 마주치는 말, "주사위는 던져졌다" 라거나 "왔노라,보았노라,이겼노라!", "브루투스여, 너마저!"라는 말이 로마의 영웅 카이사르가 했던 말이라는 것쯤은 알 만한 사람은 다안다.  정적 폼페이우스를 잡기 위해 들어갔던 이집트에서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만난다. 그가 죽고 다시 안토니우스의 품에 안기게 되는 클레오파트라는 두 남자에게는 분명 맹독이었을 것이다.

음식과 오락거리가 전부 공짜로 제공되고 3일중 하루가 쉬는 날이라면 당신에게는 천국일까? 바로 그 천국이 로마이기도 했다. 문화적 풍요를 누렸으면서도 온갖 타락과 쾌락이 난무했던 나라, 로마.. 기나긴 역사속에서 수많은 영웅들이 태어났고 죽어갔다. 그 역사를 쓰기 위하여 수많은 황제들이 시대를 거쳐갔으며  많은 사건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1장에서 보여주는 로마의 건국신화를 보면서 왜 그리스로마신화라고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영웅 카이사르의 등장으로부터 로마제국은 시작되어졌고 그 뒤를 이은 옥타비아누스는 '만인을 능가하는 권위'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으며 200년 평화의 시대인 '팍스 로마나'의 서막을 열어주었다. 그 과정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이야기도 생겨났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함께 존재하는 법이다. 어찌 훌륭하고 좋은 황제들만 있었을까? 이 책에서는 악명 높은 황제로 너무나 잘 알려진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등 4명의 황제에 대해 말해주기도 한다. 자신을 황제의 자리에 올려놓았던 어머니를 죽이게 된 후 -물론 어머니를 향한 반항심에 그렇게 되었지만-  폭군으로 변하게 되는 네로황제의 이야기,  자신을 거역한 사람들이나 중죄인을 잔인한 검투사 경기장에 집어넣었던 칼리굴라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졌었다. 로마의 정복에 쓰러져간 나라들이 모두 속주가 되고 속주를 다스리는 사람들의 횡포도 날로 심해져 많은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정복자의 횡포와 가진자의 탐욕은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모양이다.

