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전 외 재미있다! 우리 고전 10
장철문 지음, 이현미 그림, 박지원.이옥 원작 / 창비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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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과 이 옥이라... 박지원이야 <열하일기>라는 대표적인 작품이 있으니 기억속에 남는다 하지만 이 옥이라는 인물은 누구일까? 우선 그것부터가 궁금해졌다. 이 옥, 정조 때의 문신으로 박지원처럼 문체반정에 연류되었다는 사람이다. 효령대군의 후손이라 하니 그 집안의 내력이야 말할 필요가 없을 듯 하고.. 그런데 문체를 다시 돌리라는 정조의 하문에 반성문을 썼던 박지원과는 달리 이 사람은 아마도 제 고집을 꺾지 않았던 모양이다. 문제의 인물로 낙인찍혀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했다니 하는 말이다. 정조는 성균관 유생이던 이 옥에게도 전통적 격식을 갖춘 문장을 지어 바치도록 했다고 한다. 도대체 왜 세상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천박한 문체인 것일까? 전통적 예의와 도덕을 갖춘 문장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박지원의 <열하일기>로 비롯되어진 문체반정..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문체반정이 가져온 우리 문화의 퇴보는 상당했을거라고 본다. 패관문학이라고는 했지만 실상은 백성들의 참모습이었던 까닭에 어쩌면 왕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껄끄럽거나 불편한 진실이 될 수도 있었을테니 말이다.

책 속에는 박지원과 이 옥의 작품 일곱편이 실려있다. 박지원의 작품으로 <광문자전>, <허생전>, <양반전>, <호질>이 있으며 이 옥의 작품으로는 <최생원전>, <이홍전>, <심생전>이 있다. <허생전>이나 <양반전>, <호질>은 많이 들어 낯설지 않았으나 이 옥의 작품은 생소했다. 이 책은 아이들에게 우리 고전을 읽게하고 싶은 마음이 비쳐지는 책이라 그리 어렵지않게 고전으로 다가설 수 있는 장점이 있기도 하다. 대부분 학창시절의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우리 고전의 내용을 다시한번 살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나 가까이 하게 된 책이지만 사실 아들녀석에게 읽히고픈 욕심이 더 컸다. 어느 책에선가 말하길 박지원의 <양반전>이 신분제도를 타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것임을 숨겨두었다고 했었다. 가만히 살펴보면 그런 면이 느껴지기도 한다. <허생전>을 통해서도 그런 것을 찾아볼 수가 있었다. 단순히 책만 읽던 선비가 어느날 갑짜기 책상을 물리고 세상속으로 나아가 성공한다는 것은 살아내야 할 현실이 그렇게 쉽게 용납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닌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생은 책상물림만 하는 양반이기를 고집하고 있다. 어찌보면 <호질>에서 보여지듯이 요목조목 따지고드는 호랑이의 말투를 빌어 양반을 혼내주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하지만 자신들만의 어떤 명분을 또박또박 내세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옥의 작품을 둘러보면서 미신타파라는 화두를 보게 된다. 귀신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말 자체가 자신의 마음먹기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말이기도 하니. 귀신조차 무서워했다는 최생원의 이야기가 그렇다.  천하의 사기꾼 이홍은 또 어떤가? 사람의 마음만큼 묘한 것도 없고, 사람의 마음만큼 허술한 것도 없는 듯 하다. 빈 틈을 노려 치고 들어가 자신의 허세를 당당하게 이루는 이홍이 왠지 나는 밉지만은 않았다. 또한 <심생전>을 통해 보여주는 사랑의 의미가 살갑게 와닿기도 한다. 물론 유치한 사랑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린다면 할 말은 없겠으나 심생의 사랑은 꽤나 괜찮게 보여진다. 

