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선인장 - 사랑에 빠졌을 때 1초는 10년보다 길다
원태연.아메바피쉬.이철원 지음 / 시루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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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추억 공사 중 사랑통행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현재 미련구간 복구공사로 인해 사랑통행이 금지되오니  다른 사랑을 이용하시거나 부득히한 분은 공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복구가 끝난다 해도 예전 같은 행동은 어려울 것 같으니  이 점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무슨 안내판같은 이 글을 문단띄기만 해주면 한 편의 詩로 다시 태어난다. 제목이 '복구공사'다.  앞의 글처럼 한동안 회자되었던 또 다른 詩를 소개해본다면 '상사병'이다. 
처음에는 예쁘게 시작되는 병  
조금 심해지면 약간씩 짜증나는 병 
거기에 더 발전하면 합병증까지 유발시키는 병 
완전히 중증이 되면 속이 새까맣게 타버리는 병  
그러나 안 걸리는 것보다 걸려보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는 병 
세월이 약이 되는 병... 특별한 표현법 없이도, 굳이 예쁜 말을 골라쓰지 않았는데도 한 줄, 한 줄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은유라는 걸 써서 드러내지 않고 숨겨두는 기법도 있긴 하지만 나는 왠지 이렇게 쉽고 편하게 다가오는 글이 좋았다. 그래서일까? 너무 어렵거나 너무 깊이 파고 들어야하는 짧은 글들은 쉽게 다가서지 못한다.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말로 표현되어지는 글이 바로 원태연의 작품이 가진 매력이기도 하다. ( 뭐, 이건 나혼자만의 느낌일수도 있겠지만- )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눈물에 얼굴을 묻는다>, <사랑해요 당신이 나를 생각하지 않는 시간에도>... 그가 발표했던 작품들의 이름조차도 너무나 애틋하게 다가왔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랬던 그가 다시 돌아왔다. 원태연이라는 이름이 반가웠다. 벌써 10년도 훌쩍 넘겨버린 시간속에 존재했던 이름... 책꽂이에는 가끔 들러주는 나의 손길을 기다려주는 작은 시집이 있다.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그렇다고 맨날 사랑타령만 했던 그가 아니다. 詩라는 걸 제대로 알기 전인 학창시절부터 그와 함께 했다던 글속에서 젊은이의 패기를 느껴볼 수도 있다.  - 아리랑은 없어도 가라오케는 언제나 만원이다 건빠이는 외쳐대도 지화자를 외치는 이는 없다 로바다 야끼가 포장마차보다 많아진다 사찌꼬는 따라 불러도 우리의 소원을 부르면 어색하다 우리 스스로 다시 한번 식민지가 되려고 구슬땀을 흘려가며 아주 광적으로 노력들을 하고 있다. - '대가리가 단단한 건지Ⅰ' 라는 작품인데 시절이 많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가하면 우리의 힘겨운 삶도 들어있다. 
같은 말인데
골프 치고 온 아줌마와
생선 팔다 온 아줌마는
왜 표정이 틀릴까  
왜 그럴까? ...  '공쳤어'라는 제목을 가진 이 詩속에 들어있는 속내는 들춰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같은 말인데 하늘과 땅처럼 멀기만 한 그 느낌을. 기쁨과 슬픔처럼, 행복과 불행처럼 같이 가기는 하지만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어떤 것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다시 돌아온 그의 작품 <고양이와 선인장> 속에서도 여전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모습이 보여진다. 비를 피할 수만 있다면 어디에서도 잠을 잘 수 있고, 먹을 수만 있다면 쓰레기통 뒤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길고양이의 이름은 '외로워'다. 지금을 살아내고 있는 우리가 바쁘다는 말만큼이나 많이 입에서 뱉어내는 말이 바로 '외롭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게 길고양이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주인공  선인장 '땡큐' 역시 우리의 자화상일 것이다. 움직일 수는 없으나 너무나도 많은 외로움과 기다림에 익숙해진 사랑을 그 안에 품고 있다.  누군가의 아픔을 고스란히 제 몫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땡큐'는 어쩌면 희생이 필요한 사랑의 속성일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태어난다면, 이라는 전제를 내세운 질문이 서글프다. 길고양이는 선인장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선인장은 하얀 길고양이로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는 그 대목에서 잠시 가던 마음을 멈추게도 한다.