이 책에서는 종 6장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 로마는 어떻게 세워졌을까? 를 다루는 1장에서는 그리스 신화를 받아들이는 로마의 배경과 로마를 건설한 로물루스이야기와 시민중심의 왕국이었던 당시의 로마를 다루고 있다.  2장에서는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위기를 맞게 되는 로마를 그리고 있으며, 속주를 다스리는 귀족들의 횡포에 맞서는 노예들의 반란 -스파르타쿠스의 난과 같은- 이 보이기도 한다. 3장을 통해서는 로마의 제정이 시작되는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4장에서는 앞서 말했던 악명높은 황제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한결같이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으나,로 시작되어지는 황제들의 악행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로마의 평화를 이야기하는 5장의 끄트머리에서 우리는 <명상록>의 저자인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를 만날 수 있다. 세상물정 모르는 왕으로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멸망으로 치닫는 로마를 다루고 있는 6장에서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모델이 되었다는 콤모두스의 이야기가 있고,  황위를 경매에 붙이는 황당한 사건도 보여준다. 혼란의 시기에 노예출신의 황제가 나타나기도 하고,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할되기도 한다. 다시 통일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때에는 종교에 의한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스도교가 들어오기 전의 로마속에는 모든 신들이 함께 했었지만 그리스도교가 들어온 뒤로 종교적인 혼란이 왔다는 점은 흥미롭다. (신기하게도 지금의 기독교와 별반 다르지가 않다!) 아울러 각장의 마무리에 칼럼을 하나씩 실어주었는데 로마의 변천과정을 건너뛰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2200년의 역사를 뒤로 한 채 로마제국은 사라졌다. 그저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로마의 역사를 이 한 권의 책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역사는 이긴자들이 기록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들의 역사는 정말 흥미진진했다.  그 안에 얼만큼의 진실이 있고 얼만큼의 거짓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안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많을 것이다. 기나긴 영화 한편을 보고 난 듯한 느낌이다. 평소 갖고 있었던 궁금증에 대한 해결도 되었지만 그 흐름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베수비오 화산재에 덮혀 사라졌다던 폼페이 유적지를 한번 가보고 싶어진다. 그것은 과연 신의 심판이었을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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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령들의 귀환 - 1636년 고립된 한 마을에서 벌어진 의문의 연쇄살인사건 꿈꾸는 역사 팩션클럽 3
허수정 지음 / 우원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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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모포 왜관... 부산은 일본과 가깝기 때문에 왜구의 노략질이 많았다. 그런 왜구를 우리의 통제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만든 것이 왜관이다.  조선은 구역을 정해 왜관을 짓고 왜구들에게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왜관을 통해 왜구들은 우리나라에서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가 있었다.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온화했기에 그들은 시끄럽기만 한 본국보다 조선땅에서 기거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들은 점점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가려 했고 그러다보니 우리 조선인들을 괴롭히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우리 조선은 왜구들과 경계를 두기 위해 성벽을 쌓았고 성 밖으로 밀려나게 된 왜구들은 조선인의 영역을 침범하기에 이른다... 왜관이 생긴지 100년, 그 무렵 조선을 찾는 왜인들의 수는 엄청났다. 왜인들은 점차 조선의 통제에서 벗어났고, 통제 불능의 왜인들은 조선에게 군사적 위협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과의 평화를 깨뜨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일본인에게 낙원과도 같았던 조선의 왜관. 조선은 왜관을 통해 일본과의 평화를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이 사실은 모 방송의 역사스페셜을 보면서 내가 메모했던 글이다. 그리고 새롭게 알게되었던 역사적인 사실이기도 했다. 아마도 이 소설은 그 당시가 배경으로 쓰인 듯 하다. 그런데 전체적으로는 전쟁후에 돌아가지 못하고 낙오병이 되어버린 일본 사무라이 군대를 다루고 있다. 읽고 난 뒤의 느낌은 좀 그렇다. 왠지 깔끔하지 못한 뒷끝처럼 무언가 미진한 듯이..  전체적으로는 영화를 만들기 위한 시나리오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인물과 배경에 그만큼 할당되어진 양이 많게 느껴진다는 것.. 그런데 사실 따지고보면 배경그림이 그다지 많지는 않으니 하는 말이다. 거기다가 깔리는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낯익다. 그리고 어둡다. 새롭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던 팩션.. 나에게 있어 역사팩션이라는 말의 유혹은 상당히 강하다. 피해가려고 하면서도 여전히 흘끔거리는 나를 발견하게 되곤 한다. 그랬기에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다. 시대적인 배경을 제대로 읽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다.

