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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에 홀리다 - 조선 민화, 현대의 옷을 입다
이기영 지음, 서공임 그림 / 효형출판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마을어귀에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 장승, 무심히 지나쳐가던 돌탑, 길쭉한 장대위에 새 한마리를 앉혀둔 솟대는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동구밖을 지키던 커다란 나무 한그루조차도 당시에는 지금 우리의 생각보다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 어딘가에 매달려 자신의 마음을 내려놓고 싶었을 풀뿌리 같은 백성들의 바램이었으며 참담한 자신들의 현실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던 바램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힘없는 백성들의 곁에 머물며 그들의 마음을 받아주고 표현해 줄 수 있었던 것에 민화도 있었다. 민화는 대체적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은유와 직설을 동시에 담고 있기도 하다. 숨기고 싶으면서도 드러내고 싶어하는 이중적인 묘미를 갖고 있는 게 민화일런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어리숙하게도 보이고 어쩌면 유치하게도 보여지지만 백성들의 삶속에 담겨지기 시작한 민화에는 너무나도 많은 의미가 있었다. 모란을 그려 부귀영화를 기원했으며 십장생을 통해 불로장생을 꿈꾸기도 했다. 잉어 그려 과거에 합격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여주었고, 대나무를 통해 장수를 기원하기도 했으며, 원앙을 통해 부부의 사랑을 말하기도 했다. 원앙은 봉황처럼 수컷을 '원'이라 하고 암컷을 '앙'이라 한다. 날아오를 때도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데 짝을 잃으면 남은 한마리는 결코 새짝을 찾지 않기 때문에 부부화목을 상징하였다고 하니 근거없는 얘기는 아닌 것이다.
민화의 특성은 기시감인듯 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말이다. 사실이면서 허구의 세계인 동시에 과장되었다 싶으면 생략의 맛을 살려내기도 했다. 일상적인듯 보여지지만 상상력이 지배하는 세계, 일반적인듯 하지만 독특한 개성의 세계가 바로 민화의 세계인 것이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고리가 끊어지고 인간과 동물이 자연스럽게 말을 섞을 수 있었던 세계가 바로 민화의 세계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민화는 솔직하다고 이 책은 말한다. 너무나도 인간적이어서 그저 웃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민화라고.. 민화를 통해 변모해가는 시대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은 놀라웠다. 또한 그림속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상징성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김홍도가 그린 <송하맹호도>의 호랑이는 실제 호랑이와 너무도 닮았다. 그만큼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말이다. 쏘아보는 듯한 눈빛과 세밀한 눈썹의 표현속에서도 튀어나올것 같은 긴장감이 느껴지고 가까이 갈 수 없는 절대적 권위가 숨겨져 있다고 보았다. 그런가하면 과장되거나 생략되어져 추상적이라고도 말 할 수있는 호랑이 그림을 보며 일그러진 영웅의 모습을 찾아내기도 한다. 숙련된 화가의 그림과 무명화가의 그림을 통해 읽어내려가는 민화이야기가 책장을 넘길수록 흥미진진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생각하다보니 해학적이라는 말과 맞닥뜨리게 된다. 미완성이지만 조선 르네상스의 문을 연 열쇠였다고 말하는 저자는 그것을 인간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자신의 청체성을 발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징표 (-170쪽) 라고 말하고 있다. 남종화나 북종화, 그리고 문인화에 이르기까지 그림은 시대에 맞춰 변화를 추구했다. 잘 배운 화가의 그림이었든 제 생각대로 그린 무명화가의 그림이었든 시대에 맞춰 변할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그러한 변화의 과정을 읽어낼 수 있어 좋았다. 굳이 이름있는 화가의 그림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생활속에서 태어나 그대로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민화.. 그것은 백성들의 아픔이기도 했고 소망이기도 했다. 그 절절함이 담겨 있었기에 오늘날까지도 우리곁에 머무는 것은 아닐까? 서구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에게는 변화의 조짐이 일었다. 신분체제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지배계층과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백성들 사이에서 그림은 소통을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되었다. 자신들만의 세계속에서 동상이몽과도 같았던 그림의 세계는 점차 융화되기 시작했고, 그거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변화의 물결이기도 했다. 그것을 이 책에서는 민화의 진화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에는 예술이란 것이 대중적이지 못했다. 글줄이나 읽고 쓸 줄 알았던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화는 생겨났고 진화했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설명이 이 책속에 빼곡하다. 판소리가 서서히 지배계층으로 스며드는 과정이나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다던 그림이 민중속으로 파고드는 과정이 예사롭지 않다. 단순히 민화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제목처럼 민화에 홀릴 수 밖에 없는 그 이유가 매우 단단하게 박혀있다. 민화를 알기 위해서 우리가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장황스럽게 느껴질수도 있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18C에서 19C로 이어지는 조선의 변화는 대단했다. 그림을 그리거나 소리를 한다하는 이른바 예술쟁이들이 대접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대중문화의 태동이었을 것이다. 민화의 진화속에는 대중적이거나 통속적이라는 말로 치부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변화에 적응하는 조화로움이 있었고,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고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의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 새로운 화법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민화는 우리의 삶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는 말이다.