마침내는 쓰레기봉투에 버려진 선인장을 따라가며 마지막 힘을 다하던 길고양이 '외로워'는 쓰레기더미 위에서 따가운 선인장의 가시를 끌어안고 잠든다. 잠들어버린 그의 이야기가 반전처럼 펼쳐지던 다음 이야기는 짧은 순간 내 가슴 한켠을 싸아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또 한번의 실수를 용납할 수 없어서 용기있게 도전할 수 있었던 사랑이야기.. 그 이야기속에서 나는 다시한번 원태연이라는 이름의 마력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역시 다시 만나길 잘했다. 이 책 속에서는 글과 그림이 교묘하게 서로를 감싸준다. 그림이 있어 글이 존재하고, 글이 있어 그림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전해받는다. 까만 종이위에 노란 별만 콕콕 찍어놓은 두 쪽의 그림을 보면서 어쩌면 시인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 제 이름은 땡큐예요. 고맙다는 뜻이래요. 저에게 가끔 물을 주고 내 기분을 궁금해해주던 남자아이 철수가 친구가 되어줘서 고맙다고 땡큐라고 지어줬어요. 고마워요... 나 이제 하나도 외롭지 않아요 -  /아이비생각 


행복 만들기   - 원태연 -

화장실에 앉아
담배에 불을 땡기고
신문을 펼쳐드니
이 시간만은
누구도 안 부러운 거 있지
근데 이게 웬일이야
나오자마자 시작되는
이 걱정거리들은
역시 사람은
무언가에 열중해 있을 때
가장 행복하지 싶어
해서 생각한 건데
행복이란
생각하기 나름이지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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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표여행, 길 위에서 달콤한 휴식을 얻다
정인수 글.사진 / 팜파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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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행에 대해 한번 생각해본다. 여행... 우리는 왜 늘 여행을 꿈꿀까? 그렇게 꿈꾸었던 여행길에 오르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행복해지는 것일까? 그런게 아니라면 여행의 참목적은 무엇일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그 여행이라는 말 앞에 무언가를 더 붙이기 시작한 것 같다. 테마여행이라는 둥, 쉼표여행이라는 둥... 하지만 여행을 떠나고 싶어하는 이유는 단 하나일 것이다. 쉬고 싶다는 것, 그리고 일탈.. 어찌되었든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여행이다. 그래서 일단 여행가자고 하면 콘크리트 건물이 많지 않은 곳이어야 하고, 자동차의 매연을 피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하고, 맑은 공기를 내뿜는 초록의 매개체가 많은 곳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항상 따라붙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진 않다.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결코 일상을 놓지 못하는 까닭이다. 유행가도 있다. TV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전화기도 없는 그런 곳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자연주의라는 게 뭐 별거냐? 우리가 문명이라고 생각하는 편리함으로부터의 놓여남이 바로 자연주의지!

몸과 마음이 함께 즐거운 여행이 분명 있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여행을 떠날 것인가?  어떻게 떠날 것인가, 어디로 떠날 것인가도 중요하겠지만 어떤 마음으로 떠나는가는 더 중요한 일이다. 콘크리트 건물이 싫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편안함과 편리함을 놓아버릴 수 없어 나무밑의 콘크리트 건물을 다시 찾아간다. 자동차의 매연이 싫다고 하면서도 절대로 자동차를 두고 가지는 못한다. 유기농이나 웰빙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흙에서 직접 뽑거나 뜯는 나물을 달게 씹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의 여행은 언제부터인가 눈과 입만 즐거운 여행이 되어버린 듯 하다. 여기서 즐겁다는 건 나를 길들여놓은 모든 것이 그대로 재연되는 것이다! 하지만 글쓴이가 주장하고 싶어하는 여행은 그런 여행이 아니다. 마음이 쉴 수 있는 여행.. 마음도 즐거운 여행.. 바로 그런 여행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그런 여행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보자'는 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를 책을 읽는 사람에게 묻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건강을 지키기 위해 산을 찾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건강을 지키기 위해 산에 오르는 것을 접어야 했다. 약간의 무리수가 따랐던 모양이다. 한창일 때는 몰랐던 부분들이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해 이제는 무언가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따지는 것이 많아져 버렸다. 그리고 다시 '떠남' 에 대해 생각해보는 여유가 생긴 듯 하다. 일탈이라는 건 그렇게 큰 주제가 아닌데 너무 크게 생각했다는 걸, 여행이라는 것 역시 일탈이라는 말처럼 너무 무겁게만 생각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행복은 아주 작은것속에 존재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주변의 모든 것들속에 행복은 존재하듯이 가까운 곳이어도 좋고, 먼 곳이어도 좋은 게 일탈이고 여행인 것이다. 단지 그 안에서 내가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어떤 마음으로 떠나는가에 따라 머무는 곳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는 말이다. 