그저 옛글만 다루어주었더라면 이 책도 그냥 그렇고 그런 책으로 끝났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의 작품 해설이 있어 책을 읽는 사람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박지원과 이 옥의 작품 뒤에는 왜 '전傳'이라는 말이 붙어 있을까?  옛날에는 소설이라는 문학양식이 없었는데 오늘날의 소설과 비슷한 문학양식으로 '전'이 있었다고 설명해주고 있다. 오늘의 단편소설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문단편소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설명을 보면 모두가 아하,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 않을까 싶다. 고전이 어렵다고 하는 것은 그것에 맞는 풀이가 없기 깨문이다. 어려운 한자체를 본다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그 말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더더욱 다가서기 힘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되어지는 부분들을 조금씩이나마 알기 쉽게 풀이를 해 준다면 그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작품해설을 이 소설들의 시대적 배경 또한 잘 설명해주고 있다. 아울러 박지원과 이 옥의 작품세계를 통해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인지 다시한번 집어주니 우리의 고전을 그저 그런 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리며 외면하지는 않을 듯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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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혼자 올 수 있니
이석주 사진, 강성은 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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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암까지 전이된 몸을 이끌고 홀로 겨울 홋카이도와 아키타 여행을 다녀온 후 눈(雪)에 관한 사진전을 준비하던 2010년 4월, 만 스물여덟의 나이에 하늘로 돌아갔다. 이석주라는 스물여덟의 젊은이를 그렇게 보내면서 그를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은 오래도록 속깊은 울음을 참아야했을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간이었기에 그들은 사랑했던 사람 하나를 추억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그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었던거라고... 흐릿한 분위기의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그리 많지 않은 말을 하는 걸 보면 어쩌면 그들은 아직도 그를 보내지 못한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내게 다가온 이 책의 느낌은 너무 멀었다. 너무 아득했고 너무 흐렸다.

가로등...
오직 가로등빛 뿐이었다. 모든 것이 온통 잿빛이었는데 문득 다가오던 그 빛 하나. 하지만 나는 안다. 가로등은 저혼자 빛을 낼 수 없다는 것을. 어둠이 있어야 더 밝아질 수 있는 불빛, 그것이 바로 가로등인 것이다. 오직 그 빛 하나만이 밝게 보여지던 사진속의 분위기가 낯선 설렘으로 다가선다. 책 속에서 들려주던 가방이야기처럼 이별에 대한 두려움과 서로를 그리는 아픔이 어느 순간 내게 찾아왔던 첫사랑 같았다. 사진 찍었던 사람이 시작될 것 같다고 말하던 사랑은 찾아왔을까? 속으로 우는 건 아무도 모를 거라고 그렇게 매일 울고 있는거냐고 묻고 있던 당신에게 나도 묻고 싶었다. 당신도 그렇게 매일 울고 있었던 거냐고.

한때는 염전이었던 곳이 생태공원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을 했다는 그곳에 내가 찾아갔던 적이 있었다. 아직 버리지 못한 갯벌흙은 밟으니 미끄러워서 옆에 가는 사람끼리 두 손을 꼭잡고 걸어야 했었던 날.. 저 집, 영화속에 나오는 집같아... 고개를 들었던 순간 느닷없이 시선속으로 들어왔던 집을 보면서 내가 말했었다. 말하다가 그만 미끄러져 기우뚱거렸을 때 잡힌 손에서 우두둑 소리가 날 것처럼 단단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 있었다. 그 집, 영화속에 나오는 집처럼 멋지게 보였던 집은 가까이 다가가보니 황홀할 것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내 눈에는 멋지게 보였는지 알 수 없다. 소금창고.. 나무로 된 문은 반쯤 열린 채 하얀 소금을 뱉어내고 있었지. 그리곤 내게 말했었다. 맛있는 소금이라고. 이제는 몇 평 남겨두지 못한 염전에서 건져올린 거라고. 한웅큼 내게 내밀면서도 팔지는 않는다고 했었다. 소금창고.. 팔지 않는 소금을 모아두던 소금창고.. 그런데 내가 왜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왠지 모를 상실감, 그리고 알 수 없는 그리움을 그 소금창고처럼 안고있는 사진들때문이었을까?  보여주는 사진들은 너무 외롭다.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사람의 가슴처럼 그냥 먹먹해지는 느낌들이 빼곡하다. 사진이 그런건지, 사진 옆에서 꼬물거리는 글자들이 그런건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독한 외로움은 분명히 보였다. 내 기억속의 소금창고처럼.