낙오된 일본 사무라이들이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고립된 듯한 산골마을을 찾아들면서 그 마을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사무라이들 중에서도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마을사람들을 지키고 싶어한 자가 있었지만 전쟁의 망상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자들에 의해 마을을 떠나고 말았다. 그 마을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은 절망 그 자체였으며 삶에 대한 의미조차 상실해버린다. 병력을 키우기 위해 태어난 많은 아이들.. 그렇게 병사로 훈련되어지는 아이들이 자라나 청년이 되었고 이미 세뇌되어버린 아이들에게 미래는 없었다. 어쩌면 그들이 겪어내고 있었을 그 암울함이, 그 통탄이 이 글의 전체적인 분위기로 자리잡은 듯 하다. 내내 칙칙하고 끈적인다. 거기다가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그 까마귀들의 존재는 거부감마저 들게 한다.  그 칙칙함속에서 한가닥의 밝음이 있다면 박명준이다. 사람냄새를 풍기는 사람...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사람.. 그리고 소중한 것을 지켜내지 못한 사람들의 아픔과 절망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 그리하여 그 고통도 나눌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가 바로 박명준이다. 한국판 셔일록 홈즈라고나 할까? 기막힌 추리력을 자랑하는 명탐정이다. 그가 추리해내는 사건의 실마리들이 이 소설의 내용을 이끌어가고 있음이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소중한 무엇을 지키는 과정이 아닐까.... 세상사라는 건 다른 사람의 눈과 마음으로 바라볼 때 진실을 알 수 있다고... 느닷없이 밀어닥친 고통에 저항하다가 끝내는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마을사람들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씨도 아닌 아이가 태어나 자라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아비의 심정과 그 아비와 자식을 바라보던 어미의 심정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전쟁을 겪어낸 이와 겪어내지 않고 그저 이야기로만 듣는 사람이 다르듯이..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도 그 먹먹한 감동이 밀려오지 않아 당혹스러웠다. 연쇄살인사건의 전말을 파헤쳐가던 박명준의 이야기속에도 이렇다하게 다가오는 진함은 없었다. 그저 사건의 순서를 나열하는 글자에 불과했을 뿐이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죽음의 순간에 어린 윤성호의 이름을 부르며 따듯한 미소를 보내주었던 아버지의 마음을 통해 모든 것을 끌어안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한서림을 보았을 뿐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기기까지 사실 내용자체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 그러다가 작가후기를 읽고나서야 그 의도를 아주 조금은 파악할 수가 있게 되었다. 사진 한장이 전해주었던 느낌.. 전쟁의 후유증 때문에 선천적으로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이, 휠체어를 탄 아이의 그 무심한 눈망울.. 작가는 그 한 장의 사진속에서 전쟁의 참상을 보았다고 했다. 어쩌면 우리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그세서야 이해가 되었다. 살펴보니 꽤나 작품이 많았는데도 작가의 책은 이 소설로 처음 만났다. 책띠에 소개되어진 작가의 작품들을 보면서 한권쯤은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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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에 한번은 동유럽을 만나라 일생에 한번은 시리즈
최도성 지음 / 21세기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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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하고 싶은 여행이 유럽여행이다. 그런데 동유럽이라고하면 어디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폴란드나 체코, 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보스니아, 헝가리,루마니아,알바니아,불가리아등을 이야기한다. 그러고보니 모두가 사회주의체제였던 나라들이다. 지금이야 그렇지않지만 말이다. 그러다보니 내가 가장 가고 싶어하는 네덜란드나 스위스, 오스트리아는 서유럽에 속해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알게 된다.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여행을 하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무엇을 주제로하여 여행을 떠나는가에 따라 그 여행의 성격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그것을 통해 여행자의 생각이나 추구하는 바를 읽을수도 있다. 무작정 떠난다는 여행, 말 그대로 발길 닿는대로 바람가는대로 떠나는 여행도 있을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여행에 대해 무모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아무런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그야말로 자유롭게 하는 것이 여행이라고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여행을 떠난다는 그 자체가 자유다. 그러니 그 자유를 좀 더 풍요롭게 느끼고 싶은 까닭에 나 역시 테마여행을 좋아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 여행을 할 수 있나요?" 저자가 곧잘 받는 질문이라고 한다. 나도 저런 질문을 해 본 적이 있었다.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은 여행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찾아낸 것이 테마여행이다. 무언가 주제를 정해 떠나보자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수많은 관광지를 보여주기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 그곳을 거쳐가는 사람들의 냄새에 더 이끌렸다는 저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전작 <일생에 한번은 스페인을 만나라>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문학기행은 정말 멋있었다. 그랬기에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을 숨길수가 없다. 그가 펼져보여주는 동유럽, 과연 어떤 모습일지...

체코... 프라하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곳. <프라하의 봄>이라는 영화도 물론 있었지만 내게는 <프라하의 연인>이라는 드라마를 더 먼저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일까? 프라하는 왠지 안개같은 사랑이 머무는 공간일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나의 기대처럼 저자는 도착하자마자 카를교의 야경을 보여주며 프라하의 낭만을 향해 달려간다. 연인이 주문을 외우며 다리를 건너면 일년후에 다시 프라하에 오게 된다는 그 다리에는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주는 거리의 악사에 대한 전설을 안고 있기도 하다. 위대한 체코인 순위 7위에 오른 얀 후스의 이야기도 있다. 프로테스탄트가 바로 종교회의에서 화형을 당한 후스의 주장을 신봉하며 민족의식을 지향했던 서민과 농민이었다는 말이다. "교회가 부패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종교가 다른 조직으로 변질되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외치며 종교의 자유를 주장했다던 얀 후스... 면죄부를 팔던 시대에 얀 후스의 주장은 먹혀들었을까? 그리하여 그들은 종교의 자유를 얻었을까?  지금의 종교의식에 대해서도 다시한번 되돌아보게 되는 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프라하성의 근위병 교대식.. 우리에게도 근위병 교대식이 있다. 덕수궁이 그렇고 이번에 새단장을 한 경복궁이 그렇다. 내가 찾았던 날에는 비가 내려 제대로 된 교대식을 보지 못했지만 우리나라를 찾는 이들에게 좋은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문지방'을 뜻하는 이름이라는 프라하. 각나라마다 어찌 건국신화가 없으랴 하면서도 체코의 기원이 되는 리뷰세의 이야기는 왠지 신선하게 다가왔다. 문지방이 높아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으니 예의를 갖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가옥을 생각한다. 드나드는 출입문이 작고 문지방이 높은 특징을 가진 것은 머리를 숙이며 자신을 낮추는 마음으로 들어서라는 뜻이 담겨있기도 한...  카를교에 얽힌 석공의 전설, 악마의 기둥에 얽힌 나무꾼의 전설, 그리고 샤르카라는 팜므파탈을 탄생시킨 디보카 샤르카라는 마을의 전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룸이 모티브를 얻었다는 골렘의 전설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을 한다. 악마와의 거래, 누구나 한번쯤은 해보지 않았을까?