온전히 그 길 위에 나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건 정말 행복한 여행길이며 일탈인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작년 여름의 여행길이 생각났다. 우리 가족에게 진정한 행복과 사랑을 느끼게 해 주었던 그 순간이... 새벽에 가면 입장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한마디 때문에 일찍 일어나 걷게 되었던 고창읍성길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밤새 내린 비가  반짝이는 구슬로 변해 선물처럼 나무에 매달려  우리를 행복하게 했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주던 그 안개속의 작은 길은 서로의 손을 찾아헤매게 만들었었다. 더이상의 말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이었다. 흙과 안개와 빗방울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이라는 걸...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여행은, 떠남은 그런게 아닌가 싶다. 즐길 수 있는 마음과 머무는 그 곳과 하나될 수 있는 마음이면 족하다. 봄꽃을 보러가는 수많은 북적거림을 버려도 좋고, 미친듯이 흔들어대는 여름바다의 광란속에 나는 없어도 괜찮다. 울긋불긋함보다 사람머리의 검은 빛이 더 많은 가을단풍길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다면 더 좋겠다. 이 책으로 인해 작은 추억의 길을 다시한번 걸어보았다. 행복했다. 남편과 아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줄 수 있었던 그 때의 이야기가 있어 정말 좋다. 즐길 수 있는 마음만 있다면 일탈은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온전히 나를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게 여행인 것이다. 멀고 가까운 것은 중요하지 않다. 작은 것속에서도 느낌표와 쉼표를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은 금상첨화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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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에 대한 명상 - 살아있음을 느끼는 35가지 힐링아트
박다위.강영희 지음 / 아니무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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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아마도 많은 사람이 한번쯤은 생각해 보았음직한 주제. 그러나 두려운 주제. 간혹, 아니 요즘 들어서는 자주 마주치는 말. 그래서인지 옛날보다는 소리로 들려오는 느낌이 그다지 강하게 다가오지 못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말. 그런데 사람은 왜 자살을 생각하는 것일까? 그 답은 오히려 너무나도 간단하게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이 다쳐서. 마음에 생채기가 나서 아프니까. 그렇게 피가 나도록 아픈데 그 아픔을 아무도 볼 수 없다는 이유로. 그래서 가끔씩은 아프다고 말하는데 아무도 그 소리를 들어주지 않았던 까닭에. 사람이 가장 힘겨워 하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빤한 답이 나를 기다린다. 바로 무관심이다. 무관심처럼 무섭고 두려운 건 없다던 말을 떠올리게 된다. 그 반대로 사람이 가장 행복해 할 때가 바로 관심을 갖고 너를 바라보고 있다는 그 시선과 마음을 느낄 때다. 그만큼 서로를 위해 다가서는 것, 서로에게 관심을 표현하며 스킨십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애정표현이라는 것이 꼭 남녀간의 사랑에서만 필요한 것 아니다. 사랑의 종류가 여럿이듯이 그렇게 우리에게 필요한 애정표현은 많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가?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흔한 유행가의 가사처럼 우리는 살고 있는가? 사랑에 늘 목말라하면서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마음은 외면해버리고 만다.

이 책을 보면서 힐링아트라는 말을 떠올린다. 마음을 치료하는 일을 힐링 healing 이라고 한다는데 그 치유를 위한 예술이 바로 힐링아트란다. 그런데 그것이 묘하게도 미술과 연관되어져 있다. 그림을 통해 사람의 마음에 얼만큼의 생채기가 있는지를 알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의 생채기가 생겨나게 되는 원인이 나를 두렵게 만든다.  찰나에 의한 것들이 대부분인 까닭이다.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뱉어내는 한마디 말이나 행동... 얼마전 TV다큐프로를 통해 놀라운 걸 보았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마음속에 생채기를 안고 살아왔다면 그 엄마의 아이에게 똑같은 아픔을 준다는 거였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아주 잠깐의,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에 의해 생채기가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여기서 '상처'라는 말을 두고서 굳이 '생채기'라는 말을 쓴 것은 크게 다치는 것보다 그만큼 작은 것들이 우리를 더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엄마에게서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오랜 아픔이 '아이구, 우리 딸~' 하며  팔을 벌려 안아주던 친정엄마의 애정표현으로 인해 너무나도 쉽게 치유되었던 것이다! 그런것만 보아도 우리에게는 관심을 보이는 것과 그것에 따른 애정표현이 얼만큼의 크기로 다가오는지를 알 수 있다.