불꽃놀이..
죽음을 선고 받았으면서도 그는 사진을 찍으러 떠났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단다. 사진이 빛을 담는 것이 아니라 빛을 비워내는 작업임을 알아가고 있는것 같다고. 어쩌면 그는 사그러드는 제 빛을 더 밝히고 싶어 다른 빛을 비워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몇 장을 사진을 모아놓고 그 덩어리마다 제목을 붙여주었는데 사랑이니 상실이니 뭐 그런거였다. 그래놓고는 너 혼자 올 수 있느냐고 묻는다. 쓸쓸하게... 소리없이 흘러 내리는 눈물이 더 슬프다던 말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들.. 그래서일까? 이 책속에서 비워낸 빛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불꽃놀이 속에서 터지는 불꽃처럼 어쩌면 그렇게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건지도 모르겠다. 터지고나면 공중분해되어 버리는 불꽃이라 할지라도 잠시 그렇게 빛을, 희망을 끌어안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춧불..
아주 작은 촛불이 있었다. 그 촛불을 끄고 자장가를 부를 때가 되었나보다. 어쩌면 사진으로 들려주고 싶었던 그 사람의 이야기들은 이런게 아니었을까? 왕자와 공주가 만나는 이야기, 먼 나라의 가난한 소녀가 맞은 성탄절 이야기, 새가 물어다 준 마법반지 이야기,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 이야기, 성냥하나로 세계를 태워버린 아이의 이야기, 기러기를 타고 먼 나라를 여행하는 이야기, 기억이 나지 않는 많은 이야기들, 누군가 들려준 이야기들...(-243쪽) 지독히도 일상적인 것들을 제 몸을 불사르는 촛불처럼 그렇게 간절하게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눈 쌓인 한 장의 사진을 보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저마다 머리속에 그려지고 있을 그 세계가 궁금해진다. 어떤 이는 부를 수 없는 이름을 생각할 수도 있겠다. 어떤 이는 이제는 볼 수 없는 얼굴 하나를 그려볼 수도 있겠다. 어떤 이는 눈때문에 날아가버린 하루벌이를 생각할 수도 있겠다. 어떤 이는 막 시작된 사랑이 그 눈위에 나란히 발자욱을 남기는 상상을 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많은 생각들이 때로는 희망으로 때로는 그리움으로 때로는 절망으로 옷을 바꿔입는다. 많은 이야기를 잉태할 수 있는 사진 한 장.. 그러나 그 사진 한 장이 뱉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나나 당신이 지금 어떤 현실속에 머물고 있느냐만이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거라고 생각하기에. 대체적으로 책 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사진들은 아련하다. 무언가 더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놓고 싶지 않아 한번은 더 보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느낌일 뿐이다. 그것도 한 순간의 느낌일 뿐이다.

글이 사진을 따라간건지, 사진이 글을 따라간건지 그것을 나는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외면하고 싶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의 여행이 끝나는 지점에서 그 여행을 함께 느끼고 싶었을거라고 미루어 짐작을 하면서도 그렇게 말하면 왠지 미안해질 것만 같다. 사진이 빛을 비웠다고 글도 빛을 비워버린 것 같아서... 아주 잠깐이지만 사진이 한 켠으로 밀어둔 그 빛을 찾아 글이 밝혀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거라는 생각을 한다. 사진도 글도 모두가 아득하기만 하다. 다시오지 않을 사람을 향한 기다림이 이 책의 화두같다. 어쩌면 그렇게 느끼게끔 길안내를 해주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래서 이 책은 우물처럼 자꾸만 나를 저 깊숙한 곳으로 밀어넣는다. 책장을 덮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우물속에서 나오지 못한 채 아주 작은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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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그 끝나지 않는 의문
이희근 지음 / 다우출판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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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아도 이 책을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눈치 빠른 사람은 알겠다.  한번쯤은 가져 보았음직한 의문점들을 다루어주고 있는 이 책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청소년이 읽기엔 좀 무리가 아닐까 싶다. 책 띠를 보니 '청소년을 위한 좋은 책'이라고 써 있기에 하는 말이다.  역사의 뒤편 혹은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한 사실을 안다는 것에 대해서는 옳다. 하지만 '한국사'라는 테두리가 확실하게 정해지지도 않은 아이들에게 사실이 이렇고 저렇단다 이야기 해 줄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의문은 그 다음이다. 무언가를 제대로 알고 난 뒤에 그것에 따르는 진정한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소리다. 우리 역사를 바라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물음표를 찍었음직한 주제가 많이 보인다. 예를 들자면  김수로왕의 부인이었던 허황후가 정말 인도에서 왔을까? 라거나 숙종대의 도적이었던 장길산이 의적으로 거듭나게 되는 이유처럼.. 나 역시 이런저런 역사서를 읽으면서 그 당시를 이해하지 못해 상황을 정리하기가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고해서 내가 역사를 많이 안다는 말은 아니다. 짧은 소견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점이 있었다는 말이다.