민화가 안고 있는 해학이 재미있다. 우리의 생활과 생각이 숨어 있기에 이렇다 저렇다 분명하게 판단할 수 없는 통속성이라 했다. 삶의 경험을 통한 달관의 경지라 했다. 그림을 보면서 함께 웃을 수도 있고, 감동받아 눈물 흘릴 수도 있게 하는 것이 민화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웃음은 한번 크게 웃고마는 포복절도가 아니었고, 그 눈물은 최루성 눈물이 아니라 촉촉하게 젖어드는 그런 눈물이었다. 한마디로 솔직했다. 자신의 감정을 굳이 숨기고 싶어하지 않는다. 고단하고 힘든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었던 또하나의 세계가 바로 민화였던 것이다. 모든 것이 가능했던 민화의 세계에서 백성들은 위로받을 수 있었으며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한대로, 마음먹은대로 그리며 거기에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망을 담았다. 자신을 드러내보이고 싶어했던 사람들을 민화가 받아주었던 것이다.
조선사회가 대중사회로, 또 근대로 넘어가는 이정표 역할을 했던 것이 민화였다.(-223쪽) 그렇다면 현대속의 민화는 어떨까? 지식인들의 손을 빌어 다시 부활하고 있다는 민화. 그것은 무엇때문일까? 리얼리티가 아닌가 싶다. 대중적인 소재를 가지고 대중의 마음을 얻어낼 수 있는 그림이 필요했기 때문일수도 있다. 현실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었던 민화처럼. 그 사람들이 민화를 그리고 공급했던 사람들처럼 현실과 예술을 따로이 보지 않았다는 말은 아닐까? 함께 느낄 수 있는 그 무엇. 예술이라는 고고한 세계를 다루지 않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세계를 내세우는 것 말이다. 그 어떤 틀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을 바로 지금의 현실에서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민화는 당시의 사회구조와 경제체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234쪽) 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민화뿐만이 아니라 우리 그림의 변천사를 볼 수 있었다.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변해야 했던 그림의 역사는 내게 꿈결처럼 지나가 버렸다. 진정 꿈이었다면 재미없는 꿈일지도 모르겠으나 화려하고 환상적인 꿈이었음은 분명하다. 내게 다가온 민화의 세계는 그만큼 신비로웠다. 그리고 황홀했다. 현대속에도 민화의 흔적은 많았다. 일본이나 중국은 물론이고 유럽의 예술세계속에도 우리만의 특징을 가진 민화가 살아 있었다. 88올림픽의 마스코트로 등장했던 호돌이 역시 전통 민화속의 호랑이였으며, '동양의 꽃'이라 불리며 유럽의 궁정생활에 딱 맞는 디자인이었다는 일본자기의 꽃모양 역시 우리의 모란 문양이었다. 내노라하는 세계적인 화가 피카소나 샤갈, 고흐의 그림들을 우리의 민화와 비교해보는 시선 역시 놀라웠다. 저자는 그것을 기시감이라고 표현했지만... 이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하여 훑어보았다는 참고문헌은 정말 많았다. 어림잡아 50권은 넘어보였다. 그 많은 책속에서 민화의 아름다움을 찾아내 준 저자에게 절로 경외심이 인다. 거칠다고, 유치하다고, 웃긴다고 치부해버릴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안목이라는 것은 어느 분야에서건 필요하다. 나가는 글을 통해 전하고 싶어하는 저자의 메세지를 기억속에 담아두기로 한다.
민화, 그것은 우리의 소박한 꿈들이 한데 모인 그림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의 전통문양은 현대와 과거를 함께 아우르는 힘을 지녔다고. 한국적이지만 세계적인 디자인이 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민화이며 전통문양인 것이라고. 경계를 허물어내는 힘을 가진 민화가 다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 흐름을 아주 적게나마 이 책을 통해 느껴볼 수 있었다. 민화가 우리의 또다른 분신이자 자화상이라는 말이 가슴 깊숙히 들어온다. 지극히 한국적이라는 우리 민화. 그러나 누구든 만족시킬 수 잇는 힘을 가졌다는 우리 민화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딱 한가지가 필요하다. 바로 열린 시선이다. 어설픈 그림자체에만 머물지 말고 그림속의 세상을 읽을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 열린시선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