29살 청춘의 자살충동.. 그러나 그다지 크게 다가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스물아홉이라는 나이는 모든 것의 과도기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제 삶에 대한 책임감의 무게가 느껴지기 시작하는 나이. 자신을 위해, 그리고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부담감이 느껴지는 나이가 아마도 그쯤이 아닐까 싶은데.... 그런 까닭에 힘들다. 그런 까닭에 주변의 관심과 사랑은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이쯤되면 주변을 떠돌던 작은 사랑마져도 거두어간다. 홀로 설 때가 되었다는 이유로.  아마도 그래서 방황의 시기가 찾아오는 건 아닐까? 사실 책속의 그림을 통해서는 그다지 특별한 느낌을 전해받지 못했다. 전문가라면 그림속에서 무언가를 볼 수 있었겠지만 나는 전문가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겨움을 그림속에 담아 이겨내려고 하는 의지만큼은 눈치챌 수 있었던 것 같다. 자살이라는 괴물과 맞서 싸우던 자신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해서 이겨냈던 시간들은 뒤돌아볼 때마다 뿌듯할 것이다. 그림속에서 무언가를 두려워하던 자기 자신을 하나둘 죽여갈 때마다 실제의 자신안에서 살아움직이던 그 무엇.. 그것이 바로 젊음은 아니었을까? 죽음을 생각하면서 삶을 새롭게 바라보았다는 말이 울림을 담고 있다. '죽고 싶다'라는 현재가 '죽고 싶었다'라는 과거가 된 당신은 이미 죽었답니다...라는 책띠의 말을 다시한번 바라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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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더 - 샌프란시스코에서 밴쿠버 섬까지 장인 목수들이 지은 집을 찾아다니다 로이드 칸의 셸터 시리즈 3
로이드 칸 지음, 이한중 옮김 / 시골생활(도솔)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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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손에 받아든 순간을 솔직하게 말한다면 설레임이었다. 책표지에 나와 있는 사진속의 이미지만으로도 나의 기대지수는 100이었다. 설레임에 슬쩍 책을 훑어보았다. 멈추고 싶은 순간의 감정을 억누르면서 그냥 책을 덮어버렸다. 아끼면서 봐야지, 하나 하나 뚫어질 것처럼 내 눈에 마음에 각인시켜야지 했다. 누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어디에 집을 지었는지를 아는 것보다 일단 하나의 자연으로써 살아가고 있을 그들의 삶이 내게는 유토피아일테니까. 사람이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진리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진리를 모른 척 외면하면서 산다. 그러니 저들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파랑과 초록의 땅! 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책속에는 정말로 온통 파랑과 초록뿐이었다. 물과 나무가 있는 곳에 집을 짓는 빌더가 하는 말은 간단했다. 가장 좋은 집은 우리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나누지 않는 집이라고.... 그렇게 자연의 일부가 된 집에서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연스러움' 그 자체였다. 아무런 것도 첨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통나무를 도끼로 다듬어 만든 의자, 침대에 누워 머리맡으로 혹은 지붕을 뚫고 나무와 하늘과 바람과 별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집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자연스럼움'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나무로 만든 빗물 홈통, 때로 지붕을 올린 오두막. 나무둥치가 그대로 기둥이 되고 창틀이 되는 집. 각진 모서리가 없는 집. 거대한 나무그루터기를 떡하니 받쳐놓은 문간. 그냥 생긴 그대로를 옮겨다가 탁자나 의자로 이용하기. 곡선으로 굽은 통나무를 그대로 이용한 계단이나 벤치. 휘어진 통나무 세줄기를 서로 맞붙인 다음 그 가운데 줄을 매달아 그네를 만든 건 또 어떤가! 독특한 모양을 한 집도 있다. 여성의 신체구조를 닮은 집이 있다면? 설사 정말 그럴것이라고 믿는다해도 도대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기둥 하나까지 모두가 여성의 몸을 상징하고 있다. 그렇다고해서 외설적인 상상을 하지는 말라! 사진을 보는 순간 집을 통해 에너지의 흐름, 생명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말을 순간적으로 이해하게 될테니... 저마다 하나씩의 주제를 안고 있는 집이었다는 말이다.