이 책은 고대사를 시작으로 고려와 조선을 지나 근현대사까지 다루고 있다. 고대사는 사실 우리에게 그저 한편의 신화처럼 다가오는 느낌이 더 크다. 알에서 태어났다 이야기쯤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주몽이 부여를 탈출하면서 자연을 부렸다는 이야기도 그다지 신비롭지 않다. 언제였던가 고대의 건국신화를 찾던 중 두 편으로 나와있던 백제의 신화를 보고 의아했던 적이 있었다. 온조와 비류가 하나가 아닌 둘로 건국신화를 갖고 있었는데 읽어보니 내용은 비슷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둘로 나뉘어져야 했을까? 그런 기록은 왜 생겨난 것일까? 궁금하기도 했었다. 사실 지금 돌이켜보는 역사의 진실 또한 어쩌면 지극히 주관적이거나 혹은 시대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당시를 살아보지 않은 이상 그것은 추론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상황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그런 주장이 나오는 것이겠지만 역시 추론일 뿐이다. 그런 것들을 좀 더 사실적으로 다가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다지 많지 않았던 백제사를 돌이켜보면서 백제가 과연 중국의 요서지방에 또하나의 백제를 건설했을까 하는 것을 밝혀내고자 하는 것처럼. 

안타까운 것은 지금의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너무도 홀대한다는 점이다. 얼마전부터 국립대학이나 모신문지상에서 한국사를 필수과목으로 해야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을 뿐이다. 우리의 역사도 모르면서 어찌 세계사를 논할까 싶은 나의 마음도 거기에 백퍼센트 공감하지만 과연 얼마나 힘을 얻을 수 있을런지는 두고 볼 일이다. 우리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 주변국들의 역사서가 필수라는 건 어쩌면 아이러니가 아닐까? 우리에게는 없는, 아니 우리가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를 그들은 귀하게 보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서글프게 다가온다. 어찌보면 폐쇄적이기까지 했던 우리의 역사, 그런 까닭에 더 홀대받아야 하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홀대받는 역사의 되새김을 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거울속의 자신을 보듯 역사를 보아야하기에 지금의 지배층들이 역사를 배척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럴수도 있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느정도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런 책은 꼭 한번 읽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우리 역사와 좀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물론 역사는 쓰는 자의 이념에 따라 달라졌다는 게 사실이고 보면 주관적인 견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주장에 나름대로 또하나의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을 듯 하다. 평소 고려의 무신들이 정권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왕이 되지 않았을까 궁금했었다. 고려의 불상을 보면서 미륵을 기이한 모습으로 만들었던 백성들의 속마음이 궁금하기도 했었다. 그런 궁금증에 대한 이야기를 책을 읽으면서 함께 생각할 수 있어 좋았다. 고려시대에는 지금과 같은 남녀의 차별이 없었다는 걸 알고 복잡한 현실속에서 일어났던 한 건의 소송(시집간 딸도 상속을 받아야 한다는)이 떠올라 씁쓸했다. 현실속 모든 문제의 해답은 역사속에 있다는 유명인사의 말이 다시한번 떠올랐다. 정말 역사속에 모든 해답이 들어있을 거라고 고개를 끄덕인다.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을 통해 그가 결코 신분해방을 외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는 그의 속셈을 알게 된다. 그런 저자의 생각에 공감합니다-를 외치는 나의 모습이 그 순간만큼은 어색하지 않다.