프라하의 봄은 오는가, 전설의 도시 프라하, 맥주의 도시 프라하, <돈 조반니>의 고향 프라하 등 멋진 수식어를 앞세우며 내게 다가왔던 프라하는 '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 모차르트를 이야기하고, 드보르자크를 이야기하고, 밀란 쿤데라를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신세계 교향곡?을 듣고 싶게 하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을 기억하게 한다. /체코인이라면 음악인/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모차르크와 베토벤을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는 체코에 가야할 것만 같다.

폴란드... 이번 여행길에는 누구와 함께 할 것인지 기대가 부푼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없이 죽는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詩다. 아니 어쩌면 인터넷상에서 흔하게 마주칠 수 있었던 싯구인지도 모르겠다. 그 시의 주인이 폴란드 출신이란다. 쉼보르스카라는 여인...  그리고 저자는 유명한 염세주의자였다는 쇼펜하우어를 소개한다. 자신의 존재가 남게 의해 가려지는 것이 싫어 식당에 갈 때 늘 두자리를 예약했다는 그와 아침의 풍경을 묘하게 대조시킨다. 바다안개가 시야를 가려 몽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도시 그단스크에서.. 그단스크는 엽서속에서나 존재할 듯한 풍경을 보여준다. 정말 그림같은 풍경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풍경속에서도 비극은 있었다. 1차세계대전이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발칸반도를 둘러싼 이익 다툼이기도 했지만 전쟁은 아주 작고 단순한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져 크고 어두운 진실을 숨긴 채 끝을 내는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전쟁은 땅따먹기다. 누가 더 많이 빼앗는가 하는-)  그리하여 패전국인 독일의 루돌프 히틀러가 2차대전을 일으키게 되고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던 폴란드는 그의 첫번째 대상이 되고 말았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는 쇼팽과 퀴리부인의 박물관이 있기도 하지만 내게는 우리의 옛날 이야기와 비슷한 바르샤바의 전설이 살갑게 다가온다. 폴란드인들이 날마다 꽃을 바치고 있다는 바르샤바의 수호신 인어상의 이야기다. 만세를 부르던 유관순을 떠올리게 한다. 반면에 예술가들의 사랑은 애절하게 보이지만 다분히 이기적이기도 한 것 같다. 프라하에서 만난 모차르트나 베토벤처럼 폴란드의 쇼팽에게도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으로 인한 곡들이 많다. 조르드 상주를 향한 진실한 사랑을 담았다는 <빗방울 전주곡>이나 마리아 보진스키와의 사랑이 담긴 <이별의 왈츠>는 폴란드의 아침풍경과도 같은 느낌은 아니었을까?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지동설을 듣다보니 아우슈비츠다. 저자의 기억처럼 <쉰들러 리스트>나 <피아니스트>,<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는 내게도 안타까움으로 남겨진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아우슈비츠였을까? 늘 궁금했던 것에 대한 답을 얻는다. 지리적 조건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곳이 폴란드에서 가장 중요한 중화학공업지역이었으며 야전군 사령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교황 바오로2세를 바도비체에서 알현하고 물총 세례를 받기전에 얼른 자코파네를 빠져 나온다.

슬로바키아... 사전정보없이 무방비상태로 맞닥뜨렸다는 도시 브라티슬라바 거리의 조각상들은 흥미로웠다. 우리의 거리를 걸으면서도 저런 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맨홀 뚜껑을 열고 머리를 내밀어 몸을 걸친 채 지나가는 여인들을 바라본다는 조각상은 생각하는 것만으로 즐겁지 않은가 말이다. 베토벤이 사랑했던 여인 줄리에타 귀차르디에게 주었다는 <환상곡 풍의 소나타>를 태어나게 한 돌나 크루파 마을 브룬스비크성에서 이 여행은 끝났다. <환상곡 소나타>는 우리에게 <월광> 혹은 <달빛 소나타>로 잘 알려진 곡이기도 하다.