집을 보면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을 이해하게 된다. 여기에 소개된 빌더들은 그냥 집을 지은게 아니었다. 집을 지어달라고 의뢰한 사람에 맞춰서, 그리고 집을 지어야 할 곳의 상황에 맞춰서 여러 각도로 생각을 했다. 내가 정말 멋지다고 찬사를 보냈던 것은 사람따로 집따로 생각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아우를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생각했다는 거였다. 집을 만드는 재료 역시 자연에서 구했다.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을 사용했고 책의 서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집짓기, 먹을거리, 무엇이든 되도록 자기 힘으로 하기, 자연에 대한 존경, 해변으로부터 필요한 것을 구해 쓰는 것) 그 과정을 즐겼다. 정말 꿈같은 이야기다. 자연이 준 재료를 그대로 사용한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멋진 일이 아닌가! 문득 우리의 한옥을 떠올리게 된다. 못질을 하지 않는 방법도 그렇거니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그 자연속에 하나로 어울어지게 만든 것이 우리의 전통가옥이니 내심 자긍심을 갖게 된다.

책을 보면서 문득 생각났던 말이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그다지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집 안으로 들여온다. 더 많은 것을 들여놓고 싶어 더 큰 평수로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실제로 생활하는데 쓰여지는 것들은 많지 않다. 없어도 될 물건들을 자신의 욕심을 위해 채우고 채우고 또 채우며 살고 있는것이다. 그 욕심을 버릴 때 우리는 자연에게 한발짝 더 다가가는 것이 아닌지... 세상이 너무 직선적이기 때문에 둥그스름한 걸 만들고 싶었다는 빌더의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기분이 가라앉지 않게 해 주는 집'에서 나도 한번 살아보고 싶다. 나무에 커다란 열매처럼 매달려 있는 둥근나무집에는 밖이 훤히 보이는 커다란 창문도 있었다. 어찌보면 새집처럼 나무에 깃든 집이다. 그런 집에서 살면 날마다 새처럼 날아다니는 꿈을 꾸지 않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엄지공주라도 되는 행복한 착각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다 한번씩 길을 떠날 때가 잇다. 이렇다하게 정해놓은 목적지없이 떠나는 것이 진정한 여행이라고 말은 하지만 속으로는 정말 그럴까? 의심도 하면서.. 모르는 길을 달리면서 언뜻언뜻 스쳐지나는 집을 볼 때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를 때가 있는데 대부분은 자연과 하나된 듯한 집이었음을 알게 된다. 통나무집, 흙집, 나무나 돌만을 이용해서 만든 집, 혹은 그 집 주변이 그냥 흙길로만 되어 있어도 그것은 감탄사를 뱉어내게 한다. 이제는 흔해진 휴양림이나 팬션을 가보라. 밀려드는 사람들을 감당하기 위해 지금은 빌라형태의 집이 많아지는 추세지만 처음에는 통나무를 이용하거나 흙을 이용한 '자연스러운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자연이며 '자연스러움'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삶의 형태를 살펴보면 아찔해진다. 있는 자연도 파괴해버리고 인공적인 자연을 내세우면서 친환경적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가관이다. 

여하간 끝내주는 시간이었다.  영화속에서나 존재할 것 같은 집.. 그런 집이 실재한다는 것이 내게는 하나의 느낌표였고 감탄사였다. 이 책에서 소개한 많은 집을 보면서 아이쿠! 저런데서 어떻게 살아? 그저 잠시 머물다 오기에 좋은 집이겠지... 하는 마음이 앞선다면 책속에서 찾아낸 문구를 들려주고 싶다.
①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회를 놓치는 것은 기회란 것이 작업복 차림이며 일처럼 보이지 때문이다. - 토머스 에디슨"
② 가뿐하게 살아야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③ 벗어날지니 벗어날지니 끝도없는 물욕에서 벗어날지니...