세종대왕은 정말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을까?  그토록이나 많은 장경들은 어떻게 해인사로 옮겨졌을까?  농민들이 동학에 열광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정말 억불정책을 썼을까?... 재미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공감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도 놀라웠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장승은 원래 경계선의 의미였다. 원래의 이름은 장생표로 장승은 잘못된 표기다. 사찰이 성행할 때 여기까지 혹은 여기서부터는 사찰권역입니다-라는 표시로 세워둔 것이었는데 나중에 이것이 하나의 경계표로 사용되었고, 또한 이정표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지금의 표지판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은 왜 무속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 해답은 간단했다. 우리의 풍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들만의 잣대로 선을 그어버린 초기 기독교도들에 의한 잘못된 판단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아전인수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속깊이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끝도 없을 것 같은 사건과 연대, 그 안에서 살았던 수많은 이름만 외우는 것은 죽은 역사다.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역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일제가 왜 우리 조선의 궁궐 파괴에 그토록 집착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일제가 우리의 궁궐을 파괴했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왜 그렇게 해야 했는지를 바로 알아야 제대로 된 역사인식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시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지금도 지나쳐가면 역사가 된다. 후대에 어떻게 기록되어질런지 알 수 없는 우리의 시간들. 나중에 우리가 제대로 된 역사였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외면하고 있었던 지나간 역사와 마주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한번 말을 보태고 싶다. 한국사는 필수과목이 되어야만 한다고..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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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에 홀리다 - 조선 민화, 현대의 옷을 입다
이기영 지음, 서공임 그림 / 효형출판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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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어귀에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 장승, 무심히 지나쳐가던 돌탑, 길쭉한 장대위에 새 한마리를 앉혀둔 솟대는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동구밖을 지키던 커다란 나무 한그루조차도 당시에는 지금 우리의 생각보다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 어딘가에 매달려 자신의 마음을 내려놓고 싶었을 풀뿌리 같은 백성들의 바램이었으며 참담한 자신들의 현실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던 바램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힘없는 백성들의 곁에 머물며 그들의 마음을 받아주고 표현해 줄 수 있었던 것에 민화도 있었다. 민화는 대체적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은유와 직설을 동시에 담고 있기도 하다. 숨기고 싶으면서도 드러내고 싶어하는 이중적인 묘미를 갖고 있는 게 민화일런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어리숙하게도 보이고 어쩌면 유치하게도 보여지지만 백성들의 삶속에 담겨지기 시작한 민화에는 너무나도 많은 의미가 있었다. 모란을 그려 부귀영화를 기원했으며 십장생을 통해 불로장생을 꿈꾸기도 했다. 잉어 그려 과거에 합격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여주었고, 대나무를 통해 장수를 기원하기도 했으며, 원앙을 통해 부부의 사랑을 말하기도 했다. 원앙은 봉황처럼 수컷을 '원'이라 하고 암컷을 '앙'이라 한다. 날아오를 때도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데 짝을 잃으면 남은 한마리는 결코 새짝을 찾지 않기 때문에 부부화목을 상징하였다고 하니 근거없는 얘기는 아닌 것이다. 