여행가는 말한다. 일생에 한번은 동유럽을 만나라고. 그리고 찾아가는 그곳에서 당신을 반겨줄 천재적인 음악가들의 사랑이야기를 들어보라고.. 아마도 내게 있어서는 가장 세세하게 읽은 여행서가 아닐까 싶다. 그림보다는 글이 더 많은 여행서.. 그러나 그 글속에서 마음속에 풍경하나씩을 그려보게 된다. 저자를 통해 떠났던 또하나의 문학기행, 정말 좋았다. 손빨래로 여독을 푸는 여행자의 모습, 바짝 마른 옷감이 살갛에 닿을 때의 느낌이 상쾌하다고 말하는 여행자의 순수함이 너무 좋았다. 여행이 건네주는 선물은 우리를 너무나도 행복하게 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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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서 만나는 동서양 신화 사계절 1318 교양문고 10
이경덕 지음 / 사계절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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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라는 말을 듣게 되면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이윤기.. 이윤기의 그리스로마신화를 읽어보고 신화에 대해 또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해도 나에게는 틀린 말이 아니다. 아마도 내게 신화속으로의 여행을 부추킨것도 이윤기의 책일 것이다. 이후로 나는 여러나라의 신화와 만났다. 한편으로는 조금 어이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신화를 더 많이 보게 된듯도 하지만... 북유럽신화를 시작으로 이집트신화, 켈트신화 등등 신화는 읽으면 읽을수록 흥미로웠다. 그러다가 우리신화를 찾게 되었고 일본이나 중국신화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처음 그저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처럼 생각되어졌던 것들이 하나하나씩 신화로 재창조되어질 때의 흥분이라니! 어찌보면 아주 단순한 옛날 이야기처럼 보여지기도 하는 신화가 나는 왜 그리도 좋았던 것일까?

신화속에 존재하는 신들은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비록 인간을 만들고 지배를 하기도 했지만 인간과 함께 어울리며 도움을 주고자 했다. 인간이 힘겨움을 호소하면 그것을 해결해주기도 했고 희노애락을 함께 나누어 가질 줄도 알았다. 그랬던 신들이 왜 인간을 버렸을까? 아니 왜 인간을 떠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욕망, 욕심..... 지금의 이 세상을 멍들게 하고 있는 욕심이 그 시대에도 우리에게서 신을 떠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인간의 역사속에서도 욕심으로 인하여 멸망하게 되는 과정은 흔히 만날 수가 있다.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할 때, 그리고 처음의 세상속에는 선과 악의 구분이 없었다고 한다. 먼저 아는자, 프로메테우스에 의해 끝까지 살아남았던 데우칼리온과 피라가 신에게 소원했던 것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신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이 어쩌면 우리 인간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이 치매에 걸리면 가장 먼저 잊는 것이 명사라고 합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우리 생활에서 명사가 가장 불필요한 것이라는 말이지요.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는 것은 바로 동사입니다. 신화도 명사가 아닌 동사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신화는 굳어버린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205쪽)  놀랍다. 그리고 공감한다. 신화는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는 말... 단순한 옛얘기가 아니라 신화가 안고 있는 것들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너무 황당한것 같아 신화를 아이들에게 읽히지 않는다고 하기에 꼭 읽혀야 하는 것이 바로 신화라고 말해주니 의아해하던 후배의 표정이 생각난다. 마음속의 편견을 버리고 신화를 다시 보라고..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물질적, 정신적인 것들을 놓치지 말라고.. 어쩌면 신화는 지금처럼 복잡하고 미묘한 세상에서 버텨낼 수 있도록 해주는 하나의 길라잡이일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신화는 멀리있지 않다. 아주 먼 시절에 쓰여진 이야기지만 지금 우리 곁에 아주 가까이 존재한다. 일주일이 신들의 이름에서 왔다는 것은 기본적인 신화이야기에 불과하다. 단순히 토테미즘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뭔가 안타까운 것들이 그 속에 존재한다. 신화속에는 한 시대가 들어있고 그 시대를 이루게 되는 배경이 들어있고, 그 시대의 사회적인 모습이 들어있고, 그 시대를 풍미하던 정신적인 흐름이 들어있다. 그리고 그 시대를 말해주는 일상적인 것들이 녹아있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서도 신화와 어울어진 우리의 일상과 만날 수가 있다. 영화나 그림속에서 혹은 길을 걷다가도 만날 수 있음을 말해준다. 가끔 찾아가는 절에서도 신화를 만날 수 있으며 포크나 저울, 사과나 옥수수같은 우리의 생필품이나 먹거리속에도 신화는 숨어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굳이 찾으려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저자는 서양의 신화와 동양의 신화를 서로 비교해주었다. 어찌보면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지만 분위기와 느낌은 많이 달랐다. 오랜만에 마주한 우리신화 이야기가 반가웠다.