나는 생각한다. 물욕을 버린다면 우리의 삶은 가뿐해질 것이라고. 그리고 저렇게 멋진 집에서 살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올 것이라고...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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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문우답 - 인생보다 일상이 버거운 당신에게
백성호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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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보다 일상이 버거운 당신에게- 라는 소제목이 가슴 한켠을 싸아하게 한다. 멀리 내다볼 것도 없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나를 힘겹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않고 살아가는 사람 몇이나 될까?  내 것인데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게 바로 마음이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중에서 아마도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일까? 늘 '마음공부'라는 말에 유혹을 당한다. 어떻게 하면 좀 더 편안하게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해서 내가 무슨 구도자도 아니고 이렇다할 철학책 한 권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상심의 평안을 바란다는 게 어쩌면 욕심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늘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말을 이 책에서 또 만나게 된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나중에 알았다. 그 말이 불교 경전의 한 구절이라는 것을. 

나는 이렇다하게 내세울 종교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 종교가 무엇인지 그 의미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따지고보면 형식만 다를 뿐 같은 뜻을 가진 것이 우리의 종교인데 잡아먹을 듯이 서로 으르렁대는 걸 이해할 수 없어 그랬던 것 같다. 서로가 내세우는 계율조차도 가만히 살펴보면 별반 다르지 않은데 그들은 행함보다 먼저 보여주기에만 급급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욕심이다. 모두가 제 욕심을 버리지 못하니 그렇게 힘겹다. 한발짝만 뒤로 물러서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인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걸 보면서 어느샌가 내용은 없어져버리고 형식에만 치우쳐 진정한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게 우리네 종교의 현실인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part two '새롭게 깨어나기' 의 '되돌아보고 내려놓다' 편을 읽으면서 많은 공감을 하게 된다.  '사리舍利를 만드는 사리事理' 부분과  '형식보다 핵심을 보다' 부분은 바로 그런 걸 콕 집어주고 있으니 너니 나니 할 것없이 다시한번 되돌아볼 일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 오른손도 모르게' 라는 말을 통해서 배운 것도 있다. 단순하게 받아들였던 그 한 구절의 의미가 다시금 내 안을 울린다. 남이 모르게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경계해야 한다는 그 뜻을 나는 이제사 알게 된다. 또한 사람의 마음에는 단 하나의 문이 있는데 문을 열수 있는 문고리는 안에 있으니 나 스스로 문을 열지 않으면 영원히 열리지 않는다는 것도 많이 들어왔던 말이긴 하다. 그러나 그 문고리를 잡고서 항상 망설였던 것도 나였다. 그러니 더이상 말해 무엇할까?  무심코 뱉어내던 '원래 그래!'라는 말, 그 말을 하면서 얼마나 나 자신을 합리화시키며 살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원래부터’는 원래 없다, 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나 자신을 다시한번 다잡아보게 된다. 우리가 너무 쉽게 말하고 있는 '무소유' 라는 말도 다시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현문우답'이라는 제목에 이끌려 무심코 읽게 되었던 신문 칼럼 하나.  칼럼을 읽으면서 마음 한쪽이 따스해졌던 기억을 떠올린다. 신문을 펼쳐 그 칼럼을 읽을 때마다 두근거리던 내 마음을 기억한다. 참 좋다! 참 좋다! 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었는지.... 스크랩을 하면서 종교기자라는 것도 있구나 했었다. 이렇게 종교를 대하는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마음을 열 수 있는 방법을 이렇게 편하게 알려주는 글도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 좋았던 글들이 묶여 이렇게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소식을 듣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었다. 지금도 이 칼럼은 여전히 올라오고 있다. 너무나도 일상적인 일을 말하면서 그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기자의 마음이 부럽기까지 하다. 불교다 카톨릭이다 기독교다 하는 식의 경계선은 기자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낮고 낮은 문지방에 불과할 뿐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름답다. 어울릴 줄 알고, 아우를 줄 아는 기자의 마음과 같이 우리의 종교도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칼럼을 읽으면서 나도 이것만큼은 기필코 실천해보리라 다짐했었던 글을 책속에서 다시 만난다. '사람을 살리는 꾸중의 법칙' 이다. 그 글을 읽으면서 백퍼센트 공감하는 마음이 들어 부끄러웠었다. 곁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한번씩 읽어봐야겠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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