민화의 특성은 기시감인듯 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말이다. 사실이면서 허구의 세계인 동시에 과장되었다 싶으면 생략의 맛을 살려내기도 했다. 일상적인듯 보여지지만 상상력이 지배하는 세계, 일반적인듯 하지만 독특한 개성의 세계가 바로 민화의 세계인 것이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고리가 끊어지고 인간과 동물이 자연스럽게 말을 섞을 수 있었던 세계가 바로 민화의 세계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민화는 솔직하다고 이 책은 말한다. 너무나도 인간적이어서 그저 웃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민화라고.. 민화를 통해 변모해가는 시대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은 놀라웠다. 또한 그림속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상징성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김홍도가 그린 <송하맹호도>의 호랑이는 실제 호랑이와 너무도 닮았다. 그만큼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말이다. 쏘아보는 듯한 눈빛과 세밀한 눈썹의 표현속에서도 튀어나올것 같은 긴장감이 느껴지고 가까이 갈 수 없는 절대적 권위가 숨겨져 있다고 보았다. 그런가하면 과장되거나 생략되어져 추상적이라고도 말 할 수있는 호랑이 그림을 보며 일그러진 영웅의 모습을 찾아내기도 한다. 숙련된 화가의 그림과 무명화가의 그림을 통해 읽어내려가는 민화이야기가 책장을 넘길수록 흥미진진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생각하다보니 해학적이라는 말과 맞닥뜨리게 된다. 미완성이지만 조선 르네상스의 문을 연 열쇠였다고 말하는 저자는 그것을 인간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자신의 청체성을 발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징표 (-170쪽) 라고 말하고 있다. 남종화나 북종화, 그리고 문인화에 이르기까지 그림은 시대에 맞춰 변화를 추구했다. 잘 배운 화가의 그림이었든 제 생각대로 그린 무명화가의 그림이었든 시대에 맞춰 변할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그러한 변화의 과정을 읽어낼 수 있어 좋았다. 굳이 이름있는 화가의 그림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생활속에서 태어나 그대로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민화.. 그것은 백성들의 아픔이기도 했고 소망이기도 했다. 그 절절함이 담겨 있었기에 오늘날까지도 우리곁에 머무는 것은 아닐까? 서구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에게는 변화의 조짐이 일었다. 신분체제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지배계층과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백성들 사이에서 그림은 소통을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되었다. 자신들만의 세계속에서 동상이몽과도 같았던 그림의 세계는 점차 융화되기 시작했고, 그거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변화의 물결이기도 했다. 그것을 이 책에서는 민화의 진화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에는 예술이란 것이 대중적이지 못했다. 글줄이나 읽고 쓸 줄 알았던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화는 생겨났고 진화했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설명이 이 책속에 빼곡하다. 판소리가 서서히 지배계층으로 스며드는 과정이나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다던 그림이 민중속으로 파고드는 과정이 예사롭지 않다. 단순히 민화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제목처럼 민화에 홀릴 수 밖에 없는 그 이유가 매우 단단하게 박혀있다. 민화를 알기 위해서 우리가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장황스럽게 느껴질수도 있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18C에서 19C로 이어지는 조선의 변화는 대단했다. 그림을 그리거나 소리를 한다하는 이른바 예술쟁이들이 대접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대중문화의 태동이었을 것이다. 민화의 진화속에는 대중적이거나 통속적이라는 말로 치부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변화에 적응하는 조화로움이 있었고,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고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의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 새로운 화법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민화는 우리의 삶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는 말이다.

민화가 안고 있는 해학이 재미있다. 우리의 생활과 생각이 숨어 있기에 이렇다 저렇다 분명하게 판단할 수 없는 통속성이라 했다. 삶의 경험을 통한 달관의 경지라 했다. 그림을 보면서 함께 웃을 수도 있고, 감동받아 눈물 흘릴 수도 있게 하는 것이 민화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웃음은 한번 크게 웃고마는 포복절도가 아니었고, 그 눈물은 최루성 눈물이 아니라 촉촉하게 젖어드는 그런 눈물이었다. 한마디로 솔직했다. 자신의 감정을 굳이 숨기고 싶어하지 않는다. 고단하고 힘든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었던 또하나의 세계가 바로 민화였던 것이다. 모든 것이 가능했던 민화의 세계에서 백성들은 위로받을 수 있었으며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한대로, 마음먹은대로 그리며 거기에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망을 담았다. 자신을 드러내보이고 싶어했던 사람들을 민화가 받아주었던 것이다.