영화를 통한 신화읽기는 재미있다.  <반지의 제왕>은 켈트신화를 바탕으로 깔았던 작품이다. <메트릭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이 세계와는 다른 또하나의 세계가 있으며 그것을 통해 또하나의 자신과 만나는 것을 그려주고 있다.  세상의 종말을 그렸던 <딥 임팩트>, <아마게돈>, <하드 레인>처럼 종말을 예고하는 신화도 참 많다. <트로이>, <페드라> 같은 경우에는 신화를 영화로 옮긴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다지 신화적이지 않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절에서 만날 수 있는 신화로써 귀면상을 예로 들어주는데 그 귀신형상같은 얼굴이 왜 우리와 정면으로 마주서야 했는지를 신화를 통해 알 수 있게 해준다.  요즘 들어 부쩍 이슈화되고 있는 '가이아 이론' 또한 그렇다. 대지의 여신이 바로 '가이아'인 까닭이다. 살아 숨쉬며 대지위의 자연이 파괴될 때마다 몸을 흔들어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는... 우리는 그것을 자연재해라고 부르지만 말이다. 또한 저자는 아이가 어른으로 변하는 과정 역시 신화속에서 찾아냈다. 호루스의 저울은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사람이 죽어 저세상으로 가면 한쪽에 신의 깃털이 올려진 저울에 인간의 선악을 저울질 한다는... 그리하여 거짓을 고한 사람은 돼지로 다시 태어난다는... 그렇게 신화는 우리의 정의까지 심판하고 있음이다.

이렇게 신화는 화석화된 이야기도 아니고, 따라서 있을 수 없는 일이나 거짓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신화는 늘 우리 주위에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다만 이야기로서만 보려고 하고 명사로서만 신화를 보려 하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할 뿐입니다. (-206쪽) 

그리스 신화에서 보여준다는 네 시대에 대한 이야기(237쪽~240쪽)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다.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행복한 시대였다는 '황금시대', 그런데 그 좋은 시대에 인간은 너무 흥청거리며 마셔댔다. 제우스는 그들을 지구 밑바닥으로 가라앉게 만들었다. 다음으로 '은의 시대'가 왔다. 은의 시대가 되면서 인간은 먹기 위해 땅을 갈고 씨를 뿌렸다. 하지만 인간은 하찮은 일에도 불평을 터뜨렸고 사소한 일로도 싸웠다. 제우스는 인간을 모두 멸종시켰다.  다음은 '청동시대', 이 시대에 계절이 생겨났고 인간에게 처음으로 절망적인 겨울의 추위가 닥쳤다. 예전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기술과 능력이 발달했고 더 많이 갖기 위해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전쟁을 일으켜 서로 죽이고 시대를 마감했다. 그 다음 '철의 시대'가 되자 인간은 욕망을 알게 되었고 죄악이 세상에 넘쳐났다. 이 때 제우스가 보낸 여인이 판도라다. 결국 인간을 벌하기 위해 보낸 여인이 판도라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신들에게 절망만을 안겨주었고 마침내 신들은 하나씩 하늘로 돌아갔다. 이 때  인간이 올바른 가치판단을 할 수 있도록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는 홀로 남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저울은 점점 악한 쪽으로 기울어졌고 아무리 바로 잡으려해도 소용이 없자 그녀마저 인간을 외면해 버리고 말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이 이야기는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끝없을 것같은 인간의 욕망.. 그 욕망으로 엮여지는 죄악들.. 이제 인간은 마음속에 저마다의 신을 품고 산다. 그리고 절망의 순간이 올 때마다 저마다의 신을 부른다. 신은 끝내 인간을 버릴까?  종말을 이야기하는 이 시대를 살면서 정화되어지지 않을 인간의 욕망에 대해 생각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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