조선사회가 대중사회로, 또 근대로 넘어가는 이정표 역할을 했던 것이 민화였다.(-223쪽) 그렇다면 현대속의 민화는 어떨까? 지식인들의 손을 빌어 다시 부활하고 있다는 민화. 그것은 무엇때문일까? 리얼리티가 아닌가 싶다. 대중적인 소재를 가지고 대중의 마음을 얻어낼 수 있는 그림이 필요했기 때문일수도 있다. 현실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었던 민화처럼. 그 사람들이 민화를 그리고 공급했던 사람들처럼 현실과 예술을 따로이 보지 않았다는 말은 아닐까? 함께 느낄 수 있는 그 무엇. 예술이라는 고고한 세계를 다루지 않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세계를 내세우는 것 말이다. 그 어떤 틀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을 바로 지금의 현실에서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민화는 당시의 사회구조와 경제체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234쪽) 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민화뿐만이 아니라 우리 그림의 변천사를 볼 수 있었다.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변해야 했던 그림의 역사는 내게 꿈결처럼 지나가 버렸다. 진정 꿈이었다면 재미없는 꿈일지도 모르겠으나 화려하고 환상적인 꿈이었음은 분명하다. 내게 다가온 민화의 세계는 그만큼 신비로웠다. 그리고 황홀했다. 현대속에도 민화의 흔적은 많았다. 일본이나 중국은 물론이고 유럽의 예술세계속에도 우리만의 특징을 가진 민화가 살아 있었다. 88올림픽의 마스코트로 등장했던 호돌이 역시 전통 민화속의 호랑이였으며, '동양의 꽃'이라 불리며 유럽의 궁정생활에 딱 맞는 디자인이었다는 일본자기의 꽃모양 역시 우리의 모란 문양이었다. 내노라하는 세계적인 화가 피카소나 샤갈, 고흐의 그림들을 우리의 민화와 비교해보는 시선 역시 놀라웠다. 저자는 그것을 기시감이라고 표현했지만... 이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하여 훑어보았다는 참고문헌은 정말 많았다. 어림잡아 50권은 넘어보였다. 그 많은 책속에서 민화의 아름다움을 찾아내 준 저자에게 절로 경외심이 인다. 거칠다고, 유치하다고, 웃긴다고 치부해버릴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안목이라는 것은 어느 분야에서건 필요하다. 나가는 글을 통해 전하고 싶어하는 저자의 메세지를 기억속에 담아두기로 한다. 

민화, 그것은 우리의 소박한 꿈들이 한데 모인 그림이었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의 전통문양은 현대와 과거를 함께 아우르는 힘을 지녔다고. 한국적이지만 세계적인 디자인이 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민화이며 전통문양인 것이라고. 경계를 허물어내는 힘을 가진 민화가 다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 흐름을 아주 적게나마 이 책을 통해 느껴볼 수 있었다. 민화가 우리의 또다른 분신이자 자화상이라는 말이 가슴 깊숙히 들어온다. 지극히 한국적이라는 우리 민화. 그러나 누구든 만족시킬 수 잇는 힘을 가졌다는 우리 민화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딱 한가지가 필요하다. 바로 열린 시선이다. 어설픈 그림자체에만 머물지 말고 그림속의 세상을 읽을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 열린시선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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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레지스탕스 - 저항하는 인간, 법체계를 전복하다 레지스탕스 총서 1
박경신 외 지음 / 해피스토리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레지스탕스는 저항이다. 호모레지스탕스라고 하니 저항하는 인간쯤이면 될 것 같다. 부제에서도 저항하는 인간이라는 말이 보이는데 굳이 왜 호모레지스탕스라고 했을까?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그만큼 강한 유혹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었을거라고 생각하지만 제목을 보면서 왠만한 것에는 눈길도 주지않는다는 이 사회의 풍속이 떠올라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에 대한 저항일까? 그 대답도 이미 부제에서 보여주고 있다. -법체계를 전복하다-라는 말로. 부당하다고 느끼면서도 침묵하는 사람들은 많다. 일단은 귀찮아서라고 말 할수도 있겠지만 무언가에 대항하기에는 우리 시대의 모든 것들은 정말이지 복잡하다. 희생된 무언가를 되찾기 위해서 또다른 것을 다시 희생시켜야만 하는 것이 이 현실의 고리일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출발된 것이 이 책이 아닐까 싶다.

거주이전의 자유라는 기본권에 대해 강남의 한 귀퉁이에 있다는 구룡마을의 판자촌이 등장한다. 대기업의 시스템이 하청에 하청을 주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비정규직이라는 낱말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울부짖기도 했던 때가 바로 엊그제였다. 그런 그들에게 저항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셀 수 없이 많은 집회들. 그 현장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 그들이 무엇을 주장하고 싶어하는가보다는 우선 불편함을 먼저 떠올려야 할 정도로 우리사회속에는 무수히 많은 집회가 있다. 그런 그들을 공무집행방해라는 이유로 막을 수 있는 것일까? 집회를 하기 위해 도시로 올라와야 했던 농민들을 사전에 저지했던 경찰들에게 들이댈 수 있는 법은 없는 것일까? 그런 부당함이나 불편함에 당당하게 맞선 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다시말해 그들의 곁에서 도움이 되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보자면 힘없고 빽없는 사람들을 위해 움직여준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 있었기에 승리할 수 있었고 당당히 자신의 감정을 표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앞서 말했던 사람들은 모두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언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전설같은 이야기가 되어버린 삶의 이야기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말한다. 그러니 당신도 참는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생각의 차이는 때로 극명하게 다가온다. 한 때 세상을 시끄럽게 달구었던 다툼중에 출가한 딸도 상속받을 수 있다는 법정싸움이 있었다. 이미 우리에게 관습법이라는 굴레의 테두리가 희미해져가고 있었던 까닭도 있었겠지만 그 일을 전후로 하여 바뀌게 된 법체계가 있었다는 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습관처럼 몸에 밴 것들을 새롭게 바꾸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하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  누군가 하나가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한 다가서기 힘든 것도 오래되어 생활처럼 굳어져버린 관습법에 대한 거부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떻게 가족끼리? 라는 생각은 이 시대에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솔직한 말일 것이다. 가족이라는 개념은 이미 옛날의 그것이 아니기에... 그만큼 너무나도 많은 것이 변했고, 또한 변해가는 세상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얼마전 뉴스를 통해서 보았던 강의석군의 승리는 박수를 쳐주고 싶을 정도의 시원함을 느끼게 해 주었었다. 단 한명의 학생이 시위를 했었던 까닭에 일인시위라고 명명지워졌던 그 이야기.. 그때의 고등학생은 이미 교복을 벗고 대학생이 되어 있었지만 부당함을 알리기 우해 혹은 그 부당함을 자신처럼 당하는 학생이 없게 하기 위해 끝까지 투쟁을 했다. 그래서 이겼다.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법에도 어느정도는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심사가 적용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뻔히 보이는 답인데도 불구하고 판례가 없다는 이유로 답이 아닌 길을 가야하는 법의 엉뚱함을  경험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 세상에는 맞지도 않는 이미 오래전의 법체제에 매달린 채 변하기를 거부하는 저들의 안일함이 싫은 까닭이기도 하다.

하긴 귀여운 딸의 재롱을 오래도록 보고 싶어 동영상을 올렸다가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서야했던 젊은 아버지의 애타는 심정까지 법이 알아주어야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비행기가 지나가는 길목에 집이 있으니 당연히 시끄러운 거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며 살기에는 뭔가 석연치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것말고도 우리주변은 이미 소음천국이니... 혼자가 아니라면 같은 불편을 느끼는 사람끼리 집단으로라도 맞서야 한다고 이 책은 말한다. 그렇게해서라도 당신의 권리를 찾아야 하는 거라고. 불편함과 마주하고 사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싸워서 이긴 일부의 사람들을 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목소리를 높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 때로는 가슴속에 부여잡고 살아가야할 불편한 진실이라는 것도 있게 마련일테니 말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가 저마다의 권리를 찾겠다고 아우성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저항을 통해 변화가 온다는 말에도 공감은 한다. 하지만 저항하고 싸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꼭 찾아야 할 것이라면 물론 그렇게 해야겠지만 모든 것을 자신만의 틀에 맞추며 살아가는 현대의 각박함보다는 슬기롭게 대처했던 옛사람들의 작은 여유와 사람냄새만큼은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 법조인이 외치는 법의 이야기, 그리하여 법체계를 전복했다는 말은 왠지 서글프게 다가온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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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현 2011-01-09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 글을 쓴 사람중에 한넘이 제 아들입니다.[한마디로 골때리는 너...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